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73화
제20화. 유닛 대결(4)
쉬기로 한 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연습실로 복귀한 이비아.
그녀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연시우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이비아. 뭐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연습 시간은 제대로 지켜야지.”
나여솜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지켜보는 것처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머릿속으로는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계속 자리 잡고 있었다.
괜히 연습 시작하기 전부터 트러블이 발생하면 곤란하니까.
그리고 지금 연습생들의 모습은 전부 다 안무 연습실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었다.
스태프들 앞에서 가급적이면 좋은 모습만을 보여줘야 하는 그녀들로선 지금 이 상황이 불안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얘들아, 잠깐만!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말고…….”
일단은 먼저 진정을 시키려고 했었다.
이때, 비아가 먼저 말문을 뗐다.
그녀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잠깐 누구하고 만나서 이야기 좀 나누느라 늦었어.”
나여솜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미안해, 비아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오늘 오후에도 두 연습생은 서로 신경전을 벌이면서 연습에 참가했었다.
당장에라도 깨져 버릴 것만 같은 살얼음판을 걷는 분위기였는데.
비아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섬으로 인해서 갑작스러운 평화가 찾아왔다.
상대가 먼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니, 시우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사람을 계속해서 몰아붙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시우는 그렇게까지 독한 성격은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은 한 팀이니까.
그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에서 만족하려고 했던 그녀였기에 이번 마찰은 허무하다 싶을 정도로 빨리 끝나 버렸다.
비아가 어리둥절해하는 두 사람을 향해 손뼉을 치면서 재촉했다.
“우리, 얼른 연습 시작하자! 여솜 언니도 어서! 언제까지 멍 때리고 있을 거야?”
“그, 그래. 알았어.”
이연이 대체 어떤 마법의 주문을 들려줬기에 비아의 태도가 180도 달라진 걸까.
나여솜의 머릿속에 든 의문은 한동안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 * *
또다시 이어진 맹연습.
이번에는 시우가 화장실 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그녀가 나가기 직전에 여솜이 다급하게 외쳤다.
“시우야! 마실 거 다 떨어졌으니까 휴게실 자판기에 가서 몇 개 뽑아 와줄 수 있어?”
“지금요?”
“응, 지금.”
“마실 거, 언니 옆에 있지 않나요?”
물 500㎖ 병이 아직 반이나 남아 있었다.
살짝 당황하는 여솜이었지만, 이내 그것을 들고서 꿀꺽꿀꺽 입안으로 들이부었다.
깡생수를 원샷한 여솜이가 빈 통을 책상 위에 텅! 소리가 나게 내려놓은 뒤에 말했다.
“이제 없지?”
“……알았어요. 사 올 테니까 물 너무 급하게 마시지 마세요. 몸에 안 좋아요.”
동생한테 걱정을 끼쳐 버렸다.
나여솜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시우를 휴게실로 보내려는 이유가 있었다.
권이연의 부탁 때문이었다.
비아와 비슷하게 20여 분간의 시간이 흘렀다.
연습실로 다시 돌아온 시우는 안무 연습을 하는 동안 보였던 걱정과 불안함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 나타났다.
그녀 역시 비아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희, 연습해요.”
“연습하자, 연습! 언니, 빨리 일어나요!”
“아, 알았어. 잠깐만…….”
열의로 가득한 두 동생들 때문에 오히려 나여솜이 당황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에는 다 좋게 불린 것처럼 보이긴 한데.
‘대체 연이가 뭐라고 한 거지?’
정작 여솜 혼자만 모르고 있으니, 궁금해 죽을 지경이었다.
* * *
모든 연습생들에게 헬스장 회원권을 끊어준 오채일 덕분에 나여솜은 회사로 출근하기 전에 헬스장부터 먼저 들르게 되었다.
이연과 비슷한 아침 루틴이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핑크색 레깅스와 흰색 크롭탑으로 갈아입은 뒤 운동기구들이 모여 있는 웨이팅 룸으로 향했다.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트레칭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면서 몸을 풀던 그녀에게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여솜아.”
“우미 언니! 여긴 어쩐 일이에요?”
우미는 원래 따로 다니는 헬스장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가 헬스장의 회원권을 끊어줬음에도 불구하고 우미는 이곳을 거의 이용한 적이 없었다.
그랬던 우미를 여기서 보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애들한테 여기 헬스장에서 운동하는 거, 생각보다 괜찮다고 해서. 나도 한번 체험해 보려고 왔지. 그래도 다행이다. 아는 사람 만나서.”
“저도요. 서로 자세 봐주면서 할까요?”
“그러자.”
두 미인이 합심해서 근력 운동에 매진하기로 했다.
“엉덩이 좀 더 뒤로 빼고. 그렇지. 숨 깊게 내쉬면서 하나, 둘, 셋, 넷. 잘했어.”
“언니, 자세 잘 봐주시네요.”
“리샤한테 배운 거야. 너도 알지? 리샤가 운동 좋아하는 거.”
먹은 만큼 장시간 운동하는 그녀였기에 유산소, 무산소 운동 가리지 않고 상당히 많은 지식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미도 몇 번 앨리샤와 같이 운동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알려준 앨리샤만의 팁들이 우미에게도 많은 도움을 줬다.
“리샤가 다 좋은데, 마이페이스 성향이 굉장히 짙어서. 이거 잡아주는 게 여간 힘든 게 아니야. 한번 방심하면 나도 리샤의 페이스에 휘말려서 하라는 안무, 보컬 연습은 안 하고 먹고 자고 운동하고. 이것만 하게 된다니까?”
“그건 많이 위험한데요.”
