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66화
제19화. 전문가들(2)
커버곡의 경우에는 이미 노래가 나온 것에 기존의 안무까지 있다 보니까 어찌 보면 준비 과정이 쉬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되어 있는 걸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건 전문가들 앞에서 평가를 받는 자리다.
복사, 붙여넣기 방식처럼 그대로 노래와 안무만 따온 상태로 무대를 펼치면, 당연히 낮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무대에 자신들의 오리지널 요소도 가미해야 한다.
팀의 칼라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
이연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고민은 평소보다 유독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과 안무 연습을 마치고 잠깐 쉬는 동안에도 이연의 고민은 끝날 줄 몰랐다.
볼펜 끝을 이로 잘근잘근 깨물면서 머릿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펼쳐가는 이연의 귓가에 낯선 걸음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온 거 같은데.”
이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습실 문이 열렸다.
“실례하겠습니다.”
SSS 카메라팀 소속 스태프들이었다.
“카메라 좀 체크하려고요.”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그대로 쉬고 계시면 됩니다.”
스태프들의 말에 연습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날 뻔하다가 다시 앉았다.
그 와중에 멤버들은 스태프들의 접근을 미리 알아차린 이연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비아가 이연의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언니. 스태프분들 오시는 거 어떻게 알았어?”
연습실 내부에는 유스풀의 ‘별별’ 노래가 상당히 큰 볼륨으로 계속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노래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소리로 기척을 알아차릴 순 없었다.
이연은 비아의 끈질긴 추궁에도 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감이야.”
“여자의 감 말하는 거야?”
엄밀히 말하면 ‘남자의 감’이다.
그러나 이런 것까지 지적할 생각은 없던 모양인지, 이연은 그 이상의 추가 설명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에 집중해야 하니까 가서 다른 멤버들하고 같이 쉬고 있으라는 말을 들려줬다.
이연은 하니엘 팀 무대를 어떻게 꾸밀지 방향성을 정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그걸 방해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비하는 얌전히 이연의 말을 따랐다.
“정 안 풀리면 우리들한테도 말해줘, 언니.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우리, 팀이잖아. 알았지?”
“그래, 그렇게 할게.”
말만으로도 이연에게 충분한 힘을 보탰다.
카메라 점검을 마친 스태프들이 퇴장하고.
다시 멤버들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연이 잠깐 흐트러졌던 집중력을 다시 끌어올리려고 하던 순간.
다른 기척이 느껴졌다.
“또 누가 오네.”
이연의 예언은 두 번째도 어김없이 들어맞았다.
대신에 이번에는 스태프가 아닌 다른 이가 연습실을 찾았다.
“안녕, 얘들아.”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멤버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여성을 보자마자 멤버들은 빛보다 빠른 속도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저녁보다 새벽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만큼 늦은 시간에 민주린이 안무 연습실을 방문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선배의 방문에 멤버들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민주린은 그녀들의 표정 변화를 보면서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괜히 왔나 보네.”
“아, 아니에요!”
“잘 오셨어요. 선배님!”
누가 여기서 ‘네, 맞아요’라고 대답하겠나.
멤버들은 미지근했던 자신들의 태도를 금세 반성했다.
민주린은 옅게 웃으면서 긴장하는 연습생들에게 ‘농담이야’라는 말을 흘렸다.
사실 연습생들이 민주린의 방문에 마냥 기뻐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대개 심사 위원이 안무 연습실을 찾아오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중간점검 때문이다.
정식으로 평가받는 자리가 아니더라도, 그래도 긴장될 수밖에 없는 순간이라는 건 부정하지 못한다.
이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민주린도 이걸 알고 있다.
그래서 연습생들이 처음 보여준 애매한 반응에도 딱히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도 연습생 때 이와 비슷한 경험을 여러 차례 했었으니까.
대선배의 방문을 어려워하는 연습생들의 긴장감을 최대한 풀어주기 위해 민주린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안무 연습은 아직 다 안 끝났지?”
이연이 팀장답게 대표로 답했다.
“네, 선배님. 일단 안무는 따긴 했는데, 어떤 식으로 안무를 빼고 새롭게 추가할지에 대해서는 고민 중입니다.”
“아직 시간은 남아 있으니까.”
처음에는 사적인 자리에서도 연습생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했던 민주린이지만, 나름 오랫동안 그녀들을 봐와서 그런지 이제는 말을 편하게 하며 먼저 친근감을 드러냈다.
연습생들도 차라리 이게 더 편했다.
민주린과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럼 일단 안무부터 한번 볼까? 유스풀의 ‘별별’이라고 했었지? 너무 긴장들 하지 말고. 어차피 안무 완성 다 안 되어 있다고 했으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춰봐.”
“네, 알겠습니다.”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이 각자의 위치에 섰다.
어느 연습생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민주린은 포지션만 봐도 각 연습생들의 역할이 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예상대로 센터와 메인보컬은 권이연이 맡았다.
나머지 멤버들이 각각 서브 보컬과 리드댄서를.
그리고 연시우가 메인래퍼 역할을 소화하기로 했다.
민주린이 봤을 때에는 이게 가장 베스트 포지션이라고 봤다.
아직 레코딩이 끝나지 않았기에 음악은 유스풀 멤버들이 불렀던 원곡을 그대로 사용했다.
연습생들의 안무를 지켜보는 민주린의 눈빛은 날카로웠다.
전문가들에게 평가받는 자리다 보니, 더 예리하게. 더 세심하게 보고 또 봐서 피드백을 줘야 한다.
