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38화
538화. 아시안 게임(11)
툭, 투두둑. 두두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둑하던 하늘이, 꺼멓게 변하며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느낌으로만 보자면, 슬픈 하늘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추모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건 그냥 날씨일 뿐이었다. 슬픈 사람은 있겠지만, 슬프지 않은 사람은 더 많았다.
파아!
“어으, 살 떨리네, 진짜…….”
4분 경기가 끝났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자, 임효중이 참았던 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몸을 이리저리 풀기 시작했다. 당장 내일 시합인 임효중은 사실 오늘 결승전을 안 봐도 된다. 아니, 보지 않는 게 더 낫다. 그래야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경기장에 있었다. 이유는 하나. 강지영이 황금세대의 위대한 업적의 마지막 퍼즐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선수들을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81부터 마백까지, 사실상 황금세대와 견줄만한 실력자들은 거의 없었다.
황금세대는 왕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했다.
올림픽 이후, 일본 유도는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는 선수는 지금 경기장 위에서 도복을 고치는 미야모토 신지가 유일했고, 다른 선수들은 전체적으로 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유도협회는 이 같은 문제점을 바로 파악했고, 곧장 조치를 취했다. 바로 새로운 유망주의 발굴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미리 준비해 놨던 유망주와 현 국대의 교체다.
일본은 유도에서 만큼은 최고이고 싶었다. 종주국인 것도 있지만, 올림픽에서 가장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종목이 유도가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확실한 ‘골드 밭’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꾸준히 선수들을 관리했다. 기존의 국가대표 1, 2, 3선발 말고도 그 자리를 대체할 유망주를 언제나 준비해 뒀었다. 올림픽 이후, 교체가 시작됐다. 이미 올림픽, 그리고 올림픽 이전에 황금세대와 만난 선수 중에 그들을 넘을 재목이 없어 보여서였다. 거기에 기존 국대들은 마음이 꺾였다.
압도적인 성적.
유도만 하는 것도 아니면서, 올림픽이란 커다란 무대를 접수하는 그 미친 재능에 질려버린 거다. 그래서 교체는 자연스럽게 진행됐고, 결과적으로…… 성공하긴 했다. 유망주들은 세계 유수의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냈다. 우승, 준우승 등등, 확실히 일본 유도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세계에 확실히 알렸다. 하지만 그 선수 전부가 지난 세계 선수권에서 황금세대에게 싹 털렸다. 그냥, 게임도 되지 않았다.
아시안 게임은 말 그대로 아시아 국가만 출전한다. 언제나 한방이 있는 유럽권 선수들은 비출전이란 뜻이다.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1등이 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런 생각 자체가 자만이다. 하지만 황금세대는 자만이 아니라, 자신감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자신감. 그래서 이 경기가 중요했다. 지영이 신지를 꺾고 우승하면, 황금세대 전원 무패 그랜드 슬램이란 말도 안 되는 업적이 달성되는 거다.
그렇기에 컨디션 관리를 해야 하는 임효중도 돌아가지 않고 경기를 직관 중이었다. 그러나 그건 좀 실수였다. 하도 긴장하면서 봤더니 몸이 뻐근했다. 체육관의 열기가 워낙에 어마어마해서, 땀도 많이 났다. 이건 정말 좋은 건 아니다.
하지만 임효중은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강한결도 임효중에게 그만 돌아가라 하지 않았다.
“신지, 진짜 잘하긴 잘하네.”
오히려 조용히 미야모토 신지를 칭찬했다.
“지영이랑 저렇게 붙는 것 자체가 저 인간도 미친 천재라는 방증이지.”
이성진이 뻐근한 목을 풀면서 강한결의 말을 받았다. 시합이 끝났으면 홀가분해야 하는데, 표정에는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 마지막 퍼즐인 지영의 경기가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이런 경기는 사람의 숨통을 조인다. 그냥 동기가 저렇게 빡세게 경기해도 깊게 몰입하면 과호흡이 와 머리가 핑핑 돈다. 그런데 친형제보다도 더 친한 친구의 경기다. 평상시의 마음으로 경기를 관전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관중들도 고작 4분 경기에 어후, 하면서 긴장감을 털어버리려 노력하는 중인데, 강지영과 더없이 치한 관계인 황금세대는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할 수 없었다.
“지영이 이번에 전략 같은 거 안 세웠지?”
강한결이 이성진을 보며 물었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데 정신 무장은 단단히 했어. 신지 저 인간 기세 변한 거 보더니, 금방 알아보고 곧장 페이스 바꾸더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안 되겠으면 그거라도 꺼내라고.”
“그거?”
“우리 지영이의 그 날.”
“아아.”
강지영의 그 날.
친구들 사이에서는 유명했다. 사실 과학적으로 검증된 건 아니다. 아니, 검증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정말 가끔, 1년에 몇 번 안 나오는 이상한 텐션을 말하는 거니까. 이때의 강지영은 정말 뭔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황금세대의 실력을 체급에서 수치화하면, 거의 멕시멈에 가깝다. 하지만 이걸 체급 구분 없이 황금세대 전체를 겹치면?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체력이 깡패라는 말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더 쉽게 말해, 경량급이 중량급과 붙으면 불리하다는 뜻이다.
실제 훈련을 예로 들어서, 이성진과 강지영이 붙으면 승률은 보통 8-2에서 7-3 정도다. 당연히 강지영이 높은 수치다. 그리고 강지영과 임효중이 붙으면 딱 같은 수치를 적으면 된다. 중량급이 약하면 경량급이 충분히 잡을 수 있지만, 자기보다 체급도 윈데, 거기다가 정상급 선수면 고작 한 체급 아래라고 해도 승률은 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이 오면 달라진다.
이날의 강지영은 황석이나 강한결과 붙어도 승률을 반대로 가져간다. 실제로 이걸 검증 아닌 검증을 해보기 위해 강지영과 강한결이 10판을 연달아 붙은 적이 있었다. 4분 자유연습 10게임에서, 놀랍게도 강지영이 승률 80%를 가져갔다. 강한결이 이를 악물고 붙었는데도 잡지 못한 거다.
그런데 다음 날엔 스위치가 내려갔으니 다시 승률이 원래대로 돌아온다.
기이한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친구들은 농담보단 진담으로 강지영의 그 날이라는 이름을 붙인 거였다. 그건 그냥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실존하는 거였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모든 기술을 깨부수고, 터뜨린다. 이걸 알아차리는 건 생각보다 쉬웠다. 눈동자가 초점이 잘 안 잡혔다. 말 그대로,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거다. 불러도 대답도 잘 안 할 정도로 깊게 몰입하는데, 이때는 친구들끼리 눈치를 주고받고 절대 그 상태가 깨지지 않도록 배려해 줬다.
“그거 쓰면, 반칙이긴 한데…… 써서 나쁠 것도 없지.”
황석의 말에 임효중이 피식 웃으며 받았다.
“맞아, 반칙이지. 뭔 제로의 영역도 아니고. 그런데 그게 반칙은 아니잖아? 뭐 믿기지 않지만…… 그게 지영이의 고유 능력인데.”
“맞네, 고유 능력. 기본 패시브. 아니, 액티브 스킬이려나?”
“액티브지. 항상 발동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오랜만에 보고 싶긴 하다. 유도에서. 그때처럼…… 막 사고 직전에 말고.”
“그러게, 나도 오랜만에…… 어?”
“어, 어어…….”
홰액!
떠드는 사이 시작된 경기.
그리고 시작과 동시에 하늘을 나는 강지영. 그러나 강지영은 방어의 대가다. 진짜 막판에 겨우 몸을 틀어 앞으로 떨어졌고, 몸으로 얼굴을 칠 것처럼 짧게 다가오는 신지의 공세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굳히기를 방어했다. 맛테! 시작과 동시에 유효 포인트를 뺏겼다. 하지만 직감이 더럽게 좋은 황금세대는 거기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야, 효중아. 저 각에서 저 겉멋 가득한 회오리 허벅다리 차는 걸 지영이가 놓칠 리가 있을까?”
이성진의 말에 임효중은 고개를 저었다.
저건 임효중도 가끔 차는 기술인데, 스텝을 화려하게 밟는 게 포인트다. 홰액! 하고 돌던 몸이 다시 역방향으로 틀어지며, 그 반동을 이용해 허벅다리를 차는 거다. 그런데 이런 기술은 연습 때는 나와도, 시합 때는 정말 잘 안 나온다. 저건 그냥 툭 밀어치는 거로 기술을 깰 수 있고, 카운터 좀 칠 줄 알면 그냥 역으로 날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강지영은 카운터의 귀재다.
그의 방어 유도가 성립되는 건, 운영과 저 카운터에 있다. 그런데 그런 강지영한테 저런 겉멋 폭발하는 회오리 허벅다리를 먹인다? 미치지 않고서야 절대 해선 안 된다. 불시에 걸어도 마찬가지다. 유도 기술은 대부분이 불시에 들어오고, 그렇기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강지영은 그것조차 카운터를 치는 인간이다. 그걸 누구보다 강지영을 잘 아는 신지가, 강지영한테.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기엔 찝찝했다.
지영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나? 했을 때.
홰액!
이번엔 소매꽂이다. 그것도 지영이 뻗은 손의 소매를 잡는 순간 파고들어 온. 지영은 이번에도 방어에 성공했다. 하지만 유효 포인트는 무조건 뺏긴다.
“이러면…….”
강한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릴 때. 데이비드 심판이 손바닥이 보이게 앞으로 쭉 뻗었다.
맛테!
시도!
이렇게, 지도가 들어간다.
지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게 왜 이상한 거냐면, 지금까지 강지영의 경기 중에 이런 일은 있었던 적이 없었다. 강지영이 기술 두 개를 연달아 허용? 그건 지영이 이기고 있을 때뿐이었다.
지도를 받아도 될 때만, 지도를 허용하는 게 강지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백중세였다. 그런데 연달아서 기술을 허용했고, 지도를 받았다. 그것도 골든 스코어에서. 그냥 쉽게 말해,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어났다. 그렇다면 대체 왜? 에 주목해야 했다. 황금세대는 두 선수를 살펴보다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관중석을 증축해 스탠드에서 경기장은 가까웠다. 시력이 좋으면 상대의 눈빛 또한 충분히 보일 정도로 가깝게 세팅된 경기장이다. 그래서 보였다.
“야 저거…….”
“와, 씨…….”
“뭐야, 저 친구도 그날 같은데?”
“진짜, 어마어마하네…….”
절레절레.
보는 순간 전부 깨달았다.
뭔가 홀린 것 같은 표정. 시린 미소도, 다부진 느낌도 전부 사라지고, 멍한 느낌이 묻어나는 얼굴.
그 얼굴을 보고 황금세대는 다른 걸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주먹을 꽉 쥐며 지영을 바라봤다.
* * *
정신이 번쩍 들었다.
