163화
제47화. 블라인드 미션(1)
화면에 떠 있는 글자를 계속 응시해 보는 참가자들.
그러나 ‘블라인드 미션’이라는 게 뭘 나타내는 건지, 그녀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연도 이런 수수께끼를 접해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SSS 때에는 그래도 눈치껏 때려 맞출 수라도 있었는데.
여기는 SSS에 비해서 좀 더 악랄했다.
내용은 더 심하다.
민주린이 직접 블라인드 미션의 정체를 공개했다.
“간단하게 말해서 여러분들의 정체를 숨기고 무대를 펼치는 미션이란 뜻입니다.”
가을소녀 멤버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추켜올렸다.
“선배님, 질문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정체를 숨기고 무대를 펼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됩니다.”
말만 안 했을 뿐이지, 다른 그룹 멤버들 역시 이해가 잘 안 간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민주린은 스태프한테서 미리 건네받았던 가면을 들어 올렸다.
그것을 그대로 얼굴에 착용한 민주린이 역으로 물었다.
“이렇게 하면 제 얼굴이 여러분들에게 보일까요?”
“안 보여요.”
“그러면 멀리서 봤을 때 제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까요?”
“그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어쨌든 가면을 쓴 여성이 민주린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시 가면을 벗은 민주린은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것처럼 여러분들은 1차 그룹 미션에서 얼굴을 전부 가리고 무대에 올라서게 될 겁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두 가지 목적이 주어지는데요. 첫 번째. 무작위로 선정한 50인의 청중평가단으로부터 무대만으로 높은 점수를 받을 것. 그리고 두 번째. 이게 이번 블라인드 미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민주린이 들려준 두 번째 목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만약 청중평가단 50인에게 여러분들의 정체가 들킬 경우, 해당 팀은 1차 그룹 미션에서 강제로 실격 처리 당하게 됩니다.”
“……!”
참가자들이 크게 웅성이기 시작했다.
정체를 숨기고 무대를 펼치라고 했던 이유가 있었던 거였다.
이번에는 원더존 멤버가 손을 들고 추가 질문을 꺼냈다.
“선배님! 근데 얼굴만 가린다고 정체가 완전히 숨겨지는 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목소리라든지. 이거 들으면 웬만하면 저희가 어떤 그룹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텐데.”
각 팀을 대표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메인보컬들의 경우가 그렇다.
이에 대해서 민주린의 대답은 이러했다.
“그건 각 그룹별로 작전을 잘 짜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연은 민주린의 이 말을 이렇게 해석했다.
메인보컬 카드를 자체 봉인하는 게 좋을 거라고 말이다.
물론 대안책은 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앞서 선보였던 무대처럼 메인보컬이 아닌 서브보컬을 그 자리로 배치하면 된다.
서브보컬들의 경우에는 메인보컬에 비해서 파트 분량이 적은 편이기도 했고. 그리고 막상 정체를 숨기면,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는 경우가 제법 되기 때문이다.
동요하는 걸 그룹 멤버들을 향해 민주린이 부가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여러분들이 얼굴을 다 드러내고, 우리가 어떤 그룹인지 대놓고 보여주면서 무대를 펼치면 형평성에 어긋나니까요.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막내 그룹인 하니엘을 예로 들어볼까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서 두 팀의 팬덤 규모가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분 계신가요?”
“…….”
“…….”
“…….”
참가자들은 침묵했다.
누구도 두 팀의 팬덤 규모가 동일하다고 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아이비제이의 경우에는 수년간 걸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착실하게 자신들의 팬층을 키워왔고. 하니엘은 이제 겨우 데뷔 앨범 활동을 마치고 두 번째 앨범을 준비 중이었으니까.
체급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체급 차이는 시청자 투표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점 때문에 1차 미션을 블라인드로 진행하기로 결정한 거였다.
실력으로 먼저 보여라.
그리고 공평하게 시청자들한테 먼저 평가받아라.
블라인드 미션에는 이런 뜻이 숨겨져 있었다.
“여러분들이 50인의 청중평가단에게 어필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뿐입니다. 아이돌로서의 실력. 1위를 노릴 수 있도록 효과적인 작전을 구상하세요. 참고로 선곡은 자유입니다.”
본인들의 노래로 해도 되고. 타 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선곡 여부가 큰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정체를 들키면 안 된다.
이게 각 팀의 발목을 붙잡는 크나큰 제약이 될 것이다.
* * *
첫 촬영을 마치고 바로 다음 날.
멤버들은 LC 엔터테인먼트 회의실에 모였다.
어제 들었던 블라인드 미션에 관한 상의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들에게 주어진 기간은 고작해야 1주일뿐.
이 안에 곡과 안무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추가로 어떻게 해야 자신들의 정체를 완벽하게 숨길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같이 진행하기로 했다.
첫 번째의 경우에는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멤버들이 각자 마음이 들어 하는 노래들을 몇 개 추스르고, 이 범주 내에서 상의를 통해 곡을 결정하면 되니까.
문제는 두 번째 조건에 있었다.
리샤가 남은 감자칩 하나를 마무리 지으면서 물었다.
“어떻게 해야 우리가 누군지 모르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멤버들은 확실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7개의 걸 그룹 팀들 모두가 다 인지도가 꽤 있는 편에 속했다.
업계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 50명을 데려와 앉혔다 할지라도 몇 명 정도는 분명 ‘어? 이 그룹, 어디어디 아니야?’라고 의심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고민은 여타 다른 참가 팀에 비해 더 심할 것이다.
국민 걸 그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명한 팀이니까.
