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제41화. 쉼표(2)
대한민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권이연과 권민준, 남매가 힘을 합쳐서 어머니를 설득한 끝에 결국 셋이서 같이 집을 보러 다니기로 했다.
어머니는 왜 이연이 그에게 오늘 하루 반드시 휴가 내라고 강조했었는지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사 갈 집을 둘러보기 위해서 그런 거였다.
이연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탄 어머니가 문득 한 달 전의 일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까 민준이가 자꾸 우리가 만약에 이사를 가게 된다면 엄마는 어떤 집이 좋냐고 막 물어봤던 거 같은데. 설마 내 취향 알아내려고 그랬던 거니?”
뒤에 앉은 권민준이 씩 웃으면서 어머니의 말이 맞음을 실토했다.
“누나가 엄마한테 물어보라고 시켰거든요.”
어머니가 원하는 요건들을 전부 조사한 이연은 스케줄이 없을 때마다 집을 보러 다녔다.
그녀의 어머니가 원하는 조건은 딱 두 가지였다.
첫 번째로 우리 가족들끼리 조용히, 아담하게 살 수 있을 만한 작은 전원주택이어야 할 것.
그리고 두 번째로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을 것.
이 두 가지 요건만 충족되면, 어머니는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연은 이 주변 일대에 위치한 공인중개사 사무소들을 전부 찾아다녔다.
그 결과.
“세 군데 정도 될 거예요. 두 군데는 빈 곳이고, 한 군데는 세입자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집 팔리면 바로 짐 빼주겠다고 그러더라고요.”
“팔리다니. 우리, 월세로 들어가는 거 아니야?”
“매매예요. 어머니 명의로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돼요.”
“아니, 대체 왜…….”
가족 사이에 거창한 이유가 꼭 필요할까.
“어머니 딸이니까요.”
이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여태껏 이들 가족은 자신들의 집을 가져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돈이 모일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연이 SSS를 통해서 성공적으로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고. 하니엘의 데뷔 앨범이 1위를 넘볼 정도로 대박을 침으로 인해 이연은 막대한 정산금을 거머쥘 수 있었다.
이 돈으로 무엇을 먼저 해보고 싶은가 묻는다면.
당연히 이사다.
지금 살고 있는 빌라는 너무 낡고 허름하다. 만약에 이연이 해충 관련 마법진들을 여기저기 새겨놓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벌레들과 계속해서 동거했어야 할지도 모른다.
큰 폭에서 보자면 가족들을 위해서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연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셋 다 내부, 외부 리모델링을 싹 한데다가 내부 인테리어도 깔끔하게 잘되어 있으니까 웬만하면 다 마음에 드실 거예요.”
“그런 건 많이 비쌀 텐데…….”
“이럴 때 쓰라고 돈 버는 거니까요. 다 왔네요.”
첫 번째로 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공인중개사가 이연의 차를 알아보고 먼저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어머나! 이연 씨가 누굴 닮아서 이렇게 미인인가 싶었는데. 어머니를 닮으셨구나! 저는 이연 씨가 언니하고 같이 오신 줄 알았어요.”
어머니가 호호 웃으면서 그 정도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이미 SSS 파이널 무대 방송을 통해서 모녀의 미모는 전국에 널리 퍼진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연과 어머니, 두 사람 다 아직은 이런 칭찬이 많이 어색했다.
중개사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들어간 세 사람.
아담하지만 깔끔하게 꾸며진 화단이 어머니의 시선을 끌었다.
“화단이 어쩜 이렇게 귀여울 수 있을까. 너무 좋네.”
“엄마, 예전부터 식물 키우는 거 좋아하셨잖아요.”
아들의 말에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화단뿐만 아니라 주택 외장, 그리고 화이트와 베이지 투 톤 컬러로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 역시 마음에 쏙 들었다.
중개사가 집에 대해 추가로 설명을 이어갔다.
“1층하고 2층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1층은 방 2개. 화장실 1개, 부엌 1개, 거실 하나. 이렇게 25평으로 되어 있고요. 윗층은 방 하나에 화장실 하나, 옥상으로 바로 통해서 나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고요. 작은 창고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2층 천장에다가 태양광 패널 설치하시면 전기세도 어느 정도 아낄 수 있으실 거예요.”
어머니는 벌써부터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정신없이 집을 구경하고 있는 탓에 공인중개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귀로 다 담을 수가 없었다.
이연은 이미 한 번 설명을 들었던 적이 있었기에 굳이 중개사의 설명에 집중하진 않았다.
화장실 수압은 어떤지. 전기는 잘 들어오는지. 보일러 가동에 문제는 없는지 등등.
전부 다 이연이 먼저 와서 확인해 봤다.
1층을 지나 2층으로 올라섰을 때, 탁 트인 풍경이 어머니와 권민준의 마음에 쏙 들었다.
“주변에 고층 건물이 없다는 게 좋네요.”
“그렇죠? 답답하지 않고. 일조권 침해받을 일도 없고. 여기 사셨던 분들도 다 만족하셨어요.”
중개사의 말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동네가 조용하다는 게 마음에 쏙 들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집을 구경하는 동안, 이연은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만약에 이사하게 된다면, 가전제품도 싹 다 바꾸셔야 해요.”
“왜? 아직 10년은 더 쓸 수 있는데.”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이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너무 낡았잖아요. 그리고 가전제품 같은 거는 주기적으로 새 걸로 교체해 주는 게 좋아요. 오래 되면 수리비 때문에 돈이 더 나가니까요.”
이연의 의견도 맞는 말이다.
딸의 적극적인 설득에 어머니는 결국 마음을 열기로 했다.
그렇게 이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할 때쯤.