회오리 허벅다리가 어? 하는 순간 들어와 몸이 붕 떠서, 위험을 감수하고 손을 뻗어 매트를 짚은 다음 겨우 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짧게나마 방심한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깨 뒤로 슥 돌려 넣어 잡으려던 잡기에도 반응했다. 손이 전부 뻗어져 회수하기 힘들 때, 딱 그 타이밍에 소매 끝만 댄 다음 그대로 업었다. 그래도 다행히 다른 쪽은 잡히지 않아 겨우 방어에 성공했다. 이성진만큼 날카롭게 들어온 업어치기였지만, 그래도 방어는 성공했다.
하지만.
시도!
반칙 받는 걸 피하진 못했다.
지영은 지도를 받은 순간, 위기감보다 이상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방심해서 기술을 허용? 그럴 리가. 그 어떤 때보다 긴장한 상태였다. 미야모토 신지라는 희대의 천재를 상대하는데 방심? 이게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데 방심? 지영은 그렇게 물렁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당했다.
갑자기 신지의 실력이 대폭 상승해서? 그럴 리가 있나. 그럼 신지의 마음가짐이 변해서? 신지는 충분히 공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도 안다. 공격으로만 지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이건 그럼 평범하게 생각해도 일어날 수 없는 일에 가까운 거다.
‘그런데도 일어났지.’
지영은 웃었다.
그 이유를 신지의 눈빛을 보는 순간 알 것 같아서였다.
어딘지 몽롱한 느낌, 살짝 풀린 입술, 초점이 맞긴 하나? 싶을 정도로 멍한 눈빛을 마주 보는 순간 지영은 그게 뭔지 반사적으로 알아차렸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저 상태는 지영도 가끔 들어가니까.
그러나 지영은 유도에 있어서 만큼은 이 세계에 들어가길 꺼렸다.
회귀라는 어마어마한 반칙까지 저지른 마당에, 상상 이상의 몰입으로 말로는 형용하기 힘든 세계에 들어가는 건, 정말 너무 큰 반칙 같아서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세계에 들어갔던 신지와의 첫 대결 이후, 지영은 단 한 번도 이 세계에 진입하지 않았다. 유도에 있어서 만큼은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얘기가 다르지.’
그래서 자제했는데, 상대가 그 세계에 들어갔다.
그렇다면…… 꺼려질 게 없다는 얘기다.
‘근데 그거 알아, 신지?’
그 세계는, 내가 선배라는 거?
* * *
친구들은 지영의 그 날이라고 불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정말 이상하게 되어버리니까. 이와 비슷한 게 있는지 지영은 조사도 해봤다. 아예 아무런 정보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극한의 흥분 상태에서 나오는 아드레날린 과다분비로 인한 정신착란, 정도의 정보만 얻었다. 지영은 자신의 상태가 분명 그것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 상태에 들어서면, 정말 환각제라도 맞은 것처럼 의식이 몽롱해야 한다. 하지만 지영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지영은 그날에 들어서도, 눈빛이 풀린 것처럼 보여도 의식은 매우 또렷했다.
이게 가장 적나라하게 느껴진 게, 바로 독일에서였다.
소피를 구하던 그때, 트럭이 경적을 울리며 브레이크를 밟던 그때, 지영의 세계는 느려졌다. 확 줄어드는 속도감. 그 속에서 지영만 빠르게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는 자기도 느리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 극단적인 세계가 주는 이점은, 느려진 세계 속에서 의식이 명료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생각할 시간이 많아졌다.
지영이 땅을 박차고 몸을 틀어, M사의 트럭이 자동제어 프로그램이 탑재되어 있기를 바라며 건 도박 수를 그 짧은 순간에 생각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이점이 적용돼서였다. 그 짧은 순간 지영은 모험을 했다. 급정거만 해준다면, 살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리고 그 모험은 성공했다. 끝에 조금 발목을 치이긴 했지만, 그 정도면 끝내주는 결과였다.
고작 몇 번밖에 안 되지만, 지영은 이 세계에 자기가 스스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저건 무의식중에 진입한 것 같지만, 그래도 그건 반칙이야, 신지.’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들어선 것 같긴 한데, 지영이 보기엔 그래도 반칙이었다.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집중을 통해 언제든지 접속이 가능한 지영은 그래서 유도에서는 이걸 쓰지 않았다. 진짜 너무나 반칙 같았으니까. 그래서 쓰지 않았지만, 신지가 먼저 들어섰으니 이제는 거리낄 게 없다.
‘뭔가, 판타지 같네…….’
그렇게 중얼거린 지영은 다른 세계로 들어섰다.
느려진다.
이상한 부유감이 든다. 느릿해지다가, 더 느릿해졌다.
하, 지, 메.
심판의 말이 끊겨 들렸다.
이건 이상한 세계였다. 내가, 내가 아닌 느낌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모두 같은 시계(時計)에서 산다. 이는 절대적으로 공평하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게 불공평한 세상이고, 그 시간을 쓰는 인간에 따라 또 불공평한 결과가 나오지만, 그래도 시간 자체는 공평하다.
만인에게 평등한, 유일무이한 것.
그게 시간이다.
그런데 그걸 배신하는 거다. 착각이나, 환각일 수도 있겠지만 느끼는 입장에서는 확실히 달랐다. 인간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도 이걸 고스란히 이해하는 건, 스스로가 이미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선물일까?
아니다.
회귀 전에도 지영은 이런 세계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그건 확실히 기억했다. 그러니 이건 스스로가 가지고 있던 어떤 능력이다. 그래서 솔직히 꺼려지기도 했다. 아니, 꺼려진다.
스윽.
지금처럼, 신지가 멍한 눈빛으로 뻗은 손을 잡아채, 몸을 돌려 허리후리기를 차는 이 자체가 솔직히…… 너무 물 흐르듯이 흐르니까.
파- 앙-!
파공성이 울릴 정도로 거세게 찬 허리후리기. 유도를 잘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마치 둘이 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정말 두 선수가 붙는 순간, 기술이 터진 거니까. 하지만 유도를 아는 사람들의 시선엔, 다르다.
“왓 더…….”
심판을 보던 데이비드의 입에서 지영에게도 겨우 들릴 정도로 탄식을 터뜨렸다. 잡자마자 한 번에 거는 기술이 특별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정상급 선수들의 매치일수록, 당연히 나오기 쉽지 않다. 정상급이라는 건, 기술 자체에 걸리지 않을 확률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니까. 공수의 절묘한 조화를 이룬 게 탑 레벨 선수니까.
그런데 터졌다.
신지가 두 방을 연달아 터뜨리더니, 이번엔 강지영이 터뜨렸다. 중심이 앞으로 끌려 나온 것도 아닌데, 순수하게 힘, 속도로만 기술을 연결했다. 어? 어어? 하고 놀라기도 전에 미야모토 신지의 몸이 붕 떴다. 그런데 신지는 한 손으로 매트를 짚더니, 그대로 브레이크 댄스의 기술을 쓴 것처럼 빙글 돌았다.
쿵!
무릎을 꿇듯이 앞으로 뚝 떨어진 신지. 그에게 지영은 바짝 몸을 붙였다. 그러자 지영의 다리를 잡으며 반사적으로 방어에 임하는 미야모토 신지. 심판은 다시 맛테를 외쳤다. 마치 짠 것처럼 놓고 다시 일어나 자리에 가서 서는 두 선수. 하지메! 심판은 다시 시작을 외쳤다.
반사적인 경계심.
손을 뻗는 걸 주저한다.
지영은 손을 뻗었다. 쭉 늘어나는 손으로 신지의 눈동자가 돌아가는 게 보였다. 정말 잘 보였다. 손이 뻗어 오자, 본능적인 노림수가 생겨난 거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지영은 손을 빼지 않았다. 그대로 쭉 뻗었다. 손이 어깨 깃을 잡는 순간, 신지는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잡고는 그대로 어깨로 매치기를 걸었다. 아니, 걸려고 했다. 신지의 몸이 주저앉는 걸 보면서도 지영은 그대로 앞으로 전진했다.
조금 더, 조금 더.
‘조금만 더.’
손을 뺐을 때, 중심을 회복하지 못할 때까지, 조금만 더……. 시간이 느리니, 기다림의 시간마저 길다. 1초도 안 걸리는 시간인데, 지영은 한참을 기다렸다가, 손을 뜯었다. 빠르게 달리다가 두 발로 멈춰 서는 것처럼 강하게 매트를 밟으며, 손을 뿌리쳤다.
툭! 투둑!
완강한 저항이 느껴졌다.
신지의 강력한 아귀힘이 도복을 놓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 자체가 지영에게 너무나 유리했다.
쿵!
엉덩방아를 찧는 신지.
지영은 그런 신지를 보며, 한 걸음 물러났다.
맛테!
데이비드 심판은 주저 없이 그쳐를 선언했다.
시도!
그리고 위장 공격 반칙이 들어갔다.
이거로 다시 동점.
지도를 받은 신지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영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메!
다시 시작.
동점에서, 경기는 이어졌다.
길게, 아주 길게.
* * *
골든 스코어 시작 후, 09분 45초 점수 계기판에 적힌 숫자였다. 무려 10분. 두 선수의 경기는 피를 말리는 게임으로 변했다. 베스트 컨디션의 두 선수는 지치지를 않았다. 잡고, 뜯고, 잡고, 뜯고, 잡고, 기술 걸고, 방어하고, 이 과정의 연속이었다.
미야모토 신지가 유효 포인트를 따면, 강지영이 유효 포인트를 따 만회한다. 다시 강지영이 유효 포인트를 따면, 신지가 이어서 유효 포인트를 따냈다. 마치 합을 맞춘 것 같은 경기 내용이지만, 지켜보고 있는 모두는 그런 생각이 일절 들지 않았다.
그냥, 영화 같았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공수의 교환.
입술이 터져 피가 튀고, 잡기 중에 손에 눈을 맞아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것까지, 그냥 한 편의 영화와 같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냥 두 선수의 공수 교환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을 지켜봤다. 그렇게 무려 10분이 흘렀다. 그러나 두 선수의 공수 교환은 끊이지 않았다. 몇 분이 더 지났다. 점수판의 시간이 15분을 넘겼고, 변화가 시작됐다.
“후욱, 후욱.”
“후우, 후우…….”
골든 스코어 15분.
기존 시간 4분.
총 19분이 넘는 혈전. 이 시간 동안 미친 인간들처럼, 악에 받친 것처럼, 신이 들린 것처럼 치고받았다.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체력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다. 숨이 찼다.
19분 동안 쉼 없이 치고받았는데 정상이길 바라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
호흡이 가빠졌고, 꼿꼿하던 허리가 조금씩 내려갔다. 그쳐를 한 지금, 두 선수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날? 모르겠다, 그거 아직 유지 중인가? 당장은 터질 것 같은 속을 진정하는 게 먼저였다.
데이비드 심판은 그래도 시간을 줬다.
두 선수가, 이 미친 격돌을 벌이며 몸이 망가져 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힘을 쥐어짜 내고 있으니 아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도록, 시간을 좀 더 줬다. 그래 봐야 10초 남짓이지만, 그게 어딘가.
지영은 고요함 속에, 신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천천히 허리를 폈다.