자신이 얼마만큼 정확한 의견을 연습생들에게 들려주느냐에 따라 무대의 퀄리티가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연습생들의 무대가 모두 끝나자, 민주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연습 많이 했나 보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아직은 안무나 보컬이 다 완성 단계가 아니라서 상세하게 디테일을 잡는다기보다는 전반적인 방향성 위주로 의견을 줄게. 너무 깊게 받아들이진 말고.”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중간점검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커버곡 레코딩을 마치고. 안무까지 정식으로 다 짜인 상태에서 또 한 번 민주린에게 점검을 받을 예정이다.
“다 좋은데, 원곡 무대하고는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어. 이건 너희가 의도한 건지 아닌 건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만 놓고 봤을 때 솔직히 느낌은 나쁘지 않거든? 오리지널 무대하고 차별화되니까 신선하고, 새롭고. 근데 딱 이 정도 선을 유지하는 게 좋아 보여.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지?”
연습생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너무 유스풀의 칼라를 똑같이 가져가려고 하진 말고. 이게 줄 타는 게 참 어려운데…… 이래서 커버곡 작업이 힘들긴 해. 그래도 너희라면 충분히 잘해낼 거라고 믿고 있으니까. 너무 주눅 들지 말고 자신감 있게 나가자!”
“감사합니다, 선배님!”
“열심히 해볼게요!”
파이널 라운드라서 그런 걸까. 1, 2차 라운드에서 봐왔던 민주린보다는 많이 부드럽고 상냥한 모습을 보였다.
첫 번째 중간점검이 다 끝났다 싶을 때.
“이연아.”
민주린이 권이연만 따로 불렀다.
“잠깐 나하고 따로 이야기 좀 할까?”
“팀장 면담인가요?”
“그런 느낌이지. 아마 A팀도 똑같이 할 거야.”
권이연과 진절혜, 두 사람은 각 팀의 팀장으로서. 그리고 예선 때부터 계속해서 맞붙어온 라이벌 관계로서 주목받는 연습생들이다.
게다가 팀장이라는 힘든 직책을 맡고 있어서, 제작진이 두 연습생에게 카메라 샷을 단독으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게 바로 심사 위원과의 독대, 팀장 면담이다.
권이연은 민주린과 함께 안무 연습실 바로 옆에 위치한 B팀 전용 회의실로 이동했다.
“그쪽에 앉아.”
권이연은 민주린이 시키는 대로 의자에 앉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민주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연습은 잘되어가는 거 같아?”
“네. 나쁘지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멤버들도 다들 잘 따라오고 있고요.”
“프로그램 촬영하는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애들이니까.”
고생한 만큼 단기간에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다는 게 이연의 눈에도 보였다.
이번에는 권이연이 민주린에게 역으로 물었다.
“A팀에는 누가 중간점검을 진행하기로 했나요?”
“은솔 씨.”
“심사 위원분들 중 한 분이 가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요.”
이석호 트레이너일 가능성이 매우 컸지만, 딱히 그렇진 않았다.
“보컬, 댄스, 그리고 기타 무대에 오르는 데에 필요한 종합적인 것들을 다 봐야 하니까. 그러면 나하고 은솔 씨가 딱이지.”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석호 트레이너나 나현아 트레이너. 둘 다 각각 댄스, 보컬 중 한 분야에만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오채일 대표는 예전에 프로듀서 일도 하긴 했었지만, 아무래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가수들에 비하면 이래저래 부족할 수 있다.
어차피 SSS에는 연습생들에게 선배님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둘이나 있으니까.
그래서 제작진은 다른 심사 위원이 아닌 이은솔에게 중간점검 역할을 맡기기로 했다.
민주린이 이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해줬다.
“누가 A팀을 맡을지, B팀을 맡을지는 가위바위보로 정했어. 은솔 씨가 많이 아쉬워하더라.”
“왜죠?”
아쉬워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
이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와 다르게 민주린은 알고 있었다. 이은솔이 권이연을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당사자에게 굳이 이걸 말해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두루뭉술하게 말을 둘러댔다.
“그냥, 다재다능 팀이 좋았나 보지 뭐.”
이은솔도 사람이니까. 다른 팀보다 더 마음이 가는 팀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면 민주린은 어떨까.
이연은 민주린의 속내를 슬쩍 떠볼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접기로 했다.
심사위원이 A팀, B팀. 둘 중에 어느 쪽을 더 많이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아봤자 무대 준비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린이라면 주관적인 요소를 최대한 배제하고. 실력적인 면만을 보면서 평가하는 심사 위원으로 유명하니까 편파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너는 아직 SSS 심사 위원들 말고는 다른 전문가들 앞에서 실력을 평가받아 본 적 없지?”
“네.”
여자로 환생하기 전의 기억도 그렇게 알려주고 있었다.
소속사에서 월말평가를 자주 받아봤지만, 그것도 오채일 대표나 이석호, 나현아 트레이너가 주로 심사 위원으로 들어왔었으니까.
사실상 외부인에게 제대로 평가를 받아본 경험은 없는 셈이었다.
민주린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1차 미션, 어떻게 보고 있어?”
“저희가 열심히, 잘 준비하면 평점은 알아서 좋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말이야.”
민주린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연습생들 사이에서 호랑이 심사 위원으로 불리던 민주린의 그 모습이 오랜만에 드러났다.
“이번 미션은 절대로 방심하지 마. 지금은 너한테 특별 심사 위원들이 누구인지 알려줄 수는 없지만, 제작진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로만 섭외했더라. 나보다도 훨씬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무른 사람들은 아니야.”
민주린보다 더한 심사 위원이라.
이연은 두려움보다 호기심이 더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