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79화
제23화. 자존심을 걸고서(2)
벨제브 팀의 첫 번째 타자, 정담화와 시라이시 유키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권이연도 듀오 팀으로 나서게 된 양우미, 앨리샤를 제외한 멤버들과 다 같이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벨제브의 선봉들을 지켜봤다.
정담화는 특별히 개성이 있는 연습생은 아니었다.
문제는 시라이시 유키다.
일본에서 건너온 연습생.
한국으로 넘어와서 2년간 연습생 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환경적인 요인도 크고. 그래서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 실력이 여러모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탑 12 안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방송이 시작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붙은 별명이 ‘노력가’였다.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심의 기본적인 감정은 그 아이돌의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유발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라이시 유키를 응원하는 팬들의 충성심은 가히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충성심을 뚫고 표를 얻어내야 하는 게 양우미, 앨리샤의 역할이다.
그러나.
‘쉽진 않아 보이네.’
화면으로 보이는 시라이시 유키의 팬들은 다른 어떤 팬들보다도 적극적이었다.
그녀 역시 팬들을 향해 손 키스를 날리면서 짧은 보답을 했다.
마치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팬들의 열성은 배로 커졌다.
‘팬들 조련도 잘해.’
시라이시 유키. 이연도 탐냈던 인재였지만, 그녀는 처음부터 권이연이 아닌 진절혜 쪽과 계속 친분을 유지해 왔었다.
그래서 이연은 팀을 짜야 하는 순간부터 깔끔하게 그녀를 포기했던 거였다.
아무리 이연이 연습생들 사이에서 대단하다, 대단하다 소리를 듣는다 할지라도, 사적으로 친한 관계를 넘어설 단계까진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신에 나여솜과 연시우를 데려올 수 있게 되었으니, 이연은 만족했다.
무대로 올라온 벨제브 팀의 첫 타자들, 정담화와 시라이시 유키가 각자 포지션을 잡았다.
흘러나오는 반주를 듣자마자 하니엘 팀 전원이 마치 퀴즈를 맞히는 입장이 된 것처럼 동시에 노래 제목을 말했다.
“이거, ‘Foxy’ 아니야?”
“와, 이 노래를 들고 왔다고?”
“아예 예상 못 한 곡인데.”
‘Foxy’는 콘셉트를 섹시함 쪽으로 올인을 한 곡이다.
그래서 더 의외였다.
비아가 고개를 한 차례 갸우뚱했다.
“왜 저 노래를 고른 거지? 담화 언니는 그럭저럭 잘 어울린다 치더라도, 유키 언니는 아니잖아.”
사랑의 요정들 때처럼 시라이시 유키는 귀여움 쪽으로 더 잘 어울리는 그런 연습생이었다.
이연도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었다.
그러나 무대를 보고 나서 왜 그녀들이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곡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반전 매력을 보여줄 생각인가 보네.”
지금까지 시라이시 유키는 귀여운 곡들만 계속해서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왔었다.
만약에 이번 무대에서도 같은 콘셉트의 노래를 골랐다면, 그건 곧 식상함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걸 방지하고자 두 연습생은 이번 기회에 반전 매력을 도모하기 위한 이미지 체인지 전략을 꺼냈다.
지금까지 보여주지 않은 새로운 콘셉트로 무대를 꾸미면, 보는 사람들이 드는 첫 번째 인식은 ‘신선하다’가 될 것이다.
실제로도 이연은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게다가 의외로 잘 어울린다.
붉은 립스틱을 짙게 바른 시라이시 유키가 자신의 몸을 한 차례 더듬으면서 색기 넘치는 모습을 보이자, 객석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졌다.
하니엘 멤버들도 의외의 호응에 놀랐다.
“유키 언니가 저런 무대도 소화할 수 있었구나.”
어떤 무대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
그건 아이돌로서 축복받은 재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엔딩 포즈에선 시라이시 유키의 시그니처 포즈라 할 수 있는 손 키스가 펼쳐졌다.
