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96화
제27화. 파이널 미션(2)
손잡이를 잡고 묵직한 출입문을 활짝 열자, 연습생들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던 SSS 녹화 스튜디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고.
그 대신, 오직 파이널 무대 생방송 촬영만을 위한 특설 스테이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넓은 무대를 중심으로 부채꼴 형태처럼 퍼져 있는 객석들. 가운데에는 또 다른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두 무대를 잇는 중간 길에 서서 작업을 주도하고 있던 서윤철 PD가 하니엘 팀 멤버들이 도착했음을 알아차리고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간 맞춰서 딱 왔네요! 어? 박 매니저님은 어디 가고, 왜 여러분들만 따로 오신 겁니까?”
“매니저님은 주차 문제 때문에 저희만 먼저 왔어요. 근데 PD님, 이거 아예 새로 만드신 거예요?”
우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확인차 물었다.
우미와 마찬가지로 연습생들의 모든 관심은 오롯이 특설 무대 쪽에 쏠려 있었다.
서윤철 PD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예. 공사 기간만 한 3주 걸렸을 겁니다. 무대, 조명, 사운드, 웬만한 것들은 분야별로 다 최고의 장비들을 동원했으니까 여러분들도 만족해하실 거예요. 조금 있다가 리허설 해보면, 빨리 무대 서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 들걸요?”
이렇게까지 자신감이 넘치는 서윤철 PD는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이 무대에 어울리도록 연습생들도 열심히 꾸며둬야 했다.
스태프의 안내를 받으면서 팀 하니엘 대기실로 향하는 멤버들.
짐을 내려놓은 뒤, 차례대로 메이크업과 헤어를 받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비아와 시우, 두 막내에 맏언니인 우미까지. 세 사람이 먼저 자리를 이동했다.
그동안 대기실은 동갑내기 3인방이 지켰다.
스태프가 PPL 용도로 여러 개의 과자와 음료들을 대기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비아가 과자 한 봉지를 들고서 리샤에게 건넸다.
“이거, 네가 좋아하는 과자 아니야?”
“맞아.”
“안 먹어?”
“오늘은…… 식욕이 별로 없는데.”
아까 박도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올 때도 그랬지만, 놀랍게도 리샤는 오늘 아침부터 줄곧 빈속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여솜은 친구의 말을 듣고 헛웃음을 흘렸다.
“아까 특별 스테이지 봤을 때보다도 리샤의 방금 그 말이 더 놀라워.”
언제, 어느 때라도 그녀의 식탐은 열일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파업이라도 단행한 모양인지, 본의 아니게 단식투쟁에 들어서고 말았다.
잘 먹던 애가 갑자기 과자 한 조각조차 입에 안 대려고 하니, 이연은 오히려 걱정이 들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배고프다고 집중 안 돼서 막 가사 까먹고, 안무 잊어버리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지도?”
그 말을 듣자마자 이연과 여솜의 시선이 빠르게 교차했다.
서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미리 짠 것처럼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이연이 먼저 앨리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양팔을 붙잡았다.
“가, 갑자기 뭐야!”
“가만히 있어.”
그동안 나여솜은 방금 이연이 집어 들었던 과자 봉지를 잽싸게 뜯었다.
봉지 안에서 새어 나오는 특유의 감자칩 향이 리샤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과자 조각을 한 움큼 쥔 나여솜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여성에게 다가갔다.
“자, 리샤아. 아 해. 아~”
“아, 안 먹는다니까아!”
“거짓말하지 마. 먹고 싶어 하는 거 다 알고 있어. 그리고 이제 와서 이거 먹는다고 네 인생에 큰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일단 먹고 생각해. 알았지?”
“읍! 으읍!”
리샤가 입을 굳게 다물고 결사 항전(?)을 벌였다.
어쩔 수 없이 이연도 비장의 수를 쓰기로 했다.
한 손으로 리샤의 양쪽 손목을 붙잡은 뒤,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그러자 리샤가 ‘히익!’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간지러, 간지럽다구우!!!”