20분. 원래 20분하고 이러지 않는 지영이다. 오후 훈련에 자유 연습을 1시간 내내 해도 이렇게 숨을 몰아쉬지 않는다. 그런데도 지금 고작 20분에 이렇게 호흡이 망가진 건, 감속의 세계에서 미친 듯이 날뛰었기 때문이다.
조절이 불가능한 신지가 그렇게 부딪쳐왔다.
필사적으로 기술을 걸었고, 지영은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그렇기에 지영도 다시 필사적으로 공격해야 했다. 안 그러면 반칙을 받을 테니까. 그래서 신지도 필사적으로 방어했다. 이 과정의 반복을 그쳐마다 반복했으니, 몸이 이따위가 되는 것도 당연했다.
“후우.”
“훅, 후우…….”
짧은 시간에 둘 다 호흡을 어느 정도 갈무리했다. 고작 10초지만, 둘은 인터벌을 통해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을 수천, 수만 번을 반복했다. 호흡을 다듬는 것만큼은 세계 최고라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하지메!
다시 격돌하는 순간 호흡은 다시 박살 났다.
덜덜.
손끝이 떨린다.
아귀힘이 떨어졌다. 뿌리치는 걸 버티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잡기는 아예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도 지영은 버텼다. 버텨야 했다. 왜? 이제야 승리의 길이…… 보였다.
“흐윽, 흐윽.”
숨이 막힌 것처럼, 거칠게 호흡하는 신지.
눈빛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그럴 만도 했다. 그 미친 세계에서, 그렇게 미친 것처럼 날뛰었으니 과부하가 걸린 거다. 그 세계는 조심해야 한다. 너무나 기이한 세계지만, 너무나 황홀한 세계지만, 그렇기에 경계해야 했다.
지영은 그나마 익숙했다.
오랜만이라도, 지영은 충분히 경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신지는 이게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냥, 끝까지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예 눈이 풀렸다. 온몸의 근육을 100% 쥐어짠 경기를 20분이나 한 거다. 보통은 기술 걸 때나, 잡기 때나 힘을 딱 주는데, 그 과정이 통째로 삭제되어버린 거다. 그게 신지의 체력을 완전히 말려 버렸다.
지영은 거기에서 승기를 봤다.
그래서…… 끝까지 받아치기만 했다.
이 상태로, 끝까지…….
시간이 더 흘렀다.
‘아…….’
3분쯤 더 흘렀다.
총 경기 시간이 22분이 넘어가고, 곧 25분이 됐다.
신지는 끝까지 견뎠다. 완전히 풀려버렸는데, 정신력 하나로 의지해 지영을 상대해 왔다. 지영은 그렇게 신지가 코너에 몰렸는데도, 카운터부터 시작해 게임을 끝낼 아무런 공격도 하지 않았다.
체력이 바닥나고, 몸이 정상이 아니라도, 신지에게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남아 있었다.
바로, 무지막지한 유도 센스다.
미야모토 신지를 희대의 천재로 올려놓은, 가장 강력한 무기가 바로 센스다. 그냥 천부적이다는 말을 넘어서, 한 시대에 한두 명 태어날까 말까 한 괴물 같은 센스가,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그 무기는 아직도 날이 서 있다.
지영의 움직임에 보조를 맞추며, 그의 육체를 조종했다. 지영은 본능적으로 그 센스에 달린 날카로운 어금니를 봤다.
그래서 지영은 섣부른 움직임 자체를 스스로 봉쇄했다.
유효 포인트 정도만을 따내는 정도에서 멈췄다. 절대 무리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몇 분이 더 지나며, 30분을 넘겼다.
“흑, 흐윽…….”
지영은 숨을 토해냈다.
그리고 들이마셨다. 그런데도 폐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호흡을 담당하는 기관 전체가 비명을 질렀다. 그래도 이겨야 했다.
숨을 억지로 마시고, 억지로 뱉으며 달래고 또 달랬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이겨내야 했다.
끝이 보인다.
신지의 상태는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입가에서 침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과호흡을 넘어서, 호흡 자체가 거의 되질 않고 있었다. 뇌에 산소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것 같았다.
초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 신지의 모습에 데이비드 심판은 너무 고심 중이었다. 이대로 경기를 종료시킬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갈 것인지.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고심하고, 또 고심했다.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도복도 땀을 먹고 또 먹어, 너무 무거웠다.
생각도 멈췄다.
그저, 끝까지 버틴다는 것만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그저 견딘다. 방어하고, 버티고, 유효 포인트를 뺏기면 되찾고. 그것만 반복. 그냥 기계처럼 그것만.
“막고…… 갚고…….”
방어, 운영…….
중얼중얼.
어, 내가 뭔 말을 했더라?
하지메!
경기가 재개됐다.
지영은 상체를 세우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신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주 가느다란 숨만 쉴 뿐. 그런 신지에게 천천히 다가가던 중인데,
“맛테! 맛테에!”
데이비드 심판이 개입했다.
그러곤 얼른 신지에게 다가가더니, 어깨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와르르.
탑이 무너졌다.
풀썩 쓰러진 신지를 반사적으로 안은 데이비드 심판이 의료진을 다급히 불렀다. 지영은 그런 신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끝?
끝난 건가?
이렇게, 끝난 건가?
“아…….”
이겼나 보다.
신지가 들것에 실려 나가는 것을 보니.
지영은 도복을 고쳤다.
반사적으로 인사하고, 또 인사하고, 터덜터덜 걸어 경기장을 빠져나온 지영은 너무 힘들어서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주저앉아서, 벌러덩 누웠다. 눈부신 백광이 두 눈으로 쏟아졌다.
“이겼다…….”
무패 그랜드 슬램.
이제 유도와…… 안녕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정말, 널 놓을 수 있게 됐다.
마음 편하게.
그래서.
“고마웠다…….”
함께해 줘서.
그리고 미안하다.
애증 해서.
지영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환한 미소와 함께.
총 경기 시간, 31분 40초의 대혈투.
승자는, 강지영이었다.
* * *
#에필로그: 이성진
일어나.
자기, 시간 다 됐어.
“매니저님도 아래 도착하셨대.”
“으음…… 몇 시야?”
반사적으로 물었다.
“다섯 시야.”
“어으, 일어나야지…….”
이성진은 몸을 돌리면서 손을 뻗었다. 그러곤 아내 정소영을 끌어당겼다.
“어마, 아잇. 밖에 엄마 있어.”
“문 닫았잖아.”
“그래도, 에이, 에잇.”
쪽.
이성진은 발버둥 치는 정소영을 놔주지 않고 입을 맞췄다. 쪽, 그래도 입 냄새가 날까 봐 뽀뽀만 하고 놔주자, 오히려 정소영이 찐한 키스를 해왔다. 한참 스킨십을 나누고, 일어난 이성진은 화장실로 가서 빠르게 샤워했다. 샤워는 5분이면 충분했다. 물로 씻고, 타올에 바디워시를 뿌려 거품을 내 몸을 닦고, 클랜징폼과 샴푸를 동시에 해서 물로 다시 씻으면 10분도 길다. 마지막으로 양치도 하고, 나와서 머리를 대충 말린 에센스를 발라주고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오자 이른 아침인데도 음식 냄새가 훅 풍겨왔다.
“어머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이 서방 나왔나? 얼른 아침 먹고 출발해야지.”
“네.”
이성진은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불은 켜지 않고 침대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소희가 곤히 자고 있었다. 이불은 다 발로 걷어차고, 아주 곤히 자고 있었다. 이불을 다시 덮어주고, 쪽.
“아빠 갔다 올게?”
흐잉.
아빠 껌딱지 소희는 잠에 곤히 빠져, 뒤척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막 펄펄 솟아나는 기분이었으니까. 밖으로 나온 이성진은 식탁에 앉았다. 그러자 장모님과 아내 정소영이 얼른 밥과 국을 퍼다 줬다.
“죄송해요. 이른 아침부터.”
이성진의 말에 장모님은 푸근하게 웃으셨다.
“가장이 일하러 가는 건데, 이게 뭐 힘들다고 그러나. 자네 가면 나랑 소영이는 그때 좀 자면 되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얼른 아침 드시게.”
“네, 어머님. 잘 먹겠습니다.”
아침은 가벼웠다.
미역국에 계란말이, 어묵 소시지볶음에 김치. 간결한 차림이지만 정이 듬뿍 담긴 상이라서 이성진은 정말 맛있게 아침을 먹었다. 지하 주차장에서 매니저 형님이 기다리고 있어, 이성진은 양치만 하고 바로 집을 나섰다.
“갔다 올게.”
“다녀와. 오늘은 2박 3일이지?”
“응. 더 런닝 찍고 서울 숙소에서 하루 자고, 점심에 지영이 무신 시사회 참석했다가, 아틀란티스의 후예 찍고 내려올 거야.”
“바쁘다, 우리 남편. 서울 숙소에 영양제랑 한약 보내놨어. 그거 빼먹으면 안 된다?”
“그럼, 누가 챙겨준 건데. 형님 기다리시겠다. 갈게!”
“응.”
사랑하는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지하로 내려온 이성진은 깜빡, 깜빡 신호를 보내는 은색 카니발로 다가갔다. 뒤가 아닌 보조석에 오른 이성진은 바로 인사부터 했다.
“형님, 늦었죠? 죄송해요. 수영 누나, 소연이 안녕.”
코디와 메이크업 담당 팀원들에게도 인사하고 벨트를 매자,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차가 도로로 나오자, 전담 매니저인 이수형이 종이 뭉치를 건넸다.
“성진아, 이거 오늘 더 런닝 대본.”
“아, 고마워요. 가면서 좀 볼게요?”
“응, 편하게 봐.”
이성진은 바로 대본을 펼쳤다.
리얼리티 예능? 그런 건 없다. 예전엔 리얼리티 예능은 정말 리얼한 건지 알았다. 하지만 그런 예능도 큰 줄기는 전부 작가의 대본을 따라 움직인다. 말만 리얼이지, 리얼이 아닌 거다. 그때 좀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방송이다. 프로그램의 취지에 맞게 방향을 정해주는 건 당연했다.
더 런닝은 리얼리티 예능도 아니다.
초기에는 그런 걸 달긴 했는데, 지금은 아예 떼어버렸다. 작가만 무려 10명인 대형 예능이고, 큰 줄기부터 중간중간 포인트까지 세세하게 대본에 따라 움직인다. 그래서 출연진들을 스태프는 연기자라고 불렀다. 이성진은 그런 연기자 중 한 명이니, 대본 숙지는 필수였다.
“오늘 참, 서울 오프닝 아니었어요?”
“어제 톡 보냈는데? 충주 조정경기장으로 바뀌었어.”
“아, 그래요?”
이성진은 폰을 잘 안 본다.
그래서 얼른 꺼내 보자, 확실히 와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이 11시다. 보니까 작가들한테도 톡이 와 있었다. 심지어 읽었다.
“아, 어제 저 장모님이랑 와이프랑 한잔하느라, 까먹었나 봐요. 소희 일찍 재우고 달렸거든요.”
“아이고, 촬영 전날 술을?”
“흐흐, 형님 저 이성진입니다.”
“그래, 너 이성진이지. 어쨌든 오늘 오프닝 장소는 충주 조정경기장이야.”
