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88화
제25화. 대학 행사(5)
루웰이 속했던 국가의 귀족 자제들이 필수적으로 수료해야 하는 과정이 하나 있었다.
바로 기초 군사훈련이었다.
귀족의 자제라면, 성별을 가리지 않고 기본적인 군사훈련은 받도록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웰도 잠시 음유시인 활동을 접고 훈련소에 입소했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다.
거기서 루웰은 기본적인 검술을 포함해서 전쟁이 필요한 여러 가지 기술들을 배웠다.
그중 하나가 바로 양궁이다.
시우의 제안으로 양궁 동아리가 주최하는 이벤트장으로 이동한 그녀들.
먼저 활시위를 당기던 남자가 마지막 한 발을 발사했다.
그러나 과녁을 맞히기는커녕, 화살은 어이없이 날아가 벽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더럽게 못 쏘네, 짜식!”
“야야. 비켜봐라. 이 형님이 쏴줄 테니까. 내가 이래 봬도 군대에서 특등사수 출신이었어.”
“총하고 활하고 다르잖아요.”
“쏜다는 건 똑같잖아. 사장님! 여기 2천 원이요!”
군대에서 전역한 지 얼마 안 되는 것으로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기세등등하게 활을 집어 들었다.
“생각보다 묵직하네.”
“형. 그거 어렵다니까요.”
“괜히 돈 날리지 말고 그걸로 먹을 거나 사 먹죠.”
“아, 이 새끼들이. 기다려 봐! 내가 경영학과 특등사수 자존심을 보여줄 테니까!”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남자의 허세는 죽지 않았다.
이연도 남자 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자세가 틀려먹었어. 힘으로만 당기려고 하네.’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한편, 팔이 파르르 떨릴 정도로 활시위를 바짝 당긴 남자가 마침내 첫 화살을 날렸다.
첫발은 이연의 예상대로 벽에 꽂혔다.
두 발도 여전히 불발.
그러나 세 번째부터 어느 정도 감을 잡은 모양인지, 과녁 모서리 끝 쪽에 아슬아슬하게 화살이 꽂혔다.
“오!”
“형, 조금만 더 하면 중앙도 맞힐 수 있겠는데요?”
“오늘 내가 여기 상품 다 쓸어간다!”
네 발째.
가운데는 아니지만, 그래도 상당히 근접했다.
마지막 다섯 발째는…… 아쉽게도 불발이다.
그래도 지금까지 도전했던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고득점이었던 모양인지, 근처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남자의 솜씨를 칭찬했다.
“거봐라. 내가 잘한다고 했지?”
“역시 특등사수!”
동아리 부원이 남자에게 경품을 건네줬다.
작은 토끼 캐릭터 인형이었다.
“사장님. 가운데 맞히면 저기 저 큰 토끼 인형 주는 거예요?”
“아, 저건 좀 비싼 거라서…… 가운데 과녁 3번 맞히면 드리는 겁니다.”
“3번이라. 여자 친구가 엄청 좋아하는 캐릭터인데. 한번 해볼까.”
두 번째 도전 의사를 피력하는 남자였지만, 지갑에 돈이 없었다.
“야. 누가 2천 원만 좀 빌려주라.”
“잠시만요, 형.”
“지갑 좀 확인해 볼게요.”
남자가 일행에게 2천 원을 구하는 사이.
여솜이 거대한 토끼 인형에 관심을 보였다.
“좋겠다. 나도 저 캐릭터 좋아하는데.”
인터넷에 유행 중인 캐릭터, ‘뱃살 토끼’는 오동통하고 둥굴둥굴한 디자인 덕분에 여성들한테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연습하느라 인형 같은 걸 살 생각조차 못했던 나여솜.
그래서일까. 인형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이연이 여솜에게 작게 물었다.
“저거 가지고 싶어?”
“가지고야 싶은데. 정중앙 3번 맞혀야 준다고 하잖아. 아까 저 남자분도 특등…… 뭐? 아무튼 그거 하셨다고 하는데. 그분도 못 맞힌 걸 내가 어떻게 맞히겠어.”
차라리 노래방 점수로 경품을 준다고 하면 시도나 해보겠는데.
