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36화
536화. 아시안 게임(9)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금일의 마지막 경기, 남자 73체급의 결승전을 대하는 관중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강지영의 팬이라면, 미야모토 신지의 존재를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강지영은 세계에서 가장 인지도 높은 사람이다.
오죽하면 미국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강지영 이름은 알 거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 인지도는 곧, 그 자체로 인기다.
그런 강지영의 인기 상승은 큰 굴곡이 많았다. 순차적으로 계단을 밟아 올라간 게 아니라, 폭발적으로 올라갔다. 마치 쏘아진 로켓처럼. 그 과정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로켓은 한 발 쏘아지기 전에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는데, 마치 그런 그것과 같이 지영의 인기는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형성됐다. 그 과정을 보다 보면, 와 어떻게 견뎠지? 하는 생각이 절로 난다.
미야모토 신지는 그런 강지영의 인기 굴곡의 걸림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으로 강지영이란 인간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미야모토 신지를 조연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 반대로 생각했다.
그도 이미 하나의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지영과는 결이 다르지만, 일본 내에서 그의 인기는 한국에서 강지영만큼이나 유명 인사다. 유례없는 천재로 이미 고등학교 때부터 매스컴을 탔고, 강지영에게 첫 대회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패배를 당하고 난 걸 빼면, 정말 승승장구가 뭔지를 보여줬다. 아시안 게임부터 세계선수권, 가노컵, 파리 오픈, 마스터즈까지, 지영이 아시아 선수권에 나오기 전까지 그는 전승으로 세계 유도계와 일본 내에 그 이름을 떨쳐 울렸던 선수였다.
전적으로는 분명 전패지만, 그 누구도 미야모토 신지를 강지영의 아래로 두지 않았다.
그건 이미 두 선수가 격돌했던 모든 경기에서 증명됐다.
강지영은 천재다. 미야모토 신지도 천재다. 두 선수의 기량은 정말 한 끗 차이, 혹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격렬하게 치고받았고, 그 경기 결과에 대해 누구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진정한 스포츠맨십도 보여줬다.
부상 당한 강지영의 발을 단 한 번도 건드리지 않고, 끝까지 자기 기량으로만 승부를 본 미야모토 신지를 높게 사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그는 진짜 스포츠맨이다. 이 시대에 쉽게 보기 힘든.
여전히 만연한 인종차별이 숨 쉬는 곳이 스포츠 세계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더럽기까지 한 곳이다. 매너는 쉽게 찾기 힘든 곳이다. 예로 축구를 보면 이해가 쉽다. 보면, 이건 축구를 하자는 건지 싸움을 하자는 건지 모를 더러운 플레이가 어마어마하게 일어난다. 구기 종목인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감정이 더 상하기 쉬운 투기 종목에서 미야모토 신지는 오만했을지언정, 비열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신지를 지영보다는 아래로 봐도, 그를 조연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만년 2등이라는 꼬리표가 달리긴 했지만, 존중받는 선수였다.
하나의 세계 주인공.
미야모토 신지.
그 선수는 결국 또다시 강지영을 만났다. 이 매치는 모두가 기다리던 매치였다. 강지영의 팬을 제외하고, 순수한 유도 팬들 사이에서 이 매치만큼 기대되는 경기는 없었다.
빅매치.
말 그대로, 커다란 경기.
그 두 선수의 시합을 보는 건, 그 어떤 경기를 보는 것보다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두 선수에게, 어떤 심리적 부담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렇게 해달라고 따로 방송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자연스럽게 이렇게 됐다.
“진짜 신기하다니까.”
한국 선수단이 대기 중인 곳으로 올라온 이성진은 상상 이상으로 고요해진 경기장을 보면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일 경기가 있는 임효중이 그 말을 받았다.
“누가 아니래.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적막이라니, 난 결승전에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관중은 본 적도 없다.”
“그만큼 존중한다는 거겠지. 지영이나, 저 미야모토 신지나.”
“신지는 인정이지.”
황금세대 또한 미야모토 신지를 인정했다.
그는 실력과 매너가 정말 좋은 선수였다. 특히 올림픽에서 보여준 그 매너는, 황금세대에게도 아주 인상 깊게 남았다. 마치 각인이 된 것처럼. 그런 선수가 지영의 호적수라는 것이 고맙기도 했다.
“근데 좀 부럽다.”
“응? 뭐가?”