마무리까지 참 흥미로운 무대였다.
첫 무대를 보고 나서 비아가 걱정을 드러냈다.
“우리 언니들, 이길 수 있겠지?”
“그래야지.”
하지만 말과 달리, 이연의 마음속에는 불안이라는 이름의 싹이 트고 있었다.
상상 이상으로 벨제브 팀이 너무 잘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라이시 유키가 미친 듯이 잘했다.
정말로 미쳤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쟤는 뭘 해도 되겠어.’
만약에 SSS에서 데뷔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분명 어딘가에서 같이 무대에 서는 날이 올 것 같았다.
* * *
벨제브 팀의 듀오 유닛이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치고, 다음 하니엘 팀의 턴이 돌아오게 되었다.
앞에서 워낙 잘한 탓에 부담감이 상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무대를 눈앞에 두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팬들 앞에 서게 된 두 사람.
이 장면을 모니터로 바라보고 있던 비아가 옆에 앉은 시우의 손을 꽉 잡으면서 말했다.
“으아…… 내가 다 떨리네, 증말!”
시우도 같은 기분인지 비아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이연은 웬만하면 자신의 팀이 이길 거라는 희망을 품으려고 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번 듀오 대전은 왠지 느낌이 좋지 않다.
이연이 가장 불안해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우미, 리샤가 택한 곡이 하필이면 벨제브 듀오 유닛과 콘셉트가 겹친다는 거였다.
두 사람이 선택한 곡은 ‘립스틱’이다.
이 곡 역시 섹시함을 메인 콘셉트로 잡은 노래라 할 수 있다.
‘하필이면 이게 겹칠 줄은…….’
리샤가 워낙 볼륨감 있는 몸매로 남성 팬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보니까 이 점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립스틱’을 골랐다고 했다.
그러나 본무대에서는 이 선택이 약간의 미스를 낳고 말았다.
콘셉트가 이어지는 곡을 연달아 하게 될 경우, 두 팀 중 첫 번째로 먼저 무대를 마친 팀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게다가 앞에서 시라이시 유키가 말 그대로 하드 캐리를 한 덕분에 아무래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을 미리 놓을 필요는 없었다.
무대는 자연현상과도 같다.
한시도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반주가 나오고, 두 사람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리샤가 앞으로 나와 간단한 안무 동작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남성 팬들의 우렁찬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우미도 리샤에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듯 자신의 포지션에 최선을 다했다.
실수 없이 다 잘했다.
안무도 깔끔했고. 무대 매너도 괜찮았고.
마지막의 엔딩 포즈에서도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 자신을 어필하는 모습까지 완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듀오 무대는 벨제브 쪽이 더 좋았어.’
우미와 리샤도 그걸 어렴풋이 알고 있는지, 무대를 내려갈 때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아 보였다.
이렇게 해서 1차전이 모두 마무리되었다.
타이밍에 맞춰서 스태프가 대기실을 찾았다.
“조금 있다가 2차전 무대 시작될 예정이니까 준비해 주세요.”
“네!”
나여솜, 이비아, 연시우. 세 명의 멤버가 자리에서 기운차게 일어섰다.
이연은 싱긋 웃으면서 그녀들을 배웅해 줬다.
“가서 열심히 하고 와.”
“걱정 마, 언니!”
“무조건 이기고 올게요!”
전의를 불태우는 두 막냇동생들을 보면서 이연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러면서 나여솜만 조용히 불러 말했다.
“애들이 좀 릴렉스 시켜줘. 열의 넘치는 건 좋은데,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니까.”
“응, 알았어.”
“힘내고. 여기서 열심히 응원하고 있을게.”
“고마워. 나도 최선을 다해볼게.”
나여솜은 알고 있었다.
1차전은 벨제브 팀의 우세로 끝날 거라는 사실을.
여기서 어떻게든 나여솜 팀이 승점을 가져와야 한다.
