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 8화
제3화. 이걸 나보고 입으라고?(2)
이연이 루웰로 살아가던 시기에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과 비슷한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귀족들에게는 이와 같은 사상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품위 유지. 풍기문란 절대 금지.
이연은 어렸을 때부터 이런 교육을 받으며 자라왔다.
알고 지낸 지 얼마 안 된 성인 여성과, 그것도 둘이나 같이 알몸으로 있어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 나는 집에 가서 씻는 게 좋겠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언니. 저번에도 우리가 샤워하자고 할 때, 혼자서 몰래 도망가 놓고선.”
“혹시 우리가 불편해서 일부러 피하는 거 아니니?”
비아에 이어 우미까지 이렇게 나오니, 이연 입장에선 할 말이 없었다.
두 사람에게 ‘사실 난 남자다’라고 말할 수도 없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직 이연은 샤워할 때 본인의 몸조차 제대로 못 보고 있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샤워를 하는 마당에, 합동 샤워를 어떻게 하란 말인가.
온갖 핑곗거리를 떠올리면서 좋게 좋게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이비아의 추진력은 오늘따라 거셌다.
“사람들 몰리기 전에 먼저 가자. 빨리 와, 언니들!”
“알았어. 가자, 이연아.”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는 권이연.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이 필살기를 쓰기로 했다.
* * *
먼저 자연의 상태 그대로 돌아간 채 샤워실에 들어선 우미와 비아는 뒤따라 들어온 이연을 보고서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언니, 뭐 쓰고 있는 거야?”
이연은 머리 뒤쪽에 위치한 고무끈을 탁! 하고 가볍게 튕기면서 자랑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안대지.”
“아니, 샤워하는 데 안대를 쓰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이연은 부정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비아의 말이 맞다.
그녀도 여자가 아닌 원래 본인의 몸이었다면 눈 가리고 샤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좋은 핑곗거리가 없을까.
고민 끝에 그녀가 내놓은 대답은 이거였다.
“이것도 훈련의 일종이다.”
“훈련?”
“눈을 가리면 다른 감각 쪽 감각이 더 예민해지니까. 시각에만 너무 의존하면 받아들이는 정보량도 한정되고. 감각 전체를 단련한다…… 이런 뜻이지.”
솔직히 말해서 이연 본인조차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되는대로 지껄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확실히…… 언니가 말하니까 일리가 있네.”
“이연이, 요즘 부쩍 실력이 많이 늘었으니까. 이게 비결일 수도 있겠어.”
우미와 비아는 어느새 이연의 말도 안 되는 주장에 설득되고 말았다.
여태껏 이연이 보여준 게 있으니까.
그래서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연 입장에선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추가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좋아, 나도 이연 언니처럼 눈 감고 샤워해 볼래.”
“안대 있어? 하나 남는 거 있으면 줄래? 나도 해보게.”
“알았어. 내가 찾아볼게.”
이연이 두 사람을 만류하려 했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연습생들을 대상으로 때아닌 안대 붐이 벌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 * *
날을 잡아 방송국을 찾은 32명의 연습생.
몇몇은 타 가수의 백댄서 역할로 무대에 올랐던 경험 덕분에 방송국이 꽤 익숙했지만.
대다수의 연습생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우비, 비아, 그리고 이연의 경우에도 방송국을 방문한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방송국의 위엄에 비아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애들한테 엄청 넓다고 듣긴 했었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스마트폰을 들고 여기저기를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헛웃음을 삼키면서 말했다.
“너희, 방송국 견학 온 거 아니야. 인터뷰하러 왔으니까 호들갑 좀 그만 부려라.”
마치 학생들 인솔에 나선 학교 선생님처럼 박도수 매니저가 앞장서서 연습생들을 이끌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동안에도 비아의 사진 촬영은 그칠 줄 몰랐다.
비아만큼은 아니지만, 이연 역시 적지 않게 놀랐다.
‘여기가 방송국이라는 곳이군.’
주입된 현대의 기억 덕분에 방송국이 어떤 장소인지는 알고 있지만, 눈으로 보니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왕궁의 공연장도 이렇게 넓진 않았었는데.’
풍경도, 사람도. 전부 다르다.
굳이 어느 쪽이 편하냐고 묻는다면, 이연은 아직까진 전생 쪽이 더 편하게 느껴졌다.
방송국이라는 곳이 낯설어서 그랬다.
인원이 많기 때문에 각각 나눠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지나가면서 종종 보이는 선배 가수들.
마주칠 때마다 연습생들은 허리를 깊게 숙이면서 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32명이나 되는 연습생들에게 단체 인사를 받으니, 선배 가수 입장에선 기쁘다기보다는 당혹스럽다는 감정이 더 크게 다가왔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시간도 잠시.
서윤철 PD가 스튜디오에서 직접 연습생들을 맞이했다.
“아직 본 녹화 때 사용할 메인 스튜디오는 준비 중이라서 구경은 힘들 거 같네요. 인터뷰는 여기서 한 명씩 차례대로 진행할 거니까, 나머지 분들은 대기실에 있다가 호명하는 대로 이곳으로 오면 됩니다.”
메이크업까지 이미 준비 완료.
순서는 방송에 출연할 연습생들을 추스르기 위해 진행되었던 월말 평가 순위대로 지정되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맨 마지막이군.’
권이연은 32번이라는 숫자를 부여받게 되었다.
서 PD에 이어서 방송작가가 추가로 연습생들에게 부여된 번호에 대한 전달 사항을 알렸다.
