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제39화. 군필 아이돌(5)
저녁 식사까지 마치곤 난 다음에 주어진 개인 정비 시간.
고된 훈련 끝에 맞이하는 자유 시간이어서 그런지, 출연진은 지금 이 시간이 그 어느 때보다도 달콤했다.
정우재의 안내를 받으면서 휴게실을 찾은 출연자들은 크게 놀랐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위적인 액션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놀라움이었다.
“휴게실이 엄청 잘 꾸며져 있네.”
“언니들, 저기 보세요. 저쪽에 코인 노래방도 있어요!”
“우와…… 어디 테마 파크 놀러온 거 같아.”
반면, 이연은 잘 조성되어 있는 병사 휴게실을 보면서 출연자들과 전혀 다른 생각을 품었다.
‘우리 온다고 얼마나 갈굼 당하면서 작업했을지 안 봐도 뻔하네.’
이연도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 때 군단장이 온다는 말을 듣고 일주일 내내 청소했던 기억이 났다.
그녀에게는 트라우마와도 같은 기억이라 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병사들의 현실이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방송을 타는 일이다 보니 사단장이 오는 것만큼 부대 관리에 더 신경을 썼을 것이다.
병사들의 이런 고충을 잘 알아서일까.
이연이 정우재에게만 몰래 말했다.
“고생 많이 하셨겠습니다.”
그 말에 정우재는 쓴 미소를 지었다.
한편으로는 이연이 병사들의 숨은 고충을 알고 있다는 게 놀랍기도 했다.
훈련 받을 때와 더불어서 묘하게 센스 있는 모습까지.
정우재는 이연을 볼 때마다 군필의 향수가 너무 진하게 느껴졌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정우재도 잘 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느껴지는 걸 어떻게 할까.
이연의 숨겨진 속사정을 전혀 모르다 보니까 궁금증과 함께 대놓고 이연에게 물어보고 싶은 답답한 마음도 커졌다.
그러나 그는 조교다.
조교인 이상, 교육생들 앞에서는 늘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에는 뭐……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다른 경우에는 조교로서의 위엄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휴게실은 마음껏 사용하되, 개인 정비 시간에만 이용이 가능하다는 걸 늘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지만, 흡연은 절대 금지입니다.”
흡연 이야기가 나오자, 조인혜가 갑자기 발끈했다.
“담배 이야기는 왜 꺼냅니까!”
항의하듯 쏘아붙이는 그녀의 모습에 장유하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인혜야. 너, 아직도 담배 피우니? 저번에 나하고 같이 라디오 녹음하러 갔을 때에는 끊었다고 했으면서.”
“아, 아니에요, 선배님. 그게 아니라…… 정우재, 넌 나중에 보자.”
바득바득 이를 가는 조인혜를 보면서 정우재의 얼굴에는 어느새 장난기가 가득 담긴 미소 꽃이 피어올랐다.
이연은 이런 정우재를 보면서 몰랐던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다.
‘말수 별로 없고 무뚝뚝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친한 사람한테는 장난도 곧잘 치는 성격인 듯해 보였다.
아직 이연에게 이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두 사람의 거리가 좀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이건 나중에 시간이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이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만약에 선배님하고 친한 사이였다면, 제작진이 이후에 또 무슨 계획을 꾸미고 있을지 슬쩍 정보 좀 흘려달라고 물어볼 수 있을 텐데.’
이연이 ‘근무 중 이상 무’ 출연을 할 때 들었던 정보는 딱 하나. 어느 부대에서 며칠 동안 촬영할지에 대한 것뿐이었다.
‘어떻게’라는 말은 없었다.
그냥 교관, 조교가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답답하다.
미리 알고 있어야 대처도 가능할 텐데.
어쩌면 출연자들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기 위한 것이 제작진의 노림수일지도 모른다.
이연은 성격상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든 잘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고 싶다.
그래서 ‘아이쇼’에 출연했을 당시, 벌레 비스름한 게 상자에 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정답을 맞히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거였다.
카메라 앞에서는 항상 자신감 있게, 당당하게.
이것이 방송에 임하는 이연의 마음가짐이다.
물론 아주아주 가끔씩 귀여운 모습이 나올 때가 있지만, 그건 결코 이연이 먼저 의도한 게 아니다.
지난번처럼 이연이 극혐하는 약점 요소가 나오는 경우는 어쩔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이곳 막사도 불안하다.
요즘 지어진 신막사라고는 하지만, 산이 바로 뒤에 있고.
그래서 언제 벌레가 막사 안으로 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사람들 몰래 생활관에 해충 퇴치 마법진이라도 새겨둬야겠어.’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똑같은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 * *
저녁 점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연은 개인 정비 시간에 하기로 했던 해충 퇴치 전용 마법진을 창문, 그리고 생활관 문 아래에 몰래 새겨 넣었다.
생활관 내에 관찰용 무인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신중하게 작업은 하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효과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군복을 입은 이연이 생활관 한가운데에 서서 교관을 기다렸다.
잠시 뒤.
교관이 나타나자마자 이연은 처음 이곳에 입소할 당시 보여준 칼 같은 거수경례를 선보였다.
“충성! 11생활관 저녁점호 인원 보고. 총원 여섯. 열외 무. 현재 인원 여섯. 번호!”
이연의 외침에 따라 교육생들이 돌아가면서 번호를 외쳤다.
인원수대로 모두 다 있음을 확인하자마자 이연이 다시 한번 목소리를 높였다.
“점호 준비 끝!”
“쉬어.”
“쉬어!”
교관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교육생들은 다시 편안한 자세로 돌아오게 되었다.