아직 젊기도 하고, 운동도 놓지 않았다. 쉬는 날엔 청석이나 체고 훈련하는 데 가서 같이 도복도 입는다. 그래서 해독 능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7시 좀 전에 도착한 이성진은 분주히 움직이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하러 돌아다녔다.
“안녕하십니까! 상쾌하고 피곤한 아침입니다!”
푸흐!
이성진의 인사에 다들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반갑게 이성진을 맞이해 줬다. 이승희 메인 연출과 오지영 왕 작가에게 인사한 이성진은 차로 돌아와 메이크업을 받았다. 부스스하던 머리를 정리하고, 얼굴에 터치가 시작되자 스물 중반 대학생 같던 이성진은 사라지고, 연예인 이성진이 짠! 하고 나타났다.
“성진아, 오늘 후드 입을까?”
“아니요. 오늘 대본 보니까 추격 신이랑 격한 게임 몇 개 있던데요? 불편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그래? 그럼 활동성 좋은 놈으로 가자.”
“넵!”
스타일리스트 누나가 챙겨준 옷을 받은 이성진은 맨 뒷자리로 가 커튼을 치고 옷을 갈아입었다. 활동성 좋은 청바지와 맨투맨이지만, 워낙에 옷걸이가 좋다 보니 핏이 제대로 살았다. 차에서 내려 점검하는 중에 옆에 차가 와서 섰다. 새까만 카니발. 요즘 의도된 톰과 제리 구도를 형성 중인 김국종이다.
“여어! 성진이 왔구나!”
“형님 오셨습니까!”
“어어, 그래그래. 우리 성진이 오늘 컨디션 어때? 보니까 게임 좀 있던데?”
“흐흐, 좋습니다!”
“그래? 그럼 살살 부탁하자. 형도 이제 나이가 먹어 그른가, 이제 힘이 부치더라.”
참 그다운 패션인 새까만 반바지와 새까만 티셔츠를 입고 내린 김국종의 너스레에 이성진은 바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에이, 저번에 보니까 현역 뺨 치더만. 싫어요! 오늘 더 진심으로 갈 겁니다!”
“야야, 그러기냐?”
“넵, 그러기죠. 어, 혹시 청탁입니까?”
“하면 받아주고?”
“소희가 공주 세트 가지고 싶다던데요?”
“야 이!”
“콜?”
“콜!”
둘은 크크크! 하고 웃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어차피 승자는 대본이 정해준다. 그에 맞춰 최선을 다해 연기하면 된다. 연기자 차량이 속속 도착했다.
“여어, 성진이 안녕.”
“형님 안녕하십니까!”
“어 그래, 토크는 이따 하자.”
“역시, 한결같으십니다! 나만 편한 세상!”
가장 큰형이 창문만 내리고 인사하고.
“성진이 일찍 왔네?”
“누님 안녕하세요!”
“야! 누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
“흐흐.”
“웃지 말고! 누나라고 해봐! 누! 나!”
“네, 누님!”
“야!”
가장 큰 누님이 코디에게 옷 점검을 받으며 버럭하게 만들고.
“성진이 안녕! 너 무신 척위준 가?”
“넵! 누님 안녕하세요! 저 당연히 가죠.”
“그래? 나도 가는데, 같이 갈까?”
“아니요. 전 친구들이랑…….”
“에잇! 왜에! 나도 껴줘!”
“이연 누님이랑 가는데요?”
“앗, 그럼 난 혼자 갈게. 으, 난 그애 이상하게 무서워…….”
작은 누님의 투정을 받아주고.
“으어, 성진아 안녕하냐. 형은 죽겠다. 나 대본 수정해 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아. 으으.”
“형님 안녕하세요! 어제 달리셨어요?”
“어, 어제 우리 레이블 회식 있어서. 어후.”
“그래요? 정혁이 형 알아요?”
“아니 몰라. 난 죽었어.”
“넵, 제가 일찍 매 맞으시라고 다 일러바칠게요.”
“야야! 그건 아니지!”
세 아이의 아빠에서, 네 아이의 아빠가 된 삼촌 같은 형과 만담도 나누고.
“어 성진아. 안녕.”
“형님 안녕하세요!”
“아틀란티스도 대본 바꾼다는 거 같다니까, 참고만 하고 있어.”
“아 진짜요?”
“응. 특급 게스트 섭외된 것 같던데?”
“누구요?”
“네 친구들.”
“어, 안 한다고 했는데?”
“그래? 너한테 그랬어? 근데 된 거 같던데. 나도 오는 길에 연락받았어.”
“와. 이것들이…….”
“하하, 너 놀라게 해주려고 그랬나 보다.”
“장난기만 늘어서 아주. 어후.”
“하하. 모른 척하고 있어.”
“그래야죠. 찐으로 놀라줘야 그림이 살죠.”
“아주 예능인 다됐네, 다 됐어.”
“그럼요, 누구 후계자인데요?”
“야, 난 잘생긴 후계자는 안 두거든?”
“못 생겨져서 올까요? 성형 좀 하면…….”
“이걸 확!”
“흐흐! 맞다, 형. 동운이 형 어제 술 마심. 상태 메롱.”
“뭐? 이걸 그냥! 야 하동운! 너 이 자식!”
여전히 대한민국 탑 MC인 우정혁과 장난도 치고.
완전히 이 세계에 녹아들었다.
“자자, 연기자분들 모이실게요!”
이제는 유도 선수 이성진이 아닌, 방송인이 된 이성진은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서도 떨지 않고, 오프닝 토크를 시작했다.
* * *
#에필로그: 황석
샤르릉.
풍경 소리에 황석은 접시를 닦다 말고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아, 안녕하세요.”
“앗! 진짜 황석이다! 안녕하세요!”
“하, 하하. 알고 찾아오신 건가요?”
“넵! 은밀히 주시하고 있었지요! 가 아니고 제가 이 근처 살아요. 그래서 가게 오픈 준비하는 거 봤어요.”
“아하, 그러셨구나.”
푸근하게 웃은 황석은 기념비적인 첫 손님을 자리로 안내했다.
다이닝 바 한석.
한은정과 황석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를 딴, 두 사람의 첫 가게였다. 정확히는 한은정의 가게였다. 대화 소리를 들었는지 주방에서 한은정이 나왔다. 첫 손님인가? 하는 기대감을 품고서.
“앗! 나쁜 언니다!”
“엥? 갑자기요?”
“히히, 저희 나쁜 은정 회원이에요!”
“악! 제 안티?”
“에이, 안티는 아니죠!”
나쁜 은정은 황석의 팬카페 이름이었다. 황석은 황금세대 중에서도 가장 빨리 품절 된 친구였다. 결혼이야 이성진이 먼저 했지만, 둘은 한 병원에서 태어났고, 심지어 부모님들은 이전부터 친구였다. 그래서 그냥 가족처럼 붙어 다녔는데, 중학교에 들어가 한은정이 뽀뽀와 동시에 나랑 사귀자! 해서 연인이 됐다. 그리고 둘은 연인이자, 가족처럼 지금까지 지내왔고, 작년에 결혼했다.
그래서 황석의 팬에게 한은정은 어마어마한 질투를 받았다.
그런 질투 때문에 황석의 팬카페는 나쁜 은정이란 직관적인 이름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한은정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진짜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귀엽게 질투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황금세대 전체가 빨리 연애를 시작했고, 빨리 결혼해서 자연스럽게 황금세대의 연애와 결혼에 관대해져서였다.
“그럼 나쁜 은정 착한 은정으로 바꿔줄 수 있어요?”
“앗! 그건 싫어요!”
“안티 맞네!”
“히히! 아니라니까욧!”
“맞으면서!”
팬이자 첫 손님과 티격태격하는 한은정을 진정시킨 황석은 바 안으로 들어가 푸근한 미소로 말문을 열었다.
“첫 손님, 환영해요.”
“아싸! 참! 이번에 남우조연상 축하해요!”
“하하, 감사합니다.”
베터런 3편에도 황석은 출연했다. 비중은 베터런 2편 때보다 훨씬 늘어났다. 아니,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비중 자체가 거의 오덕수와 비슷했다. 주조연급. 그러니 엄연히 주연은 아닌. 그렇지만 안정적인 연기력과 화면 장악력, 그리고 화끈한 액션으로 백룡 영화제와 금성 예술대상 남주조연상 2관왕을 달성했다.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핫한 배우 중 하나이며, 이제는 조연이 아니라 배우 황석의 주연인 영화를 기대하는 팬들이 많이 늘어난 상태였다.
“근데요, 다시 벌크…….”
“안티분들? 메뉴부터 시키지 않으시렵니까?”
“아잇! 언니! 안티 아니라니까용, 진짜!”
“흐흐, 알았어요. 이제 안 놀릴게.”
“언니 진짜, 후잉…….”
“우는 척 안 통해요? 그래도 서비스 큰 거 하나 줄게요. 첫 손님이니까.”
“아쌍! 저희 이거, A 세트 주세요!”
“저는 B 세트요!”
“넵, 주문받았습니다. 남편, 말동무 좀 하고 있어. 아, 그리고 남편, 손님 물은 챙겨드려야지.”
그 말에 아! 하는 표정이 된 황석이 얼른 냉장고에서 물과 컵을 꺼내 세팅했다. 그리고 하는 김에 접시와 수저 세트도 같이 했다.
“아까 벌크업 물어보신 거죠?”
“네! 베터런 3편 때보다 확 올라온 거 같은데요?”
“눈썰미 좋네요? 확까진 아니고, 천천히 증량 중이에요.”
“네? 증량이요? 아 설마 범죄의 도시 5편 확정된 거예요?”
“네, 손님이 들어오셨을 때쯤 기사 나갔을걸요?”
“어, 진짜요?”
“네.”
“우와. 우와!”
둘은 얼른 폰을 꺼내 보더니, 진짜 올라간 기사를 확인하곤 꺄꺄! 거리며 좋아했다. 진짜 황석의 팬이었다. 그래서 황석은 기분 좋게 웃었다.
“빌런! 빌런 역으로 들어간 거죠?”
“네. 맞아요.”
“대박! 대박!”
범죄의 도시.
심플한 이 제목의 영화는 벌써 4편까지 제작됐다. 그리고 총 관객을 무려 4,500만이나 채웠다. 3편이 조금 별로여서 700만밖에 안 됐지만, 4편이 초대박이 터지며 4편 합쳐 4,500만을 달성했다. 그런 범죄의 도시는 곧 5편 촬영을 시작한다. 황석은 거기 빌런으로 캐스팅됐다. 조연이 아니라, 범죄의 도시 주인공 마동철과 대립하는 주인공 역으로. 그 캐스팅 확정 기사는 좀 전에 나갔다.
빌런이지만, 범죄의 도시 빌런 역은 대한민국 모든 배우가 탐내는 배역이었다.
정말 남녀 구분 없이 모든 배우가 말이다. 4편의 빌런을 여배우가 맡았는데, 액션은 없었지만 진짜 희대의 악녀 역을 제대로 보여주면서, 그 역할에는 이제 남녀 구분 없이 모든 배우가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 치열한 경쟁 끝에 배역을 딴 배우가, 바로 황석이었다.
