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제39화. 군필 아이돌(6)
맹렬하게 울려대는 사이렌 소리가 출연자들에게 강한 혼선을 주기 시작했다.
사전에 제작진한테서 들은 게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지금 이게 훈련인지 실제 상황인지조차 헷갈려했다.
처음에는 이연도 다른 출연자들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주성원 PD의 얼굴 표정을 보고서 확신했다.
‘훈련이네.’
아무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제 상황이 걸렸는데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처음에는 출연자고 스태프고 무조건 당황하는 게 맞다.
인간은 예상을 뛰어넘는 일이 갑작스레 벌어지면 당황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제작진은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사이렌 소리를 신호로 삼아 급하게 이동하여 촬영할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교관이 출연자들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오대기 비상이 걸렸으니 2명만 오대기와 같이 출동하고, 나머지 교육생들은 포상으로 가서 즉각사격준비태세 확립하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
“네! 아, 알겠습니다!”
출연자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했다.
이제 여기서 오대기 대원들과 같이 출동해야 할 2명을 골라야 한다.
교관이 먼저 지원자를 받겠다고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105번 교육생 권이연. 제가 가겠습니다.”
단독군장 차림으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야 하는 일인데도 먼저 지원을 했다는 게 신기했다.
이연의 용기가 가상하게 보였는지, 교관은 그녀의 지원을 흔쾌히 수락하기로 했다.
마지막 남은 한 자리.
이연이 시우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언니하고 같이 가자.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시우는 이연이 자신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SSS를 통해서 시우는 이연에 대해 하나 깨달은 게 있었다.
그녀의 행동에는 무의미했던 게 단 한 개도 없었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나중에 알고 보면 전부 다 유의미한 결과로 이어졌다.
파이널 라운드에 진출하고 나서부터 비교적 늦게 이연과 함께 그룹을 짜서 행동했던 시우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 그룹의 리더를 믿어보자.
시우의 손이 위로 향했다.
“106번 교육생 연시우! 저도 지원하겠습니다!”
교관은 지원자가 아예 없을 줄 알았었다.
그런데 두 명이나 나오니, 누구를 데리고 가면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럼 105번 교육생하고 106번 교육생은 본 교관 따라서 이동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머지는 조교 통제하에 즉각사격준비태세 들어갑니다. 실시!”
“실시!”
그렇게 출연자들은 본의 아니게 두 팀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 * *
오분대기조, 줄여서 오대기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거수자가 출연할 경우, 혹은 이에 준하는 비상 상황이 발생했을 때 가장 먼저 투입되는 선발조라고 할 수 있다.
포대별로 소대원들과 운전병, 통신병까지. 여러 명의 오대기 소대원들이 상황을 하달받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교관이 P96K를 통해 각 오대기 소대장들에게 상황을 전달했다.
“대항군으로 추정되는 거수자 2명 출연. 발견하는 즉시 생포하도록. 수신 양호한지.”
-알파 양호.
-브라보 양호.
-찰리 양호.
이연과 시우는 교관이 이끄는 본부포대 인원들과 함께 부대 뒤쪽에 위치한 산으로 향했다.
단독군장 차림에 발을 압박하는 가죽 전투화, 그리고 편의성이라고는 1도 없는 군복까지.
이 모든 것들이 교육생들을 지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이연의 말에 넘어가 오대기와 함께 하게 된 시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언니의 뒤를 따랐다.
반면, 이연은 지친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교관에게 질문을 던지는 여유까지 보였다.
“대항군 2명을 잡으면 상황은 종료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카메라 감독이 이연과 교관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집중 조명했다.
순간 카메라 감독은 이연의 눈빛이 아주 잠깐 변한 것을 봤다.
이연이 미리 챙겨 온 포승줄을 가리키며 추가로 물었다.
“이걸로 대항군을 포박하면 됩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그건…….”
현역병들한테도 어려운 일이다.
훈련 도중에 대항군을 전부 다 사로잡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성공하는 사례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오대기 소대원들의 실력이 정말로 출중해서 대항군을 붙잡는 경우.
그리고 두 번째는 오대기 소대장하고 대항군을 연기하는 간부, 병사가 서로 친한 사이일 때.
후자의 경우에는 일부러 도와주기 위해서 ‘알아서 잡아가세요’라고 투항해 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 훈련은 방송에 나가게 될 예정이기 때문에 봐주면 절대로 안 된다.
고개를 끄덕인 이연은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겨우 이연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시우가 조용히 물었다.
“언니, 뭐 하고 계세요?”
“찾고 있어.”
“네? 뭐를요?”
이연이 다시 눈을 뜨면서 말했다.
“대항군.”
그러더니 빠른 속도로 아래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돌발 행동에 시우와 교관이 크게 당황했다.
“교, 교육생! 어디 가는 겁니까!”
카메라를 들고 웬만한 험지는 다 다녀본 카메라 감독조차 이연을 따라잡기 버거울 정도였다.
산언저리까지 뛰어내리다시피 한 이연은 금세 두 명의 대항군과 마주하게 되었다.
“……!”
“어, 어떻게 여기를…….”
대항군들이 역으로 당황해버렸다.
그들의 의도는 이러했다.
오대기 소대원들을 산으로 끌어들인 뒤, 몰래 부대로 잠입해서 지통실이나 포대상황실을 점거한다.
그러면 대항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가 될 것이다.
포병 부대의 기능 상실이 대항군의 가장 큰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설마.
