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제40화. 승부욕(1)
이연은 유키와 함께 웹예능 프로그램, ‘숏토크’에 출연하기 위해 박도수 매니저가 운전하는 타를 차고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촬영장에 도착하기 10분 전. 신호 대기하는 시간을 이용해 박도수 매니저가 두 멤버에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흘렸다.
“‘숏토크’에 출연했던 사람들 말 들어보니까, 촬영 시간이 엄청 짧다고 하더라.”
“보통 어느 정도인데요?”
“1시간 정도?”
유키가 박도수 매니저의 말에 깜짝 놀랐다.
“진짜요? 그렇게 짧아요?”
“애초에 러닝타임이 그리 길지가 않으니까.”
숏토크는 웹예능답게 한 편당 15분 내지 17분 사이의 러닝타임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걸 감안해도 1시간 녹화는 굉장히 짧다.
출연했던 사람들이 매번 숏토크에 또 나가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촬영 시간이 짧으면, 출연하는 게스트들의 부담도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이연은 이동하면서 미리 받은 대본을 다시 한번 살폈다.
어제저녁, 작가한테 급하게 연락이 왔었다.
대본 몇 줄이 더 추가되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수정된 내용은 간단했다.
엊그제 방영되었던 ‘근무 중 이상 무’ 여군 특집 3기에 관한 질문들이 몇 개 추가되었고, 그 이외에는 변동 사항이 없었다.
여군 특집 3기가 시청률 대박과 함께 시청자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받게 되었기에 숏토크 제작진이 부랴부랴 넣은 것이다.
현역들보다도 더 군생활을 잘하는 걸그룹 아이돌이라고 칭찬받게 된 이연.
2박 3일동안 고생한 만큼, 그 이상의 보상이 이연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첫 번째 앨범 활동 마지막 주간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러브콜이 들어올 정도로 이연과 하니엘을 향한 방송가의 관심이 매우 뜨거웠다.
박도수 매니저가 쓴 미소를 짓고서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앨범 활동 기간 더 늘려서 잡을 걸 그랬어.”
“그래도 방송은 계속 출연할 수 있지 않나요?”
이연의 물음에 박도수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LC는 소속 아티스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한다는 게 회사의…… 아니, 대표님의 방침이니까. 굳이 앨범 활동 기간이 아니어도 본인이 방송에 출연하고 싶다면 그래도 되고. 쉬고 싶으면 쉬어도 되고. 이만한 회사 또 없다, 얘들아.”
박도수 매니저는 틈을 노려 본인의 회사가 좋은 곳임을 어필했다.
이건 이연도, 유키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모든 게 만족스러울 순 없을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완벽한 회사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점이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였기에 이연은 한동안 LC와 계속 호흡을 맞춰나갈 생각이었다.
‘어차피 데뷔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일단은 연예계라는 곳에 적응하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서 차근차근 경력을 쌓고. 나중에 타이밍이 왔다 싶을 때. 이연의 궁극적인 목적이기도 한 ‘완벽한 무대’를 위해 차근차근 준비할 생각이다.
* * *
촬영장에 도착한 뒤에 숏토크의 진행자인 여성 래퍼, 샌디와 짧게 인사를 나눴다.
리샤나 이연 못지않게 상당한 볼륨감을 자랑하는 몸매를 지닌 샌디.
진한 메이크업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지, 성격도 굉장히 쿨했다.
“나는 뭐 내숭 떨고 이러는 거 별로 안 좋아하니까. 방송 들어가도 그냥 신경 쓰이는 거 있으면 바로바로 물을게. 알았지?”
‘내숭을 싫어한다’라고 말할 때, 이연은 몰래 유키를 응시했었다.
유키는 샌디의 진한 화장보다도 더 두꺼운 투명 가면을 쓰고서 말했다.
“저도 내숭 떠는 사람들 별로 안 좋아해요. 솔직한 게 제일 아니겠어요, 선배님?”
“어머, 유키라고 했지? 나하고 잘 통할 거 같은데?”
“제가 일본에 있을 때부터 선배님 무대를 얼마나 많이 봤는데요!”