흥행이 보증된 작품이고, 인기몰이가 확정된 배역이다. 범죄의 도시 작품과 작품 안의 빌런 역은 그런 힘이 있었다. 두 사람은 황석의 팬이다 보니, 이렇게 좋아하는 거였다. 악역이라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황석은 악역을 이미 맡아본 적이 있었고, 그 안에서 이미 충분히 빌런이 뭔지 느낌 충만하게 보여줬기에, 걱정하지 않는 거였다.
“촬영은 언제 들어가요?”
“음, 다음 달 크랭크 인이라고 들었어요. 근데 아직 확실하진 않아요. 배우들 준비가 끝나면 들어간다고 했거든요.”
“아하! 히히! 첫 주연이다. 축하드려요!”
“하하, 고마워요.”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팬이 정말 고마웠다.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한석 다이닝은 느낌이 좀 달랐다. 여기는 딱 세트 메뉴밖에 없는데, A 세트는 한식이 베이스고, B 세트는 일식이 베이스다. 한은정이 일주일에 2, 3일씩 충주로 내려가 이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사토 이치카 씨의 가게에 가서 전수받은 일식이라, 맛은 보장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일본식 조림이에요. 새콤달콤해서 입맛 돋우기 좋을 거예요.”
“앗! 맛있어 보여요!”
“맛도 좋답니다. 후후.”
“혹시 추천하는 술은 있나요?”
“어, 미성년자 아니에요?”
“어? 우와, 언니 대박!”
“후후, 아닌가 보네요? 오늘 A 코스는 사케가 어울려요. B 코스는 화이트와인이 어울리고, 드릴까요?”
“네!”
황석은 대답을 들은 즉시 움직였다.
가격이 비싸지 않은 중저가의 사케와 화이트 와인을 잔과 함께 능숙하게 세팅해, 전문가 포스 철철 넘치게 잔에 따라줬다.
가벼운 대화와 함께 속속 나오는 요리.
첫 손님은 정말 만족하고 돌아갔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 아니, 만족감이 철철 넘치는 얼굴이라서 황석은 안심했다.
첫날이고, 홍보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후 12시까지 손님은 없었다.
셔터를 안에서부터 내리며 가게 정리를 마치자 한은정이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기다리고 기다렸던 우리 시간을 가져볼까?”
“……응.”
황석의 부끄러움 가득한 대답을 들은 한은정이 씩 웃으며 거침없이 다가와 황석을 안았고, 그녀의 판타지가 시작되었다.
* * *
#에필로그: 임효중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단원의 커다란 인사와 함께 연습이 끝났다.
“후우, 후아.”
“효중아, 힘들어 보이는데? 너 요즘 체력 너무 떨어진 거 아니니?”
땀으로 범벅이 되어 주저앉아 있던 임효중은 그 말에 고개를 들어, 헛웃음을 터뜨렸다.
“선생님이 절 너무 굴린 거라는 생각은 안 드시고요?”
“이 정도로 굴리긴 뭘 굴리니. 그냥 적당했지.”
“……선생님이 아는 적당히와 제가 아는 적당히가 많이 다른가 봅니다.”
“후후, 약한 소리 하기는. 얼른 씻고 와. 할 말 있다며?”
“네, 금방 씻고 올게요.”
“사무실로 와.”
“네.”
임효중은 일어나 샤워실로 가서 얼른 씻었다. 씻고 나온 임효중은 이문정의 사무실로 가며 연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오빠!
“훈련 끝났어?”
-응! 막 씻고 나왔지롱! 오빠는?
“나도 지금 막 끝났어. 이제 선생님 미팅 가는 길이야.”
-아, 에리카 동생 그거?
“응. 아무래도 아쉬워서. 내가 직접 해보게.”
-우와, 오빠도 추진력 하나는 끝내준다. 우리 오빠 원래 수동적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네?
추진력?
그런 게 아니다.
가슴이 공허해서, 그걸 채우려고 일을 만드는 것뿐이다.
인생에 가장 큰 동반자와 같던 운동이 사라지자, 처음엔 괜찮았는데 지금은 공허했다. 하지만 임효중은 그런 속내를 감췄다.
“하하, 그냥, 아까워서 그래.”
-그게 그거지! 그럼 미팅 잘하고! 끝나면 연락 줘! 나 오늘 12시에 잘거야!
“알았어.”
-그럼 수고링!
“응, 너도.”
쪽쪽. 소리와 함께 끊긴 통화. 그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언제나 에너지가 넘치는 강유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씻기는 기분이었다. 아니, 진짜로 씻겼다. 특히 정신적인 피로에는 강유진의 애교가 직빵이었다.
똑똑.
“선생님, 임효중입니다.”
“응,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간 임효중은 챙겨 온 태블릿을 내민 뒤, 영상 하나를 재생시켰다. 한 소녀의 춤과 노래가 담긴 영상이다. 이걸 보여주는 의도를 대번에 파악한 이문정의 눈빛이 단숨에 변했다.
춤 한 곡, 노래 한 곡.
“잘하네. 아이돌 지망생?”
“네, 아직은 지망생이에요.”
“어디 연습생이야?”
“아직 소속은 없습니다.”
“그래? 근데 영상 뒤에 책장 보니까, 한국 애는 아닌 것 같네?”
“일본 애예요.”
“아아. 그래. 근데 이걸 나한테 왜 보여줬을까?”
이문정의 질문에 임효중은 크게 숨을 마신 뒤, 본론을 꺼냈다.
“이 아이, 제가 제작해 보고 싶어서요.”
“응? 제작? 벌써? 너 나이가 이제 스물 꺾였는데? 벌써 제작해 보게?”
“네. 아까워서요. 참고로 이 아이, 연습 시작한 지 3개월 된 친구예요.”
“어…… 그래?”
3개월이란 말에 이문정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뮤지컬은 종합예술의 극치다. 연기, 노래, 춤까지 모든 게 들어가 있다. 그리고 이문정은 그 세 가지를 가장 잘 가르치는 프로듀서였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뮤지컬이다.
“걸그룹 쪽이지?”
“네, 아무래도요.”
“그럼 나완 상관없지 않나?”
“뮤지컬 그룹도 병행할까 해서요.”
“응?”
“요즘은 데뷔 전에 연기고 뭐고 다 배우잖아요. 그런데 전 연기보다는, 아예 뮤지컬도 같이 병행해 보고 싶습니다. 뮤지컬, 매력적이잖아요.”
“그럼! 매력적이지!”
이문정은 임효중의 말에 대번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녀는 한평생 뮤지컬의 음악감독을 맡아 왔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턴 직접 기획도 했다. 뮤지컬의 메인 프로듀서. 이문정은 이 바닥에서 가장 능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뭘 바라는데?”
“애들 트레이닝이요. 이 아이 중심으로 5인조를 만들 예정이거든요.”
“아하. 음. 요즘 아이돌 데뷔 돈 많이 들어가는데. 아. 너 임효중이구나. 돈은 문제없겠네. 음, 뮤지컬이랑 결합한 아이돌이라……. 나쁘지 않네. 새로운 시도고.”
나중에 뮤지컬로 데뷔하는 게 아니라, 아예 병행이다.
그게 임효중의 기획안 중 하나였다.
“정확한 기획은 안 나온 거지?”
“네. 일단 선생님들부터 모으고 제대로 시작하려고요.”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런데 효중이 네가 처음부터 다 가르치려고?”
“아니요. 브로드웨이 가야 하잖아요. 일단 형들 부를 생각입니다. 같이 오디션하고, 저 가 있는 동안 트레이닝은 맡겨두게요.”
“형들? 아아 카일이랑 수혁이?”
“네, 이따가 만나기로 했습니다.”
“추진력은 좋네. 그런데 선생님만 있으면 뭐해. 데뷔 이후를 맡아줄 전문가가 없는데.”
“도와주실 분도 오늘 만납니다.”
“오호? 음, 그럼 나는 트레이닝만 부탁하는 거지?”
“네.”
“흠…….”
이문정은 영상을 다시 재생했다.
임효중의 말이 맞다면, 고작 3개월 연습한 아이다. 그런데 그녀가 보기엔 발성은 잘 잡혀 있고, 목소리도 여간 딴딴한 게 아니었다. 춤도 잘 춘다. 풋풋한 느낌은 있어도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그녀의 눈엔 그냥 보였다. 이 아이의 천재성이. 그리고 이문정은 천재를 가르치는 데 정말 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타고난 교육자.
그게 이문정이었다.
임효중은 그걸 아니까 다짜고짜 소녀의 영상을 들이민 거다. 교육 욕구가 확 피어나도록.
“좋아. 근데 나 비싼 거 알지?”
“제자 DC 좀 해주세요.”
“흥, 어림도 없지. 너 계약할 때 한 푼도 안 깎아줬잖아. 나랑 세 작품이나 같이했는데.”
“대신 브로드웨이 진출 제자 얻으셨잖아요? 그 홍보비가 더 셀 텐데요?”
“뭐, 그렇긴 하지.”
임효중은 내년 초에 브로드웨이에 선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진출이다. 작품이 아닌 배우 단일 진출로는 말이다. 더블 캐스팅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당히 주연을 꿰차기도 했다. 뮤지컬 바닥에서 임효중은 이문정 사단으로 꼽힌다. 그래서 그녀가 얻은 홍보 효과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그래도 정가로 가야지. 맞다. 그래도 팀 전체적인 수준이 별로면, 알지?”
“넵, 잘 뽑을게요.”
“그래그래. 그럼 얘기는 끝?”
“넵, 끝.”
“오키오키, 가봐.”
“네, 선생님. 감사합니다.”
훠이훠이.
내쫓는 손짓에 임효중은 피식 웃고는 일어나 사무실을 나왔다. 다시 탈의실로 돌아와 짐을 챙긴 임효중은 시간을 확인하곤, 이후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톡방에 메시지를 남겼다.
효중: 지금 출발.
카일: ㅇㅇ 나도 출발.
수혁: 나도.
다다다.
연달아 온 메시지를 확인한 임효중은 주차장으로 내려와 얼마 전에 바꾼 데스티니 신형에 올랐다. 아직 한국에 판매 허가는 났으나 풀리지 않은 차량이지만, 친구 찬스로 구매할 수 있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딱 30분 걸렸다.
먼저 들어가 잠시 기다리자, 카일과 수혁이 거의 동시에 들어왔다. 프로젝트 아이돌 때 같은 멤버였던 이들이다. 데뷔 전까진 사이가 안 좋았지만, 데뷔 이후 메가 히트를 터뜨린 다음에는 앙금을 풀고, 좋은 형 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여, 브라더.”
“형, 어서 와. 오랜만이다.”
“오랜만이지.”
“수혁이 형도 오랜만. 잘 지냈지?”
“나야 뭐 항상 같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앉자, 단도직입적인 카일이 먼저 말했다.
“뭐 시키기 전에, 일단 왜 불렀는지나 듣자.”
“참 여전하다, 형은.”
“사람 바뀌면 죽는 거랬다.”
