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76화
제22화. 역주행(1)
백댄서들은 권이연의 갑작스러운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좋을지 판단을 내리질 못했다.
만지라니.
“어디를…… 요?”
댄서 중 한 명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이연에게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묻는 듯한 뉘앙스로 말했다.
이연의 대답은 간단했다.
“몸 전체요.”
“……네?”
대답을 들을수록 물음표만 늘어나는 상황이었다.
하기야. 아침에 오자마자 자신의 몸을 만져도 된다는 걸 허락하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 듣는 입장에선 당연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연은 자신이 너무 말을 축약했다는 잘못을 인정하고 구체적인 설명에 들어가기로 했다.
“저번에 윤혜미 선배님 오셨을 때, 청중평가단에게 어필할 수 있는 인상적인 퍼포먼스가 하나 필요할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댄서들이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그건 기억이 난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니까.
당시에 윤혜미가 이연에게 건넸던 아이디어가 있었다.
“후렴구 파트 들어가기 전에 괜찮은 퍼포먼스 아이디어 하나를 추천받아서요. 어떤 거냐면…….”
이연이 화이트보드 판을 가져왔다.
말로 하는 것보다 직접 그림으로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게 댄서들의 이해력을 도울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2절 끝나고, 제가 무대 가운데에서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밧줄이 팔과 다리가 묶인 것처럼 서 있을 거예요. 이때 댄서분들이 좌, 우, 그리고 뒤쪽에서 양팔을 뻗어서 제 몸 여기저기를 훑으면 돼요.”
‘Lonely’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었다.
-나를 옭아매려 하지 마.
구속하려고 하지도 마.
오직 너를 유혹하기 위한 손길.
fall into temptation.
댄서들은 이연이 말해준 퍼포먼스를 그대로 가사와 접목시켰다.
가사와도 잘 어울리고.
그리고 확실히 인상에 강하게 남을 것 같은 퍼포먼스였다.
어차피 다들 여성 댄서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니까.
신체 접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단지 이연이 싫을 뿐.
댄서들은 이연이 제안한…… 아니, 정확히는 윤혜미가 제안했던 아이디어에 대체로 만족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댄서들 역시 이연의 말대로 청중평가단의 뇌리에 남을 만한 임팩트 있는 퍼포먼스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댄스팀 리더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그러면 한번 다 같이 맞춰볼까요? 이연 씨가 가운데에서 포즈를 취해주세요. 그다음에 저희가 어떻게 설지 각자 위치를 잡아볼게요.”
“네.”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윤혜미가 언급했던 포즈를 취했다.
양팔과 다리를 서로 꼬듯 교차시켰다.
이 모습을 보던 댄스팀 리더가 안무가 아닌 무대 의상 쪽에 아이디어를 냈다.
“의상은 몸에 딱 달라붙는 소재가 좋을 거 같네요. 기왕이면 이때 이연 씨 몸의 라인을 좀 더 강조하는 의상이면 더 예쁜 그림이 나올 거 같아서요.”
“네. 그것도 나쁘지 않죠.”
치마보다는 그게 나았다.
이연을 중심으로 댄서들이 양방향으로 흩어졌다.
양팔을 쭉 뻗은 뒤에 마치 팔들이 독자적으로 살아 있는 것처럼 흐물흐물 움직였다.
여러 댄서들의 손끝이 이연의 목덜미와 옆구리, 허리, 배, 허벅지를 스쳤다.
순간 이연이 타임을 외쳤다.
“자, 잠시만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면서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은 이연.
고개를 푹 숙인 그녀를 보면서 댄서들의 불안감이 커졌다.
“괜찮으세요, 이연 씨?”
“누가 이상한 데 만진 거 아니야?”
이연이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문제가 아니라는 표현을 보였다.
다시 고개를 든 이연이 긴 머리를 뒤로 쓸어내렸다.
머릿속으로 이 퍼포먼스를 구상했을 때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단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거, 생각보다 엄청 간지러운데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 * *
새롭게 떠올린 퍼포먼스 연습을 포함해서 오늘도 댄서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린 이연은 짐을 챙기고 회사를 나왔다.
집으로 향하기 위해 택시 어플을 실행했다.
매번 지하철이 끊기는 시간까지 연습을 하다 보니, 이렇게 택시를 부르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근처에 있는 택시를 호출하고 있다는 알람이 뜨자마자 이연의 시선이 도로 쪽으로 향했다.
비상등을 켠 채 정차되어 있는 검은색 세단.
늦은 시간에 정장을 차려입은 두 명의 젊은 남자가 어느 한 여성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서 다가가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여성은 남자들에게 같이 갈 생각 없다고 앙칼진 어투로 답했다.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이연의 관심이 그녀에게 쏠렸다.
공교롭게도 이연이 잘 아는 인물이었다.
‘우미 언니잖아?’
처음에는 괴한들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줄 알았으나, 오히려 남자들이 양우미의 태도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회장님께서 이 늦은 시간에 아가씨 혼자 돌아다니게 하면 위험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저희랑 같이 가시죠.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된다고 대신 전해주세요.”
“아가씨…….”
지금이야 시간이 너무 늦어서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없지만, 계속 저렇게 실랑이가 이어지면 분명 몇몇 사람들이 저들에게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곤란해지는 사람은 양우미밖에 없다.
이미 우미는 방송을 통해 여러 차례 대중들에게 존재를 노출시켰으니까.
지금의 광경을 사람들에게 보이면, 온갖 이상한 추측들이 난무할 게 뻔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냥 놔두면 안 되겠어.’
이연이 실랑이가 벌어지는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언니.”
