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140화 (140/299)

140화

제39화. 군필 아이돌(4)

정우재를 보자마자 윤채미는 짧은 비명을 지르면서 황급히 화장실 밖으로 도망치듯 나갔다.

반면, 이연은 도망 이전에 군인으로서 해야 할 행동부터 먼저 펼쳤다.

바로 거수경례다.

“충성.”

“…….”

침착한 이연의 모습 덕분에 오히려 정우재가 당황하고 말았다.

이연의 거수경례를 받아주기 위해서 물에 흥건하게 젖은 손으로 얼렁뚱땅 상호 간의 경례를 선보인 정우재.

출연자들에게 간부와 교관, 조교와 마주치면 항상 거수경례로 인사해야 한다고 교육시키긴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착실하게 알려준 걸 실천할 줄은 몰랐다.

차라리 채미처럼 비명과 함께 복도로 나가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정우재의 머릿속을 스쳤다.

“여자 화장실인 줄 알고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그럴 수 있지. 시, 신경 쓰지 마. 여자 화장실은…… 여기 복도 반대편으로 가면 작은 화장실이 하나 더 있거든? 그쪽으로 가면 될 거야.”

“감사합니다. 충성.”

“추, 충성.”

“그리고 조교님.”

이연의 시선이 정우재의 얼굴과 가슴을 거쳐 아래쪽으로 향했다.

“실례되는 말입니다만, 바지 아래 열려 있습니다.”

남대문을 가리키는 거였다.

정우재는 황급히 손으로 민망한 부위를 가렸다.

할 말도 다 끝났으니.

이연은 미련 없이 뒤로 돌면서 복도로 향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지만, 정우재에게 있어선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끔찍한 순간이기도 했다.

* * *

다시 연병장으로 모인 출연자들은 교관, 그리고 조교들과 함께 155㎜ 견인곡사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교관이 직접 설명을 들려줬다.

“포가 들어가 있는 이 언덕 지형을 통틀어서 ‘포상’이라 부릅니다. 적포탄 공격을 어느 정도 방어하면서 동시에 위장 효과도 가지고 있습니다. 상황이 걸리면, 포병들은 1순위로 막사에서 바로 뛰어나와 이곳으로 향해서 즉각사격준비태세를 확립합니다. 이것이 우리 포병들이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박도수 매니저에게 들은 그대로였다.

포를 방열되어 있는 포를 살펴보면서 이연은 과거에 봤던 마법 경기를 떠올렸다.

‘이것하고 비슷하게 생긴 무기가 있었는데.’

단지 차이가 있다면 그건 마력으로 구동되는 거고, 이것은 장약이라는 화약 추진제를 사용한다.

인터넷에서 여러 번 보긴 했었지만, 실제로 접해보니 이연은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사이, 설명을 마친 교관이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혹시 질문 있나.”

전부 다 생소한 용어들이었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물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교관도 초반부터 질문이 들어올 거라고는 기대 안 했던 모양인지, 다음 내용으로 바로 넘어가려고 했었다.

이때, 이연이 자신의 관등 성명을 외치면서 손을 들었다.

“105번 교육생 권이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방금 탄 종류가 여러 개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그 종류에 따라서 사용되는 장약도 달라집니까?”

교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답이다. 고폭탄과 조명탄, 백린연막탄 등 포탄에 맞춰서 장약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보통은 7호를 사용하는 편이지.”

설명을 들으면서 이연은 속으로 아까 떠올린 마법 병기에 대해 생각했다.

그 마법 병기 역시 마력 주입양에 따라 화력이 달라진다.

비슷한 면이 있어서 그런 건지 이연의 호기심은 죽지 않고 계속해서 타올랐다.

“뇌관, 신관 구조에 대한 것도 알고 싶습니다.”

원래 가르치는 입장에서 열의를 보이는 학생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신이 나는 법이다.

말문이 트인 교관은 교육생들을 위해서…… 아니, 이연을 위해서 자신이 아는 지식들을 하나하나씩 풀어내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교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교육생들 태도가 훌륭하니, 본 교관도 기분이 좋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교관의 칭찬.

