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91화
제26화. 마지막 준비(2)
예전부터 권이연은 이석호 트레이너에 대해 느낀 게 하나 있었다.
이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게 서투르다고.
지금도 그랬다.
“내, 내가 절혜하고? 아, 아니야! 그런 거 절대로…….”
흔들리는 동공.
지나칠 정도로 더듬는 말.
그리고 어색해하는 손동작까지.
누가 봐도 거짓말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연은 안 그래도 이 이야기에 관해 공론화는 아니더라도 한 번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었다.
시기는 파이널 무대를 앞두고 있을 때가 적절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 타이밍에 이석호 트레이너에게 사실을 말한 거였다.
“듣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요?”
이연의 제안에 이석호 트레이너는 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했기 때문이다.
* * *
이석호 트레이너의 개인 사무실을 찾은 이연.
혹시나 해서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를 향해 이석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는 카메라 설치 안 되어 있으니까 너무 그렇게 살펴보지 않아도 돼.”
하기야. SSS는 어디까지나 연습생들이 주인공인 프로그램이다.
심사 위원들의 개인 공간에도 굳이 카메라를 설치할 필요가 없었다.
이석호 트레이너의 입에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쩐지. 저번에 네가 나하고 절혜 관계에 대해 물었을 때 좀 이상하다 생각하긴 했었는데…….”
“네. 그거 때문에 일부러 말해본 거였습니다.”
이석호 트레이너가 듣기에는 기분 나쁠 수도 있을 것이다.
연습생이 그를 떠보기 위해 그랬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미 이석호가 잘못을 저지른 건수였기에 자신이 목소리를 크게 낼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보다 앞서 궁금한 게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
나름 잘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이걸 눈치채는 사람이, 그것도 그 사람이 연습생일 줄은 감히 상상도 못 했다.
이연은 간단하게 답했다.
“지나가다가 우연히요.”
아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래도 이석호 트레이너는 이미 확실해진 사실을 끝까지 부정할 정도로 비양심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맞아. 네가 어떤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절혜한테 프로그램 내부 정보를 미리 흘려준 거 맞아. 이에 대해선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미안하다.”
잘못을 저지른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하다가 이석호 트레이너가 진절혜에게 내부 정보를 흘려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에 본인의 입을 통해 들은 적이 있었다.
“진절혜 아버지한테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나요?”
이석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연의 추측이 맞음을 시인했다.
“절혜 아버님이 꽤 잘나가는 기업 회장님이시거든. 나 한창 어려울 때 금전적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었어.”
두 사람이 처음 연을 맺게 된 것은 진절혜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직원들의 복지 일환으로 ‘출근 후 댄스 레슨’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하면서였다고 했다.
댄스 스쿨이 한창 재정난에 허덕일 때였으니까. 이석호는 외부 강사 일이든 뭐든 닥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절혜 아버님이 먼저 말씀을 하시더라고. SSS에서 자기 딸 좀 밀어줄 수 없겠냐고. 나도 거절해야 한다는 걸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막상 은인의 면전에서 칼같이 거절하려니까 차마 입이 안 떨어지더라.”
“그래서 도와주게 된 거군요.”
“맞아.”
“그렇다고 해도 저는 그 자리에서 거절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트레이너님의 그 행동이 성실하게 노력해 온 다른 연습생들에게는 피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거니까요.”
“……알고 있어.”
이석호 트레이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떤 짓을 하든 속죄는 힘들다.
그 역시 오랫동안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한편으로는 이런 소행이 누군가에게 발각된 게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오늘 대표님한테 말할 생각이야?”
이석호 트레이너는 권이연이 그렇게 할 의도로 일부러 자신에게 이 말을 꺼낸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권이연의 대답은 이석호 트레이너의 예상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아니요. 말 안 할 겁니다.”
“아, 안 한다고? 왜?”
“이걸 공론화시켜 봤자 프로그램하고 저희도 같이 타격을 입을 테니까요. 데뷔하자마자 순위 조작해서 만들어진 걸 그룹 아니냐는 소리 듣기 싫거든요.”
사실 이런 부정행위가 아니더라도 진절혜는 어떻게든 파이널 라운드까지 올라왔을 것이다.
인성은 둘째 치고. 실력은 있으니까.
그러나 이석호는 이연이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그 이유가 듣고 싶었다.
“혹시 너도 나한테서 정보를 달라는 뜻으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저는 진절혜하고 똑같은 인간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더 이상의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았기에 이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저는 제가 우승할 자신 있어요. 굳이 이런 더러운 꼼수를 쓰지 않아도요.”
“…….”
이연이 이석호에게 이 말을 꺼낸 목적은 따로 있었다.
“딱 두 가지만 부탁드릴게요, 첫 번째. 파이널 무대에서는 트레이너님이 이전처럼 정보를 흘려주는 식으로 개입하지 말아주세요. 하다못해 마지막 무대에서만큼은 연습생들끼리 공정하게 대결을 펼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건…… 나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어. 그리고 너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겠지만, 이미 이전부터 내가 절혜한테 정보를 흘려주는 일은 없게 되어버렸거든.”
아마 2라운드 팀 미션 때부터일 것이다.
그때 두 사람이 강하게 의견 충돌을 일으키는 모습을 이연의 눈으로 직접 봤으니까 말이다.
“그럼 방금 제가 말한 첫 번째 요구 조건은 들어주기로 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래. 두 번째는?”
이 두 번째 조건이 핵심이었다.
“SSS에 참가했다가 떨어진 연습생들, 트레이너님이 책임지고 데뷔시켜 주세요.”
