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49화
제14화. 파이널로 향하는 길(1)
모든 녹화가 끝나자마자 허훈 PD가 박수를 치면서 출연자, 스태프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먼저 건넸다.
“오랜 시간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스태프들은 허훈 PD가 이렇게 먼저 목소리를 높이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연습생들 중 누구도 스태프들이 왜 저런 모습을 취하는지 물어보지 않았음에도 윤혜선이 먼저 이에 대해 알려줬다.
“허 PD님이 저렇게 말하는 거, 오랜만이거든요.”
“아하…….”
평소의 허훈 PD는 녹화가 끝나도 고심이 많아 보이는 표정으로 일관했었다.
이걸 어떻게 편집하면 좋을지. 이런 생각이 늘 머릿속에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런 허 PD가 오랜만에 이렇게 기분 좋은 반응을 보인 것이다.
허 PD의 모습을 보자마자 윤혜선은 바로 직감했다.
“오늘 녹화가 PD님의 마음에 쏙 드셨나 보네요.”
그걸 입증하듯, 허 PD가 직접 이연과 다재다능 팀원들 쪽으로 다가왔다.
“오늘 촬영, 다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예능감이 좋으시더군요. 나중에 데뷔하시게 되면, 꼭 저희 프로그램에 다시 나와주세요.”
“네, PD님. 감사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할게요!”
그 깐깐한 허 PD가 신인을 이렇게까지 칭찬해 주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PD들에게 칭찬받는 연습생들의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 박도수 매니저는 흡족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 * *
연습생들을 일일이 집에 바래다준 박도수 매니저는 때마침 회사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채일 대표와 홍류현 실장의 부름을 받았다.
“‘스타일 나이트’ 녹화 잘 끝났어?”
“애들이 실수한 거 없지?”
박도수가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말해줬다.
“허 PD님이 애들 엄청 칭찬하더라고요. 방송 잘한다고, 계속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 허 PD가 ‘웃었다’고?”
“예, 대표님.”
오채일 대표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박도수가 눈앞에서 직접 본 것을 아니라고 꾸며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잘한 건 잘한 거니까.
홍 실장도 박도수 매니저의 말이 신기하게 들렸다.
“다른 PD도 아니고. 허훈 PD님이 그랬다니. 오늘 방송 내용보다 허 PD님이 수고했다고 칭찬하는 그 모습이 더 궁금해 죽겠네.”
“실장님은 보신 적 없으십니까?”
“적어도 내가 매니저 생활할 때에는 없었지. 칭찬이 어디야. 쓴소리 안 들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었는데. 허 PD님이 많이 유해지신 건지, 아니면 애들이 정말 그만큼 방송을 잘해서인지 난 분간이 안 가네. 박 매니저가 현장 직접 봤을 거 아니야? 보기엔 어땠어?”
박도수의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후자입니다.”
“그래? 진짜로 팀 명 따라가는 거 같네.”
다재다능. 못하는 게 없는 팀이다.
오채일 대표가 담뱃불을 끄면서 말했다.
“내가 그랬지? 애들, 스타성이 있다니까.”
오채일 대표는 오랫동안 연예계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그동안 그가 봐오고 키워온 연예인들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른다.
그렇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오채일 대표는 스타가 될 연예인 정도는 쉽게 구별이 가능해졌다.
그가 보기엔 다재다능 팀은 지금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연이, 걔가 진짜 물건이야. 두고 봐. 이연이가 나중에 우리 회사 먹여 살릴 거다.”
허 PD의 웃음도 그렇지만, 오채일 대표의 이 호언장담 역시 박도수와 홍류현을 놀라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가 이렇게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적이 근래 들어 있었을까?
두 사람이 알기엔 없었다.
물론 오채일 대표는 다른 연습생들 앞에선 이렇게까지 다재다능 팀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이런 것 하나하나가 다른 연습생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경쟁은 공정하게.
그게 오채일 대표의 방침이다.
세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침 이석호 트레이너가 회사를 나서고 있었다.
“석호야!”
오채일 대표가 큰 소리로 그를 불러봤지만, 이석호 트레이너는 미처 듣지 못했는지 급하게 회사로 향하는 모습을 보였다.
홍 실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석호 씨, SSS 시작한 이후로 많이 바빠 보이더라고요.”
“혹시 숨겨둔 여자 친구라도 있는 거 아닐까요?”
박도수의 농담에 오채일 대표가 ‘예끼!’ 하면서 일침을 가했다.
“애도 있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농담이냐.”
얼마 전, 이석호 트레이너의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
겹경사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석호 트레이너의 표정은 요즘 밝지 못했다.
오채일은 그가 워낙 바빠서 그런 거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도 여기서 농땡이 그만 부리고, 일하러 들어가 보자고.”
“예, 대표님.”
이석호를 따라 회사로 복귀하는 세 남자.
그러나 이들은 알지 못했다.
이석호가 품고 있는 비밀에 대해서.
* * *
1위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팀 연습을 봐주기 위해 안무 연습실을 찾은 이석호의 시선이 날카롭다.
“스톱.”
음악 끄라고 말한 이석호는 연습생들의 안무 상태에 매우 불만족했다.
“무대까지 2주도 채 안 남았는데. 동작이 하나도 안 맞고 있잖아. 뭐냐, 연습 제대로 한 거 맞아?”
“……죄송합니다.”
연습생들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이석호 트레이너의 잔소리를 받아냈다.
