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제39화. 군필 아이돌(3)
SSS 촬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 이연은 오채일을 찾아 회사를 방문했던 정우재를 직접 안내해 준 적이 있었다.
그 후에도 이은솔과 같이 헬스장에서 만난 적도 있었고.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일병이었던 그가 지금은 당당하게 병장 계급장을 달고 멤버들 앞에 서 있었다.
시간의 흐름을 그의 계급장을 통해 여실히 느끼기도 전에.
정우재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로워졌다.
“빨리 안 내리고 뭐 합니까! 얼차려 받고 싶습니까!”
이연보다도 같은 배우로 활동 중인 장유하가 정우재를 더 알고 있었다.
아는 얼굴이 나오자 장유하는 왜 그러냐는 식으로 살갑게 그를 달랬다.
“우재야. 나, 유하 누나야. 설마 나 못 알아보는 건 아니지?”
“사회에서 뭘 하고 왔든 군대에서 여러분들은 교육생입니다. 정확히 10초 주겠습니다. 10초 안에 2열 종대로 모이지 않으면, 오늘 훈련은 전부 취소하고 하루 종일 얼차려만 받게 하겠습니다. 십! 구! 팔! 칠…….”
죽음의 카운트다운이 개시되었다.
장유하는 정우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정말로 많은 듯한 표정으로 섭섭함을 드러냈지만, 빨간 모자를 쓴 그에게는 일절 통하지 않았다.
정우재의 말대로 이곳은 군대다.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정식으로 입소한 이상, 이들은 조교의 말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근무 중 이상 무’는 원래 그런 콘셉트다.
장유하와 조인혜의 경우에는 이미 여군 특집 1기 출연을 통해서 이런 경험을 미리 접해봤기 때문에 금방 교육생 모드로 태도를 전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군대 예능이 첫 출연인 시우와 채미, 혜종은 연병장에 나와서 줄을 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여타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처럼 카메라와 오디오, 조명 장치에 PD, 스태프들까지 다 있는데.
지금까지 그녀들이 출연했던 예능 프로그램들과는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정우재 조교가 한겨울의 날씨처럼 차가움이 뚝뚝 묻어 나오는 어투로 말했다.
“11초. 1초 늦었습니다. 다음부터는 본 조교가 말한 시간을 철저히 엄수하기 바랍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목소리 크기 봐라. 알겠습니까!”
“예, 알겠습니다아-!”
출연자들은 촬영 첫 걸음부터 괜히 참가했나 하는 후회를 느끼기 시작했다.
* * *
대대장에게 신고식을 하기 위해 군복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여섯 명의 여군들.
1기 당시에는 군복을 어떻게 입어야 하는지 헤맸던 장유하와 조인혜였지만, 3기 때에는 경험자로서 동생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의욕을 드러냈다.
“이연아. 언니가 알려줄까?”
가장 먼저 이연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봤지만, 그녀는 누구보다도 빠르게 전투복을 다 입은 상태였다.
“괜찮아요, 선배님. 전투화 끈만 정리하면 끝나요.”
“벌써?”
전생에선 풀 플레이트 아머를 수차례 입었다 벗었다 했던 이연인데, 이런 군복 정도는 상대적으로 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장유하가 타깃을 시우에게로 바꿨다.
“시우는? 뭐 어려운 거 없어?”
“저도 다 입었어요.”
“뭐야. 왜 다들 알아서 잘하는데. 모처럼 이 언니가 알려주려고 했더니만.”
시우의 경우에는 아버지가 군인 출신이니까.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게 있었기 때문에 이연과 비슷한 속도로 환복을 마쳤다.
하니엘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잘한다.
장유하와 조인혜는 어쩔 수 없이 윤채미와 최혜종을 도와주기로 했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환복을 마치고 돌아온 여군들을 보면서 장우재와 조교, 교관은 놀라움을 애써 감췄다.
“이렇게 빨리?”
“나는 한 15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담배 타임 가질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신고식을 하기 전에 가장 먼저 중요한 과정이 있다.
교관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분대장을 뽑도록 하겠습니다. 분대장은 여러분들을 이끄는 팀장 같은 존재입니다. 분대장이 잘해야 같은 분대원들도 편해질 수 있으니, 심사숙고해서 정하기 바랍니다. 먼저, 지원자 있습니까?”
“…….”
“…….”
“…….”
모두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분대를 이끄는 존재.
이 말을 듣자마자 출연자들의 머릿속에 스친 생각이 하나 있었다.
아, 이건 무조건 고생하는 직책이다.
이렇게 말이다.
그러니 먼저 손을 드는 사람이 없는 게 당연했다.
이때, 옆에 서 있던 정우재 조교가 어느 한 인물을 추천했다.
“장유하 교육생은 어떻습니까. 이미 군 생활 경험도 있고. 그리고 최연장자 아닙니까. 큰언니로서 분대원들을 잘 이끌 거라고 봅니다만.”
최연장자라는 말에 장유하의 이마에 커다란 혈관 마크가 자리 잡았다.
저걸 그냥 확.
하지만 상대는 후배이자 현 군대 조교다. 훈련받으러 온 교육생인 그녀가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하극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장유하가 분대장을 맡게 될 것이다.
정우재의 말처럼 경험도 있고. 나이도 많아서 그녀가 딱 분대장 체질로 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장유하는 잘해낼 자신이 없었다.
이때,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자가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손을 번쩍 들고 분대장에 지원한 유일한 사람.
권이연 쪽으로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교관이 이연에게 확인 차 물었다.