“지영이는 미야모토 신지가 있고, 한결이는 베카우리 라샤가 있잖아. 그런데 나나 너, 석이는 저런 라이벌이 없으니까.”
“뭐? 하!”
난간에 턱을 기대며 한 이성진의 말에 다들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걸로 타박하고 그러진 않았다. 심지어 웃음을 터뜨리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라이벌의 존재는 과연 득일까, 실일까?
세 친구는 전부 실이라고 봤다.
스포츠는 혼자 하는 게 아니다.
스포츠의 재미는 경쟁에서 나온다.
이는 절대 명제였다.
이 치열한 경쟁에 관객은 환호하고, 돈을 지불한다. 그러면서 시장이 형성된다. 경쟁이 없는 스포츠? 아마추어나 단순히 취미 생활을 제외하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스포츠에서 적수는, 필수적인 요소였다.
다시 축구로 따져보자.
맨체스터에 두 팀이 있는데, 이 팀 하나가 10년간 모든 리그를 씹어먹는다. 다시 이후 10년간 다른 팀이 리그를 폭격한다. 이런 스포츠가 과연 재미있을까? 어차피 우승은 정해진 건데? 경쟁도 없고, 경쟁이 없으니 치열함이 없는데? 이런 리그는 폭발력이 없다. 이기는 팀 선수들도 어차피 이길 거니 대충 할 거고, 지는 팀은 어차피 질 거니 의욕 없이 대충할 건데, 이런 리그를 어떤 미친놈이 열광하면서 돈을 내고 볼까?
그런 거다.
스포츠에서 라이벌이란 것은.
맞상대, 호적수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셋에게는 없었다.
황석은 좀 고전하긴 했어도, 다 확실하게 제압하고 무패 행진을 달리고 있었다. 이성진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베 히후미가 유일한 대항마로 여겨졌었는데, 더러운 반칙으로 강제 은퇴 당하면서 그 또한 호적수는 없었다. 언제나 신성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 선수 중에 미야모토 신지 정도 되는 천재성을 갖추고, 진심으로 노력하는 선수는 없었다. 임효중은 뭐, 체급의 제왕이라 칭해지는 선수였다.
무적.
문자 그대로 무적이라 칭해지는 선수가 임효중이었다.
호적수?
그런 존재가 없으니 모두가 그의 발아래 있었다.
물론 편하게 경기를 하면 좋긴 좋다. 하지만 황금세대는 유도에 진심이었다. 유도란 스포츠가 가진 치열함을 사랑하기까지 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렇기에 아쉬운 거다.
적수가 없음이.
이걸 싸가지없게 말하면.
유도가 재미가 없는 거다.
“맞네, 그건 좀 부러운 거네.”
임효중이 순순히 수긍했다.
큰 위기 없이 세계 정상에 오른 임효중이었기에, 이성진의 말을 쓴웃음을 지으며 받았다. 황석도 고개를 끄덕였다. 미야모토 신지와 같은 호적수의 존재는, 사실 축복받은 거라는 것을 모두가 동의했다.
“쉿, 입장한다.”
“…….”
“…….”
“…….”
강한결의 말에 떠들던 황금세대가 입을 닫았다.
양쪽 대기실 끝에서, 두 선수가 등장하고 있었다.
강지영은 청색 도복, 미야모토 신지는 백색 도복.
확연히 다른 기세로 들어선 두 선수가 다섯 계단을 올라 경기장에 입성했고, 나란히 마주 보고 섰다. 이어 심판이 들어와 자신의 자리에 서서 입장하라는 수신호를 보내면서, 경기가 시작됐다.
* * *
두근, 두, 근.
좋은 느낌의 심장 박동이다.
“이거지…….”
다른 선수와 마주 보고 섰을 때는 느낄 수 없는 심장 박동이다. 이 박동은 오로지, 미야모토 신지 저 선수와 섰을 때만 발동한다. 저 선수의 괴물 같은 실력이 지영에게 강력한 긴장감과 흥분감을 선사하기 때문이었다.
지영은 이런 상태가 좋았다.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땀이 분비되면서 일어나는 정신적 각성 상태를 논한다. 그런데 그게 꼭, 운동 도중에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지금처럼, 심장이 쫄깃해지는 긴장감 속에서 피어나기도 한다.
마주 보고 선 둘.
둘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똑바로 상대를 직시하고, 서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멀리서도 보일 정도의 환한 미소는 아니었다. 아주 희미한 미소다. 그 미소는 아마도, 너의 마음을, 심정을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다. 그런 생각에서 나오는 미소였다.