“본 방송 때에도 이 번호는 쭉 유지될 테니까 앞으로 자기 번호가 몇 번인지 반드시 숙지하고 계세요.”
“네!”
가장 마지막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연이었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번호를 바꿔달라고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마지막이 좋은 경우도 있으니까.’
거의 후열에 배치된 이연은 우미, 비아와 같이 대기실로 향했다.
1번은 진절혜의 차례였기 때문에 그녀 혼자 스튜디오에 남았다.
조명 장비가 설치되어 있는 작은 스튜디오 공간으로 향하는 그녀.
의자에 앉자마자 서 PD가 진절혜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
“안녕하세요! LC 엔터테인먼트 소속 3년차 연습생인 진절혜입니다!”
첫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긴장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멘트에 촬영팀은 크게 안심했다.
앞으로 32명이나 촬영을 진행해야 하는데. 1명이 NG를 낼 때마다 시간이 쭉쭉 지체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절혜의 능숙한 시선 처리와 멘트가 마음에 들었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낯설지 않아 보이네요.”
“네. 어렸을 때부터 아역배우 일을 쭉 해왔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아역배우 출신이셨군요. 어쩐지. 다른 연습생들에 비해서 유독 포스가 남다르다 싶었습니다.”
이런 눈에 띄는 경력 하나하나가 카메라 비중을 늘려주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방송에 임하는 각오를 묻는 질문에 대답 역시 당찼다.
“당연히 1위로 데뷔하는 거죠.”
조금의 불안감도 느껴지지 않는 표정.
강한 자신감은 진절혜의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서 PD는 그녀에게 이런 질문을 건넸다.
“같은 소속사에서 연습생으로 있었으니까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라이벌로 보고 있는 참가자가 있습니까?”
서 PD는 이번에 1위를 차지한 권이연의 이름이 언급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니요. 라이벌은 없어요. 굳이 고르자면 제 자신이 아닐까요?”
권이연이 1위를 차지하든 말든. 자신은 신경 쓰지 않겠다.
이런 의지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진절혜를 시작으로 연습생들의 자기소개 겸 인터뷰가 쭉 진행되었다.
촬영만 거의 7시간째.
드디어 마지막 참가자가 스튜디오에 모습을 드러냈다.
“32번 연습생, 권이연입니다.”
단체 미팅 때처럼 권이연의 어투는 여전히 남달랐다.
10대, 20대 젊은 여성의 말투라기보다는 중년 아재의 어투에 오히려 가까웠다.
“선공개 영상 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셨던데. 비결이 뭘까요?”
“열심히 한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인상적인 대답은 아니었다.
질문지를 보던 서 PD의 머릿속에 문득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연습생 중에서 라이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권이연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했다.
질문지에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서 PD가 어떤 대답을 바라고 이런 질문을 날렸는지. 권이연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없습니다. 경쟁 상대는 어제의 제 자신뿐입니다.”
진절혜와 아주 흡사한 대답을 들려주는 권이연.
그녀를 보면서 서 PD의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의미심장한 미소.
재미있는 구도가 나올 것 같다.
* * *
프로그램 명칭이 ‘스페셜 스타 스테이지’, 줄여서 ‘SSS’로 확정되면서 준비는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첫 방송이 이틀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잘될 것만 같았던 준비 과정 중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LC 엔터테인먼트를 찾은 SSS 의상팀이 회사 관계자들에게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의상 준비하는데 트러블이 생겨서…… 일단 참가자분들이 입을 옷 준비해 뒀으니까 한번 직접 입어보세요. 사이즈 안 맞는다 싶으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저희가 어떻게든 방송 당일까지 맞춰서 수선할게요.”
홍 실장이 대표로 알겠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박 실장. 애들 연락 돌려서 의상 입어보라고 해. 시간 없으니까 빨리.”
“알겠습니다, 실장님.”
박도수를 비롯해서 다른 회사 직원들도 32명의 연습생에게 빠르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씩 의상이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모여들었다.
이연 팀 역시 방송에서 입을 의상이라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다.
“유니폼 같은 건가?”
이연의 혼잣말을 들은 우미가 바로 반응했다.
“응. 무대의상과는 별개로, 평상시 녹화할 때 입어야 하는 의상이라고 그러던데.”
비아가 마치 기도를 하는 것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예쁜 옷이면 좋겠다. 그치, 이연 언니?”
“아니.”
비아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연은 예쁜 의상을 바라지 않았다.
‘다 좋으니까, 치마만 아니면 좋을 거 같은데.’
아래에 아무것도 안 입은 듯한 그런 휑한 감각이 이연은 굉장히 싫었다.
그래서 여자로 환생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 번도 치마를 입지 않았다.
물론 음유시인 신분으로 무대에 오를 때에도 마찬가지다.
의상팀이 가져온 의상들이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과연 저 안에 어떤 옷이 숨겨져 있을까.
이연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되었다.
의상팀 스태프가 천을 걷어내면서 말했다.
“옷에 번호표가 같이 붙어 있으니까 그거 보시고 본인 옷 찾아가면 돼요.”
펄럭!
드디어 참가자들이 입을 의상이 공개되는 순간.
유일하게 단 한 명, 이연만 혼자서 절망에 가득 찬 얼굴이 되어버렸다.
교복을 연상케 하는 화사한 핑크빛 의상.
그리고 눈에 띌 정도로 짧은 스커트.
‘이걸 나보고 입으라고?”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