“그렇지? 근데 엊그제 휴게실에서 연이 한번 만나더니 얘가 갑자기 달라졌어. 어제는 나보다 먼저 연습실에 나오더니 시간 없으니까 빨리 안무 맞춰보자고 그랬다니까?”
“리샤가요?”
“응. 난 처음에 리샤 아닌 줄 알았어.”
그렇게 생각할 정도로 우미에게는 앨리샤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일화는 우미만 겪은 게 아니었다.
“언니, 저도 그래요.”
“너도?”
“네. 하루에 최소 세 번 이상은 말다툼을 해야 속이 풀리던 애들이었는데. 어제부터는 서로 양보를 못 해서 안달이 났더라고요.”
앨리샤, 이비아, 연시우.
이 셋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이연과 휴게실에서 1대1 면담을 나눈 경험이 있다는 거였다.
일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된 건 좋은데, 이유를 모르니 답답함이 밀려왔다.
마침 이 답답함을 해결해 줄 사람이 직접 행차했다.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권이연이 세 번째로 헬스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다들 일찍 왔네? 우미 언니는 오늘부터 여기 다니기로 한 거야?”
“그냥 한번 와봤어. 그보다 연아. 물어볼 거 있는데.”
주변을 살피던 우미가 갑자기 이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이연의 작은 어깨가 한순간 움찔했다.
갑자기 왜 그러냐고 물어볼 새도 없이 이연은 우미의 손에 이끌려 러닝머신 기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가운데에 이연을 세우고, 우미와 나여솜이 각각 왼쪽, 오른쪽 러닝머신을 차지했다.
“일단 뛰는 척해.”
“뭐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여기 헬스장에 우리 SSS 스태프분이 계실지도 모르니까.”
유닛 대결 미션에 관한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연은 일단 우미가 하자는 대로 따르기로 했다.
삑, 삑.
속도를 조절한 이연은 이내 뜀걸음을 시작했다.
옆에 선 나여솜이 이연의 흔들리는 상체 부분을 힐긋 바라봤다.
얼굴을 붉히는 여솜을 보면서 이연이 물었다.
“왜 그래. 감기라도 걸렸어?”
“아, 아니! 너, 너 오기 전에 운동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가 봐.”
“운동도 좋지만, 안무 연습할 에너지는 남겨둬.”
“그래야지. 당연히 그럴 건데…….”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여솜이 이성과 본능 사이에서 열심히 싸우는 동안, 우미가 이연을 보자고 한 이유를 언급했다.
“휴게실에서 애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해준 거야?”
우미가 이 질문을 한다는 뜻은 이연에게 있어서 긍정적인 신호이기도 했다.
멤버들을 무사히 갱생시켰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연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면, 우미가 이연에게 이런 질문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이연은 러닝머신 위에 서게 된 김에 뜀걸음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우미가 궁금해하는 것을 설명해 줬다.
“별말 안 했어. 간단해.”
“정말로 간단한 거 맞아?”
말 몇 마디 했다고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혹시 이연이 무슨 특별한 수를 쓴 게 아닐까. 이런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이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가 멤버들에게 해준 건 정말로 ‘조언 몇 마디’가 전부였다.
“비아하고 시우한테는 이렇게 말했어. 이 유닛 대결, 우리가 이미 이긴 거나 다름없으니까 너희는 긴장할 것 없이 여솜이 말에 잘 따라 연습하라고.”
“그게…… 전부야?”
“응.”
정말로 간단했다.
하지만 나여솜은 이연이 한 말 중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이긴 거나 다름없다는 게 무슨 뜻인데? 작전이라도 있어?”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그럼에도 이연이 들려준 말은 너무나도 짧았다.
“사실 허세야.”
“……???”
우미와 여솜은 들어서는 안 될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당황했다.
“허, 허세라고?”
“잠깐만. 그럼 애들한테 한 말은 거짓이라는 거야?”
이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당당한 그녀의 태도에 두 사람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우미가 이연에게 재차 물었다.
“그러다가 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언니. 질 생각으로 연습하고 있는 거야?”
“그건 아니지만…….”
“우리 같은 연습생에게 가장 필요한 건 바로 자신감이야.”
이연은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비아와 시우에게 줘서 자신감을 끌어올려 줬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불안감을 없애줬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이연이 직접 말을 해주니까 무게감이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안심하고 이연이 말한 대로 나여솜의 리드에 따라 연습에 매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과 태도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거든. 결국 간단한 거야.”
어느새 우미와 여솜은 이연의 말에 납득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지 않았나.
무조건 우리가 이길 거라는 이연의 허세는 결국 정답인 셈이었다.
“그러면 리샤는? 걔한테는 뭐라고 말했어?”
앨리샤한테 비아와 시우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들려주면, 그녀는 ‘그래? 그러면 더 설렁설렁해야겠다~’ 하고 나태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뭘 해도 이길 테니까.
앨리샤에게 필요한 건 강압적으로 그녀의 나태함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의 존재였다.
그걸 이연이 여태껏 도맡아왔었는데, 유닛 대결에서는 우미가 대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연은 앨리샤에겐 다른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협박했어. 만약에 너 때문에 우리 팀이 진다면, 뭐 맛있는 거 먹으러 갈 때마다 내가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식욕 저하 영상을 보여줄 거라고. 그랬더니 바들바들 떨면서 우미 언니 말 열심히 듣겠다고 그러더라고.”
“…….”
“…….”
한쪽에는 허세를.
다른 한쪽에는 협박을.
어쩌면 권이연이 진절혜보다도 더 무서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잠깐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