“그건…….”
이석호 트레이너가 말끝을 흐렸다.
사실 굉장히 무리한 요구였다.
이석호가 오채일 대표도 아니고. 그에게 신임을 받고 있는 위치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탈락한 연습생들 전원의 데뷔를 책임질 만큼의 권한은 없었다.
“힘들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절혜를 제외한 31명 모두 다 트레이너님과 진절혜 사이에서 벌어진 부정행위의 피해자라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하다못해 최소한의 노력은 해주세요. 이게 제 두 번째 조건입니다.”
이석호 트레이너는 아까보다 더 무거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는 연습생들과 달리 사회생활을 여럿 경험해 온 어른이다.
어른이라면 책임을 질 줄도 알아야 한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감사합니다, 트레이너님.”
할 말은 끝났다.
이석호의 사무실을 벗어나려고 할 때.
“이연아.”
그가 권이연을 잠시 불러 세웠다.
“정말로 미안하다. 용서를 구하려고 해도 이미 연습생들 전부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래도 네 말대로 어떻게든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책임을 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네. 믿고 있을게요.”
속죄할 시간 정도는 줄 수 있다.
최악의 수까지 고려해서 이연은 녹취록이라는 물증까지 이미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연이 지금까지 봐온 이석호 트레이너라면, 굳이 녹취록을 꺼낼 필요까진 없어질 것 같았다.
무대에서 일하는 자라면.
그 무대가 더 이상 더럽혀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석호 트레이너도 이걸 알고 있다.
그래서 믿고 있겠다는 말을 한 거였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쉽지 않다.
이연은 오랜만에 그걸 뼈저리게 느꼈다.
* * *
첫 번째 오리지널곡, ‘첫사랑’ 레코딩을 모두 마친 하니엘 멤버들은 뒤이어 두 번째 곡인 ‘페어링’을 듣기 위해 장소를 옮겼다.
이연은 실질적으로 ‘첫사랑’보다 두 번째 곡 ‘페어링’이 좀 더 하니엘이라는 팀에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첫사랑’이 높은 안무 난이도와 청순 콘셉트의 곡이라면, ‘페어링’의 경우에는 현역 걸 그룹 멤버들이 자주 선보이는 중독성 있고, 신나고,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코드들이 많이 가미되어 있었다.
이연은 ‘페어링’을 듣자마자 이 곡을 하니엘의 데뷔곡으로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에 꽤 든 편이었다.
‘찐 프로듀서가 확실히 실력이 있는 사람이야.’
이연에게 만약 파이널 무대에서 부를 오리지널곡의 작곡을 맡겼더라면, 찐 프로듀서가 만든 ‘페어링’과 비슷한 느낌의 곡으로 작업을 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연은 두 번째 곡에 좀 더 비중을 두고 싶었다.
멤버들에게도 이러한 점을 강조했다.
“이 곡은 특히 잘 들어둬. 맨 마지막에 팬들한테 보여줄 노래니까, 우리가 데뷔한다는 거에 쐐기를 박을 만한 곡으로 만들어내야 해.”
“알았어.”
“어디, 집중해서 한번 들어보실까?”
멤버들이 의욕을 불태우면서 다시 한번 가이드곡을 듣기 시작했다.
찐 프로듀서가 보컬 파트를 나눠주긴 했지만, 어느 부분에 누가 이 파트를 불러야 할지. 이런 건 정해주지 않았다.
어차피 이미 두 명은 확정되어 있었다.
랩은 연시우가 무조건 맡아야 하고.
“메인 보컬은 연이 언니가 하는 게 좋지?”
“그래야지. 연이한테 메보 맡기면 우리도 안심이니까.”
이연도 그럴 생각이었다.
데뷔가 걸려 있는 무대다 보니, 웬만하면 실험적인 픽은 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확실한 방법을 승리를 결정짓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런데 괜찮겠어? 이거, 음 엄청 높은데.”
우미는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방금 말이 나온 것처럼 고음 파트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았기 때문이었다.
그냥 불러도 어려운 것을, 안무까지 소화하면서 불러야 하니까 난이도는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연은 늘 그렇듯 걱정보단 자신감을 먼저 드러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아니, 어떻게든 해낼게.”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서 가이드곡을 경청하고 있을 무렵.
반가운 손님이 그녀들을 찾았다.
오채일 대표가 박도수 매니저와 함께 양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나타났다.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어?”
“네, 대표님!”
“앉아 있어, 앉아 있어. 출출할 거 같아서 먹을 거 사 왔으니까 이거 먹으면서 하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특히나 리샤가 가장 기뻐했다.
연습생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오채일 대표.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남은 시간 동안 조금만 더 고생해 줘. 그리고…….”
모처럼 연습생들 앞에서 좋은 말을 여러 개 들려주려고 했는데.
전화 한 통이 그의 말을 끊고 말았다.
“잠깐만. 어, 석호냐? 뭐? 술 한잔하자고? 이 시간에? 아니, 안 되는 건 아닌데…… 그래, 알았다. 난 회사에 있으니까 오면 연락해라. 그래, 알았다. 조금 있다가 보자.”
전화를 끊은 오 대표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웬일이래. 둘이서 술 마실 수 있냐는 말을 먼저 꺼내고. 가만. 내가 무슨 이야기 하려고 했더라? 아무튼…… 열심히 하고. 무슨 일 있으면 여기 박 매니저한테 언제든 말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난 먼저 갈게.”
급하게 회의실을 나서는 오 대표.
이연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동안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