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38화
제11화. 호랑이 선배님(1)
렛플 엔터테인먼트에 들렸던 이연은 연습생 중에서 가장 먼저 오늘의 촬영지이자 벡스의 소속사 연습실에 도착했다.
미리 와서 백댄서들과 함께 몸을 풀고 있던 이은솔이 권이연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이연 씨 왔어?”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깍듯이 인사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은솔의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그렇게 딱딱하게 안 굴어도 돼. 오늘부터 같이 무대 준비하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조금씩 친해질 필요도 있어.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선배님.”
대답과 다르게 이연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백댄서들은 이런 두 사람의 대화가 재미있는 모양인지 몰래 웃음을 삼켰다.
이연의 뒤를 이어서 다재다능 팀원들이 속속들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평소에 연습하던 LC 엔터테인먼트 안무 연습실이 아니어서 그럴까.
낯섦과 어색함이 그녀들에게 긴장감을 선사했다.
녹화가 시작되기 전에 조연출이 이들에게 말했다.
“카메라는 계속 돌아가고 있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연습하시면 됩니다.”
“예.”
이은솔이 대표로 조연출에게 알겠다고 답했다.
오늘 연습생들이 익혀야 할 노래는 이은솔의 첫 번째 솔로 데뷔곡인 ‘너의 그림자가 되고 싶어’였다.
그 유명한 인기 보이 그룹, 벡스의 멤버가 낸 솔로 앨범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는지, 데뷔하자마자 바로 음원 차트 1위를 차지했던 곡이기도 하다.
장르는 댄스.
안무는 상급으로, 연습생들 입장에서 보면 결코 쉽지 않은 편이었다.
그래도 이은솔 선배님이니까.
연습생들은 비교적 다정한 분위기 속에서 연습을 이어나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아직까지는.
“그러면 일단 우리가 안무 맞춰보는 거, 한번 볼래? 보고 난 다음에 어떻게 안무를 구성할지 상의해 보게.”
“네, 선배님!”
모처럼 화제의 중심에 서 있는 SSS 연습생들이 합류했는데. 백댄서만 연습생들로 바꾼 듯한 평범한 무대를 보여주면 시청자들도 실망할 것이다.
그래서 이은솔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운 안무를 몇 개 곁들일 생각이었다.
그 전에 오리지널 안무부터 먼저 보고 넘어가기로 했다.
노래를 틀자마자 펼쳐지는 강렬한 비트.
연습생들의 어깨가 박자에 맞춰 절로 들썩였다.
노래는 이미 연습생들도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안무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티비에서 보던 무대와 직접 눈앞에서 보는 무대는 박력에서부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은솔은 파워풀한 안무를 선보이면서 연습생들이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마이크를 잡고 무대 위에서 진행만 하던 선배와는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역시 잘나가는 가수는 다르긴 달랐다.
완벽한 군무도 군무였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게 있었다.
격한 안무를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숨 하나 헐떡이지 않는 이은솔의 모습에 연습생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겉으로 봤을 때에는 굉장히 호리호리해 보여도, 이은솔은 꾸준히 운동으로 체력을 기르고 있었다.
똑같은 무대를 몇 번이나 소화해도 그는 지치거나 하지 않았다.
여기에 라이브까지 해야 하니. 톱급 아이돌은 이 정도로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연습생들은 단번에 체감할 수 있었다.
이은솔이 머쓱한 미소로 연습생들에게 물었다.
“안무가 좀 어렵지?”
“그렇긴 해도…… 잘해낼 수 있어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선배님!”
연습생들은 의욕을 불태웠다.
이런 모습, 이은솔도 나쁘지 않게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대는 의욕만 있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다.
“첫 오프닝 때하고 간주 이후부터 오리지널 안무를 짜서 진행할 거야. 1절 파트는 안무를 동일하게 진행할 거니까, 일단 오늘은 여기부터 연습하도록 하자. 그다음에 다 같이 모여서 안무 회의 가져보도록 하고. 원래는 안무부터 짜고 난 다음에 쭉 연습하는 게 좋은데, 시간이 없으니까.”
“네, 선배님!”
“좋아. 그러면…… 이연 씨가 여기에 서고, 우미 씨는 저쪽에 서볼까? 그리고 앨리샤 씨는 오른쪽하고, 그 옆에 비아 씨가.”
나머지는 이은솔과 함께 안무를 선보였던 백댄서들이 채웠다.
센터는 당연히 이은솔이 차지하기로 했다.
두세 걸음 떨어져서 안무 대형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던 이은솔은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좋아. 대열은 이대로 확정하고. 다음, 안무 알려줄게.”
진행자가 아닌 댄스 트레이너로 변신한 이은솔이 자신의 노래 안무를 직접 강의해 주기 시작했다.
“팔을 오른쪽으로 쭉 뻗은 다음에 몸을 대각선 방향으로 살짝 틀어줘. 이 상태 그대로 왼쪽 다리를 반걸음 정도 뒤로 뻗은 다음에 반 바퀴 턴. 그리고…….”
직접 구분 동작으로 시범을 보이면서 연습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덕분에 연습생들은 눈과 머릿속으로 빠르게 안무를 익혀갈 수 있었다.
부분부분 연습하면 잘된다.
하지만 이것을 쭉 이어붙이면, 가끔씩 헷갈리는 곳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자, 처음부터 다시.”
이은솔의 외침에 연습생들은 시작 대형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미가 실수를 저질렀다.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
손뼉을 치면서 이번에도 리턴을 지시하는 이은솔.
이 과정이 25번쯤 반복되었을 때.
연습생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었다.
