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제40화. 승부욕(5)
생각보다 작은 종이 면적을 보고서 이은솔의 머릿속에 오만 가지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잠깐만요. PD님. 이거 괜찮은 거예요?”
A4 용지 한 장 정도 되는 크기밖에 안 된다.
물론 잘하면 두 사람이 나란히 두 발을 딛고 설 수 있지만, 그래도 거리를 가깝게 좁혀야 하는 건 변함없다.
이은솔이야 사실 상관은 없다.
그러나 이런 건 여자 쪽 입장을 항상 들어봐야 한다.
스킨십 부문에 있어서는 어쩔 수 없다.
김정수 PD가 이연에게 먼저 물어보려고 하기도 전에.
그녀가 먼저 답했다.
“상관없어요.”
“예?”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대답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오히려 PD와 제작진, 이은솔에 박도수 매니저까지. 모두가 다 귀를 의심했다.
“하겠다고?”
박도수 매니저가 혹시나 해서 다시 물었다.
그러자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재차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네. 할게요.”
“아니…… 진짜로 괜찮아? 너, 스킨십 싫어하잖아.”
물론 싫어하는 건 맞다.
그러나 오히려 남자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군사훈련을 받을 때에도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몸을 부대끼고 훈련받았던 적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같은 성별이기도 하고.
물론 지금은 다르지만, 속은 여전히 남자였기 때문에 이연은 차라리 이은솔이 나았다.
그리고 여자의 몸이 되었을 때에 비해서 지금은 스킨십에 관한 장벽이 많이 낮아진 편이기도 했다.
그동안 비아나 리샤, 유키, 여솜 등등. 같은 그룹 멤버들이 틈날 때마다 이연과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다니고. 인사 대신 가볍게 포옹을 하기도 해서 어느 정도 면역이 생겼다.
역으로 이은솔이 당황하고 말았다.
이걸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그래, 하자.”
방송이니까. 출연자로 나온 이상, 최대한 재미있는 장면들을 만들어낼 의무가 있다.
여기에 약간의 사리사욕(?)을 채울 수 있다면 더 좋고 말이다.
두 사람의 참전이 결정되자, 사람들의 기대가 더욱 높아졌다.
이벤트 진행자 역시 유명인들의 참가 소식에 더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여러분! 지금 이은솔 씨하고 권이연 씨가 여기 이벤트에 참가하신다는데 다들 보고만 계실 겁니까? Hurry up! 얼른 참가들 하세요!”
언제 또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이런 게임을 같이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추억이란 이름의 페이지를 장식하기 위해 젊은 커플들 다수가 권이연, 이은솔 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참가 팀의 숫자는 총 스물.
이은솔은 겉옷을 벗고서 자신의 매니저에게 건넸다.
매니저가 이은솔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야, 은솔아. 근데 이길 수 있겠냐?”
“왜요.”
“저기 봐봐. 딱 봐도 운동 좀 하게 생긴 사람들이 여럿 보이잖아.”
허벅지가 일반 성인 여성 허리만 한 두께를 자랑하는 근육맨들이 몇몇 보였다.
그럼에도 이은솔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승부욕을 드러냈다.
“괜찮아요. 자신 있습니다.”
아이돌로서 산전수전 다 겪어온 저력을 이 자리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아니, 이연에게 적극적으로 어필하기로 했다.
* * *
각자의 위치에 선 참가자들을 향해 진행자가 룰을 설명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앞에 놓인 종이에 두 사람이 한 팀이 되어 올라서서 10분을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10분이 지날 때마다 종이 면적이 반으로 줄어듭니다. 그 뒤에 다시 10분을 버티고. 이런 식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팀이 최종 우승자가 됩니다. 아셨죠?”
“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두 분이 종이 위에만 올라가 있으면 됩니다. 한 분이 다른 한 분을 업으셔도 되고요.”
업어도 된다는 말에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시티를 입은 근육맨들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그럼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서 동시에 올라가 주세요. Ready…….”