“간지러우라고 하는 거 맞아.”
“아니, 그보다 너,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마치 수갑을 찬 것처럼 아무리 손목을 움직이려 해봐도 이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결국 리샤의 입이 터지고 말았다.
이 틈을 노려 여솜이 리샤의 입안에 과자를 그대로 쑤셔 넣었다.
우물우물우물.
강제로 과자를 먹게 된 리샤의 표정이 점점 편안함으로 물들어갔다.
여솜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오구오구. 잘 먹네, 우리 아가. 하나 더 먹을까?”
“…….”
리샤의 얼굴은 어느새 ‘억울하지만 역시 맛은 있네’라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과자가 몇 조각 들어가고 나서야 잠잠했던 리샤의 식탐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스태프를 향해 도시락을 들고 외쳤다.
“언니! 이거 먹어도 되는 거 맞죠?”
“어? 어. 먹어도 상관은 없는데…….”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리샤는 빈속을 채우기 위해 나무젓가락을 들었다.
한편, 메이크업을 받던 도중에 스마트폰 가져간다는 걸 깜빡해서 잠시 대기실로 돌아온 비아는 리샤의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뭐야, 이 언니. 오늘은 아무것도 안 먹을 거라고 그렇게 강조하더니. 결국은 먹네?”
“사람은 역시 먹어야 힘이 난다는 걸 깨달았을 뿐이야.”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도 적당히 먹어.”
이 와중에 이연은 여솜과 작게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서로의 활약상을 칭찬하느라 바빴다.
* * *
파이널 라운드 생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연습생들은 각 팀별로 모여서 리허설을 진행했다.
먼저 첫 스타트를 끊게 될 12인의 단체곡, ‘우리의 꿈’부터.
시간 관계상, 리허설은 딱 1절까지만 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리허설 당시에는 이연의 고음 파트는 볼 수 없었다.
리허설 무대를 지켜보던 이은솔은 이 점에 대해 큰 아쉬움을 드러냈다.
“얼마나 잘 부르는지 보고 싶었는데.”
나현아 트레이너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머. 은솔 씨, 애들이 ‘우리의 꿈’ 부르는 거 못 들어보셨어요?”
“네. 유일하게 딱 저 단체곡만 못 들어봤어요.”
심사 위원들 모두가 모여서 최종적으로 연습생들이 준비한 모든 무대를 점검하는 날이 있었다.
평소에는 각 팀별로 떨어져서 연습을 했기에 이렇게 합동 점검이 아니면 12인 단체곡을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이은솔은 바쁜 스케줄로 인해 이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래서 아쉬움이 더 컸다.
오 대표가 이은솔의 등을 토닥여 줬다.
“본 무대에서 봐. 그러면 되잖아.”
“무대 뒤쪽으로 빠져 있어서 저는 노랫소리밖에 못 들어요.”
“아, 맞다. 너 진행자였지.”
이처럼 어설픈 위로는 상처만 더 주는 꼴밖에 안 된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은, 남들보다 한발 먼저 이런 식으로 연습생들의 무대를 볼 수 있다는 거였다.
서윤철 PD가 확성기를 들고 외쳤다.
“다음은 벨제브 팀 첫 곡 리허설 들어가겠습니다. 하니엘 팀은 내려오셔서 심사 위원분들하고 같이 리허설 보셔도 됩니다.”
“네!”
권이연과 멤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곧장 객석으로 향했다.
안 그래도 그녀들 역시 벨제브 팀의 무대가 궁금했었기 때문이다.
각 팀의 오리지널곡들 역시 완곡이 아닌 1절까지만 리허설을 진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무대는 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이연은 모든 관심을 벨제브 팀의 무대에 쏟았다.
일렉 기타 소리가 초반부터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메탈 장르의 댄스곡이네.’
벨제브 팀 이미지에 맞는 느낌이었다.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진절혜가 센터가 아니라고?’
이연은 눈을 의심했다.
