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제45화. Tug of war(4)
혜원이라면 본인 그룹을 제외하고 제일 경쟁력 있다 여겨지는 MAYO나 아니면 요즘 한창 잘나가는 CDP를 고르지 않을까 하고 사람들은 예상했었다.
그러나 혜원은 이런 사람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선택지를 보여줬다.
민주린이 사람들을 대표해서 혜원에게 왜 하니엘을 골랐는지에 대해 물었다.
“어떤 이유가 있나요?”
“원래 복병이 가장 무서운 법이니까요.”
막내 그룹이라고 하니엘을 무시해선 절대로 안 된다.
그것은 곧 방심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각 그룹의 기량으로 따지면 하니엘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웬만한 선배 그룹들보다도 더 강력한 상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혜원은 그렇게 보고 있었다.
그래서 하니엘을 가장 경계하는 라이벌 그룹으로 고르게 되었다.
기자들의 카메라 방향이 혜원에서 이연 쪽으로 바뀌었다.
왠지 이연은 방금 혜원의 발언과 관련해서 어떤 기사가 나갈지, 그 타이틀이 눈에 훤히 보였다.
아이비제이, 가장 견제하고 싶은 그룹으로 ‘하니엘’을 고르다.
‘안 봐도 뻔하지, 뭐.’
혜원 덕분에 본의 아니게 하니엘을 향한 주목도가 늘었다.
* * *
제작발표회를 끝마치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이연은 멤버들의 속사포 질문의 타깃이 되어야만 했다.
“언니! 분위기 어땠어?”
“제작발표회 잘 끝냈지?”
“황 PD님이 뭐 도움이 될 만한 말 같은 거 슬쩍 안 흘려주셨어?”
멤버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이연은 쓴 미소를 흘렸다.
“제작발표회 방송 다들 봤을 거잖아.”
비록 현장에는 같이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연의 말대로 스마트폰을 통해서 멤버들 다 같이 모여 제작발표회 영상을 실시간을 시청했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멤버들의 궁금증을 가라앉히기엔 부족했었다.
카메라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현장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멤버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었는지. 그녀들은 이게 궁금했다.
이연은 피곤함이 가득 담긴 한숨을 삼켰다.
“그냥 촬영 들어가기 전에 출연진, 제작진 다 같이 모여서 회식 한번 하자는 이야기 말고는 중요한 말 안 나왔어.”
이연이 멤버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할 사람도 아니고. 그리고 프로그램에 관한 중요한 이야기가 나왔다면, 멤버들에게 공유를 안 해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침착하게 대응하는 이연 덕분에 잔뜩 흥분했던 멤버들의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을 수 있었다.
이때, 비아가 다른 궁금증을 꺼냈다.
“근데 혜원 선배님이 우리가 가장 신경 쓰이는 그룹이라고 지목하셨잖아. 그거, 진짜야?”
비아는 그것도 혹시 대본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졌다.
물론 방송이 대부분은 대본이라고 하지만.
“진짜 맞아.”
그것까진 리얼이었다.
멤버들은 이걸 좋게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안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대선배한테 인정받았다는 건 충분히 기뻐할 만한 일이긴 하지만, 아이비제이의 발언으로 인해 걸파이트에 참가하는 모든 그룹이 전부 하니엘을 견제하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려 디펜딩 챔피언이 지목한 기대주니까.
그러나 이연은 다르게 보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만큼 제작진도 본 촬영 때 하니엘의 비중을 조금이나마 더 챙겨주려고 할 것이다.
이연은 이것만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라고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멤버들은 이런 거에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었다.
“걸파이트에 관심 보이는 건 좋은데. 우리, 앨범 작업도 있잖아.”
앨범 홍보 활동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앨범 준비에 소홀하면 안 된다.
이제 이연도 다시 복귀했으니까.
“안무 연습하러 가자. 준비해.”
그녀의 말에 멤버들의 표정은 벌써부터 피곤함으로 물들었다.
* * *
하니엘의 두 번째 앨범 타이틀곡, Tug of war가 안무 연습실에 한동안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오늘도 멤버들은 이연의 주도하에 구슬땀을 흘리면서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오늘은 컴백과 동시에 올라갈 미러 버전 안무 영상을 촬영해야 했다.
각자 몸을 푸는 동안, 멤버들의 모습과 동작이 잘 나오도록 카메라를 거치시키고 있었다.
화면에 나오지 않는 위치에 선 은서해가 손뼉을 여러 차례 마주치면서 스트레칭을 마친 멤버들의 시선을 모았다.
“원 테이크로 가는 거니까. 재촬영 없이 한 번에 끝내자. 알았지?”
“네!”
“자, 파이팅 한번 하고 가자.”
은서해의 주도로 멤버들이 손을 모아 결의를 다졌다.
“하니엘, 파이팅!”
“파이팅!”
멤버들이 각자 위치에 서자, 카메라 감독이 곧장 녹화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들의 두 번째 타이틀곡 Tug of war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센터에 선 이연을 중심으로 멤버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마치 꽃봉오리가 개화하는 듯한 동작을 펼치면서 오프닝을 화려하게 알리는 그녀들.
이후, 이연의 파트와 함께 그녀가 앞을 향해 나아갔다.
매혹적인 눈웃음은 덤이었다.
카메라 뒤에서 이연의 표정 연기를 지켜보던 박도수 매니저가 은서해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트레이너님. 연이가 표정이 많이 풍부해진 거 같지 않습니까?”
“맞아요. SSS 촬영할 때에는 맨날 표정 연기가 너무 어색하다고 지적받곤 했었는데. 요즘은 많이 자연스러워졌더라고요.”
이연의 유일한 단점이었던 게 지금은 강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일까. 한창 안무 영상 촬영에 집중하는 멤버들을 보면서 은서해는 걸파이트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흘렸다.
