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68화
제19화. 전문가들(4)
권이연은 무의식적으로 서윤철 PD를 힐긋 바라봤다.
‘이런 꿍꿍이를 숨기고 있었다, 이거지?’
그녀는 이제야 민주린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 심사 위원들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 당부했던 민주린.
물론 앞서 먼저 등장했던 오용하 프로듀서나 이븐, 수플렉스 팀, 그리고 유지빈과 이혜원까지. 모두가 다 전문가로서 상당한 식견을 지닌 인물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설마 원곡을 부른 가수 팀까지 데려올 거라고는 이연도 예상 못 했다.
연습생들도 당황한 모양인지 누구 하나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제작진이 바라고 있던 리액션일 것이다.
이은솔이 평가단들에게 차례로 물었다.
“오늘 어떤 각오로 심사할지 한 분씩 돌아가면서 말씀해 주세요. 먼저 오 프로듀서님부터.”
“섭외 제안이 들어왔을 때부터 ‘전문가 평가 미션’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에 걸맞은 평가를 내리겠습니다.”
“저 역시도 오랫동안 활동해 온 여러분들의 선배 가수로서 객관적으로 점수를 매기도록 할게요.”
“제작진이 너무 관대하지 않아도 되니까 보이는 그대로 평가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이게 제 평가 기준입니다.”
서로 말은 달랐지만, 공통점이 있었다.
냉정하게 평가하겠다.
10팀의 심사 위원들이 보여준 태도는 이와 같았다.
진절혜 팀이 선곡한 원곡 가수, 세레스 멤버들은 칼을 갈고 나온 듯한 각오를 보여주는 심사 위원들과 다르게 연습생들을 응원하겠다는 비교적 다정한 소감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유스풀 멤버분들도 한마디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멤버들하고 엄청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 서는 거라서 오히려 저희가 더 긴장하는 거 같아요. 마음속으로 열심히 응원하고 있으니까 다들 힘내시고, 저희 곡을 얼마나 색다르게 재해석하셨는지 어서 보고 싶네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파이팅!”
“힘내세요!”
선배들의 응원에 하니엘 멤버들은 고개를 숙이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첫 번째 무대는 A팀인 벨제브 팀이 먼저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무대 준비가 끝날 때까지 두 팀은 잠시 무대 아래에서 대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은솔의 말에 두 팀은 양쪽 끝에 있는 계단을 이용해 각각 다른 방향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무대를 내려오자마자 각 팀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나여솜이 당혹감을 크게 드러냈다.
“어, 어쩌지? 우리 무대, 선배님들이 보고서 안 좋은 말 하면 어떻게 해야 돼?”
원곡을 부른 가수가 이건 자신들이 꾸몄던 원래 무대하고는 너무 많이 동떨어져 있는 거 같다고 말하면, 평가에 많은 지장을 줄 것이다.
그녀들만큼 원곡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드물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연과 이전 다재다능 멤버들은 나중에 합류한 나여솜, 연시우만큼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커버곡 미션 당시, 이미 원곡을 불렀던 가수 앞에서 직접 자신들의 무대를 보여줬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연이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두 사람을 안심시켜 줬다.
“예전에도 우린 민주린 선배님 앞에서 밀크티 노래 가지고 평가받았던 적 있었어. 별문제 없이 잘 넘어갔었으니까 이번에도 괜찮을 거야.”
물론 나여솜과 연시우도 그 일을 알고 있었다.
그녀들도 당시에 현장에 있었으니까.
한 번이라도 비슷한 경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굉장히 크다.
특히 아직 데뷔를 못 한 연습생들 사이에서는 이 경험의 유무가 상당한 격차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우미, 비아, 그리고 앨리샤까지. 원년 멤버들은 유스풀이 특별 평가단으로 합류했어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마음을 추스르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이연은 팀원들을 다독이기까지 했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그리고 이번 1차 미션 결과가 데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순 있어도 아예 판가름을 내는 건 아니니까. 못해도 2차, 3차 미션에서 만회하면 돼. 그러니까 너무 얼어붙어 있지 말고 자신감 있게 하자. 알았지?”