1위 아니면 죽음을 달라 팀은 연습생들 중에서 가장 많은 방송 출연 횟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팀 단위 출연만 다섯 번.
하루씩만 잡아먹어도 최소 4일이다.
그만큼 이들은 다른 팀에 비해 연습 시간이 부족해진다는 것을 뜻했다.
그럼에도 방송 출연에 박차를 가했던 이유는 바로 진절혜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조건 방송으로 시청자들에게 자신들의 얼굴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타 방송 출연 금지 해제는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처음에는 좋았다. SSS 말고 경험해 보지 못했던 방송이라는 것에 적응하다 보니 재미도 느꼈다.
하지만 2라운드 마지막 팀미션 일자가 다가올수록, 이 결정의 여파가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연습과 집중력의 부족이 점점 최악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석호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진절혜와 몰래 내통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역시 트레이너였다.
눈앞에서 빤히 연습생들이 망가지는 꼬라지를 보고도 가만히 넘길 위인은 아니었다.
“진절혜. 나하고 잠깐 이야기 좀 하자.”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연습생들은 두 사람의 눈치만 살폈다.
한편, 진절혜를 데리고 카메라가 없는 곳으로 향한 이석호 트레이너는 그녀의 실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금 방송 출연을 고집할 때가 아니라고. 연습이 중요하다니까. 너, 가수야. 아이돌이라고. 지금 네가 방송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니냐?”
“다재다능 팀을 이기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요.”
“어떤 방법인데. 이런다고 시청자들이 너한테 표 줄 거 같아? 가수면 가수답게 무대 완성도를 높일 생각을 우선으로 삼아야 할 거 아니야!”
진절혜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그만큼 이석호 트레이너는 지금 진절혜가 큰 착각에 빠져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조차 진절혜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더 이상 트레이너 선생님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저한테 정보 흘려주지 않으셔도 돼요. 트레이너 선생님도 그게 좋으시잖아요. 그렇죠?”
“…….”
“걱정 마세요. 아버지한테는 제가 잘 말씀드릴 테니까요. 트레이너 선생님한테 피해 갈 일은 없을 거예요.”
“야, 진절혜…….”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리는 진절혜를 보면서 이석호는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뭐 하는 거냐, 나란 녀석은.”
그렇게 한동안 자리를 지키던 이석호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절혜, 이석호.
두 사람이 떠난 공간의 한쪽 구석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투명화 마법으로 몰래 기척을 감춘 채 숨어 있던 이연이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석호 트레이너가 진절혜의 아버지한테 약점 잡힌 거라도 있나 보군.”
그래서 그가 강제로 진절혜의 데뷔를 돕게 되었다…… 라는 시나리오가 얼추 완성되었다.
‘일단 녹음은 해뒀고.’
두 사람을 보자마자 바로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활성화시켜 둔 게 정답이었다.
증거는 확보해 뒀지만.
‘이걸 쓸지 말지는 나중에 정하는 게 좋겠지.’
만약에 이석호와 진절혜의 내통 여부를 인터넷에 공개해 버리면, SSS 프로그램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연도 스스로의 손으로 지금까지 쌓아온 공든 탑을 무너뜨리고 싶지 않았다.
이 녹음 파일은 결국 최후의 거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일단은 진절혜가 쪽에서 먼저 이석호 트레이너와 선을 긋기로 했으니까. 당분간은 혼자서 하려고 하겠지.’
둘이 갈라섰다는 것만으로도 이연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뭐, 내통해 봤자 나한테는 안 되겠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큰 의미는 없었다.
그만큼 이연은 자신의 데뷔에 한 치의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 *
이연이 다시 연습실로 돌아오자, 팀원들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
“속이 많이 안 좋아? 화장실 갔다고 했잖아.”
그럼에도 시간이 상당히 지체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을 때에는 이연의 뱃속 컨디션이 많이 안 좋은 건 아닐까 절로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혹시 그날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이연이 먼저 나서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들려줬다.
“시간 없으니까 연습부터 하자. 각자 포지션 다시 확인하고. 그리고 이번 주 목요일에는 레코딩 잡혀 있으니까 보컬 연습도 해둬.”
오리지널 곡은 연습생들이 녹음까지 직접 해야 했기에 보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안무 연습에 보컬까지. 연습에 투자해야 할 시간이 배가 된다.
그래서 제작진이 치어리딩 미션 때와 달리 이번에는 연습생들에게 3주간의 연습 기간을 특별히 할애한 거였다.
물론 3주가 여유 넘치는 기간이라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다.
일반 가수들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여전히 지옥 일정임에 틀림이 없었다.
보컬 쪽도 이연이 직접 연습생들을 체크해 주고 있었다.
덕분에 다재다능 팀원들은 훨씬 수월하게 연습에 매진했다.
레코딩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보컬 연습을 해보기로 한 연습생들.
이때, 안무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익숙한 남자가 슬쩍 얼굴을 비쳤다.
이석호 트레이너가 보컬 연습에 한창 집중하고 있는 연습생들을 바라보면서 앗차 싶은 표정으로 물었다.
“안무 좀 봐주려고 왔는데. 다음에 올까?”
이연이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들려줬다.
“아니요. 이것만 하고 다시 안무 연습하려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마무리 짓고. 준비 다 되면 나 불러줘.”
“네, 알겠습니다.”
이석호는 실력도 좋고. 인성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째서 내통 같은 것을…….’
이연은 다시 사라지는 이석호 트레이너를 보면서 속으로 혀를 여러 차례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