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제41화. 쉼표(1)
오늘 하루, 이은솔과의 데이트를 모두 마무리 지은 이연은 데이트 시작 때 그랬던 것처럼 이은솔이 운전하는 차 보조석에 타고서 하니엘 숙소로 향했다.
그동안 그녀는 이벤트에서 탄 상품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 고민했다.
상품으로 받은 건 종류별로 모여 있는 과자 세트였다.
이은솔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이연을 보면서 한 차례 웃었다.
“가져가서 멤버들이랑 같이 나눠 먹어.”
“선배님은요?”
“우리는 지금 숙소 생활 안 하고 있으니까. 가져가 봤자 나 혼자 먹어야 하고. 먹을 입이 많은 쪽이 가져가는 게 좋지 않을까?”
벡스는 현재 멤버 중 한 명이 군 입대를 한 관계로 완전체 활동은 잠시 쉬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어떤 멤버들은 유닛을 만들어서 계속 가수 활동을 이어가고 있고 또 어떤 멤버는 연기 생활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은솔의 경우에는 진행자 겸 솔로 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이렇게 각자 흩어져서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니, 숙소 생활이 크게 의미가 없어지게 되었다.
반면 하니엘은 이제 막 데뷔 앨범을 낸 신인 걸 그룹이기도 하고. 솔로 활동보다는 멤버들 전체가 모여 스케줄을 다니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래서 이은솔은 그녀에게 상품을 양도하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천만에. 그리고 사실 너 아니었으면 우리가 우승하지도 못했을 거야.”
막판에 이연이 가녀린 팔에서 나올 리 없는 근력과 균형 능력을 선보이면서 근육맨들을 제압하는 모습은 이은솔이 봐도 명장면이었다.
이연 덕분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공주님 안기도 당해보고.
이은솔에게 있어서 오늘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하루가 되었다.
차를 세운 이은솔은 트렁크에 실어둔 다수의 과자 봉지를 꺼냈다.
“내가 숙소까지 옮겨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선배님. 이 정도는 저도 충분히 들 수 있어요.”
하기야. 성인 남자를 안고 외발로 버텨내기까지 하는 이연인데. 고작 과자 봉지 몇 개 못 든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이연을 먼저 보낸 뒤, 차로 돌아온 이은솔은 카메라를 끄자마자 바로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어, 은솔아. 이연 씨는 잘 바래다줬어?
“네. 그보다 형.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부탁? 뭔데.
“PT 추가로 더 받고 싶어서요.”
-갑자기? 너 스케줄 많아서 PT 늘리는 거 힘들다고 했잖아.
“운동 더해서 몸 좀 키워야겠어요.”
이연의 활약이 본의 아니게 이은솔의 운동 욕심을 자극하게 되었다.
* * *
이연이 다시 하니엘 숙소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헬스팀도 모두 복귀한 상태였다.
시우와 함께 저녁을 만들고 있던 우미가 가장 먼저 이연을 반겼다.
“어서 와, 연아.”
우미의 말을 듣자마자 방 안에 있던 다른 멤버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다.
“연이 언니 왔어?”
“권이연! 일로 와서 앉아봐.”
리샤와 여솜, 비아, 그리고 유키는 할 말이 많아 보인다는 표정으로 이연을 강제로 거실로 끌고 왔다.
“이거 뭐야?”
여솜이 심각한 얼굴로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동영상 하나를 보여줬다.
이벤트 현장에서 이연이 이은솔과 서로 포옹하면서 좁은 종이 위에 오래 버티는 게임을 하는 장면이 고스란히 올라와 있었다.
“근처에서 이벤트 하고 있길래. 거기에 참가한 거야. 이상한 뜻으로 한 행동도 아니고. 사람들도 다 보고 있었으니까 괜찮아.”
“대체 무슨 게임이었길래 선배님하고 이렇게 포, 포옹을…….”
이연이 자초지종을 설명해 줬다.
설명을 듣고 나서야 멤버들은 조금이나마 안심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와중에 비아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정말 선배님하고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닌 거, 확실해?”
“나하고 선배님 억지로 엮으려고 하지 마.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원래 다른 사람의 알콩달콩한 연애 이야기가 더 재미있는 법인데.”