그래야 권이연의 부담감을 조금이나마 덜어줄 수 있다.
한편, 현장에서는 투표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이은솔이 다시 한번 청중평가단들에게 강조했다.
-투표 결과는 바로 발표되지 않습니다. 따로 방송을 통해 확인해 주세요.
이은솔이 말한 대로 투표 결과는 무대가 모두 끝나고, 연습생들만 따로 모여 있을 때 공개된다.
‘차라리 이렇게 결과를 모른 채로 무대를 펼치는 게 더 좋긴 하겠어.’
앞에서 우리 팀이 상대 팀에게 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만큼 의욕이 꺾일 테니까 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제작진이 머리를 잘 쓴 셈이었다.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선봉으로 나섰던 리샤가 우미보다 먼저 대기실로 돌아왔다.
리샤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연에게 말했다.
“……미안해.”
“왜 사과하는 거야?”
“못했으니까……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아쉬움이 눈물로 표현되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이연은 조용히 팔을 뻗어 리샤를 안아줬다.
스킨십을 싫어하는 그녀지만, 그렇다고 울고 있는 멤버를 눈앞에서 가만히 방치해 두고 싶진 않았다.
“괜찮아. 잘했어. 충분히 잘했어.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
조용히 리샤의 등을 쓸어줬다.
이연의 따스한 마음씨 때문일까.
결국 리샤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은 채 흐느꼈다.
그런 리샤를 이연은 한동안 말없이 다독여 줬다.
SSS 촬영을 계속 진행하면서 거의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리샤가 처음으로 이렇게 울고 있었다.
그만큼 많이 분했을 것이다.
지금은 괜찮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이 분함이, 이 슬픔이 훗날 리샤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줄 테니까.
* * *
리샤가 돌아오고 5분이 지나고 나서야 우미도 다시 대기실에 얼굴을 비췄다.
“어디 갔었어?”
이연의 물음에 우미는 쓴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잠깐 화장실에.”
“……그래?”
우미의 눈 화장이 번져 있었다.
동생들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아서, 혼자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치고 온 것으로 보였다.
이미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이연은 우미를 위해서 모른 척해주기로 했다.
이제 곧 두 번째 대결이 펼쳐질 것이다.
첫 번째 무대의 아쉬움은 잠시 뒤로 미루고. 무대 위에서 열띤 대결을 펼칠 멤버들을 응원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2차전을 펼치기 전에, 각 팀 유닛이 한자리에 모여 각오를 펼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미는 기도하듯 두 손을 모았다.
“우리 애들, 잘할 수 있겠지?”
“잘해낼 거야.”
왜냐하면 2차전 팀에는 이연이 준비한 비밀 무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여솜. 그녀가 그 무기의 정체였다.
“언니, 사랑의 요정들 무대 여러 번 봤었지?”
“안 볼 수가 없지 않았어? 본무대는 방송으로 봤으니까 그렇다 치고. 리허설 때에도 연습생들 다 같이 모여서 무대 보고 그랬잖아.”
“그때 사랑의 요정들 보면서 무슨 생각 들었어?”
“잘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근데 왜?”
“틀렸어.”
이연은 우미와 약간 다르게 그 무대를 받아들였다.
“정확히는 ‘사랑의 요정들이 잘한다’가 아니라 ‘나여솜이 잘한다’가 맞아.”
그 팀의 무대는 모두 나여솜이 맹활약을 펼쳤기에 잘했다는 인상을 심어줄 수 있었던 거였다.
실제로 사랑의 요정들 팀 멤버들 중에서 나여솜을 제외한 모든 연습생은 탈락의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나여솜이 너무 잘해서.
그녀의 존재가 너무 독보적이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연습생들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
대중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여솜이,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실력 있는 얘야. 그러니까 기대해도 좋아.”
권이연과 진절혜, 두 사람이 파이널 라운드가 시작되자마자 동시에 나여솜부터 노렸던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잠시 뒤, 무대로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