팔 힘이 약한 편에 속하는 나여솜이었기에 차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때 이연이 흑기사를 자처했다.
“알았어. 내가 타서 가져올게.”
이연이 자신감을 내비치며 나섰다.
“할 수 있겠어? 저거, 엄청 어려워 보이던데.”
“어려운 거 아니야. 오히려 저 정도면 내가 기초 군사훈련 받을 때에 비해서 엄청 쉬운 거야. 그때는 말 타고 화살 쏘는 것도 하고 다녔는데, 뭘.”
“……???”
당연하게도 여솜과 시우는 이연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멤버들이 당혹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이연은 지갑에서 2천 원을 꺼내 양궁 동아리 부원에게 건넸다.
“저, 한번 할게요.”
“예, 감사합니다! 여성분은 옆쪽에 작은 활 있으니까 저거 쓰셔도 됩니다.”
“아니요. 아까 저 남자분이 사용했던 거 쓰겠습니다. 저게 정확도가 높으니까요.”
“……네?”
한눈에 보자마자 이연은 어느 활이 더 자신의 손에 맞을지 분석까지 다 끝내뒀다.
아까 남자가 들었던 활을 한 손으로 집어 드는 이연.
무겁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쏠 만해.’
앞에 놓인 화살 하나를 들어 줄에 걸었다.
미인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다시 양궁 이벤트 행사장으로 쏠렸다.
“키 엄청 크네.”
“모델 일 하시는 분인가?”
“우리 학교에 저렇게 비율 좋은 사람이 있었어?”
연예인은 그 특유의 분위기라는 게 있다.
얼굴을 가리고 일반인 사이에 섞여 있어도 이 분위기까지 완벽하게 숨기지는 못한다.
활시위를 당긴 이연은 짧은 시간 동안 숨을 참으면서 과녁에 집중했다.
어설펐던 남자에 비해 완벽한 포즈였다.
양궁 동아리 부원들조차도 놀랄 정도였다.
“와, 자세 봐라.”
“폼이 예사롭지가 않은데?”
감탄이 끝나기도 전에.
피융!
한 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빨간색 정중앙을 두고 1㎝ 옆에 꽂혔다.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깝다!”
“와, 근데 첫 발에 저렇게 맞힌다고?”
“아까 형이 할 때랑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이연의 바로 앞에서 자신감만 뽐냈던 남자가 ‘우연이야, 우연’이라고 이연의 실력을 폄하했다.
그러나 세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고.
두 번째 화살이 이연의 손끝을 떠났다.
첫발의 아쉬움을 완벽하게 떨쳐내려는 듯 빨간색 한가운데에 정확히 화살이 꽂혔다.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세 발, 네 발.
연달아 히트를 기록했다.
“말도 안 돼……!”
“선수 아니야? 어?”
“미쳤다, 미쳤어.”
어느새 사람들의 이목은 이연과 그녀가 쏜 마지막 다섯 발째 화살에 집중되었다.
라스트 찬스.
완전히 감을 잡은 이연을 말릴 수 있는 건 적어도 이 자리엔 없었다.
탁!
다섯 발째 화살마저 가운데에 꽂혔다.
“일등 당첨!”
“추, 축하드립니다!”
동아리 부원들도 이연의 놀라운 실력이 당황한 나머지 살짝 말을 더듬었다.
혹시 양궁 선수 출신이냐는 물음에 이연은 딱 잘라 아니라고 답했다.
무사히 거대 뱃살 토끼 인형을 얻어낸 이연은 그것을 그대로 여솜에게 건넸다.
“자, 선물.”
품에 한가득 안기는 뱃살 토끼.
기뻐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여솜이 이연에게 갑자기 뜬금없는 고백을 날렸다.
“연아. 나랑 결혼하자. 응?”
“아니, 그건 좀…….”
여자가 된 것도 적응이 안 되는데.
이 이상 삶의 난이도를 올리고 싶지 않았다.
* * *
대학 축제는 이연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볼거리들이 많았다.
각종 행사들도 좋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활기 넘치는 이 분위기가 너무나도 좋았다.
환생하기 이전의 이연도 공연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가끔씩 도시 축제 같은 거에 참가하곤 했었다.