“앨리샤. 도는 속도가 너무 느려. 다시 처음부터.”
이 ‘처음부터’라는 단어만 벌써 26번째 듣는 거였다.
이은솔은 틀린 부분만 수정해서 다시 안무를 이어나가도록 하지 않았다.
1절 안무를 풀로 완벽하게 소화할 때까지.
그는 계속해서 연습생들에게 반복을 강요하고 또 강요했다.
아무리 쉬운 동작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1분이 약간 넘는 시간 동안 30번 넘게 계속하고 있으면 지치게 마련이다.
게다가 연습생들은 선배가 보고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싸워 이겨내야만 했다.
이것이 부담감으로 작용한 것 때문인지, 연습생들끼리 연습하던 때보다 훨씬 더 빠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를 때쯤.
이은솔이 마침내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연습 지옥을 끝냈다.
“10분 정도 쉬었다가 다시 하자.”
고작 10분이라는 말에 연습생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얼굴로 딱 죽지 않을 정도만큼 연습생들을 굴리는 이은솔.
이연은 그의 모습에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빡셀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다.
물론 이연은 힘들지 않았다.
환생하기 전에는 이보다 더한 연습량을 소화하곤 했었으니까.
다만, 자신보다 다른 연습생들이 더 걱정이다.
이은솔과 같은 팀을 짜면 편할 거라는 기대감이 무너졌으니까.
정신적인 대미지를 어느 정도 입었을 것이다.
여기에 체력적인 문제까지.
‘이중고네.’
이연이 해줄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다.
각자 알아서 잘 버텨주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 * *
그렇게 오늘의 연습이 모두 끝나고.
늦은 시간, 그녀들은 회의실에 모여 나머지 파트들을 채워 넣기 위한 안무를 정하기 위해서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이연을 제외한 다른 연습생들은 그대로 녹다운이 되었다.
식탐이 강한 앨리샤조차 눈앞에 있는 간식거리에 손을 뻗지 못할 정도면 말 다 한 셈이었다.
이은솔이 아직 회의실에 나타나기 전.
연습생들만 모여 있을 때, 비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이은솔 선배님…… 이렇게까지 엄격하게 굴리실 줄 몰랐어.”
이연이 커피로 목을 축이면서 정말로 몰랐냐는 듯이 물었다.
“팬미팅 행사 때 우리, 빡세게 연습시킬 거라고 말씀하셨잖아.”
“그야…… 그냥 웃으라고 한 소리인 줄 알았지.”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뼈저리게 깨닫고 말았다.
다른 연습생들은 이런 이은솔의 모습이 무섭다고 했지만.
권이연은 연습생들의 생각과 많이 다른 편이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은솔이 자신의 무대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거 같아서 좋았다.
프로다운 마인드라고 할까.
무대에 서는 사람이라면, 늘 최고의 무대를 추구해야 한다.
그 한 번의 무대로 인해 관객들의 하루가…… 아니, 평생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무대에 서는 자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자살을 결심했던 사람이 모 가수의 무대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했던 기사가 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권이연이 루웰로 활동할 때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제법 있었다.
무대는 그 사람의 마음까지 바꾸게 만든다.
무대가 단순한 오락 요소가 아님을 이은솔은 잘 알고 있었다.
연습생들끼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때에.
마침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대화의 주된 이야깃거리로 등극했던 이은솔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연습생들은 군기가 바짝 잡힌 듯 앉은 자세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연습에 돌입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어느 순간부터 180도 달라졌다.
이은솔도 그걸 눈치챘다.
그리고 그 원인이 자신의 연습 스타일에 있다는 것도 물론 알고 있었다.
“미안해. 오늘 많이 힘들었지?”
“아, 아니에요! 전혀 안 힘들었어요! 그렇지, 언니들?”
“으, 응! 아마도…….”
빤히 보이는 거짓말이다.
당황하는 연습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은솔은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연 씨는 어땠어? 오늘 내 방식에 맞춰서 연습해 보니까.”
“저하고 잘 맞는 거 같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기뻐하는 이은솔과 달리, 연습생들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내심 이연이 팀장답게 나서서 연습 좀 힘들게 안 시켜줬으면 좋겠다고 항의해 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연은 더하면 더했지, 절대로 연습량을 줄이려고 할 만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돌고 돌아서.
이은솔이 먼저 본론을 언급했다.
“오프닝 무대를 좀 특별하게 꾸며달라는 요청이 있었거든. 시간은 1분 정도? 평소 무대에 비해서 시간이 1분가량 더 추가되었으니까. 여기에 맞춰서 시청자들에게 임팩트 있는 장면 연출을 보여주면 어떨까 싶은데. 혹시 괜찮은 아이디어 있는 사람?”
이은솔의 물음에 연습생들은 절로 시선을 회피했다.
연습생들끼리의 무대도 아니고.
더욱이 SSS도 아닌, 타 프로그램 음악 방송 무대를 꾸미는 일이다.
부담스러운 자리인 만큼,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힘들어 보였다.
이은솔은 이런 점까지도 예상하고 있었다.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연습생 신분이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주도적으로 할 수는 없거든. 이건 내 무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너희가 평가를 받는 무대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PD님도 웬만하면 연습생들 아이디어를 채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달라고 나한테 부탁하셨어. 아마 다른 선배 가수들한테도 그러셨을 거야.”
연습생들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침묵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이은솔의 시선이 최후의 수단인 권이연에게 향했다.
“이연 씨는 어때? 생각해 둔 거 있어?”
왠지 이연이라면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릴 것 같았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오프닝 무대를 연극으로 꾸며보면 어떻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