“하하.”
가볍게 웃은 임효중은 태블릿을 꺼내 아까 이문정에게 보여줬던 영상을 보여줬다. 그리고 먼저 참고해야 할 것도 알려줬다.
“참고로 그 애, 3개월 배운 애야.”
“3개월? 그럼 뭐 거의 생 초짜…… 어?”
카일은 고개를 갸웃했다.
리더이자, 메인 댄서였다. 타고난 춤꾼. 브레이킹부터 시작해 종류 가리지 않고 모든 장르를 수준급, 그 이상을 구사하는 댄서가 카일이다. 먼저 춤 영상을 보던 카일은 실망하려던 기색을 지우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영상을 시청했다.
그리고 그다음 노래 파트에선, 수혁이 눈을 빛냈다.
카일이 타고난 춤꾼이라면, 수혁은 타고난 보컬리스트였다. 노래 하나는 기가 막힌. 수혁도 고작 3개월 배운 아이의 노래를 정말 집중해서 들었다.
역시 두 번씩 돌려본 뒤에야 시선을 떼는 둘.
“정말 이게 3월짜리라고?”
“응. 내가 확인했어. 그런데 3개월이 아니라고 해도, 이 정도면 포텐 충분하지 않아?”
“충분하지. 뭐 걸그룹 세계에서 생태계 교란종은 못 되어도, 충분히 상위 1%는 들어가지. 그런데 진짜 3개월짜리고, 앞으로 더 성장할 여력이 있다면, 생태계 깨부수긴 하겠다.”
“노래도 잘하네. 음색이 기가 막혀. 여리면서도 딴딴하고, 까랑까랑한 이런 음색은 진짜 가지기 힘든데. 나인 걸스의 태인 선배님이랑 비슷하고 느낌도.”
역시 둘은 금방 포텐을 알아봤다.
카일은 수혁의 말이 끝나자 다시 본론으로 직진했다.
“그래서 얘는 왜? 어디 연습생인데?”
“소속사 없어. 일본 애고, 근데 교포라서 국적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너 설마, 얘 기획하려고?”
“응. 형들, 우리 걸그룹 하나 만들자.”
“야, 아이돌 제작이 뭔 장난인 줄 아냐? 그거 돈도 많이 들고 신경 써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카일이 대번에 반발했다.
수혁은 차분한 성격답게, 임효중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난 아닌 거 알지. 우리 데뷔 엄청 힘들었잖아. 잘 알아. 그런데 욕심나잖아. 제작. 형들도 저번에 해보고 싶다고 했고.”
“그렇기야 한데…….”
조금 넘어온다.
임효중은 목소리를 좀 더 은근하게 바꿨다.
“형, 이런 애들 흔치 않다. 다른 애들만 잘만 뽑으면 1티어에는 무조건 들어.”
“음…… 마스크도 좋긴 하네. 여배우 상이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자. 트레이닝은 형네 학원에서 하고, 그리고 이문정 선생님도 도와주실 거야.”
“아 진짜? 아, 맞다. 뮤지컬도 병행하고 싶다고 예전에 그러더니, 이 애들 그렇게 방향 잡게?”
“응. 길은 여러 개일수록 좋으니까. 빡세긴 하겠지만, 가능성은 있어. 이문정 선생님이 도와주면.”
“그건 그렇지. 음 그런데 애들 훈련 열심히 시키면 뭐해. 곡은. 안무는? 우리 그쪽으론 인맥 없잖아. 그리고 음방 같은 스케줄은 어떻게 잡게. 너나 나나, 수혁이는 그쪽으론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래서 그걸 도와주실 분을 모셨지.”
“어? 누구?”
“오실 거야. 시간도 다 됐…….”
임효중이 시계를 보는 순간, 카일과 수혁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고개를 90도로 숙이며 인사를 박았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와 있었네?”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40대 초반의 여인.
프로젝트 아이돌을 인수해, 메가 히트를 쳤던 아이돌 제작 전문 프로듀서 추소진이었다. 워낙에 무서웠지만, 또 챙겨주는 건 한도 끝도 없이 챙겨줘서 두 얼굴의 마녀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대략적인 얘기는 들었는지, 임효중의 옆에 앉아 바로 태블릿을 돌려 영상을 재생했다. 그러곤 딱 한 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얜 뜨겠다.”
“그죠?”
“응. 얘는 무조건 돼. 근데 얘 솔로는 아니지?”
“네, 최소 5인조 구상 중입니다.”
“다른 멤버는? 오디션으로?”
“네.”
“그럼 우리 애 하나 데려가. 실력이 지 혼자 백조라서, 데뷔 못 하는 애 있어.”
“어, 그래요?”
“응. 혼자 너무 잘하니까, 어떻게 매칭을 시켜봐도 안 되겠더라. 그런데 저 애 보니까 잘 맞겠다. 걔는 입덕상이거든. 얘는 센터 비주얼이고. 일단 제일 필요한 건 다 갖췄네. 그럼 둘이네? 셋만 잘 구해봐. 봐서 되겠다 싶으면 데뷔 스케줄은 내가 짜줄게.”
“네, 감사합니다.”
“지분은?”
“투자하실 생각이죠?”
“받아주면.”
“공정하게 가시죠. 딱 25%씩.”
아이돌 제작은 돈 잡아먹는 하마와 같다.
하지만 다들 연예계에서 성공한 사람들이라서, 각자 2, 3억 준비는 별로 어렵지도 않았다.
“나쁘지 않네. 너희들은? 할 거지?”
추소진의 말에 카일과 수혁은 숨도 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아이돌 프로듀서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는 추소진이 고개를 끄덕인 거면, 그건 무조건 되는 거다. 그러니 발을 뺄 이유가 없었다.
“근데 너 브로드웨이 가지 않냐?”
“가요. 내년에. 가기 전에 세팅만 끝내놓고 가게요. 어차피 일정 6개월밖에 안 되니까.”
“그럼 그때까지 쉬어도 될 건데, 너도 참 바쁘게 산다.”
“하하.”
바쁘게 살고 싶다.
다들 자리를 잡은 친구들처럼.
그리고 평생 안고 있던 것에서 멀어지니, 가슴이 허해서 뭐라도 채워 넣고 싶었다. 그런 속내를 숨긴 임효중은 그냥 웃었고, 세 사람은 얼추 느낌이 왔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너도 참…… 천재들 틈에서 고생이 많다.”
“…….”
추소진의 위로 듬뿍 담긴 말에 임효중은 쓴웃음을 지었고, 카일과 수혁은 절대 인정하지 못한다는 눈빛이 되었지만, 그 속내를 내뱉지는 않았다. 천재들 틈에서 고생이 많은 천재, 임효중은 바쁘게 살고 싶었다.
* * *
#에필로그: 강한결
“어휴, 한결아. 넌 피부도 어쩜 이렇게 곱니?”
“어? 저 고운 편인가요?”
“그럼! 내가 그래도 이 바닥에서 경력 10년이 넘는데, 남자 여자 떠나서 너처럼 피부 좋은 애를 본 적이 없어.”
“지영이는요? 지영이 피부도 장난 아닌데.”
“아, 본 적 있네.”
하하.
강한결은 메이크업을 받으며 가볍게 웃었다.
“미안미안. 걔를 깜빡했네. 그런데 지영이는 진짜 반칙이지. 걔는 피부에 흠잡을 곳이 하나도 없어. 진짜 어떻게 그리 깨끗하던지. 보면서 정말 놀란다니까?”
“좋긴 하죠. 그 고생을 하고, 특별히 관리도 안 하는데 정말 좋잖아요.”
“그러니까. 워낙에 희고 고아서, 따로 메이크업 안 할 때도 있거든? 그런데도 자체 발광하더라. 하여간 반칙이야, 반칙. 미에 관심 있는 세상 여자 전부가 피부에 돈을 정말 어마어마하게 들이잖니. 한두 푼이야, 그게? 그런데 지영이는 돈 한 푼 안 들이잖아. 아휴.”
“타고난 거죠.”
“응, 그런데 너도 타고났어. 점수를 매기면 너도 95점은 넘어.”
“감사합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하는데, 똑똑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문 근처 소파에 앉아 있던 스태프가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저 조영웁니다.”
“어, 팀장님.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1년 후배 조영우가 결재서류를 품고 들어왔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거울 속 강한결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사님, 저 조영웁니다.”
“응, 영우야. 오늘 결재서류지?”
“네, 이사님. 끝나면 드리겠습니다.”
“아니야, 지금 줘.”
“네!”
서류를 건네받은 강한결은 고민도 하지 않고 펴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자 바로 타박이 들려왔다.
“너는 오늘 같은 날까지 꼭 그래야겠니?”
“당분간 못 보니까 더 하고 가야죠.”
“어휴, 너도 진짜 일 중독이다, 중독이야.”
“그러라고 제가 이사잖아요. 이 나이에 이사 직함 달았으면, 열심히 해야죠. 안 그러면 사람들이 욕해요.”
“너를 욕해? 누가? 그건 새로 나온 사회적 자살 방법이니?”
“하하.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 그 정도 맞아. 고개 좀 들어볼래?”
“네.”
강한결은 연희 스포츠 재단의 이사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시작했다. 강한결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변화가 생겼다. 본래는 스포츠 후원 전문 재단이었다. 소속된 선수만 무려 100여 명에 가까운 대형 재단이었는데, 지금은 다른 후원도 시작했다. 그 후원은 정말 강한결다운 선택이었다.
바로, 보육원에서 자라다가 18세에 단돈 500만 원과 함께 세상에 내팽개쳐지는 보호종료 아동을 대상으로 한 후원이었다. 500만 원. 적은 돈은 아니다. 하지만 거주지가 없는 아이들에게, 이 돈은 정말 너무나 적은 돈이었다. 그래서 그런 아이 중 꽤 많은 아이가 범죄에 노출된다.
강한결은 그런 아이들을 중점으로 케어하기 시작했다.
스포츠 재단의 이름으로 주거용 숙소를 전국 각지에 설립했다. 돈이 뭉텅이로 나갔지만, 강한결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이런 강한결의 선택에 꽤 많은 지원금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황금세대가 갹출했다.
낡고 허름한 빌라를 임대해 리모델링해, 숙소로 지원했다. 남자아이는 남자아이들끼리, 여자아이는 여자아이들끼리 살 수 있게 배려해줬다. 강한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단순히 쉴 공간만 잡아줘서는 아이들 케어가 제대로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을 벌였다. 아이들이 일할 공간이 필요하니까.
물론, 주력은 공부였다.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은 계속 다니게 하면서, 주말에 알바 자리를 챙겨줬다. 그럼 학교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받지 않았다. 정말 억울하게 학교를 못 다니는 케이스가 아니면, 강한결은 퇴학당하거나 학교를 포기한 아이들은 문제아로 규정했다. 그런 아이들은 오히려 노력하는 아이들에게 방해만 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고, 한 인터뷰에서 그 생각을 강력하게 말했다.
물론 여지는 있다.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일터에 간 아이들은, 예외로 쳤다.