물론 그때도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얼굴을 가리고 다니고 그랬었다.
대학 축제는 이연에게 그때의 기억을 오랜만에 꺼내보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무대 행사 시간에 맞춰서 다시 차로 돌아온 그녀들.
박도수 매니저는 뭔가를 양손에 가득 들고 나타난 멤버들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렸다.
“리샤. 넌 먹을 걸 뭘 그렇게 많이 사 왔냐. 그리고 여솜이는…… 뭐야, 그 돼지 인형은.”
“돼지 아니거든요?”
나여솜의 반박이 바로 날아들었다.
“뱃살 토끼예요, 뱃살 토끼.”
“아무리 봐도 피부 허연 돼지처럼 보이는데.”
“매니저님이 보는 눈이 없으신 거예요.”
화를 내는 여솜의 태도를 보면서 박도수 매니저는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내가 미안하다. 아무튼 인형은 무대로 가지고 못 올라가니까 일단 차에 실어둬. 그리고 리샤, 그 먹을 것들은 다 어떻게 할 거야.”
“걱정 마세요. 제가 다 먹을 테니까요.”
“진짜 그 많은 걸?”
“에이. 이 정도도 자제한 거예요. 우미 언니하고 비아가 옆에서 안 말렸으면 이거의 2배? 그 정도는 더 사 왔을 걸요?”
“분명 축제를 즐기고 오라고 했던 거 같은데. 누가 보면 푸드 파이터 대회 나갔다 온 줄 알겠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다들 박도수 매니저의 예상을 아늑히 초월한 결과물들을 가지고 오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아무튼 슬슬 의상 갈아입고 준비하자.”
“네!”
대학 축제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축하 공연을 위해 박도수 매니저는 멤버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향했다.
어제는 한밤중에 무대를 가졌었는데.
오늘은 해가 아직 퇴근 도장을 안 찍은 시간에 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밤 분위기도 좋긴 하지만, 낮에는 낮 특유의 활기참과 생동감이 있어서인지 이연은 이 시간대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대 의상은 어제와 다른 걸로 준비했다.
각 무대별로 똑같은 의상을 입으면, 아무래도 보는 사람들도 식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스마트폰으로 영상을 찍어서 계속 하니엘 팀의 무대를 올려주고 있는데, 이 와중에 의상이 똑같으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은가.
안 그래도 노래나 안무는 동일한데. 의상까지 같으면 그 시간, 그 장소에서 펼친 무대만의 개성이 없을 것이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새로운 의상이 몸에 잘 맞는지, 어디 문제 있는 곳은 없는지 최종적으로 확인했다.
오늘도 어제처럼 하니엘 팀과 안면이 있는 가수가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은솔이 대기실에 나타나자, 멤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인사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언제부터 와 있던 거야? 나도 나름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보다 먼저 온 가수팀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저희는 한…… 2시? 그쯤부터 있었어요.”
“2시라고?”
“네. 매니저님이 대학 축제 잠깐 즐기고 와도 된다고 하셔서요.”
박도수 매니저가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이만큼 우리 애들을 많이 생각하고 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러게요. 좋은데요? 저희 매니저 형도 박 매니저님처럼 이런 센스를 가지고 있다면 좋을 텐데.”
이은솔의 매니저로 추정되는 남자가 그에게 눈을 흘겼다.
“야. 네가 축제 현장에 있다는 거 들키면 난리 나잖아. 후폭풍 감당할 수 있어?”
“당연히 못 하죠.”
하니엘 팀이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벡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은솔이 축제 현장에 와 있다는 말이 퍼지는 순간, 경찰이 와도 쉽게 통제가 안 될 것이다.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얘들아. 나중에 나도 같이 데려가 줘.”
“저희야 좋죠!”
“시간만 내주세요, 선배님!”
“연이가 활 엄청 잘 쏘거든요? 나중에 선배님도 연이한테 인형 따달라고 해주세요.”
“연이가? 활을 쏠 줄 안다고?”
“네!”
나여솜이 신이 난 목소리로 전설적인(?) 일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이은솔의 고민이 깊어졌다.
“나도 활 연습 좀 해야 되나…….”
후배에게 잘 보이고 싶은 선배의 고민이 또 하나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