“연애 아니라니까.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아무리 해명을 해보지만, 비아의 머릿속에 펼쳐진 꽃밭 풍경은 바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이 와중에 유키가 이벤트 게임 결과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래서 언니. 1등 했어요?”
“응. 이게 그 상품이야.”
“우와, 과자 아니에요?”
“어. 선배님이 멤버들하고 나눠 먹으라고 양보해 주셨어.”
“안 그래도 숙소에 먹을 거 없어서 언니들하고 같이 근처 마트에 갔다 올까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잘됐네요.”
과자라는 말에 리샤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프XX스 있어? 자X치는!”
“어휴, 이 언니 과자라고 하니까 눈 뒤집어지는 거 봐. 방금 헬스장에서 운동 그렇게 열심히 해놓고선.”
“괜찮아. 그만큼 또 운동하면 되니까.”
그러나 리샤의 원대한 계획은 우미의 잔소리 한마디에 와르르 무너지게 되었다.
“밥 먹기 전에 과자 먹으면 안 돼.”
“……네.”
엄마의 충고에 둘째 딸은 금세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 * *
스타데이 관찰 촬영이 종료되었다.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을 회사 내에 위치한 소회의실로 따로 불렀다.
“다음 주에 스타데이 스튜디오 녹화만 끝나면 데뷔 앨범 활동은 다 끝날 거야. 스튜디오 촬영은 이연이하고 여솜이, 이렇게 둘만 가면 되고. 바로 다음 앨범 작업 들어가기 전에 3주 정도 휴식 기간 줄 거거든? 숙소에 계속 머물고 싶은 사람은 머물러도 되고. 가족들하고 같이 지내고 싶은 사람은 그때까지 집에 가 있어도 돼. 어떻게 할래?”
유키가 가장 먼저 손을 들고서 말했다.
“저는 일본에 가 있을게요. 가족들하고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요. 얼마 전에 엄마한테 전화 왔었는데, 동생들이 언니 보고 싶다고 그랬대요. 그 말 들으니까 안 갈 수가 없더라고요.”
박도수 매니저는 유키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여줬다.
“알았어. 유키 말고 다른 멤버들은?”
유키의 뒤를 이어서 여솜과 리샤, 그리고 비아도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기를 원했다.
“리샤는. 미국 쪽 집 말하는 거지?”
“네.”
“오케이. 그러면 남은 인원이…… 우미하고 이연이, 그리고 시우는?”
우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숙소에 남을게요. 어차피 자취 집에 가봤자 혼자일 테고. 차라리 숙소가 더 편해요.”
“저도요. 숙소에 남을게요.”
시우도 우미와 같이 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이연의 차례.
오랜 고민 끝에.
“집에 가 있을게요.”
“집이 숙소 말하는 거야? 아니면 본가?”
“본가요.”
이번 기회에 미뤄뒀던 일을 할 생각이었다.
멤버들의 희망 사항을 각각 수첩에 적은 박도수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실장님한테는 이렇게 보고 올릴게. 이연이하고 여솜이는 내가 다음 주에 스튜디오 녹화 일정 다시 한번 공지해 줄 테니까 확인하고. 차 끌고 내가 너희 집으로 데리러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면 돼.”
“네, 알겠습니다.”
“다들 첫 앨범 활동 기간 동안 고생 많았고, 내일이나 모레쯤에 다 같이 모여서 뒤풀이 파티라도 하자. 괜찮지?”
파티라는 말에 멤버들은 열띤 환호로 답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데뷔 활동.
기쁨과 아쉬움이 공존하는 첫걸음을 잠시 멈추고.
재정비의 시간을 가진 다음에 다시 열심히 뛸 준비에 나서기로 했다.
* * *
멤버들, 그리고 소속사 관계자들과 함께 하니엘의 활동에 쉼표를 찍은 기념으로 다 같이 모여 먹고 마시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 날 아침.
평소처럼 이른 시간에 눈을 뜬 이연은 3주간 본가로 돌아갈 때 챙길 가벼운 짐들만 몇 개 캐리어에 챙긴 후에 숙소를 나설 준비를 마쳤다.