장유하가 몰래 이연에게 윙크를 했다.

“잘했어, 이연아. 혹시 이걸 예상해서 일부러 의도한 거야?”

그럴 리가 있나.

그냥 자신이 봤었던 마법 병기하고 비슷하면서도 다른 듯한 원리가 신경이 쓰여서 이것저것 물어본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이연이 교관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관련 질문들을 쏟아낸 줄 알았다.

얻어걸린 셈이었지만.

“네, 물론이죠.”

그냥 자신의 작전이었던 것처럼 꾸미기로 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

이게 군대식 법칙이다.

* * *

설명도 끝났으니.

실제로 직접 방열 훈련을 해보기로 했다.

가신이라 불리는 철제 다리를 접고 난 뒤, 포차에 포를 걸고서 대대 연병장으로 향했다.

교관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아까 알려준대로 여기서 직접 방열을 해보겠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도와줄 테니까 천천히, 조심히 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다.

포병은 다쳐도 가벼운 수준이 아니라 최소 골절을 당할 정도로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만큼 훈련 자체가 굉장히 하드하다.

톤 단위로 나가는 포를 수평을 유지하면서 들고 있어야 했다.

그 뒤, 가신을 벌리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

이제 가신 발톱을 가신 끝에 연결하고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인원 분배가 잘못 되었는지, 이연 쪽 남자 병사들의 숫자가 부족했다.

가신 발톱의 무게만 80㎏에 달한다.

이걸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가슴 위치까지 들어 올려야 하는데, 병사들 숫자가 부족하다 보니 발톱을 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가신을 들고 있는 남자 병사들을 빼낼 수도 없다. 그러면 여자 출연자들만으로 포의 한쪽 무게를 온전히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칫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서 이연이 외쳤다.

“제가 가신 발톱 들겠습니다.”

“안 돼, 위험해!”

교관이 크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연은 할 수 있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반대쪽 가신 발톱 손잡이를 들었다.

맞은편에 서 있던 정우재와 시선을 마주친 이연.

나 한번 믿어달라는 그녀의 간절함이 통한 걸까.

정우재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제가 신호 주면, 그때 힘껏 들어 올리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네!”

“하나, 둘, 삼!”

포병들은 ‘하나둘셋’이 아닌 ‘하나둘삼’으로 표기한다.

그래서 정우재는 끝에 셋이 아닌 삼이라고 외쳤다.

그의 신호에 따라 이연은 너무나도 손쉽게 가신 발톱을 들어 올렸다.

정우재조차 ‘어?’ 하고 놀랄 정도였다.

남자 두 명이 들어도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의 무게인데.

여태껏 다른 사람들하고 수십 번 넘게 가신 발톱을 들어봤던 정우재지만, 이연과 같이 들을 때가 가장 편하다고 느껴졌다.

이연이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건 정우재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연의 저 가느다란 팔에서 이런 근력이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철컹! 소리와 함께 가신 발톱을 가신과 결합하고 난 이후에 포를 천천히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교관이 다가와서 이연의 상태를 살폈다.

“교육생, 괜찮습니까?”

“네. 멀쩡합니다.”

손바닥이 살짝 빨갛게 물든 것 빼고는 멀쩡했다.

그제야 교관도, PD도, 스태프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위험한 행동은 절대 금물입니다.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까진 없습니다. 충분히 잘했으니까.”

이연이 없었더라면, 병사들이나 참가자들이나. 다른 지원병이 올 때까지 계속해서 가신을 들고 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더 큰 사고가 벌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연의 빠른 판단과 행동력이 미연에 사고를 방지한 셈이니, 교관 입장에선 그녀만 탓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인원 분배를 잘못한 자신의 잘못도 있고 하니까.

테이프를 갈기 위해 잠시 촬영이 중단되었을 때, 출연자들이 이연에게 몰려들었다.