하지만 남을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했던 아이들은 전부 지원 대상에서 뺐다. 애초에 스포츠 재단 때도 강한결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인성이었다. 그건 보호종료 아동 지원을 시작했을 때도 당연히 적용됐다.
그렇기에 강한결 이사님은, 할 일이 매우 많았다.
오늘 같은 날도 일해야 할 정도로.
다시 똑똑.
“이사님, 정아영입니다.”
“어, 들어와.”
“실례하겠습니다.”
문이 열리고, 투피스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얼굴을 보면 나이는 많아 봐야 스물 하나둘 정도로 밖에 안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 어리진 않았다. 5년 전에 보호 종료가 되고, 바로 하나 아래 동생과 함께 강한결이 후원하기 시작한 1기 멤버 중 한 명이었다. 서울 상위권 대학에 들어갔지만, 졸업과 동시에 연희 스포츠에 들어왔다. 다른 좋은 회사로 가라니까 죽어도 싫다면서 우기고 우겨 강한결의 비서를 자처한 사람이었다.
“잠실 경기장은 어떻게 됐어?”
“네, 대관 완료했습니다. 저희가 원하는 일정에 맞춰주겠다고 합니다.”
“혹시 말 바꿀지 모르니까, 계속 확인해야 해. 그쪽은 아영이 너한테 맡길 거니까, 잘할 수 있지?”
“네, 이사님. 맡겨주십시오.”
“그래, 고생했어.”
꾸벅.
살짝 고개 숙여 강한결의 말을 받은 정아영은 다음 보고를 올렸다.
“성남시 숙소 건도 잘 해결될 것 같습니다. 마침 건물주께서 안 그래도 사회 환원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세보다 싸게 임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인테리어 얼른 해서 아이들 주자. 지금 그쪽에 숙소 못 해준 애들 몇 명이지?”
“꽤 됩니다. 아까 확인한 바로는 어제 종료된 아이까지 와서 스물한 명입니다.”
“많네. 걔들 지금 다 한 숙소에서 자는 거지?”
“남녀 구분은 따로 해주고 있습니다만, 네.”
정아영의 말에 강한결은 한숨을 쉬었다.
스물한 명이면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 아이들을 한곳에 두면, 문제가 생길 때가 많다. 물론 최대한 인성을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모르는 거다. 꼭 그렇게 무리를 지으면 대장 행세를 하고 싶은 놈이 있고, 이런 놈들은 꼭 사고를 치니까.
그럼 여기서 가벼운 문제.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범죄에 노출될까?
몇 가지 방법이 있지만, 가장 큰 방법은 바로 선배다.
먼저 보호 종료가 된 선배. 먼저 범죄에 몸담은 선배. 이들의 꼬드김에 넘어가 범죄에 발을 담그는 경우가 태반을 넘는다.
강한결이 이런 경우로 경찰서에 나간 것만 못해도 스무 번이 넘는다. 지금 보호 중인 애들 중에도 분명 그럼 꼬드김을 받는 아이가 있을 거다. 썩은 고름 하나로 전체가 물들기 전에, 나눠서 분리해야 관리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빨리 분리하는 게 좋다. 강한결은 이런 쪽으로는 정말 자비가 없었다. 그러나 인테리어라는 게, 하루아침에 끝나는 게 아니라서,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따가 가서 좀 다독여 줘. 불안할 거니까, 몇 명은 데리고 가서 숙소 보여주고.”
“네, 이사님.”
“고생이 많다.”
“아닙니다. 이사님 아니었으면 저나 수진이나 이렇게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 생각은 절대 못 했을 테니까요. 특히 수진이는…….”
“됐어. 또 왜 옛날 얘기를 꺼내고 그래.”
강한결의 부드러운 웃음에 피도 안 날 것 같은 정아영의 얼굴에 금이 갔다. 얼굴은 저래도 눈물이 어찌나 많은지, 회식 한 번 하면 눈물을 한 1L는 쏟는 게 정아영이다. 벌컥! 말도 없이 열린 문으로 이사 오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샛노란 머리.
분홍색, 무릎까지 내려오는 원피스를 입었는데, 위엔 가죽 자켓이다. 강한결의 속을 무던히도 썩였던 정수진이다. 정아영의 동생이고, 강한결을 만나기 전엔 껌 좀 씹으며 놀던 아이였다. 다행히 아이들을 괴롭히진 않았다. 삥을 뜯지도 않았고, 그냥 고아라고 무시당하는 게 싫어서 강하게 행동하는 애였다.
그런 애를 정상으로 돌리기 위해, 꽤 고생했던 아이였다.
“너 트레이닝은 어쩌고?”
“효중 샘이랑 같이 왔지롱! 올, 우리 이사 오빠 멋진데? 까비, 내가 나이만 좀 많았어도…… 크! 악! 아 왜 때려!”
“말버릇 진짜! 너! 내가! 이사님한테 버릇없이 굴지 말랬지!”
“악! 아악! 아 아파!”
큭큭.
강한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메이크업을 해주던 경주 누님이 대번에 머리를 톡 쳤다.
“주름 생겨! 그리고 너네!”
“앗! 죄송합니다!”
정아영이 얼른 고개를 숙여 사과하곤 동생을 질질 끌고 나갔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그녀가 거울 속 강한결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너도 정말, 대단하다. 대단해. 수진이 쟤가 너 속 썩이던 애였지?”
“네. 마음은 착해요. 강한 척하는 거, 보니까 금방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자존심이 워낙에 강해서, 그거 푸는 데 시간 좀 걸렸죠.”
“그래 보인다. 이야, 아무나 못 하는 거야, 역시.”
다시 절레절레.
“아휴, 손님 또 들이닥칠 거 같은데, 얼른 메이크업 끝내고 머리 만지자.”
“네.”
그녀의 말처럼, 손님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다 그와 정말 친한 사람들이라서, 들어오지 못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는 세팅 시간이 끝나고 잠시 뒤.
“신랑! 입! 장!”
진정한 의미의, 만인의 축하를 받으며 버진로드를 걸었다.
* * *
#에필로그: 강지영
올해의 남우 주연상, 수상은…… 축하합니다! 무신! 강!
‘어, 지금 날 부른 건가?’
우와!
짝짝짝.
지영은 생각 없이 앞의 스크린과 전년도 남우 주연상 배우를 보다가 자기의 이름이 불려, 조금 얼떨떨해졌다.
“지영! 으하하! 축하해! 축하하네!”
다니엘의 축하에는 그냥 멍했고,
“축하해, 강! 하하!”
제임스의 축하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올해는 정말, 당신의 해네요. 너무 축하해요.”
그러다 제니퍼의 부드러운 말에 정신을 완전히 차렸다.
짝짝짝!
모두가 일어나 자기를 보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지영은 그 박수를 받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상황이 파악되자, 하아, 한숨이 나오며 기분 좋은 미소가 입에 걸렸다. 주변을 돌아보면서 자기를 축하해주는 이들에게 꾸벅, 꾸벅, 인사를 한 뒤 지영은 단상으로 내려갔다.
작년도 수상자 크리스 에반젤이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지영은 그의 포옹을 피하지 않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히어로 캐릭터를 연기했던 그는, 요즘엔 사적으로 자주 만난다. 그가 다음 작품을 같이 하자고 지영을 꿰는 중이라서 그렇다. 그런 그에게 트로피를 받았다. 묵직했다.
‘아카데미에서 남우 주연상이라…….’
좋은데?
이는 지영으로서도 뜻깊었다.
마이크 앞에 선 지영은 기라성 같은 배우들을 잠시 바라봤다. 일세를 풍미한, 일세를 풍미 중인, 떠오르는 신성까지, 전부 모인 시상식이다. 영화 팬이라면 악수 한 번 해보는 게 소원인 사람들이 눈앞에 전부 앉아 있었다. 그런 그들이 열렬히 박수를 보내다 지금은 입을 다물고 자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이 안 좋을 수가 없었다.
“음, 큼. 아, 일단 감사합니다. 이런 큰 상을 주셔서.”
휘이익!
지영의 말에 다시 짧은 환호가 나왔다.
“사실 못 받을 줄 알았습니다. 아니, 기대를 안 했다는 게 맞겠네요. 인종 이런 문제 때문이 아니라, 요즘 저의 연기는 좀 정체기에 있었고, 그 연기는 이미 상당한 혹평을 받았습니다. 다행히 무신 척위준 3편이 히트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 개인적으로는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작업이었습니다. 그래서 내심 바라면서도, 내심 포기했었습니다. 그런데, 받았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혹평은 사실 아주 적었다.
그리고 히트라곤 했지만, 사실 전 세계 흥행 성적 1위를 바뀌어버린 게 무신 척위준이었다. 또한 추격자에 합류해 제대로 안착까지 성공하기도 했다. 강지영이 보여준 흥행 성적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그렇기에, 사실 이번 아카데미의 남우 주연상은 강지영을 제하고는 논할 수 없단 말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그러니 지영을 빼면, 누구나 지영의 수상을 인정했다.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는 어색할 수 있는 동양인 히어로에게 편견 없이 열광해 준 팬들도 정말 고맙습니다. 그저 재미 하나만을 봐준 많은 분에게, 또 고맙습니다. 척위준 출연에 고민하던 저를 애타게 잡아준 다니엘 감독님도, 고마워요.”
하하!
마지막에 좀 짓궂게 얘기하자, 다니엘 화이트는 하얀 치아를 내보이며 껄껄 웃었다. 그는 이번엔 상을 받지 못했지만, 이전에 2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2관왕. 상업영화 감독으로 명실상부한 거장의 반열에 오른 다니엘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열사의 땅에서 고생하고, 혹한의 추위를 이겨내며 고생한 우리 스태프들도 너무 고맙습니다.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무신 척위준은 없었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지영은 이어서 가족, 친구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수상 소감을 마쳤다.
시상식이 끝났다.
수많은 배우가 다가와 사진을 요청했고, 사인을 요청했다. 에프터 파티에 참가해 오랜만에 술도 마시고, LA에서 이틀을 더 보낸 지영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
세계 최대 시상식에서 주연상, 감독상을 수상한 한국의 배우나 감독은 많았다. 하지만 아카데미에서 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는 지영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공항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지영이 나오자 주모! 샤따 내려! 를 실제로 외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지영을 보며 꺅꺅 거리다가 풀썩 주저앉는 팬도 있었다. 지영은 짧게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 전체가 지영의 얘기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지영은 그런 시끄러움을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은 충주에 있었다.
호암동 근처의 땅 200평을 매입해 아예 새롭게 집을 지었다. 친구들은 농담 삼아서, 강지영 생가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집에 도착하자 양유진이 환한 미소로 나와 지영을 꼭 안았다.
“수상, 정말 축하해요. 정말.”
“……고마워. 당신 근데 울어?”
“응? 울긴요. 누가 울어요. 나 안 우는데?”
“눈물이 그렁그렁한데?”
“에이, 좀 넘어가요. 그냥 당신 얼굴 보니까 그냥 눈물이 났단 말이야.”
“알았어.”
집 안으로 들어온 지영은 언제나 한결같은 미소로 자신을 봐주는 어머니와도 포옹했다.
“고생했다. 축하해, 우리 아들.”