정우재가 이연에게 저녁점호 인원 보고는 어떻게 하는지 알려주긴 했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보고자 역할을 소화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교관도 속으로 크게 놀랐다.
이연의 활약상을 접하면 접할수록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활관 책임자가 인원 보고를 잘한 덕분인지, 교관은 생각만큼 빡세게 점호를 진행하진 않았다.
침대나 침낭, 그리고 전투화와 활동화, 슬리퍼, 군장과 더플백 등등.
모든 것들이 다 각이 제대로 잡혀 있었다.
현역 병사들보다도 더.
이렇다 보니 교관 입장에선 할 말이 없었다.
교육생들이 우수한 태도를 보이면 교관 입장에선 좋아해야 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관은 고개를 한 차례 갸우뚱하면서 애매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연은 이런 교관의 모습이 굉장히 신경 쓰였다.
‘뭐지?’
혹시 이연이 뭔가 잘못한 게 있나?
그건 아니었다.
“현재 시간 21시 45분. 저녁점호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정확히 22시에 취침 취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의 하루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럼에도 이연은 멀어져 가는 교관과 조교의 뒷모습을 몰래 훔쳐보면서 아까 문득 들었던 의구심을 다시 떠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성원 PD와 작가 몇 명이 교관과 함께 행정반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궁금하긴 한데.
“연이 언니. 같이 화장실 가요.”
“응, 알았어.”
시우의 부름에 이연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재촉해야 했다.
* * *
‘근무 중 이상 무’ 제작진은 지금 비상사태가 걸렸다.
이유는 전혀 엉뚱한 곳에 있었다.
“이연 씨가 너무 잘하는데요?”
주성원 PD의 말에 교관과 조교들은 공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오전, 오후 내내 촬영을 하면서 주성원 PD는 훈련 내내 하드캐리하는 이연을 보면서 때아닌 위기감을 느꼈다.
제작진이 바랐던 것은 여성 출연자들이 교관, 조교의 한마디 한마디에 당황해하는 모습들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연출이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연이 분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뭔가 사건이 터질 것 같으면서도 이연이 적절한 타이밍에 나서서 커트를 하는 느낌이었다.
교관이 자신의 생각을 툭 까놓고 말했다.
“이연 씨는 제가 봤을 땐, 웬만한 현역 병사들보다도 더 훈련 잘 받습니다. 같이 훈련 뛰어본 저희 병사들도 그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는 말이 현실로 가능한 일일 줄은 전혀 몰랐다.
이럴 때에는 다 방법이 있다.
“교관님.”
“네.”
“혹시 이건 어떨까요?”
창과 방패의 대결.
이연이라는 이름의 방패를 뚫기 위해서 주성원 PD가 교관과 함께 창 끝을 좀 더 날카롭게 가다듬기로 했다.
* * *
입소한 지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훈련도 힘들긴 하지만, 군대에서 병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게 바로 새벽 기상이다.
그러나 이건 의외로 출연자들에게는 그렇게까지 큰 시련은 아니었다.
각각 배우로,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하고 있다 보니 새벽에 일어나는 일에는 충분히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다.
단지 낯선 환경에서 현역들과 함께 몸을 굴리는 훈련을 받다 보니 평소보다 몸이 더 무겁게 느껴질 뿐.
그것 말고는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아침점호는 저녁점호와 다르게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진행된다.
이번에도 이연이 인원 보고를 맡아서 진행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인원 보고를 마친 이연.
교관이 교육생들을 향해 외쳤다.
“전체 뒤로 돌앗!”
어제 한창 제식 훈련을 받은 덕분에 출연자들은 나름 깔끔한 턴을 선보였다.
“전방을 향해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아아아아악―!”
함성인지, 아니면 살려달라고 외치는 비명 소리인지 분간이 안 가는 여성들의 외침이 산골짜기 전체에 메아리쳤다.
어설프게나마 우리의 결의를 복명복창하고. 국군 도수체조를 따라 하고.
그리고 병사들이 가장 싫어하는 아침 행사인 구보도 뛰었다.
인솔자 위치에 선 정우재 조교가 군복과 전투화를 걸치고서 힘든 구보를 이어가고 있는 여성 출연자들을 향해 외쳤다.
“왼발, 왼발, 왼발! 이동 중에 노래한다.”
원래는 군가인데.
출연자들에게 군가를 알려주지 않은 상태였기에 정우재는 일반 노래를 시키기로 했다.
“노래는 ‘HUG’. 노래 시작. 하나, 둘, 삼, 넷!”
“HUG?”
“그거를 지금 어떻게 부릅니까!”
이연과 시우가 속한 하니엘의 노래를 구보 중에 부르라고 하니 출연자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조교가 시킨 거니까.
이연이 먼저 선창을 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이연 입장에서는 정우재가 고마웠다.
자신들의 곡을 홍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말이다.
하니엘의 노래 말고도 윤채미가 속한 원더존의 첫 번째 앨범 타이틀곡인 ‘World’도 추가로 시켰다.
그렇게 아이돌 노래 2곡을 완창한 끝에 겨우 아침점호를 마친 출연자들.
식사를 하고 다시 단독 군장 차림으로 대대 연병장으로 향했다.
출연자들은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비슷한 훈련이 이어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에에에에엥!
“오대기 비상!”
“오대기 비사앙!!!”
사이렌 소리와 함께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뭐, 뭐야?”
“이거 실제 상황이야?”
“저, 전쟁이라도 난 건 아니겠지? 응?”
상황이 긴박하게 흘러가자 교육생들이 크게 당황했다.
이와 다르게 주성원 PD는 옅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어제 교관과 이야기했던 그대로 판이 깔리기 시작한 거였다.
하지만 막판에 그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웃는 모습을 이연에게 들키고 말았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