말끝을 흐리던 진행자가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삐이익!
시작 신호와 동시에 이은솔과 이연이 동시에 두 발을 올렸다.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형태를 취하는 두 사람.
혹시 몰라서 이연은 신고 있던 힐 대신 운동화를 신고서 경기에 임했다.
혹여나 힐 굽으로 이은솔의 발등을 찍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말이다.
신발을 바꿔 신어서인지 아까보다 이연의 키가 한층 더 낮아졌다.
안 그래도 180㎝대에 달하는 이은솔과 키 차이가 많이 나는 편인데. 운동화를 신으니 이연은 이은솔을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반면, 이은솔은 난감해졌다.
바로 앞에 이연이 있다 보니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그녀에게 들릴까 봐도 조마조마했다.
그녀의 달콤한 향기가 이은솔의 후각을 자극했다.
“선배님.”
“어? 어! 왜?”
“뒤꿈치 들고 계시면 불편하시잖아요. 좀 더 제 쪽으로 붙으세요.”
“그, 그럴까?”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사람들의 이목이 더더욱 집중되었다.
10분이 지날 동안, 20팀 모두 무사히 미션을 클리어했다.
문제는 이다음부터다.
진행요원들이 돌아다니면서 바닥에 깔린 종이들을 정확히 반절로 접었다.
A4 용지의 2분의 1 크기.
생각보다 굉장히 작다.
근육맨 팀들은 벌써부터 자신의 여자 친구를 번쩍 안아 들기 시작했다.
이은솔이 이연에게 슬쩍 물었다.
“우리도 저렇게 할까? 내가 너 안아서 올리면 되는데.”
“아니요. 괜히 벌써부터 체력 낭비할 필요 없어요. 이 정도면 아직은 충분하니까요.”
“충분하다니…….”
자칫 잘못하다가 무게중심이라도 잃어버리면 그대로 탈락이다.
그럼에도 이연은 걱정하지 말라는 태도로 일관했다.
“자! 2라운드, 시작하겠습니다!”
이은솔이 먼저 올라섰다.
뒤이어 이연이 남은 종이 면적에 자신의 두 발을 올렸다.
이때, 이연은 1라운드 때 취하지 않았던 행동 하나를 선보였다.
양팔을 뻗어 이은솔의 목을 감쌌다.
사람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반면, 이은솔은 크게 당황했다.
뭐라 말문을 떼지 못하는 선배를 향해 이연이 자신의 전략을 알렸다.
“팔로 저 안아주세요, 선배님.”
“어, 어떻게.”
“허리를 감싸는 식으로요.”
“…….”
이름하여 포옹 작전이다.
양팔을 뻗어서 이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꼭 껴안았다.
허리가 너무 얇아서 한 팔만으로도 충분할 정도였다.
이은솔은 순간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반면, 이연은 이쯤 되니까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승부욕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것 말고는 다른 감정은 일체 없었다.
게다가 카메라까지 있으니, 시청자들에게 무조건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의미로 뜨거웠던 2라운드가 끝났다.
반의반 크기로 줄어든 종이들.
진행자가 현재 상황을 알렸다.
“20팀 중 10팀만 살아남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난이도가 훌쩍 뛰니까, 전략을 잘 짜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제부터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등에 업든가, 팔로 공주님 안기 방식으로 안아 올리든가 하는 식의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다.
2라운드 때 근육맨 팀들이 보여준 작전처럼 다른 커플팀들 역시 남자가 여자를 안아 올리는 자세를 취했다.
이은솔도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연을 안아 올리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이연은 오히려 반대 입장을 취했다.
“제가 선배님 들어 올릴게요.”
물론 이은솔은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고생할 자신을 위해 예의상 한 말로 치부했다.
“괜찮아. 이래 봬도 나, 체력하고 근력 꽤 좋은 편이니까 안심하고 맡겨도 돼.”