리더다운 면모를 보여주는 이연 덕분에 두 멤버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비아가 먼저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우리, 파이팅 한번 하자!”
“그럴까?”
우미도 비아의 의견에 찬성이라며 동생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앨리샤, 나여솜, 연시우도 차례로 손을 올렸다.
마지막으로 이연이 손을 올릴 차례다.
그러나 그녀는 위가 아닌 맨 아래로 자신의 손을 위치시켰다.
이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이런 행동을 보인 이유에 대해 알려줬다.
“리더는 위에 군림하는 자가 아니라 밑에서 팀을 받쳐주는 자니까.”
“우리 언니,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멋진 거야!”
“연이가 만약에 남자였다면, 난 무조건 사귀자고 했을 거야.”
“나도!”
겉은 여자지만 속은 남잔데. 그래도?
……라는 말 대신, 이연이 먼저 힘차게 선창했다
“하니엘, 파이팅!”
“파이팅-!”
기운 넘치는 그녀들의 외침이 짧게나마 현장 전체를 물들였다.
* * *
무대 오른쪽 끝에서 ‘파이팅!’이라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갑작스러운 외침에 오용하 프로듀서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어우, 깜짝이야.”
“저쪽, 다재다능 팀이 퇴장한 방향 맞죠?”
유지빈 작사가가 묻자, 이븐이라는 가명으로 활동 중인 전이은이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줬다.
“지빈 언니. ‘다재다능 팀’이 아니라 이제 ‘하니엘 팀’이에요.”
“맞다! 그랬었지. 내 정신 좀 봐. 하도 다재다능이라는 팀명이 입에 붙어서, 나도 모르게 예전 명칭으로 말해 버렸네.”
이들이 말하는 것 하나하나가 다 마이크에 담기고 있으니 사소한 거라도 웬만하면 조심해서 말하는 편이 좋다.
아이돌 그룹의 팀 네임은 상당히 민감하고 중요하다.
직접 그룹 활동을 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전이은과 이혜원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혜원이 뒤를 돌아보면서 세레스, 유스풀 멤버들과 인사를 나눴다.
“세레스 분들은 지난주에 음방에서 만났고. 유스풀 선배님들은 방송에서 너무 오랜만에 뵙는 거 같아요.”
“그동안 이래저래 문제가 많았거든요.”
연장 계약 과정에서 소속사와 생긴 마찰.
앨범 판매량 저조.
발표하는 노래마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보여준 덕분에 방송 활동을 이어가는 것도 애매했다.
안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멤버들의 멘탈도 점점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혜원은 이 점이 매우 안타깝게 다가왔다.
그녀가 연습생이었던 시절 때부터 지켜봐 왔던 유스풀의 무대는 늘 행복해 보이고 기운이 넘쳤다.
무대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던 그녀들.
하지만 1년 반 가까이 유스풀은 그룹 활동을 이어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이혜원은 그녀들이 특별 평가단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유스풀 멤버들도 크게 성공한 후배가 자신들을 만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유스풀의 리더를 맡고 있는 나채민이 SSS 제작진 측에서 처음 연락을 받았을 당시의 일을 회상했다.
“연습생분들이 우리 노래를 선곡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다른 유명한 걸 그룹 분들 많을 텐데, 왜 우리를 택했지? 하면서 멤버들하고 다섯 시간을 가까이 수다 떨었다니까요.”
“선배님들 곡, 다 명곡이라서 충분히 그럴 수 있죠. 저도 선배님들 노래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비록 크게 성공은 못 했지만, 이혜원은 그녀들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알기에 유스풀의 이름을 달고 나온 노래들을 안 좋아할 수가 없었다.
민주린도 이혜원과 똑같았다.
