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112화
제31화. 완성형 아이돌(2)
오늘도 변함없이 이른 시간에 눈을 뜬 이연은 불 꺼진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했다.
텀블러를 꺼내 안에 보충제를 탄 뒤, 스포츠백에 챙겨 넣고 곧바로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이연의 개인실 맞은편에 독방을 쓰고 있는 유키가 이연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운동 가시는 거예요?”
“어.”
“오늘 라디오 방송 있잖아요. 안 피곤하세요?”
“피곤해도 운동은 꾸준히 하는 게 좋으니까.”
숙소 내에도 아예 홈트레이닝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그래도 헬스장에 배치되어 있는 다수의 헬스 기구들을 대신하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그리고 이연은 오히려 헬스장에서 땀을 빼고 와서 샤워를 해야 하루를 개운하게 시작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유키는 이연의 이런 부지런한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그러더니 아주 잠깐의 고민 끝에 이런 말을 꺼냈다.
“저도 같이 갈래요.”
“너도 가려고?”
“네. 요즘 리샤 언니 때문에 0.5㎏ 쪘거든요. 이거, 어떻게든 빼고 싶어요.”
멤버들은 리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야식 지옥을 겪고 있는 중이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먹는 라면. 이건 못 참는다.
게다가 유키가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하필이면 인스턴트 라면이다.
이렇다 보니, 밤만 되면 리샤가 조리하는 라면 냄새를 맡을 때마다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유혹을 참지 못하고 몇 번 먹었던 게 체중 증가라는 형태로 돌아오게 되었다.
반면, 이연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리샤의 라면 유혹에 넘어간 적이 없었다.
모자 하나만 눌러쓴 채 운동 갈 준비를 대충 마치고 이연의 차에 올라탄 유키는 언니의 이런 자제심이 마냥 대단해 보였다.
“언니는 라면 냄새 맡으면 먹고 싶지 않으세요?”
“아니, 전혀.”
“뜨끈한 라면 면발에 김치 한 조각 탁 얹어서 한 입 먹으면 천국의 맛 그 자체잖아요.”
“한국인 다 됐네. 그런 맛 표현도 할 줄 알고.”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불패의 조합이라 할 수 있는 인스턴트 라면과 김치. 유키는 이미 이 맛에 푹 빠지고 말았다.
일본 라멘도 맛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한국 라면이 더 입맛에 맞았다.
“양푼 냄비에 끓여줘야 제맛이더라고요. 저, 그거 때문에 얼마 전에 냄비도 사 왔잖아요.”
차를 몰고 가던 이연은 입맛을 다시는 유키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누가 보면 운동하러 가는 게 아니라 라면 투어하러 가는 줄 알 것이다.
그렇게 이연의 새벽 운동에 같이 동참하게 된 유키는 그녀와 나란히 옷을 갈아입고 트레이닝룸으로 향했다.
LC 엔터테인먼트에서 끊어준 헬스장 말고도 이연과 멤버들은 집에서도 가깝게 오가면서 운동할 수 있게 추가로 헬스장 회원권을 끊어뒀다.
이른 새벽임에도 운동을 나온 사람들이 꽤 보였다.
오늘은 유산소에 꽂힌 모양인지, 이연은 가볍게 발목 스트레칭을 마치고 바로 러닝머신 쪽으로 향했다.
유키는 마치 어미 새를 쫓아가는 아기 새처럼 이연의 뒤를 졸졸 따랐다.
러닝머신 속도를 높인 이연은 바로 옆 기기를 차지한 유키를 보면서 말했다.
“나 눈치 볼 거 없이 네가 하고 싶은 운동 하면 돼.”
“지금은 언니 옆에서 뛰고 싶어요.”
그렇다면야.
이연은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유키가 운동에 크게 방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점점 빠르기를 높여가면서 본격적으로 땀을 흘려보려고 하던 순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이연 씨, 유키 씨!”
