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제42화. 가깝고도 먼(1)
쉬는 기간에 집에서 가족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지만, 그렇다고 3주 동안 아예 숙소 출입을 금한다는 말은 없었다.
아직 우미와 시우가 숙소에 머물고 있고. 멤버들한테도 늘 이곳은 개방되어 있었다.
이사 갈 집 고르기 투어를 마친 이연은 차를 끌고서 간만에 하니엘 숙소로 향했다.
간만이라고 해봤자 이틀 정도밖에 안 되었다.
이동하는 와중에 이연은 어제 만났던 공인중개사에게 먼저 전화를 걸었다.
“네. 어제 봤던 그 첫 번째 집이요. 거기로 계약해 주셨으면 해서요. 계약서 쓰고, 계약금도 오늘 내로 바로 보내드릴게요. 잔금은 이사 당일에 치르는 걸로……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릴게요.”
예정되어 있던 세 군데를 전부 다 둘러봤지만, 결국 첫 번째 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연도 세 집 중 첫 번째 집이 제일 좋아 보였었다.
가족이라 그런 걸까.
집 취향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중개사와 통화를 나누는 사이, 그새 하니엘 숙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정차시킨 이연은 공용 현관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숙소가 있는 상층으로 향했다.
기다릴 것도 없이 비밀번호를 직접 입력해서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이연.
그러자 거실에서 홀로 TV를 보고 있던 시우가 그녀의 등장에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깜짝이야…… 저는 귀신이라도 나타난 줄 알았어요.”
“갑자기 웬 귀신이야?”
“어제 우미 언니하고 무서운 영화 봤었거든요.”
“걱정하지 마. 나는 사람이니까.”
비록 다른 세계에서 넘어오긴 했지만, 적어도 귀신은 아니다.
“우미 언니는?”
“샤워하고 지금 머리 말리고 있을 거예요.”
시우가 말한 대로, 아까부터 방 안쪽에서 ‘위이잉―’ 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드라이기 바람 소리가 끊어졌다.
방문을 열고 나온 우미도 시우와 똑같이 크게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엄마!”
“대체 어제 어떤 공포 영화를 봤길래 나만 보면 깜짝깜짝 놀라는 거야.”
우미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동안 시우가 영화 제목을 알려줬다.
“‘담력’이라는 영화였어요.”
“그 키 크고 머리카락 긴 여자 귀신 나오는 거?”
“네, 맞아요.”
어쩐지. 이연을 보고 놀라는 이유가 있었다.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우미가 이연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었다.
“연이…… 맞지? 귀신 아니지?”
“이렇게 생동감 넘치는 귀신이 또 어디 있다고. 언니하고 시우, 둘밖에 없지?”
“어? 응. 우리 둘뿐이지.”
어제 두 사람을 제외하고 나머지 멤버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그래서인지 한창 데뷔 앨범 활동 기간이었을 때에는 숙소가 넓은데도 불구하고 뭔가 꽉 차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보일러 온도가 충분한 대도 불구하고 썰렁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우미가 이연의 손을 잡고서 뒤늦게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보니까 좋네. 숙소에는 무슨 일로 왔어? 놓고 간 물건이라도 있는 거야?”
“그건 아닌데.”
물건 대신 다른 걸 가지러 왔다.
우미로부터의 확답이다.
“이번에 양 이사님하고 같이 저녁 식사하고 싶어서.”
“우리 오빠 말하는 거야?”
“응.”
“뜬금없이 왜?”
“양 이사님이 우리 본가 이사 갈 때 가전제품을 포함해서 이것저것 많이 선물해 주겠다고 하셨거든. 지난번에 민준이가 대신 말 전해달라고 한 거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시던데. 그래도 너무 과분한 거 같아서 식사라도 제대로 대접할까 생각해서.”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었다.
“나하고 양 이사님 둘만 만나면 분명 사람들한테 오해받을 게 뻔하고. 그래서 언니한테 같이 와줄 수 있나 물어보려고 왔어. 적어도 가족이 있으면 나하고 양 이사님이 설마 그렇고 그런 관계인가 하고 의심하진 않을 테니까.”