“감사합니다. 엄마가 다 잘 키워주신 덕분이에요.”
“후후, 안 그래도 자부심 느끼고 있단다. 밥은? 아직이지?”
“네, 배고파요. 근데 이따가 애들 온다고 하니까 조금만 차려주세요.”
“어? 그래? 애들 온다니?”
“네. 축하 파티하자고, 가족들 전부 출동한대요.”
“너는 왜 그걸 지금 말하니? 잠깐만. 집에 먹을 게…….”
“아니, 집에 먹을 게 없던 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말씀 안 드렸어요. 그리고 준비는 저 혼자 천천히 해도 되고요. 애들 지금 출발한다니까 시간도 넉넉해요.”
“넉넉하기는! 방 청소도 해야 하고! 음식도 하고 그러려면 한두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는데! 가만있어 봐. 아들, 밥은 차려 먹을 수 있지?”
하하.
친구들은 엄마에게 또 다른 아들들이다. 워낙에 어려서부터 가깝게 지냈으니 아들이 맞았다. 반대로 지영도 친구들 부모님에게 아들이었다. 어머니가 주방으로 후다닥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그걸 도우러 따라가는 양유진에게 물었다.
“애들은?”
“아직 체육관! 오려면 한 시간 남았어요!”
“아, 맞다.”
애들.
아이들.
지영도 결혼했다.
성대하지 않은, 가족과 지인만 온 결혼식이었다. 그게 벌써 오 년 전이다. 그리고 한 해 뒤에, 아이들이 태어났다. 이란성 쌍둥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너무나 예쁜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운 4살 레벨을 찍으면서, 아빠엄마의 정신과 체력을 사정없이 말리는 말썽꾸러기들이었다.
지영은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신발을 신고 나갔다.
창고에서 캠핑용품을 꺼냈다. 날이 차니까, 밖은 안 돼서 따로 유리로 지어 놓은 공간을 이용하기로 했다. 의자만 스무 개 가까이 된다. 그릴도 여러 개 빼서 중앙에 세팅하고, 숯도 미리 세팅했다. 불은 붙이지 않고, 일단 넣어만 뒀다.
테이블을 펴고, 걸레를 빨아 와 깨끗이 닦았다.
양유진이 준비해 놓은 식기를 가져다 놓고, 날이 선선하니 고기도 빼서 랩에 씌워 가져다 놨다. 이런 지영의 행동은 정말 익숙했다. 밖에서나 배우 강지영이지, 집에서는 그냥 평범한 남편이고 아들인 지영이었다.
착착 준비하는데, 양유진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그에 몸을 돌려보니 정문이 열리며 차 한 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반대쪽 지영의 차 옆에 주차하고 내린 사람은 이성진이었다. 이제 벌써 서른이 다 되어가는 이성진은, 확실히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철없이 보이는, 풋풋한 소년은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리고 대신 한 가족의 가장인 친구가 대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지영을 보자마자 환한 미소를 짓는 이성진. 그는 다가와 지영을 꽉 안았다.
“축하한다, 진짜!”
“고맙다. 너도 대상 축하해.”
“그건 저번에 받았으니까, 오늘은 너만 축하하는 거로!”
“하하, 그래.”
포옹을 풀은 이성진이 정소영이 내리는 짐을 대신 받으며 말했다.
“이거 안에 가져만 놓고 나올게?”
“응. 소영아 오랜만. 소희도 안녕?”
꾸벅.
지영의 인사에 이성진과 정소영의 딸 이소희가 배에 가지런히 손을 대고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지영 삼촌.”
“응, 안녕. 소희 이제 다 컸네? 이제 꼬마 숙녀라고도 못 하겠는데?”
“아직 더 커야 해요. 중학교 가기 전에, 엄마 넘는 게 제 목표예요.”
“그래? 하하!”
“다행히 엄마 키 보니까, 목표는 이룰 수 있을 것 같아요.”
하하!
똑 부러지는 이소희의 말에 정소영은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영은 그런 모녀를 보며 또 웃었다. 말이 많았던 결혼식이었지만,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축하해, 지영아.”
“고맙다.”
축하를 끝으로 인사를 끝내고, 두 사람을 얼른 안으로 들였다. 아직 바람이 차다. 교대하듯이 이성진이 나와 같이 캠핑 준비를 했다. 난로를 틀자 바로 훈훈해졌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친구들이 속속 들어왔다.
미운 4살을 넘어, 폭주하는 7살 아들을 데리고 온 황석과 한은정 부부.
아장아장 걷는 딸과 아직 품에 안아야 하는 1살 아들을 데리고 온 임효중과 강유진 부부.
세상 도도한 공주님과 함께 온 강한결과 양지원 부부.
친구들이 전부 모였다.
그리고 마치 주인공처럼 근처 합기도 체육관을 끝내고 돌아온 딸과 아들.
조용하던 저택이 금방 소란스러워졌다.
추운 날씨인데도 잔디밭에서 뛰는 데 정신이 없는 아이들과 뒤에서 지켜보는 엄마들.
좋은 시간이었다.
하하 호호 웃으면서,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지영은 친구들이 주는 술을 빼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술을 권했다. 아이들을 재우러 엄마들이 먼저 일어나 빠지고, 오롯이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왔다.
“아, 좋다…….”
이성진이 술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멍하니 중얼거리자.
“그러게, 좋네…….”
하고 임효중이 받았다.
술이 몇 잔 더 돌았다. 그러자 얼굴이 너무 뜨거워서, 지영은 잠깐 바람 쐬러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조용히 따라나온 강한결.
“술 취했어?”
“나? 당연히 취했지. 오늘 많이 마셨잖아.”
“그랬지. 많이 마셨지. 너 그렇게 술 많이 마시는 거 처음 본다, 진짜. 하하.”
“그냥, 기분 좋은 날이잖아. 상을 빼고 그냥, 이렇게 모이는 것도 오랜만이고.”
“맞아, 오랜만이지.”
다들 바쁘다.
이성진은 방송일로 바쁘다. 공중파 1개씩에, 종편에서 2개, 총 다섯 개나 하는 이성진이다. 상대적으로 여유롭다고 하겠지만, 남는 시간은 또 자기관리가 일이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연희 스포츠 재단 일을 돕는다.
황석은 한석 다이닝 바와 연기 일로 바쁘다. 범죄의 도시 5에서 연기력을 제대로 증명한 황석은 이젠 충무로가 가장 믿고 찾는 배우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시나리오를 쓸 때,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쓰는 배우, 황석. 한석 다이닝 바를 도우면서 연기에, 마찬가지로 재단 일을 도우니 바쁘지 않을 수가 없다.
임효중은 뮤지컬 쪽에서 완전히 자리 잡았다.
하지만 그쪽보다는 HC레이블 책임 프로듀서 직함 때문에 더욱 바빴다. 임효중은 아이돌 두 팀을 제작했다. 그리고 두 팀 전부 크게 성공했다. 두 팀은 전부 1티어 아이돌이 됐고, 지금은 3번째 팀을 제작 준비 중이었다. 유일하게 재단 일에서 손을 돕지 않는 친구였다. 대신, 가장 커다란 금액을 지원했다.
강한결은 뭐……. 하루에 자는 시간이 서너 시간 남짓이었다. 그거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해도 될 것 같았다.
지영은, 제일 여유로웠다.
배우는 작품에 들어가기 전까진, 한량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러니 모이기 힘들었다.
명절 때는 무조건 모이자고 해서, 그때를 빼면 1년에 1번 모일까 말까였다. 각자 위치가 있으니 휴가도 같이 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한때는 그게 서운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이해했다. 그리고 인정도 했다.
이제는 옛날처럼 쉽게 모이기 힘들다는 것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책임져야 할 것도 많아지고, 그렇기에 소중했던 것이 잠시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도 같이 이해하고 인정했다.
“그래도 이렇게 모이는 게 어디야. 좋지? 오랜만에 보니까.”
“응. 좋지.”
너무나.
매일매일 이게 꿈이 아니기를 바랄 정도로, 좋다. 서른이 넘은 지금은, 그냥 하루하루가 너무 좋다. 회귀한 시점보다도 더 지난 지금, 다 건강하게 행복하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좋다.
보상일까?
그 아팠던 시간을 감내해야 했던 내게 주는, 아버지의 선물일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했다. 가끔 꿈에 나오셔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가시는 아버지. 꿈이란 것은 깨고 나면 희미해지기 마련인데, 모든 꿈이 명료하다. 마치,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그렇기에 알았다. 꿈이 아닐 수도 있고. 꿈이라도, 어쩌면 현실과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때론 무섭고 두려웠다.
아니, 조금 자주.
아니아니, 많이 자주.
그러나 내색할 수 없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니.
없어야 하…….
“지영아.”
“응?”
“꿈 아니야.”
“…….”
“이렇게 행복한 게 꿈이면, 너무 슬프잖아.”
“…….”
뭘까. 마치 다 안다는 저 눈빛과 말투는. 말할 수 없는 건데, 그래서 말하지 않은 걸 건드리는 저 말은.
강한결은 지영을 보며 그냥 웃고 있었다.
그런 강한결을 가만히 바라보던 지영은 어느 순간, 피식 웃었다.
“어쩐지…….”
너무, 완벽하더라.
-完
#작가의 말
긴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은 글이라 중간에 적당히 끝낼까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유도는 사실 제게는 애증입니다. 저는 유도 자체를 싫어하진 않았습니다. 초기에 말씀드렸다시피, 제법 잘했거든요. 73체급에선 손에 꼽히는 선수였습니다. 체전 입상도 여러 번 했고, 용인총장배 같은 메이저 대회도 입상했었으니까요. 조금 더 자랑하자면, 그래도 또래에선 66의 김주진 선수의 라이벌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뭐, 중학교 때 소체 결승, 그다음 추계 중고연맹 대회 준결에서 붙어 박살이 났지만요. 그래도 저희 또래 최고의 천재라 불렸던 김주진 선수와 아주 짧게나마 라이벌 관계를 해봤던 적이 있었네요.
그러니 유도 자체는 재미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는 유도를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유도 자체는 재밌지만, 그 외적인 요인이 제게 한없이 마이너스였거든요. 그랬던 제게 이 소설을 쓰는 건 정말 큰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누구보다 전문적으로 쓸 자신은 있지만,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고 할까요. 그래서 연예인이란 타이틀을 주어, 유도 얘기만 하지 않게끔 설정을 짰습니다. 그렇게 쓰다 보니까,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나는 이제 유도 소설을 쓰지 않을 테니, 제대로 써서, 제대로 안녕하자.
주인공이 유도를 하는 경우는 있어도, 유도 자체가 베이스가 되는 소설은 쓰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길어도, 성적이 잘 안 나와도 완결을 빨리, 급하게 치지 말자. 이렇게 생각하며 글을 썼습니다. 그러다 보니 21권이나 썼네요.
이제는 저도, 애증의 유도를 조금은 더 좋아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다음 작품은, 강지영과는 180도 다른 주인공으로 내세울 예정입니다.
미친개 휘안.
제 데뷔작이었던 제국의 군인 2부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