익숙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며칠 전에 하니엘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준 그 촬영감독이었다.
이연은 높였던 러닝머신의 속도를 잠시 멈췄다.
“안녕하세요. 감독님이 여긴 어떻게…….”
“여기, 제가 아는 동생이 트레이너로 일하는 헬스장이거든요. 며칠 전부터 이연 씨 봤다고 말하던데. 정말일 줄은 몰랐습니다. 유키 씨도 좋은 아침입니다!”
촬영감독이 시원스러운 미소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이연은 무의식적으로 유키의 반응을 살폈다.
유키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입꼬리만 올라갈 뿐. 눈매는 그대로였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이연은 속으로 피식 웃었다.
겉과 속이 다른 유키의 전매특허, 가식 미소가 발동되었다.
“어머! 감독님. 여기서 뵙게 되니까 너무 기뻐요! 역시 저희는 운명인가 봐요.”
지켜보고 있던 운명의 여신이 ‘뻥 치시네’ 하고 말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뻔뻔한 거짓말이 새어 나왔다.
유키는 프로필 사진을 찍어줬던 촬영감독을 싫어한다.
자신의 센스에 태클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 앙금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던 촬영감독이었지만, 그의 지인으로 추정되는 트레이너가 나타나 촬영감독을 끌고 갔다.
“PT 하셔야죠, 형. 어딜 농땡이 부리시려고.”
“알았다니까! 그럼 이연 씨, 유키 씨. 나중에 또 기회가 되면 뵐게요.”
이연과 유키가 각각 작별 인사와 응원을 보냈다.
“네, 감독님. 운동 열심히 하세요.”
“파이팅!”
그들이 사라지자마자 유키가 속도 업 버튼을 화풀이하듯 거칠게 삑, 삑, 삑 연타했다.
이연은 이런 유키의 가식 순도 100퍼센트에 가까운 모습을 접할 때마다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그래도 우리 프로필 사진 열심히 찍어주신 분이니까. 너무 그렇게 미워하지 마.”
“…….”
말은 안 했지만, 유키도 잘 안다.
고맙긴 해도 화가 나는 미묘한 상황.
참 피곤한 성격이었다.
* * *
예정되어 있던 라디오 방송을 위해 하니엘 멤버 전원이 어제처럼 박도수 매니저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가는 길에 박도수 매니저는 오늘 출연하기로 되어 있는 ‘박민아의 뮤직 스토어’ 프로그램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공유해 줬다.
“라디오라고는 하지만, 방송처럼 영상 송출도 동시에 되는 거니까 안 보인다고 막 이상한 행동 하지 마. 알았지?”
“네!”
보이는 라디오 식으로 진행된다.
광고가 나가는 시간에도 영상은 계속 인터넷을 통해 송출될 예정이기 때문에 항상 방심해선 안 된다.
특히 시라이시 유키.
멤버들의 시선이 전부 유키에게 쏠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유키는 알겠다는 듯이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알았어요. 실수 안 한다니까요. 걱정 마세요.”
자기를 문제아 취급하니까 짜증을 부렸다.
한편, 아직 유키의 본성을 모르는 박도수 매니저와 최공예는 깜짝 놀랐다.
“유키. 너, 화도 낼 줄 알아?”
“사람들 앞에서 항상 생글생글 웃던 착한 아이가…….”
비아가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고자질을 시도했다.
“이게 유키의 본성이에요. 지금까지 보여준 거 전부 다 가식이래요.”
“전부 다는 아니거든? 나 이상한 사람 만들지 말아줄래?”
“이거 봐. 내가 무슨 말만 하면 화내잖아.”
“네가 화낼 말만 골라서 하니까 그렇지.”
박도수 매니저가 백미러를 통해 멤버들을 바라보면서 불안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아직 데뷔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불화설 돌게 하지 말자. 제발.”
이연이 직접 나서서 두 사람을 안심시켜 줬다.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서로 싸우는 거 아니니까요.”