이은솔과 시내로 데이트를 나갔을 때에도 이와 비슷한 논리로 촬영팀을 대동했었다.
이연의 말에 우미도 충분히 이해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이연은 다른 이야기도 같이 꺼냈다.
“언니가 많이 불편해할 거 같으면 거절해도 돼.”
“아니야. 안 그래도 나도 오빠가 우리 숙소에 가전제품 놔준 거에 대해서 고맙다는 말하려고 했었으니까. 그것까지 같이 겸하면 되겠지. 약속은 언제 잡으려고?”
“이사님한테 연락해 보고 난 다음에 정할까 생각 중인데.”
“알았어. 오빠하고 이야기해 보고, 날짜 정해지면 알려줘. 나는 언제든 시간 낼 수 있으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시우는 바로 근처에서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우미가 그런 시우를 향해서 먼저 제안했다.
“시우도 같이 갈래?”
“아니에요. 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데, 괜히 가서 분위기만 흐리는 거 아닐까 걱정도 되고. 그냥 여기에 있을게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잖아. 그리고 우리 오빠, 예전부터 사람들 만나는 거 좋아하는 성격이니까 민폐라고 생각 안 해도 돼. 오히려 너 보면 기뻐할 거야.”
고민 끝에 시우가 우미 말대로 하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해서 이연은 무사히 목적을 이루게 되었다.
모처럼 숙소까지 왔는데 그냥 가기는 뭔가 아쉽다.
“오랜만에 셋이서 같이 점심 먹을까?”
“그러자.”
다시 리더를 봐서 그런 걸까.
우미와 시우의 얼굴이 한층 밝아졌다.
* * *
양우섭이 알려준 대로, 이연은 어머니와 남동생을 데리고 집 근처에 있는 YN전자 매장을 찾았다.
3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커다란 매장에 있던 사람들이 이연과 마주칠 때마다 팬임을 어필하며 인사를 건넸다.
이연이 손님으로 왔다는 말에 직원이며 손님이며 할 것 없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워낙 유명한 걸그룹의 멤버니까.
그래도 오늘은 팬서비스보단 이사 갈 집에 들여놓을 가전제품들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이연의 가족들에게 제품들을 소개하고 설명하기 위해 매장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지점장이 직접 나섰다.
“이번에 새로 나온 공기청정기입니다. 컬러는 총 5종이고, 화이트 톤이 가장 무난해서 그런지 제일 잘 팔리고 있습니다.”
“누나. 나, 이거 아카튜브에서 리뷰해 주는 영상들 몇 개 봤거든? 현존하는 공기청정기 중에서 성능이 가장 좋대.”
대신에 그만큼 비싸다.
그럼에도 지점장은 환하게 웃으면서 가격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연 씨한테는 돈 받지 말라고 저희 이사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가격 신경 쓰지 마시고 원하는 거 있으면 그냥 말씀만 해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점장님”
“아닙니다. 아까 매장 직원들한테 사인도 일일이 다 해주셨는데. 저희가 더 해드릴 수 있는 게 있다면 무조건 해드려야죠.”
이때, 누군가가 뒤에서 불쑥 나타나 지점장의 말을 대신 이었다.
“맞아요. 제가 쏘는 거니까 기왕이면 이번에 새로 출시된 신제품 위주로 골라보세요.”
“엇! 이, 이사님!”
지점장이 화들짝 놀라며 부랴부랴 양우섭에게 예를 표했다.
설마 양우섭이 직접 이곳 매장을 방문할 줄은 몰랐다.
그건 이연도 마찬가지였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오랜만에 봬요.”
“그러게요. 어떻게, 마음에 드는 것들은 고르셨나요?”
이연 대신에 권민준이 지금까지 고른 품목들을 쭉 나열해 줬다.
“에어컨하고 세탁기, 건조기 골랐고요. 공기청정기 고른 다음에 TV도 보러 가려고요.”
“TV 어떤 거? 민준이 게임 좋아한다고 했었지?”
