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제39화. 군필 아이돌(7)
이틀 차 훈련이 모두 종료되자마자 이연은 빠른 속도로 샤워실로 향했다.
군대에서는 항상 전우조로 움직여야 했기에 이연은 어쩔 수 없이 출연자들 사이에서 가장 가까운 관계인 시우를 데리고 와야 했다.
쏴아아―
따스한 온수가 오늘 하루의 피로를 싹 날려 버리듯 이연의 몸을 감쌌다.
수건으로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낼 무렵, 비슷한 타이밍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우가 머리를 말리면서 물었다.
“언니. 대항군들 있는 위치는 어떻게 안 거예요?”
마법으로…… 라고 말을 하려다가 도중에 꾹 삼켰다.
“아래쪽을 슬쩍 내려다봤는데, 빨간색 머리띠가 희미하게 보이더라고. 그래서 알아차렸지.”
“거리가 엄청 멀었는데. 그게 보여요?”
“난 시력이 좋거든.”
시우는 이연의 몰랐던 신체 능력 하나를 새로 알게 되었다.
두 사람 다 머리카락이 긴 편이다 보니 말리는 데에도 한세월이었다.
당연하게도 군대에서는 드라이기가 없다. 다들 머리가 짧다 보니 수건으로 훌훌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
그녀들이 사용하는 드라이기는 개별적으로 가져온 거였기에 샤워실을 나설 때에도 잊지 말고 챙겨야 했다.
다시 활동복을 입고 샤워실을 나오려고 하던 찰나에 먼발치에서 그녀들과 마주친 병사들이 비명 같은 환호를 질렀다.
“미친……! 진짜 하니엘이잖아!”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김준학 상병님!”
“방송으로 볼 때보다 실물이 수백 배 예쁘네.”
군대에서 하니엘의 인기는 가히 하늘을 찌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SSS가 군인들이 가장 많이 본 프로그램 순위에 오를 정도였으니, 그녀들의 인기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이연과 시우가 있다는 말에 근처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군인들의 너무나도 뜨거운 기세에 놀란 모양인지, 시우의 작은 어깨가 잠깐 움찔했다.
그럼에도 팬서비스는 잊지 않은 모양인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면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연도 시우와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군인들에게 최대한 밝은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 이 상황은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다.
‘근무 중 이상 무’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병사들은 절대로 출연진에게 접근하지 말라는 간부들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연과 시우는 가벼운 팬서비스 같은 건 크게 상관은 없었지만, 정작 병사들이 문제다.
간부의 명령을 어긴 셈이 될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되면 처벌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연이 최대한 좋게 타이르려고 할 때였다.
“니들, 지금 뭐 하고 있냐.”
정우재가 목소리를 낮게 깔며 병사들에게 대놓고 물었다.
최고선임의 등장에 병사들은 순간 얼어붙었다.
“그게 말입니다, 정우재 병장님…….”
“이, 이건…….”
“포대장님하고 행보관님이 분명 말씀하셨을 텐데. 촬영 끝나기 전까지 이쪽 복도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정우재의 말대로 병사들의 생활 구역과 출연자들의 활동 공간을 표기해서 붙여놓은 표식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근무 중 이상 무’ 출연자들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안내선을 넘어 이동하진 않았었다.
촬영 무사히 잘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뒷말이라도 나오면 좀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요인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지킬 건 다 지키면서 촬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우재가 나선 거였다.
“다섯 셀 동안 안 물러서면, 니들 전부 군기교육대 보내버린다. 하나, 둘…….”
정우재의 손가락이 하나씩 접히기 시작하자, 병사들은 부리나케 장소를 떴다.
그 많던 병사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한숨을 깊게 내쉰 정우재가 이연과 시우에게 다가가 사과했다.
“미안. 우리 애들 중에서 하니엘 팬들이 제일 많거든. 다들 평소에는 말 잘 듣고 착한 녀석들이니까 너희가 이해해 줘.”
이연과 시우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방금 전에 보여준 정우재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근데 선배님이 여기 부대에서 제일 선배이신 거예요?”
“포대 왕고 말하는 거지? 그 정도까진 아니고. 나보다 선임인 사람은 이제 딱 두 명 남았는데, 둘 다 지금은 말년휴가 가고 없어서 남아 있는 사람들 중에는 내가 왕고이긴 하지.”
“우와! 어쩐지, 아까 병사분들이 선배님 말씀에 꼼짝을 못 하시더라고요. 멋있으셨어요.”
시우의 말에 정우재는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조교, 교육생 관계지만. 카메라 밖에서는 연예계 선후배로 지금처럼 서로 살갑게 대화하곤 했다.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에 정우재가 이연의 활약상에 대해 말했다.
“아까 교관님하고 제작진이 회의하는 거 슬쩍 들어봤는데. 너희가 대항군 잡는 거, 편집 잘해주실 거 같더라. 괜찮은 장면이 많이 나왔대.”
“다행이네요.”
이연이 오대기와 함께 작전에 나서기를 지원했던 이유는 원래 분량 챙기기였다.
그런데 하다 보니까 자신도 모르게 과몰입을 해버린 탓에 마법까지 써가면서 대항군 둘을 잡는 데에 혈안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방송인데. 너무 진지했던 거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정우재의 염탐 덕분에 이 고민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이연이 많이 활약한 만큼, 이번 편에서 그녀의 비중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우재가 농담으로 말했다.
“나중에 전역하면 이연이한테 방송 배워야겠더라.”
“그 정도까지는 아니에요, 선배님.”
아직 이연도 방송에 적응해가는 단계다.
그래도 전생 때부터 해오던 짬이 있으니까.