누구보다도 센터 욕심이 강한 그 진절혜가 첫 번째 곡에서는 센터가 아니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진절혜 대신 시라이시 유키가 첫 곡의 센터를 차지했다.
격한 안무 동작에 따라 그녀의 긴 머리카락들이 흔들리면서 시라이시 유키의 움직임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다.
곡 이미지에 맞추려고 한 건지, 옅은 레드 오렌지 컬러로 염색한 헤어스타일이 베스트 셀렉트가 되었다.
‘저런 곡도 나름 잘 어울린다는 게 신기하네.’
분명 처음 봤을 때에는 청순하고 큐티한 콘셉트가 잘 어울리는 연습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어떤 장르든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는 만능 연습생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진절혜가 아니라 시라이시 유키가 더 무서운 상대로 거듭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비아도 이연과 같은 걸 느낀 모양인지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흘렸다.
“유키 언니 잘하네. 예쁘고.”
언니라는 말에 나현아 트레이너가 물음표를 띄웠다.
“유키가 너보다 언니라고?”
“언니 아니에요?”
“아니야. 너랑 동갑일걸?”
“네? 진짜요?”
“내가 알기론 그런데. 유키가 문아한테 자기하고 동갑인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었거든. 너도 문아하고 19살 동갑이잖아. 고등학교 3학년.”
“……우와. 나랑 같은 나이였다니. 더 주눅 드네.”
진절혜를 센터에서 밀어낼 만큼 강자인 연습생이 자신과 동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절로 위축이 되고 말았다.
비아의 이런 모습에 이연은 피식 웃었다.
“주눅 들 게 뭐 있어. 너도 충분히 귀엽고 예쁜데.”
“진짜?”
“어. 진짜로.”
“정말 나 귀엽고 예뻐?”
“그렇다니까.”
금세 기분이 좋아졌는지 비아가 헤헤 웃었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나현아 트레이너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누가 보면 삐친 여자 친구 달래주는 남자 친구인 줄 알겠다, 야.”
“어떻게 알았어요, 현아 쌤? 저, 이연 언니 여자 친구 하기로 했는데.”
이 말에 가만히 있던 나여솜이 발끈했다.
“아니거든? 연이, 나하고 결혼하기로 했거든? 난 이미 약혼 선물도 받았어.”
“저번에 그 뱃살 토끼 인형 말하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나도 연이 언니한테 선물받은 거 많아.”
갑자기 벌어진 삼각관계에 이연은 조용히 좀 하라며 두 사람을 자제시켰다.
지금은 사랑싸움보다 상대팀이 어떻게 무대를 준비했는지 주시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순번상으로는 이다음 하니엘 팀의 첫 번째 무대가 이어져야 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번거롭기도 하고. 어차피 리허설이어서 이대로 벨제브 팀의 두 번째 무대까지 연달아 진행하기로 했다.
두 번째 곡 장르는 일렉트로팝. 앞에서 펼쳤던 메탈 댄스곡의 강렬함보다는 약간 힙한 느낌을 주는 쪽으로 무대를 구성했다.
두 번째 공연에서는 포지션에 변화가 있었다.
첫 곡의 센터는 시라이시 유키였지만, 마지막 곡 센터는 모두의 예상대로 진절혜가 센터를 차지했다.
심사 위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만족스러운 얼굴로 벨제브 팀의 두 번째 무대를 응시했다.
“확실히 진절혜가 센터를 맡으면 안정감이 살아나네.”
“그러게요.”
“절혜가 2라운드에서 삐끗하긴 했지만, 요즘 다시 폼이 올라온 거 같아서 다행입니다.”
“파이널 라운드 들어서면서 마음을 다르게 먹은 거 같더라고.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하니까. 지금의 절혜가 딱 그런 케이스지.”
오늘이 아니면 앞으로 이연과 이런 경쟁 구도를 펼치는 날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 때문일까.
리허설임에도 불구하고 진절혜는 마치 실전처럼 독하게 공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