“네!”
“그러면 큰 화면으로 해야지. 한 75인치 어때? QLED에 UHD 4K까지 지원하는데. 나도 그거 쓰는 중인데, 괜찮더라. 영화 볼 때도 좋아. 벽걸이로 설치해 놓고 보면, 굳이 영화관을 갈 필요가 없어질 거야.”
“어떤 모델인데요?”
“저거. 한번 볼래?”
“네!”
마치 친형제처럼 서로 친하게 대화하면서 물건들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TV는 확실히 좋다.
그러나 가격표를 보자마자 이연의 어머니가 부담스러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TV 하나에 거의 2백만 원이나…….”
“괜찮습니다, 어머님. 아까 저도 그렇고. 여기 지점장님도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선물하는 거니까 가격에 대한 고민은 아예 머릿속으로 지우셔도 된다고.”
이 말에 어머니는 연신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감사해요. 키도 크고, 잘생기고. 성격도 어쩜 이렇게 좋으실까.”
“맞아요. 우섭 형이 진짜 잘생겼어요. 엄마, 저희 SSS 생방 보러 갔을 때 제가 말했잖아요. 형 보고 배우인 줄 알았다.”
쏟아지는 모자의 칭찬에 양우섭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우리 누나하고 잘 어울리는…… 끄아악!”
중간에 빡! 소리가 나더니 권민준이 자신의 오른쪽 다리 정강이를 붙잡고 비명을 질러댔다.
“무, 무슨 짓이야, 누나! 다리 부러지는 줄 알았잖아!”
“네가 자꾸 맞을 짓을 하니까 그런 거잖아.”
시간이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남동생은 여전히 누나의 참교육이 필요해 보였다.
권민준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다.
외형도 외형이고 성격도 성격이지만, 양우섭은 집안까지 좋다.
인기가 많을 수밖에 없는 남자다.
그러나 그건 그거고.
권이연은 권이연이다.
양우섭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권민준의 말을 부정했다.
“나하고 이연 씨를 놓고 보면, 이연 씨가 훨씬 아깝지.”
“우리 누나가요? 왜요?”
“이렇게 아름다우시니까. 그리고 아이돌로서 인기도 많은데, 나한텐 너무 과분하지.”
“제 눈에는 그저 그런 거 같은데.”
“너야 이연 씨 동생이니까. 그럴 수 있지.”
친남매니까. 당연한 반응이다.
권민준한테 어머니 모시고 다른 거 구경하고 있으라고 말한 이연은 양우섭과 따로 시간을 가졌다.
그에게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에 시간 한번 내주실 수 있을까요?”
“다음 주에요?”
“네. 보답의 뜻으로 제가 이사님한테 식사라도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우미 언니하고 저희 멤버인 시우도 같이 올 거예요.”
우미가 온다는 말에 양우섭의 표정이 아까보다 훨씬 밝아졌다.
하지만 이내 걱정을 드러냈다.
“혹시 우미가 저 온다는 사실을 모르고 나오겠다고 한 건…….”
“그건 아니에요. 이사님하고 같이 저녁 식사할 거라고 확실하게 말을 해뒀으니까요.”
“그런데도 우미가 오겠다고 했나요?”
“네.”
“그랬군요…….”
양우섭은 말끝을 흐리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을 보였다.
고민 끝에 양우섭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다음 주에 어떻게든 제가 시간 한번 내보겠습니다. 우미도 우미지만, 이연 씨가 직접 초대해주시는 자리인데. 거절하면 안 되겠죠.”
“감사합니다, 이사님.”
“저야말로 괜히 저희 때문에 이연 씨가 중간에서 고생을 많이 하는 거 같아서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우미 언니하고 이사님하고. 서로 친하게 지내면 좋겠어요.”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니까.
힘들 때 우선적으로 의지가 되는 건 가족이다.
이연은 우미의 현 상태가 아슬아슬하다고 느꼈다.
외로우니까. 그래서 이연이 숙소를 나갈 때 우미가 눈물을 보인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약속도 잡았으니까.
이제 그날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