신인이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방송에 적응하고 있는 중이었다.
슬슬 생활관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찰나에, 정우재가 두 사람에게 하나 더 물었다.
“유하 누나는 아직도 나한테 화 많이 나 있어?”
조교 콘셉트에 충실하다 보니까 의도치 않게 장유하에게 쓴소리를 여러 번 들려줬던 정우재.
그게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이연이 들려준 대답은 이러했다.
“전역하고 복귀하시면, 장유하 선배님한테 한동안 잘해주셔야 될 거 같은데요.”
이 말을 듣자마자 정우재는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기로 결심했다.
* * *
둘째 날이 지나고.
드디어 촬영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출연자들은 처음 촬영에 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2박 3일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었다.
그러나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도 간다.
유독 길게 느껴졌던 2박 3일의 군대 예능 촬영도 퇴소식이라는 마지막 관문만 남게 되었다.
퇴소 신고를 하기 위해 출연자들이 일렬로 나란히 줄을 섰다.
입소식 때와 마찬가지로 이연이 교육생들을 대표해서 맨 앞줄에 섰다.
“부대 차렷!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처음에 비해서 많이 군인다워진 교육생들을 보며 대대장은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105번 교육생 권이연 외 5명은 2022년 11월 25일부로 2박 3일간의 훈련을 마치고 퇴소를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입소식도 그렇고, 퇴소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연은 단 한 번의 말더듬 없이 완벽하게 보고를 마쳤다.
대대장은 가장 먼저 이연에게 다가가 고생했다는 말을 전했다.
“여자들이 받기에 힘든 훈련들투성이었을 텐데. 분대장으로서 늘 앞에 서고 적극적으로 훈련에 임해줘서 고맙습니다. 2박 3일 동안 보여준 여러분들의 열정과 노력은 대대장을 포함해서 여기에 있는 교관, 조교들도 절대로 잊지 않을 겁니다. 고생 많았습니다.”
대대장의 말을 들으면서 그간 고생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한꺼번에 지나갔다.
벌써부터 눈물을 훔치는 교육생이 있을 정도였다.
이연의 마지막 거수경례와 함께 퇴소식이 마무리되고. 공식 촬영 역시 끝을 맺게 되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장유하가 정우재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찌릿.
매섭게 노려보는 그녀의 눈총이 오늘따라 굉장히 따가웠다.
“누나. 사실은 말이죠…….”
정우재가 미안하다고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장유하가 손을 뻗어 정우재를 와락 안아줬다.
“고생 많았어, 우재야. 오랜만에 봐서 너무 좋았고…….”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고개를 푹 숙인 채 후배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에 정우재도 조용히 그녀를 안아줬다.
각 교육생들도 교관, 조교들과 눈물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하니엘 멤버들 중에서 가장 감정적인 동요가 적은 편에 속하는 시우조차도 눈시울을 붉힐 정도였다.
이별에 슬퍼하는 출연자들과 다르게, 이연은 끝까지 웃는 모습으로 일관했다.
교관이 이연에게 먼저 다가갔다.
“이연 씨 훈련받는 모습 볼 때마다 저도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다른 간부들은 이연 씨가 여군 준비하려고 하다가 아이돌 된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더라고요.”
준비하다가 관둔 게 아니다.
이래 봬도 이미 입대에 만기 전역까지 하고 온 몸이다.
물론 교관이 이걸 알 리 없다.
그래서 이연은 대충 말을 맞춰주기로 했다.
“모니터링을 열심히 해서 그런가 봐요.”
모니터링만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연이 직접 이렇게 말을 하니까. 교관 입장에선 그러려니 하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군복을 벗은 그녀들.
평소에는 딱 달라붙는 스키니 바지가 하반신을 늘 압박해서 불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군복 입었다가 이거 입으니까 잠옷인 줄 알았네.’
너무 편했다.
역시 군인보다는 아이돌이 낫다.
* * *
2박 3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멤버들이 이연과 시우를 격하게 맞이해 줬다.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박도수 매니저가 이연, 시우를 대신해서 멤버들의 이런 걱정들을 단번에 불식시켜줬다.
“가서 연이하고 시우가 하드캐리하고 왔으니까 나중에 본 방송 나오면 다 같이 모여서 한번 보자.”
“그래요?”
“그날은 무조건 스케줄 비워둬야겠네요.”
박도수 매니저는 멤버들에게 꼭 봐야 한다고 몇 차례나 더 강조했다.
“얼마나 잘했냐면, PD님이 다음에 여군 특집 녹화할 때 우리를 또 부르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니까? 그때는 다른 멤버들도 데리고 나와 달라고 하는데. 너희는 어때? 좋지?”
“…….”
“…….”
“…….”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연과 시우가 복귀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었는데.
갑자기 숙소 내 공기가 싸해졌다.
여솜이 손뼉을 가볍게 한 차례 마주치면서 벌떡 일어섰다.
“마, 맞다. 나, 오늘 트레이너 선생님한테 PT 받기로 한 날인데.”
“나도! 같이 갈래.”
리샤가 허겁지겁 여솜을 따라나섰다.
비아하고 유키도 내일 자기들이 출연할 프로그램 모니터링하러 가야 한다면서 은근슬쩍 각자의 방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우미조차도 갑자기 친구한테 전화하기로 했던 거 깜빡했다면서 급하게 자리를 비웠다.
순식간에 사라진 다섯 멤버들을 바라보면서 박도수 매니저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혹시 내가 말하면 안 될 걸 말해버렸나?”
이연과 시우가 딱 잘라 대답했다.
“네.”
“정확하게 아시네요.”
당분간 숙소에서 군대라는 단어는 금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