“걸파이트에 나가더라도 우리 애들, 충분히 해볼 만할 거예요.”
박도수 매니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멤버들에게 다시 한번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볼 생각이 없냐고 물어본 거였기도 하고 말이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멤버들의 숨은 더욱 거칠어졌다.
그럼에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아이돌은 항상 카메라 앞에선 웃어야 한다.
어느새 노래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멤버들 또한 엔딩 포즈를 취하기 위해 처음처럼 다시 이연을 중심으로 한가운데로 몰려들었다.
실수 없이 안무를 마무리 지은 그녀들을 보면서 은서해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다들 잘했어!”
은서해가 보기에는 굳이 재촬영을 안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멤버들 본인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니까.
한 차례 모니터링을 한 뒤, 혹시나 해서 추가 촬영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어땠어? 이걸로 갈까?”
멤버들의 시선이 이연에게 쏠렸다.
원래 이런 결정은 이연이 주로 내리곤 했었다.
이연이 역으로 멤버들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때?”
“난 괜찮았어.”
“생각보다 더 잘 나왔는데?”
“이 정도면 우리가 여태 연습했던 것 중에서 가장 잘 나온 거 아니야?”
다들 긍정적인 의견을 보였다.
모두가 오케이라면, 이연도 오케이다.
길어질 수도 있었던 안무 연습 영상이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그렇다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서 쉬는 건 아니었다.
오늘은 저녁에 따로 일정이 잡혀 있다.
지난번 제작발표회를 가졌던 화제의 프로그램, 걸파이트 시즌 2 첫 회식 약속이 오늘 저녁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참석하기 전에 멤버들은 거의 방송 출연을 앞에 두고 있는 상태처럼 메이크업과 헤어, 그리고 코디에 신경을 써야 했다.
앞으로 몇 개월간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될 선배들과 만나는 자리니까. 몸을 단정하게 하는 건 당연했다.
덕분에 오늘도 이연의 손기술이 빛을 보게 되었다.
한 손에는 빗을. 다른 한 손에는 드라이기를 들고 우미의 긴 머리카락을 만져주는 이연을 보면서 멤버들은 감탄을 삼켰다.
“연이 언니, 헤어 쪽도 할 줄 알았어요?”
놀라는 유키에게 비아가 한창 바쁜 이연을 대신해서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 저번에 치어리딩 미션 나갔을 때 했던 머리도 연이 언니가 해준 거야.”
“진짜로? 그때 엄청 예뻤는데. 연이 언니 작품이었구나.”
손에 들고 있던 작은 빗을 앙다문 입술로 문 이연이 빈손을 이용해 우미의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쓸어내려 줬다.
다시 빗을 손에 쥔 이연은 이번엔 반대쪽 머리카락을 빗질하면서 세심하게 신경 쓰는 모습을 보여줬다.
누가 보면 미용실에서 일하는 베테랑 직원으로 느껴질 정도로 전문성이 가득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멤버들의 머리카락을 이런 식으로 일일이 다듬어주는 게 귀찮아 보일 수도 있지만, 이연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 세계에서 볼 수 없었던 미용 도구들을 다루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가끔씩 이렇게 직접 멤버들의 미용을 담당해 주곤 했다.
멤버들도 이연에게 맡기면 전문가들에게 맡긴 것만큼 좋은 결과물이 나와서 만족스러웠다.
이연의 메이크업과 헤어는 본인이 알아서 마무리를 지었다.
옷도 너무 화려하지는 않게, 하지만 단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얌전한 색상의 원피스나 캐주얼 의상으로 통일했다.
첫 단체 회식에 참가하기로 한 박도수 매니저와 홍류현 실장도 정장으로 오늘만큼은 한껏 멋을 부렸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상태였다.
이연은 멤버들과 함께 얼마 전에 만났던 황이전 PD와 다시 한번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황 PD가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쪽에 MAYO 분들 계시니까 가서 인사하시면 됩니다.”
황 PD의 말대로 그녀들은 MAYO 멤버들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걸스힙합의 선두 주자답게, 파티 현장에서도 4명 다 상당히 강렬한 이미지를 풍기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벌써부터 센 이미지를 풍기고 있는 MAYO 멤버들 앞에서 하니엘은 소심한 고양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말 붙이기를 어려워하는 멤버들을 대신해서 그쪽 리더와 이미 일면식을 가지고 있는 이연이 먼저 나섰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머, 이연 씨 왔어요?”
MAYO의 리더, 미랑이 이연을 반갑게 맞이해 줬다.
미랑뿐만 아니라 MAYO의 멤버들도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에게 먼저 접근해 오면서 친근감을 드러냈다.
대화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하니엘이 가지고 있던 두려움과 경계심은 금세 사라졌다.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생각보다 착하고 귀여운 언니들이었기 때문이다.
미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비제이 선배님들은 아직 안 오셨나?”
“네. 아까 보니까 안 계시더라고요.”
이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장 한쪽이 크게 술렁거렸다.
“안녕하세요, 혜원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지현 씨.”
“아이비제이 트윙클 팀 도착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들에게 쏠렸다.
언제 어디서든 아이비제이는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룹이다.
그녀들의 모습을 보면서 MAYO의 미랑이 의미심장한 말을 흘렸다.
“이연 씨. 제가 좋아하는 명언이 하나 있는데. 뭔지 아세요?”
이연이 그걸 알 리 없었다.
미랑이 음료가 담긴 잔을 살짝 기울이면서 말했다.
“영원한 1등은 없다…… 라는 말이에요.”
그 말에 이연은 이렇게 답했다.
“저도 오늘부터 그 말이 좋아질 거 같네요.”
벌써부터 참가 그룹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줄다리기(Tug of war)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