이연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YN그룹의 양우섭 이사. 그가 이연에게 먼저 연락을 취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문 일이다.
“여보세요.”
―이연 씨. 갑자기 연락해서 죄송합니다. 급하게 확인할 게 있어서요.
다급함이 느껴지는 양우섭의 목소리에 이연의 궁금증은 더욱 상승했다.
“네, 말씀하세요.”
―이번에 앨범 활동 끝나고 멤버들 전부 쉴 거라고 들었거든요.
“맞아요.”
―그래서 오랜만에 우미 자취 집에 왔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요. 보니까 집에 안 들어온 지 꽤 된 거 같은데. 혹시 우미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돼서 연락드렸습니다.
양우섭은 우미가 숙소에서 나와서 집으로 돌아온 줄로 아는 모양인가 보다.
“우미 언니는 시우랑 같이 숙소에서 지내기로 했어요.”
―아…… 그랬군요.
다급함 뒤에 민망함이 밀려왔다.
허탈하지만, 양우섭은 우미한테 별일 안 생겼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우미 언니한테 직접 연락하셨으면 될 텐데.”
―이연 씨도 알겠지만, 우미하고 저희 쪽 하고는 아직도 서먹서먹한 관계라서요. 제가 괜히 연락했다가 우미 기분 상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서, 일부러 먼저 이연 씨한테 전화했습니다. 혹시 바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어차피 전화 한 통이니까.
그리고 지금은 그렇게까지 바쁜 것도 아니었다.
이연이 통화를 나누는 걸 바로 근처에서 들었는지 권민준이 ‘응?’ 하는 반응을 보였다.
“누나. 누구랑 통화하고 있는 거야? 남자 같은데.”
남자라는 말에 이연의 어머니가 화들짝 놀랐다.
이연은 남동생에게 쓸데없는 의심하지 말라고 눈을 흘기면서 답했다.
“아는 지인이야.”
“근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양우섭의 목소리가 권민준에게는 굉장히 익숙하게 들렸다.
양우섭도 비슷했다.
―민준이도 같이 있나 보네요.
“어? 혹시 우섭 형님 아니에요?”
권민준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면서 물었다.
―민준아! 잘 지냈지?
“네, 형! 오랜만이에요!”
SSS 파이널 생방 무대 당시, 양우섭과 권민준은 가까운 객석에 앉았었다.
그때 이후로 오랜만에 서로의 목소리를 듣는 거여서 그런지 반가움이 컸다.
이연은 작게 한숨을 내쉬면서 동생에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건넸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직접 통화해.”
스마트폰을 받자마자 권민준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형, 제가 우미 누나하고 형하고 관련된 기사 보고 얼마나 놀랐는데요. 내가 그때 봤던 사람이 엄청 대단한 사람이었구나 했다니까요?”
―그 정도는 아니야. 근데 이연 씨하고 같이 있네? 가족들끼리 외출이라도 나온 거야?
“아니요. 저희, 이번에 이사 가려고요. 거의 15년 만에 이사하는 거 같아요.”
그동안 남매와 이들의 어머니는 좁고 낡은 빌라에서 오랫동안 지내왔다.
이것 때문에 이연은 활동을 쉬는 기간에 이사 문제를 최우선으로 잡고 해결하고 싶었던 거였다.
이사라는 말에 양우섭이 깊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사 언제 가는데.
“누나 쉴 때 다 하자고 하니까…… 그래도 이번 달 안에는 가지 않을까 싶은데요.”
―냉장고나 세탁기는? 건조기 같은 건 안 필요해? 원하는 거 있으면 형이 세트로 해서 선물로 보내줄게.
“정말이요?”
권민준의 표정이 급격하게 밝아졌다.
안 그래도 가전제품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잘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남동생한테 거절하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러나 권민준이 누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 봐, 누나. 형이 다 해준대잖아.”
“이미 양 이사님이 우리 숙소 가전제품들도 다 제공해 줬는데. 우리까지 그런 혜택을 어떻게 받으라고.”
그때는 그래도 여동생 우미가 엮여 있는 일이었으니까 명분이 존재했다 치더라도.
이번 경우는 그런 게 없다.
이연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양우섭이 권민준에게 어떤 말을 전달했다.
그러자 권민준이 ‘스피커 모드로 변경할게요’라고 말하면서 액정화면을 터치했다.
―이연 씨. 저번에 민준이가 제 대신 말 전해준 거에 대한 보답을 아직 안 해서요. 그거 때문에 제가 해주고 싶으니까 너무 부담 가지진 마세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연이 아무리 안 된다고 해도 이미 권민준과 양우섭은 서로 말을 맞춘 상태였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어 보였다.
이연은 결국 마지못해 양우섭의 선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제가 더 감사하죠. 이연 씨하고 민준이 덕분에 우미하고 오랜만에 만나서 이야기도 나눠보기도 했고. 앞으로도 이런 기회를 차츰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양우섭은 이러다 보면 여동생과의 관계 회복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통화를 마치고 다시 이연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는 권민준.
이연은 그런 남동생을 찌릿 노려봤다.
“하지 말라고 하면 좀 하지 마라.”
“공짜잖아. 뭐 어때?”
“공짜 아니야. 이런 거 하나하나가 다 갚아야 할 빚이라고.”
적어도 이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권민준이 말 몇 마디 대신 전해준 거 가지고 너무나도 큰 보답을 받았다.
그래서 이연은 초과하는 분량에 대해서 그만큼 양우섭에게 다시 되돌려주고 싶었다.
이연이 양우섭에게 해줄 수 있는 것.
그리고 양우섭이 가장 바라고 있는 것.
‘오늘 집에 가서 우미 언니한테 한번 전화라도 해야겠네.’
할 일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