“진짜? 고마워~”
유키를 꽉 안아주는 샌디.
아마 그녀는 모를 것이다.
자신이 안고 있는 이 작은 소녀가 샌디가 싫어하는 내숭과 가식의 화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전후사정을 다 알고 있는 이연이었지만, 일부러 말은 안 하기로 했다.
때로는 침묵이 답일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다.
방송 시작과 동시에 멤버들은 샌디가 자신들을 소개하는 멘트를 꺼내기 전까지 스튜디오 바로 근처에서 대기했다.
잠시 뒤, 샌디가 목소리를 크게 높였다.
“오늘의 핫한 인물들을 소개할게. Come on baby!”
스태프가 신호를 주자, 이연이 먼저 걸음을 옮기면서 카메라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천사, 하니엘입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단체 인사까지 매끄럽게 이어갔다.
그러나 샌디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두 사람의 인사법을 지적했다.
“우리 숏토크는 무조건 반말로 해야 되는 프로그램이야. 자, 다시 인사해.”
“반말로요?”
“응. 나한테도 반말로 하고.”
유키가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면서 소극적인 태도로 말했다.
“대선배님이신데, 저희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괜찮아, 괜찮아. 1화 때부터 쭉 이래 왔어. 콘셉트니까 우리 시청자들도 다 이해해 줄 거야. 자, 반말 버전으로, Restart!”
진행자가 이렇게 말을 하는데, 게스트 입장에선 거절할 수가 없었다.
“안녕. 너희들의 천사, 하니엘이야.”
“숏토크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말을 놓으니까 같은 단체 인사말이라 할지라도 느낌이 전혀 달라졌다.
특히 이연이 각 잡고 이렇게 반말로 말을 하니까 몇몇 스태프들은 매도 속성도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살짝 들었다.
한편, 샌디는 두 사람의 인사가 그제야 마음에 들었는지 오케이를 연달아 외쳤다.
“내가 알기론 유키가 일본인이라고 들었는데. 맞아?”
“응, 맞아.”
1분 전에 분명 대선배님한테 말을 어떻게 놓냐고 어려워하던 유키였는데. 지금은 그런 고뇌의 흔적 따윈 찾아볼 수 없었다.
180도 달라진 유키의 언행에도 샌디는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아까도 그녀가 직접 말했지만, 숏토크 자체가 반말 콘셉트로 진행되고 있었기에 오히려 유키의 이런 행동은 ‘방송 잘하네’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다.
“유키를 위해서 오늘, 우리가 일본 통역을 맡아주실 분을 구했어. Hey, Come on!”
샌디의 외침에 맞춰서 개그맨 김용진이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안녕. 나는 용진이라고 해.”
개그맨답게 쇼토크 특유의 분위기에 금세 적응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김용진은 일본 유학 경험을 토대로 일본어 회화에 능숙하다고 연예계에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오늘, 유키의 통역을 맡기 위해 기껏 출연했지만.
“나 한국말 잘하는데.”
유키의 말에 샌디도 깊은 공감을 드러냈다.
“맞아. 아까 이야기 나눠보니까 유키, 한국말 나보다도 더 잘하더라고.”
“그럼 나는?”
김용진이 자신을 가리키면서 묻자, 샌디와 유키가 동시에 바이바이라고 말하며 손을 흔들어줬다.
이연은 호흡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을 보면서 신기했다.
가식 떠는 걸 싫어하는 사람과 가식 그 자체인 사람이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하니까 신기하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두 사람의 호흡에 김용진은 억울함을 토로했다.
“아니, 나 이번 주에 촬영 이것밖에 없는데. 일자리 빼앗아가지 말고 나한테도 일할 거리 좀 줘. 내가 잘 통역해 줄 테니까.”
물론 샌디나 유키, 두 사람 다 진심으로 김용진을 다시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으로 한 건 아니었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다.
* * *
샌디가 이연에게 급하게 추가된 질문에 대해 물었다.
“요즘 이연이가 출연했던 모 군대 예능이 엄청 화제던데. 촬영할 때 어땠어?”