“연이 언니, 정말 괜찮아요?”

“응. 멀쩡해.”

“저 쇳덩이를 대체 어떻게 든 거야?”

“헬스할 때에도 쇳덩어리 들잖아요. 운동한다는 셈 치고 한 거니까요.”

물론 운동과 훈련은 엄연히 다르다.

PD도 혹시 몰라서 이연의 상태를 살폈지만, 교관이 확인했던 것처럼 그녀는 멀쩡해도 너무 멀쩡해 보였다.

“이연 씨, 이러다가 여기 부대에서 부사관 지원하라고 요청 들어오겠어요.”

현역들보다도 군대 시스템에 빨리 적응하고, 여성의 가장 취약한 약점이라 할 수 있는 근력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쯤 되면 특급감이다.

그러나 이연은 PD의 농담을 칼같이 거절했다.

“저는 무대 서는 게 더 좋아요.”

전생에 한번 입대해 봤으면 됐지, 재입대는 죽어도 싫다.

* * *

이연의 활약상 덕분에 훈련 겸 촬영이 무사히 종료되었다.

막사로 돌아온 그녀들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은 쉬는 게 아니었다.

위장크림 지우는 일이었다.

“너무 찝찝해!”

조인혜가 얼굴에 덕지덕지 발랐던 검갈녹색 위장크림을 거울로 확인하면서 새된 비명을 질렀다.

“얼굴에 뭐 날 거 같아.”

“냄새도 심하고.”

“이거 바르고 땀까지 흘리니까 지옥이 따로 없더라.”

위장크림 싫어하는 건 그녀들이나 현역병들이나 다 똑같았다.

저녁 식사 집합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 정우재가 생활관을 방문했을 때, 최혜종이 다급하게 물었다.

“조교님! 얼굴 씻어도 되나요?”

“방금 ‘요’라고 했습니까?”

“죄, 죄송합니다! 얼굴 씻어도 되겠습니까?”

습관이 안 된 모양인지, 아직 군대식 어투에 익숙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정우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후 훈련은 다 끝났으니까 식사 집합하기 전까지 씻어도 됩니다. 샤워도 가능하니까 씻고 준비하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샤워라는 말에 출연자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반면, 이연은 당황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채미가 그녀의 손을 잡아당기면서 같이 샤워하러 가자고 재촉했다.

“나, 나는 밥 먹고 난 다음에 씻을게.”

“그때 조교님이 샤워할 시간을 따로 줄지 어떨지 모르잖아. 샤워하라고 할 때 같이 하는 게 좋지 않아?”

뒤에서 장유하도 윤채미의 말에 힘을 보태줬다.

“맞아. 군대에서는 그냥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제일 편하고 좋더라. 이 기회 놓치면 앞으로 없을 수도 있어.”

찝찝한 채로 하루를 보내고 싶진 않다.

안 그래도 오늘 땀을 많이 흘렸기에 샤워는 무조건 해야 한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안대 안 가져왔는데.’

그 중요한 물건을 깜빡해 버릴 줄이야.

어쩔 수 없이 이연은 시유와 윤채미의 손에 강제로 이끌려 샤워실로 향했다.

* * *

옷을 빠르게 벗는 그녀들.

이연도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탈의를 했다.

그러자 조인혜의 입에서 ‘어머어머’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연이 피부 뽀얀 거 봐봐.”

“살결도 좋네. 역시 무조건 나이 어린 게 깡패라니까.”

언니들의 거친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뻔하기 직전.

시우가 적절하게 커트를 해줬다.

“연이 언니는 스킨십 많이 어려워하더라고요.”

“아,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연에겐 두 가지 약점이 있다.

벌레, 그리고 시우가 방금 말했던 과도한 스킨십.

샤워실로 들어간 이연은 시우에게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자 시우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오프닝 때 언니가 제 분량 챙겨주셨으니까요.”

그에 대한 보답이었다.

같은 멤버끼리 체결한 암묵적 동맹이 이연에겐 오늘따라 든든하게 느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