“정말이지? 믿어도 되는 거 맞지?”
“네. 저렇게 보여도 숙소에선 서로 잘 놀고 그래요.”
연습생 시절이 길다 보니 다른 또래 아이들처럼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비아와 유키는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찐친’이다.
두 사람이 이렇게 투닥거리기 시작하면, 또 다른 막내즈 멤버인 시우가 자연스럽게 말리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말싸움할 땐 하더라도 나중에 스케줄 다 끝나고 숙소에서 해. 그때 원 없이 하게 해줄 테니까.”
서로 ‘흥!’이라고 콧소리를 흘리면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비아와 유키.
언니 멤버들은 이런 막내들을 보면서 한동안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을 보냈다.
* * *
박민아의 뮤직 스토어 현장에 도착한 멤버들.
라디오 부스는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서 그리 크지 않다.
좁은 공간에 일곱 명이나 되는 게스트들이 오니까 현장은 그새 북적였다.
심지어 오늘의 게스트는 하니엘만이 아니었다.
민주린도 같이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력 덕분일까. 그녀와 하니엘 멤버들은 이런 식으로 자주 스케줄이 겹쳤다.
부스 안에 들어가서 미리 음량 체크를 하고 있던 박민아와도 각자 인사를 나눴다.
총 아홉 명의 출연자들을 데리고 PD가 어떻게 라디오 방송이 진행될지 설명해 줬다.
“1부에서는 민아 씨가 단독으로 가요계 소식을 전해줄 거고요. 2부부터 여러분들이 게스트로 등장하셔서 토크해 주시면 돼요. 그리고 3부에는 하니엘 멤버분들, 그리고 민주린 씨. 이렇게 두 팀의 노래를 라이브로 들어보는 시간을 가질 겁니다. 아셨죠?”
“네!”
이미 출연자들은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정리의 뜻으로 짧게나마 브리핑 시간을 가지는 게 이곳 PD의 방식이었다.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이연은 먼저 부스에 들어가서 대본을 체크하는 박민아를 살폈다.
그녀는 민주린보다도 더 일찍 데뷔한, 하니엘 멤버들에게는 까마득한 선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멤버들 중에서는 벌써부터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게다가 박민아는 민주린보다도 더 까탈스러운 성격이라고 잘 알려져 있었다.
특히 음악, 방송에 관해선 한없이 엄격해지는 선배다.
이 때문에 민주린조차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미가 이연에게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민주린 선배님이 저렇게 긴장하시는 거 처음 봐.”
그건 이연도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박민아를 많이 어려워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럼 왜 하필 하니엘은 이런 어려운 대선배님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참여하게 된 걸까.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청취율 때문이다.
‘박민아의 뮤직 스토어’는 음악을 다루는 라디오 프로그램 중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듣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목소리에 더해서 탁월한 선곡 능력까지.
이로 인해 박민아의 뮤직 스토어는 연말마다 열리는 시상식에서 라디오 부문으로 최소 1개 이상의 상은 꼭 타가는 편이었다.
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민주린은 후배들을 모아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조언을 들려줬다.
“선배님은 가수라면 기본적인 라이브 실력은 꼭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야. 그러니까 2부는 둘째 치고 3부 라이브 코너 때엔 사력을 다해서 불러야 해. 라디오 방송이라고 대충 부르지 말고. 알았지?”
“네, 선배님!”
마치 음방에 나간 것처럼. 그렇게 영혼을 다 바친 무대를 완성시켜야 한다.
민주린이 이런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건 단순히 박민아에 관한 소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 예전에 솔로 활동할 때 홍보 차원에서 출연했다가 라이브 때 대충 했다고 선배님한테 엄청 혼났거든.”
앞서 말했던 모든 것들이 본인의 경험담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었다.
멤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무래도 프로그램 섭외,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연은 ‘오히려 좋아’라는 태도를 보였다.
장인 정신을 가진 음악인.
딱 권이연 스타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