이렇게 빨리 자신들을 찾아내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도 교관도, 조교도, 오대기 소대원들도 아닌 교육생이.
“어, 어떻게 합니까, 소대장님?”
대항군 역할을 맡게 된 병사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는 간부에게 물었다.
빨간색 머리띠를 두르고 있던 소위는 곧장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일단 후퇴한다.”
“예, 알겠습니다.”
상대는 가녀린 여성 혼자다. 마음만 먹으면 이 둘이 제압할 수 있겠지만, 시간은 대항군들의 편이 아니다.
이런 걸로 시간을 끌어봤자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맞서 싸우는 것보다 도주를 택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이연이 아니다.
바람 계열의 마법을 사용해서 바닥에 깔려 있는 흙바닥으로 먼지구름을 일으켰다.
“우왓!”
“갑자기 웬 바람이…….”
이들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시킨 이연은 가장 먼저 병사를 노렸다.
병사의 뒤로 돌아가 다리를 걸어 앞으로 고꾸라뜨렸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당해버린 병사가 빠르게 일어나 반격하려고 했지만.
“모, 몸이 왜 이렇게 무거워……!”
아무리 이연이 그를 깔아뭉개고 있다 하더라도 그녀의 몸무게는 얼마 나가지 않는다.
병사가 아예 몸을 못 움직일 정도까진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항군 병사는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이연이 중력을 강화시키는 마법을 걸어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시우가 카메라 감독, 그리고 몇몇 스태프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했다.
“언니!”
“잘됐네. 와서 네가 포승줄로 손 좀 묶고 있어봐. 어떻게 묶는지는 아까 교육받으면서 배웠지? 그대로만 하면 돼.”
“네? 저, 저 혼자서요?”
스태프들은 도와줄 수 없다. 왜냐하면 카메라 뒤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앞에 나설 때에는 카메라가 꺼진 경우밖에 없다.
“제가 하면 저분, 금방 일어나실 거 같은데…….”
시우는 이연처럼 근력이 센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연은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시우에게 두터운 포승줄 다발을 넘겼다.
“괜찮아. 5분 안에만 포박하면 돼.”
“왜 하필 5분이에요?”
“그런 게 있어.”
중력 마법을 그때쯤 해제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남은 대항군 쫓아가야 하니까. 잘 부탁할게.”
“자, 잠깐만요! 언니!”
말리기도 전에 이연은 빠른 속도로 도망친 대항군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시우는 교육받은 그대로 침착하게 포승줄을 묶기 시작했다.
이연이 말한 대로, 남자는 전혀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력 마법 때문이라는 사실을 시우는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죄송해요. 조금만 실례할게요.”
시우가 엎드려 있는 병사 위로 올라타서 몸으로 제압한 뒤 포승줄을 묶기 시작했다.
이때 병사는 생각했다.
이런 플레이(?)도 나쁘지 않을 거 같다고.
* * *
도망친 대항군 소위는 숨을 헐떡이면서 그대로 나무 기둥을 등받이 삼아 주저앉았다.
“설마 거기서 이연 씨가 튀어나올 줄이야.”
예상도 못 했다.
그보다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했다.
그녀에게는 마법이라는 치트키가 있음을 모르는 이상, 소위는 평생 자신들의 위치가 들킨 이유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지금도 방심해선 안 됐다.
쿵! 소리가 나더니, 바로 앞에 이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위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으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신출귀몰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이쯤 됐으니 소위는 그냥 얌전히 이연에게 잡혀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얌전히’라는 걸 고려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소위의 왼팔을 붙잡더니 그대로 자신을 엎어치기 해버렸다.
어? 하는 사이에 소위의 눈앞 세상이 한 바퀴를 빙글 돌았다.
병사들이 벌목 작업을 위해 쌓아둔 나뭇가지 위에 그대로 엎어진 소위.
이연은 소위의 팔을 뒤로 꺾어서 남은 포승줄 하나를 이용해 완전히 포박하는 데에 성공했다.
교관과 다른 카메라맨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이연이 남은 대항군을 잡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10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교관의 통제도 없이 순식간에 대항군 두 명을 잡아내 버린 여군들.
교관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를 대신해서 이연이 상황을 보고했다.
“신원불명의 거수자 두 명, 현 시간부로 전원 생포했습니다.”
“어, 그게…… 자, 잘했습니다. 잘했는데.”
교관이 약간의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너무 빨리 잡았습니다.”
단계별로 대응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주성원 PD 측하고 열심히 준비한 훈련 이벤트였는데.
이번에 참여한 교육생이 너무 뛰어난 탓에 상황이 금방 종료되고 말았다.
* * *
오후 훈련이 모두 종료된 뒤.
주성원 PD는 교관과 함께 오대기를 따라나섰던 카메라 감독들이 확보한 영상을 모니터링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순식간에 두 명의 대항군을 제압한 이연의 활약상을 지켜보던 교관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PD님. 이럴 줄 알았더라면 대항군을 더 투입시킬 걸 그랬네요.”
출연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황하는 장면을 만들고 싶어서 이런 계획을 꾸민 거였는데.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주성원 PD는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괜찮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편집 방향을 다르게 잡으면 되니까요.”
“어떻게요?”
곤란해하는 여군들의 모습을 카메라로 담으려던 계획은 단념하기로 하고.
“이연 씨가 맹활약하는 장면들을 중점으로 내보내면 되니까요.”
제작진이 영상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그 출연자를 빌런으로, 혹은 영웅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
주성원 PD가 택한 쪽은 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