이연의 부름에 우미와 남자들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우미가 남자들을 향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동생하고 같이 들어갈 거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가세요. 그러면 됐죠?”
“…….”
“…….”
서로 눈빛을 교환한 남자들은 마지못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비상등을 켜뒀던 차로 돌아갔다.
남자들이 탄 차가 멀어지고 나서야 우미는 크게 안도했다.
“내가 정말 못살아…….”
어찌어찌 상황은 해결되었다.
남자들이 떠난 뒤에도 이연은 특별히 우미에게 방금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오히려 우미가 이연에게 물었다.
“방금 일에 대해서 궁금하지 않아?”
“궁금한데, 언니가 개인사에 대해서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그걸 알기에 이연은 굳이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이연이 원하는 대답이 돌아올 확률도 매우 낮고 말이다.
그러면 그냥 시도조차 안 하는 게 정답이다.
이연의 배려를 알고서 우미는 쓴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나중에 때가 되면 그때 다 말해줄게.”
“위험한 일에 엮여 있다든가. 그런 것만 아니면 돼.”
“응. 걱정하지 마. 그건 절대로 아니니까.”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이연과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우미.
한동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겼던 이연이었지만.
호출한 택시가 곧 도착한다는 알림 소리에 그녀도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야만 했다.
* * *
집에 도착하자, 권민준과 친구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가장 먼저 그녀를 반겼다.
‘오늘 민준이 친구들 온다고 했었지.’
어제 남동생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이연이 온 걸 알아차린 모양인지, 주형운과 양인박이 방에서 거의 뛰쳐나오듯 모습을 나타냈다.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 누나!”
“많이 피곤하시죠? 연습은 잘되셨나요?”
“어. 너희는 뭐 하고 있었어?”
“저번에 누님 파이널 라운드 1차 미션 했던 거, 오늘 방송으로 나왔잖아요. 그거 영상 다시 돌려보면서 인터넷 반응 살피고 그랬습니다.”
너무 연습에 몰두했던 걸까.
생각해 보니 오늘이 지난번에 녹화했던 내용이 방영되는 날이었다.
주형운이 호들갑을 떨면서 노트북을 직접 가져와 인터넷 창을 보여줬다.
“댓글들 지금 난리 났어요. 온통 누나 칭찬밖에 안 보이던데요?”
“그래? 알려줘서 고맙다.”
시큰둥하게 답한 이연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화장실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돌핀팬츠와 오버사이즈 박스티를 찾아 입은 이연은 긴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채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활동 무대를 권민준의 방에서 거실로 옮겨온 남동생 패밀리들이 이연을 향해 손짓했다.
“누나도 오셔서 영상 보실래요?”
“연습하느라 방송 못 보셨다면서요?”
“아니, 됐어. 안 봐도 돼.”
나중에 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문을 열고 변기 커버를 내리려고 한 순간.
안 좋은 느낌이 이연의 온몸을 빠르게 훑었다.
바지를 내리려던 손길을 멈추고 화장실 바닥과 벽을 빠르게 훑던 그녀가 갑자기 문을 벌컥 열고 뒷걸음질을 쳤다.
이연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남동생들은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왜요, 누나!”
“무슨 일 있어요?”
“…….”
입을 꾹 닫고 있던 이연이 권민준을 지목했다.
“나? 글로 와보라고?”
끄덕끄덕.
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누나가 있는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화장실 앞에 선 권민준에게 샤워기가 있는 벽 한편을 가리켰다.
“왜?”
“……저기 아래.”
“아래? ……아!”
그제야 권민준은 누나가 느닷없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바퀴벌레 한 마리 때문이었다.
“뭐야. 누나, 공포영화는 못 봐도 벌레는 안 무서워했잖아. 저번에는 바퀴벌레도 발로 밟아서 죽이더만.”
“시끄러워! 가서 잡기나 하라고!”
참다못한 이연이 발로 권민준의 허리를 꾸욱 누르면서 재촉했다.
뒤에서 주형운과 양인박이 ‘내가 민준이었으면 포상받는 느낌이었을 텐데’라 말하는 소리가 잠깐 흘러나오긴 했지만, 이연은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보다 저기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바퀴벌레가 더 신경이 쓰였다.
“알았어. 기다려 봐.”
화장실 안에 잠시 들어간 권민준이 휴지 뭉치를 들고서 나왔다.
그러자 이연이 빠르게 남동생한테서 멀어졌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누나의 약한 모습을 보면서 권민준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그려졌다.
또다시 불길한 느낌을 감지한 이연이 정색하면서 경고했다.
“너, 그걸로 장난치면 진짜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알았다니까. 걱정 마.”
잠깐 누나를 괴롭힐 생각을 가져봤지만, 그렇다고 실천으로 옮기진 않았다.
얌전히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리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이연은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뒤늦게 방금 남동생들에게 보여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진 모양인지 재빨리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안에서 물줄기 소리가 들려오자, 권민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흘렸다.
“우리 누나지만, 진짜 이상하다니까. 뭐 사람이 저렇게 하루아침에 바뀐대?”
그러나 권민준의 친구들은 아무렴 어떠냐는 반응을 보였다.
“야. 그래도 방금 누님, 귀여웠잖아.”
“맞아. 작은 벌레에 오들오들 떠는 누나의 모습이 얼마나 귀한데! 모르겠냐?”
“오늘 민준이 집에서 자고 간다고 하길 잘했네.”
“난 오늘만큼은 여한이 없다.”
친구들의 격한 반응을 보면서 권민준은 피식 웃었다.
“오버하긴.”
방금의 이연이 귀여운 건 사실이었지만.
친남매 사이에서 그런 것 따위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