새벽에 유키와 리샤가 먼저 떠났고.
그다음으로 이연의 차례였다.
남은 멤버들이 이연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에 모여들었다.
“나중에 또 봐, 연아.”
우미가 이연을 꼭 안아줬다.
이연도 왼손으로 우미의 작은 등을 가볍게 토닥여줬다.
중간에 우미가 급하게 양손으로 자신의 눈가를 가렸다.
갑자기 눈물이 나와서 자신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슬픈 일 아닌데. 왜 그런대, 진짜…….”
이연은 옅은 미소를 띠면서 스스로한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위로와 조언을 해줬다.
이별에 익숙한 사람은 절대로 많지 않다.
3주라는 기간이 짧은 것도 아니니까.
그래도 이연은 멤버들과 웃으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차 끌고 바로 올 테니까.”
“알았어.”
“조심해서 들어가, 언니!”
“집에 도착하며 톡 보내고!”
멤버들과 아쉬움이 가득한 작별의 시간을 보내고, 이연은 홀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스케줄이 워낙 많아서 본인이 직접 차를 끌고 나갔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다행히도 운전하는 법을 까먹진 않았다.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천천히 돌리면서 지하 주차장을 빠져나온 이연은 오랜만에 본가로 향했다.
익숙한 도로, 그리고 익숙한 골목길이 보이면서 집에 왔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근처에 차를 세우고 초인종을 누르자,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그녀의 어머니가 문을 열어줬다.
“우리 딸, 어서 오렴!”
어머니가 이연을 꽉 안아줬다.
“왜 이렇게 말랐니. 어머머, 얼굴이 반쪽이 됐네.”
“아이돌이니까 어쩔 수 없죠. 민준이는요?”
“애들이랑 PC방 갔다 오겠대.”
“이 녀석이.”
누님이 오랜만에 온다는데. PC방에 정신이 팔려 있다는 말을 들으니까 괘씸죄가 붙었다.
이연이 캐리어를 들고 오랜만에 자신의 방에 와서 짐을 막 풀려고 하던 순간,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엄마를 찾는 권민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 엄마! 누나는! 아직 안 왔죠?”
어머니보다 이연이 먼저 반응했다.
방 안쪽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이연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동생을 노려보며 말했다.
“벌써 왔다.”
“왜, 왜 이렇게 빨리 왔어.”
“빨리 오면 안 되냐?”
“그, 그건 아니지만…….”
누나가 오랜만에 집에 오는 거니까. 도착하기 전에 집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짐도 옮겨주고. 잘 왔다고 마중도 나오고. 그렇게 하겠다고 미리 이연에게 약속까지 했는데, 아무래도 남고생이다 보니 PC방의 유혹을 참기가 힘들었다.
이연은 기대도 안 했다면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 정리 끝나면 바로 나갈 거니까 준비해 둬.”
“오늘 하려고?”
“어. 3주 안에 하려면 시간 많이 빠듯하니까.”
“알았어. 오자마자 바로 나갈 준비 해야겠네.”
남매간의 대화를 얼핏 들은 모양인지, 어머니가 권민준에게 물었다.
“뭐를? 오늘 외식하기로 했니?”
“그게 아니라요.”
권민준이 바깥 쪽을 가리켰다.
“누나가 집 몇 개 봐둔 거 있으니까 오늘 엄마 데리고 같이 보러 갈 거래요.”
“집을…… 봐뒀다고? 그게 무슨 소리니?”
이연이 짐 정리에 집중하면서 거실까지 들리게끔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집 너무 낡았잖아요. 엘리베이터도 없고 어머니 무릎도 안 좋으신데 계속 계단 왔다 갔다 하기도 힘드실 테고. 그래서 좀 더 좋은 곳으로 이사시켜 드리려고요.”
“아니야, 아니야! 엄마 괜찮으니까 이런 걸로 돈 안 써도 돼.”
“이렇게 하려고 돈 번 거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어요.”
“그래도…….”
권민준이 말끝을 흐리는 어머니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오랜만에 누나한테 효도할 기회도 줘야죠.”
어머니 입장에선 너무 과분한 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