“잘할 자신 있습니까?”
“네!”
“다른 분대원들은 어떻습니까.”
여태껏 진행되었던 ‘근무 중 이상 무’ 편수들 중에선 나이가 많은 출연자가 분대장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나이가 어리고 군 생활 경험이 없는, 게다가 아이돌이기도 한 출연자가 분대장을 맡아본 경우는 일절 없었다.
이연이 분대장을 차게 되면, 최연소 분대장 출연자를 비롯해서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게 된다.
그럼에도 출연자들은 이연의 분대장 지원에 찬성하는 태도를 보였다.
SSS에 출연하면서 보여준 그녀의 리더십은 이미 연예계에서도 유명했기 때문이다.
만장일치로 분대장을 맡게 된 권이연은 교육생들 앞에 서서 신고식을 진행하게 되었다.
먼저 제식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거수경례부터.
“충! 성!”
오른손 끝이 정확히 그녀의 긴 눈썹 끝에 위치했다.
손바닥은 보이지 않게.
팔은 정확히 60도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처음 해보는 거수경례일 텐데도 불구하고 완벽에 가까운 자세를 선보이는 이연의 모습에 교관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원래는 출연자들의 어설픈 태도를 막 지적하고 쓴소리를 남발해야 군기도 잡고 그럴 텐데.
너무 잘해 버리니까 막상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교관이 당황하고 말았다.
“어, 그러니까…… 잘했습니다. 혹시 조교가 미리 제식 알려줬습니까?”
“아닙니다. 혼자서 독학했습니다.”
모든 군대를 통틀어 제식은 군사훈련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이연이 전생에서 받은 훈련 과정에도 제식훈련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칼을 들었을 때의 경례 자세와 맨손 때의 경례 자세 등. 같은 동작만 수백, 수천 번을 반복했었다.
물론 그때와 지금의 경례 자세가 똑같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맥락은 비슷했다.
목소리 크게 하고. 최대한 절도 있게 움직이고. 이런 기본적인 것들만 해줘도 평균 이상은 갈 수 있다.
이미 이연의 몸에 밴 군필자로서의 경험이 낯선 군대 환경도 금방 적용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대장 앞에서 진행하는 신고식 또한 막힘이 없었다.
“105번 교육생 권이연 외 5명은 2022년 11월 23일부로 7087대대 제3포대 전입을 명받았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대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충성!”
쩌렁쩌렁 울리는 이연의 목소리에 지나가던 병사들조차도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오디오 감독은 잠시 헤드셋을 벗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 한 번의 말실수조차 없이 완벽하게 신고식을 마친 이연을 보면서 대대장은 슬쩍 교관을 바라봤다.
“교관이 교육을 잘 시켰구만.”
이에 대해서 교관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교관보다는 이연이 잘해서 나온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2박 3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여러분들 역시 현역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나라를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진지하게 훈련에 임할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알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성공적으로 신고식이 마무리되었다.
신고자 역할을 마무리 짓고 다시 교육생들 대열에 합류한 이연을 보면서 장유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1기 때의 강라은을 보는 것 같다고.
* * *
오전에는 기본적인 제식훈련으로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식사 집합 전에 막사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된 그녀들.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권이연과 선수 출신인 최혜종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의 멤버들은 그대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아…… 죽을 거 같아.”
본격적인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옆으로 돌기, 뒤로 돌기, 발맞춰 앞으로 걷기 등. 이런 것들만 교육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바닥까지 떨어지게 되었다.
장유하와 조인혜는 분명 1기 때 제식훈련을 받았는데 처음 배우는 이연보다도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니, 두 사람이 못했다기보다는 이연의 적응력이 너무 빠른 탓이었다.
“이연아. 너, 솔직하게 말해봐. 군대 다녀온 적 있지? 응?”
그렇지 않고서야 경력자인 자신보다 더 잘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있긴 하다.
그러나 선배한테 전생 때의 일을 들려줘 봤자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게 뻔하고.
그래서 이연은 이번에도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그냥 모니터링을 열심히 한 덕분이에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상한데.”
군필 아이돌임을 들킬 뻔했다.
식사 집합하기 전에 이연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출연자들에게 화장실 갈 사람 있는지를 물었다.
최혜종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혼자 후딱 갔다 와도 되잖아.”
“조교님이 어디 다닐 때 전우조로 행동하라고 하셔서요.”
“어머, 맞다. 그랬지.”
이연 덕분에 최혜종은 깜빡하고 있던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이연과 동갑내기인 윤채미가 같이 화장실 가자고 자원했다.
“근데 군대에도 여자 화장실이 있을까?”
그녀들이 있는 7087대대 막사에는 여군이 배치되어 있지 않다.
남자 화장실밖에 없을 텐데. 이게 걱정이었다.
이연은 아까 스태프들한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촬영 진행되는 동안 다른 화장실 하나를 임시 여자 화장실로 사용할 거라고 했었어.”
“거기가 어딘데?”
“글쎄. 종이 붙여두겠다고 했었는데…….”
주변을 살펴봤지만, 안내 문구가 적힌 종이는 보이지 않았다.
출연자들이 머무르는 생활관과 가장 가까운 화장실이 임시 여자 화장실이지 않을까.
이런 추측을 앞세우면서 이연과 채미는 눈에 보이는 화장실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마침 볼일을 마치고 손을 씻고 있던 정우재와 마주치게 되었다.
“엇……!”
방금 보여줬던 차가운 조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정우재는 당황해서 말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여, 여기…… 남자 화장실…….”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찾아온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