“만약에 오늘까지 우리 애들이 너희 곡 아무도 선택 안 했다면, 내가 추천해 줄까 생각도 했었어.”
선배의 고백에 유스풀은 크게 놀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선배님!”
“그러면 저희가 더 부끄러워서……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으셔도 돼요.”
“뭐 어때. 근데 다들 너희 곡 안무가 어려워서 그런지 아무도 택하질 않더라고. 그나마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게 이연이네 팀이었는데. 결국 됐네.”
모험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실력에 대한 자신감에서 온 선택인지.
그건 그녀들의 무대를 지켜보면 조만간 알게 될 것이다.
평가단들끼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을 무렵, 진절혜의 벨제브 팀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평가단들의 이목도 무대로 집중되었다.
“시작하려나 보네요.”
“그러게.”
그녀들이 부르는 노래를 최대한 잘 듣기 위해서 평가단들은 이어폰을 착용했다.
연습생들의 숨 고르는 소리까지 세세하게 다 전달되었다.
평가단들 중에서도 진절혜 팀의 무대를 가장 관심 있게 지켜보는 쪽은 역시 원곡을 불렀던 세레스였다.
자신들의 노래를 연습생들이 얼마나 멋있게 각색해서 꾸며줄지. 세레스 멤버들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
조명이 번쩍이기 시작하면서 센터를 맡은 진절혜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2라운드 마지막 팀 미션에선 다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는 역시 명불허전이었다.
잠시 주춤했다고 진절혜의 실력이 어디로 갑자기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자신감 넘치는 몸동작과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시선 처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원스럽게 위로 뻗어 올라가는 고음까지.
팀의 중심답게, 진절혜는 거의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 냈다.
다른 멤버들도 잘했다.
단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진절혜 연습생이 차지하는 파트가 워낙 많아서, 다른 연습생들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 가늠하기가 좀 힘드네요.”
오용하 프로듀서가 펜을 들고서 끄적이며 자신이 느낀 그대로를 솔직하게 말했다.
노래나 댄스를 좀 더 지켜보고 난 다음에 세세하게 평가를 내리고 싶었는데. 그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봤을 때, 퀄리티가 높은 무대였음은 틀림없었다.
“잘 준비했네요.”
“네, 벨제브 팀, 고생하셨습니다.”
무대가 끝나자마자 평가단들은 고생한 벨제브 팀에게 짧게 박수를 보냈다.
이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인 쪽은 세레스였다.
이은솔이 마이크를 들고서 세레스 멤버들에게 물었다.
“후배들의 무대를 보신 소감이 어떠세요? 보니까 굉장히 만족해하시는 거 같은데.”
“네! 너무 좋았어요!”
“우리 곡이 이렇게도 해석될 수 있구나 하면서 많이 놀랐어요.”
“무엇보다도 안정적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들었어요. 보는 제가 다 편안해지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승차감이 좋은 우등 버스를 타고 가는 느낌이더라고요.”
“언니, 비유가 좀 이상한데?”
“그래? 난 이만큼 찰떡같은 표현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레스의 시끌벅적한 소감을 들으면서 팀 벨제브 멤버들의 얼굴에 미소 꽃이 피어올랐다.
오용하 프로듀서뿐만 아니라 수플렉스 팀, 그리고 전이은과 유지빈, 마지막으로 이혜원까지. 모두가 다 호평 일색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이석호 트레이너가 한 가지 단점을 지적했다.
“저는 개인적으로 파트 분배에 아쉬움을 느꼈습니다. 아까 오용하 프로듀서님도 중간에 말씀하셨지만, 팀 리더의 파트가 지나치게 많았던 거 같아요. 물론 실력 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은 비중을 가져가는 건 맞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연습생들을 평가하는 무대니까요. 다른 멤버들에게도 공평하게 기회를 줬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
아군의 배신.
진절혜의 얼굴에 피어올랐던 미소 꽃이 일순간 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