방송에서 공개적으로 풀어줄 만한 에피소드 같은 게 있는지를 물었다.
에피소드라고 말할 것까진 아니었지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긴 했다.
“방송으로 나간 건 촬영할 때 고생했던 거의 한…… 3분의 1? 그 정도밖에 안 나갔어.”
“진짜로?”
“어. 그때 채미는 너무 힘들어서 훈련받던 중간에 울기도 하고 그랬거든.”
출연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운동선수 출신으로 참가했던 최혜종 역시 나중에 가서는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칠 정도였다.
그만큼 많이 힘들고 빡셌던 촬영이었다.
“그래도 많은 분들이 재미있게 봐주시고 그래서 난 만족해.”
덕분에 이연이라는 존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으니까.
그녀 입장에선 대성공이라 할 수 있다.
군대 예능 촬영에 대한 이야기 말고도 다른 질문도 있었다.
“유키는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얼마나 했었어?”
“방송 활동은 안 했고. 오디션만 몇 번 봤었어.”
즉답하는 유키를 향해 김용진이 ‘내 통역은 아예 필요 없나 보구나’라고 말을 흐리면서 멘트 칠 기회를 놓친 아쉬움을 토로했다.
김용진의 말에 신경도 안 쓰는 모양인지, 샌디는 곧장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아니, 질문이 아니라 요청이었다.
“그럼 혹시 일본에서 유행했던 애교 대사 같은 거 한번 해줄 수 있어? 이연도 같이.”
“나…… 도?”
촬영을 진행하면서 이연은 처음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연은 애교가 어렵다.
그야 당연하다. 남자였을 때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애교를 부려본 적이 없었으니까.
심지어 애교부리는 배역조차 맡아본 기억이 없었다.
한편, 질문을 받은 유키는 어떤 대사가 있었나 하고 생각에 잠기던 도중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나타노 하토니 니코니코니, 이거라도 할까? 연이 언니…… 아니, 연이는 어때?”
이 위기를 어떻게 넘길까.
마침 이연의 눈앞에 어떤 인물이 유독 강조되어 보였다.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타이밍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는 남자.
“용진이가 하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이연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애교 대사를 토스했다.
샌디는 귀여운 이연의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했지만, 그래도 김용진에게도 기회는 줘야 한다는 생각에는 동의했다.
통역가로 나오긴 했지만, 넓게 보면 김용진도 게스트니까.
“알았어. 그러면 용진이가 해봐.”
“진짜로 하라고?”
설마 애교 대사가 돌고 돌아 본인에게 넘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확실히 자신이 하면 웃길 거 같았기에 시도는 해보기로 했다.
“아나타노 하토니 니코니코니♡”
양손으로 하트까지 그려가면서 애교 대사를 펼치는 김용진.
그러나.
현장 분위기는 한파 그 자체였다.
샌디가 얼음장 같은 차가운 표정으로 PD에게 말했다.
“이거, 편집해 줘.”
김용진에게 있어서 오늘은 뭘 해도 안 되는 날이었다.
* * *
숏토크를 포함해서 미리 잡혀 있던 일정들을 거의 모두 소화한 하니엘 멤버들.
이제 앨범 활동 기간에 잡힌 마지막 방송 일정만을 남겨두게 되었다.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을 회사로 집합시켰다.
“내일, 우리 ‘스타데이’ 미팅 있는 거 알지?”
“네.”
멤버들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이 대답했다.
‘스타데이’라는 글자를 화이트보드 판에 큼지막하게 적어둔 박도수 매니저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아주 간단하게 설명했다.
“다들 알겠지만, ‘스타데이’는 관찰 예능이야. 이틀 동안 숙소 내에 카메라들이 잔뜩 설치될 예정이니까 항상 촬영 중이라는 거 염두에 둬야 해. 알았지? 특히 유키는 더 조심하고.”
합을 맞춰 고개를 끄덕이는 멤버들.
이제 이 마지막 프로그램만 넘기면.
그다음부터는 달콤한 휴식기가 찾아올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