이런 걸로 따진다면, 오히려 데뷔 연도가 가장 늦은 하니엘이 유리하게 보일지 모른다.
우미가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어제 들었던 민주린의 말을 다시 반복했다.
“정체를 들키면 실격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무조건 꼴찌야?”
비아의 말에 멤버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격 처리되면 점수는 무조건 0점 처리된다.
비아의 말대로 꼴찌는 확정이다.
1차 미션부터 꼴찌로 시작하는 것은 SSS 당시의 이연 한 명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때, 여솜이 이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펼쳤다.
“그럼 이건 어때? 청중평가단 중에서 우리가 누군지 정체를 알아내긴 했는데, 자기 때문에 실격 처리 판정이 나오면 미안하니까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 그러면 실격 아니잖아.”
저 무대에 서 있는 팀이 어느 팀인지.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만 안 하면 되는 거니까.
어차피 사람 속내를 완벽하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스태프가 독심술이라도 익히지 않는 이상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이연의 반박에 의해 단번에 깨지고 말았다.
“청중평가단에는 오히려 반대로 말해줄 거라고 했어. 무대 위에 가면을 쓰고 있는 그룹이 어떤 그룹인지 정체를 알아맞히면, 소정의 상품을 제공하겠다…… 라는 식으로.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기를 쓰고 맞히려고 하겠지.”
“그, 그랬어?”
“내가 PD님한테 직접 물어본 거니까 확실해.”
언제 또 그런 걸 물어봤는지. 멤버들은 이연의 철두철미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베네핏이 걸려 있는 중요한 미션인 만큼 확인할 건 다 확인하고 무대를 준비하는 게 좋다.
그래서 이연은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확인할 생각이었다.
그냥 봐도 문제인데. 상품까지 걸려 있으니까 청중평가단들의 눈과 귀는 더욱 날카로워질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참가팀들 역시 확실하게 자신들의 정체를 숨겨야 한다.
7개 팀 중 본인들만 제외하고 남은 여섯 개의 팀이 전부 정체를 들켜서 실격 처리만 되어도 1등을 차지할 수 있다.
그만큼 정체를 들키지 않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서 이연은 선곡, 안무보다 어떻게 하면 하니엘을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더 깊게 했었다.
우선 늘 그렇듯, 멤버들의 의견부터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괜찮은 아이디어 있는 사람?”
어제 녹화 막바지 때처럼, 모든 멤버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만약에 그런 아이디어가 있었더라면, 진작 멤버들에게 공유했을 것이다.
아이디어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비아와 리샤가 서로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나, 이렇게 머리 써야 하는 거 딱 질색인데.”
“나도 그래.”
이연은 애초에 두 사람한텐 기대도 하지 않았다.
“시우하고 유키는?”
“……잘 모르겠어요.”
“저도요.”
“우미 언니하고 여솜이도?”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둘도 팬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알고서 모른 척해주기를 기대하는 방향으로 방법을 떠올리긴 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이연이 황 PD한테서 확답을 받아 옴으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남은 건 이연뿐이었다.
“일단 방법은 두 가지가 있어.”
“뭔데?”
“역시 연이 언니야. 얼른 말해봐.”
멤버들의 기대치가 단숨에 높아졌다.
팀이 위기에 놓여 있을 때 늘 해결사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리더 권이연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하니엘이 취해야 할 방향성을 먼저 제시했다.
“멤버 수를 속이는 거야.”
“수를 속인다고?”
“무슨 뜻이야?”
궁금해하는 멤버들을 위해서 이연이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무대에 올라서면 가수하고 백댄서, 이렇게 둘로 역할군이 달라지잖아. 예를 들어서 아이비제이 트윙클 선배님들만 다른 복장을 하고 있어봐. 그러면 ‘아, 저 팀 멤버는 총 세 명이구나’라고 단번에 알아차릴 거잖아. 그러면 아이비제이 트윙클이라는 것도 알게 될 테고.”
이렇게 되면 바로 실격이다.
그래서 이연이 생각한 게 있었다.
“우리들 중에 몇 명을 백댄서 포지션으로 옮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백댄서 중에 몇 명을 우리 멤버처럼 둔갑시켜서 사람들에게 인원수를 속이자는 거지.”
“우와! 그거 괜찮은데?”
“인원 속이면 알 방법이 없지.”
“연이 언니, 머리 좋다!”
여기저기서 찬사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장 고질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목소리다.
“인원수뿐만 아니라 파트도 바꿀 거야. 우리들 중에서 노래를 불렀을 때 가장 목소리를 알아듣기 힘든 멤버가 메인보컬로 갈 거고, 나는 서브 쪽으로 빠지는 게 좋겠어.”
이건 멤버들도 예상하고 있었다.
이연의 목소리가 엄청 개성 넘치고 유니크한 건 아니다.
그러나 SSS에서 팀 미션을 수행할 때도 그렇고. 하니엘로 데뷔했을 때부터 이연이 쭉 메인보컬을 맡아왔기 때문에 귀가 좋거나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이연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녀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것이다.
그래서 이연은 자신의 파트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서브 쪽으로 빠질 생각이었다.
“그러면 메인보컬은 누구한테 맡길 건데?”
“그러게. 연이 언니가 빠지면, 맡을 만한 사람이…… 딱히 없지 않아?”
서브보컬 라인들 중에서 한 명을 메인으로 올릴까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도 정체를 들킬 위험성이 꽤 높다.
그러나 딱 한 명.
데뷔 전부터 제대로 보컬 솜씨를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이 마침 하니엘 내에 있었다.
“시우야. 네가 한번 해볼래?”
이연은 하니엘의 랩 담당을 메인보컬 자리로 올려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