“아니요. 제가 하는 게 훨씬 안정적인데…….”
“설마 선배 못 믿어서 그러는 거야?”
이은솔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여기서 이연이 ‘네’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일단은 선배한테 기회를 주기로 했다.
두 팔을 이용해서 이연을 안아 올리는 이은솔.
이연은 아까처럼 팔로 이은솔의 목을 감싸면서 좀 더 안정적인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근육맨들과 비교해서 호리호리한 체형을 지니고 있는 이은솔이었기에 이연은 사실 많이 불안했었다.
그런데 막상 안기고 나니까 생각보다 꽤 탄탄한 느낌이었다.
“선배님. 운동 많이 하셨나 보네요.”
“아이돌이니까.”
숨은 근육들이 상당했다.
서로 최대한 밀착한 상태였기에 이연은 이은솔의 숨겨진 남성미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꽤나 안정적인 자세로 세 번째 라운드를 버텨낸 이은솔.
그의 맹활약 덕분에 3라운드도 무사히 통과했다.
“살아남은 팀은 다섯 팀! 이제 대망의 4라운드로 향하겠습니다!”
4라운드부터는 한 사람이 두 발을 바닥에 붙일 수가 없다.
무조건 한 발을 들고 버텨내야 한다.
자신의 파트너를 안고서 두 발로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일인데. 여기에 발을 하나 들기까지 해야 하니 난이도가 체감상 최소 다섯 단계는 올라간 듯한 느낌을 줬다.
이건 근육맨들도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삐익! 하는 호루라기 소리와 동시에 다섯 팀 중 두 팀이 탈락했다.
남은 근육맨 팀들과 이은솔, 권이연 팀의 대결.
제아무리 이은솔이라 할지라도 슬슬 한계에 봉착한 모양인지 구슬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힘들긴 하네.”
그래도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끝까지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지 애써 웃었다.
이때, 이연이 오른쪽 옷소매를 끌어내리고서 그것을 이용해 이은솔의 땀을 닦아줬다.
“힘내세요, 선배님.”
이연의 응원 덕분일까.
이은솔은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하루 종일도 버틸게.”
없던 힘까지 생길 정도였다.
이 와중에 한쪽에서 사람들의 탄식이 흘러나왔다.
근육맨 두 팀 중 한 팀이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이제 남은 근육맨 팀 하나만 꺾으면 된다.
그러나 승부는 5라운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손바닥보다도 더 작아지게 된 종이 면적을 보면서 이은솔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근육맨 팀도 슬슬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모양인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은솔이 몸을 풀면서 마지막 전의를 다지려고 할 때였다.
“선배님.”
이연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수 교체하죠.”
* * *
마지막 5라운드.
진행자가 호루라기를 분 순간, 사람들은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아까처럼 이은솔이 이연을 안아 들 거라고 예상했었는데.
반대로 이연이 이은솔을 안아 들고서 외발로 종이 위에 올라섰기 때문이었다.
진행자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연 씨가 이은솔 씨를 안아 들었네요! Amazing! 심지어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습니다!”
근육맨들, 이은솔보다도 훨씬 더 안정적인 자세로 성인 남자를 안은 이연의 얼굴에는 조금의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이은솔은 수차례 이연에게 괜찮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고정이었다.
“네. 멀쩡해요.”
“이거 참…….”
이은솔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더 놀라운 건 이벤트 결과였다.
결국 버티다 못한 최후의 근육맨이 ‘어어……!’ 하며 다른 발을 지면에 딛고 말았다.
“이은솔, 권이연 팀! 우승입니다!”
우승이 확정되고 이은솔을 다시 바닥으로 내려놓을 때에도 이연은 거친 숨 한번 몰아쉬지 않았다.
너무나도 멀쩡한 그녀를 보면서 이은솔은 자신의 결정에 대해 약간의 후회를 비쳤다.
“진작 너한테 맡길 걸 그랬네.”
그 말에 이연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결국은 이겼으니까.
이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