심판이 들어왔다.
심판은 미국의 데이비드 심판이었다.
예전에 경기장을 박살 냈던 미국 대표팀의 코치였던 데이비드가 심판 자격증을 취득하고 지영의 결승전 심판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지영은 안심했다. 저 심판은 돈에 휘둘리는 심판이 아니었다. 돈만이 아니라 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았다.
오롯이 유도.
현명한 판정만을 내린다.
만약 자기가 내린 판정이 잘못된 거 같으면 먼저 부심에게 요청해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기도 한다. 심판이라고 권위만 잔뜩 세우는 몇몇 심판과는 결이 완전히 다른, 진짜 심판이다.
이 경기를 위해, 대회 운영 측에서도 신경을 써주고 있다는 뜻.
그러니 남은 건, 그냥 치열한 한판 게임이다.
수신호가 떴다.
꾸벅,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 후 입장, 나란히 서서, 다시 인사, 그리고 다시 한 걸음 걸었다.
심판이 지영과 신지를 한 번씩 쳐다봤다. 시합 준비가 됐냐는 무언의 신호고, 그 눈빛을 받은 지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지도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이자, 심판도 한 걸음 나섰다.
하지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커다란 외침이었다.
짧고 굵게, 그리고 길게 울려 퍼진 하지메 소리에 우와! 하고 환호성이 터졌다. 잘 참더니 이번엔 못 참았다. 순간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커다란 환호성이 울렸지만, 이미 지영은 그 환호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깊이 몰입했다.
그리고 그건 상대, 미야모토 신지도 마찬가지였다.
굳건한, 단단한, 지영처럼 의지와 투지, 신념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 채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자세가 높다. 옛날 옛적 유도였다면 확 태클을 걸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지영은 안다. 옛날 옛적 유도였어도, 신지가 태클 같은 기술에 날아갈 일은 한없이 영에 수렴한다는 것을.
수많은 이미지 트레이닝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노려서 거는 기술?
실패다.
들어오는 기술을 카운터?
이것도 실패다.
언제 어느 각도에서, 어떤 상황에서 기술을 들어올지 예측이 안 되니까 카운터 이미지를 그려낼 수가 없었다. 지영은 자기가 생각하는 유도를 그대로 풀어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수였다. 그런데 그런 지영은 미야모토 신지에게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지영이 풀어낼 수 없는 난제와도 같은 선수다. 그런데 난제는 아주 가끔, 우연한 기회로 풀릴 때가 있다. 정말 말 그대로 우연으로. 지영의 승리는 그와 같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하나 다행인 것은, 이건 신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툭, 툭.
뻗어온 손을 툭 쳐내고, 언제나 잡는 자세로 잡았다. 두 선수는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잡기 싸움에 열을 올리지 않았다. 왜? 둘 다 안다. 뭔 짓을 해도 내가 유리하게 잡기 힘들다는 것을.
신지나 지영은 절대로 상대가 유리하게 잡게는 두지 않는다.
올라운더에 가까운 두 선수라서, 어디를 잡아도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미약하나마 선호하는 잡기 자세가 있게 마련이다. 지영은 등 깊이 잡는 걸 좋아하고, 신지는 가슴 깃을 잡아 받쳐서 각을 재는 자세를 좋아한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 두 자세가 한 번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거다. 지영이 등 깊이 잡으면 신지가 가슴 깃을 잡고 툭 손목으로 받치면, 둘 다 원하는 자세가 된다. 여기서 소매 싸움을 하면 되는데, 두 선수는 그러지 않았다.
왜? 소매 싸움에서 졌을 때 리스크가 컸다.
커도 너무 컸다.
소매를 제대로 빼앗기는 순간, 무조건 한판이 나올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그걸 피하려고 그냥 바닥에 엎어지면, 그 자체로 심판이 지도를 먹일 수도 있었다. 신지의 입장에서 강지영과의 경기에서 먼저 지도를 받는 것은 죽도록 피하고 싶은 시나리오일 거고, 그건 지영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두 선수는 비슷하지만 다르게 잡았다.
지영은 어깨 깃을 잡았고, 신지는 지영의 가슴 깃을 잡긴 잡되, 손을 쭉 뼈 턱 아래에 넣고 받쳤다. 쉽게 안으로 파고 오지 못하게, 안전장치를 건 셈이다. 지영 또한 어깨 깃을 잡았지만, 언제고 손바닥으로 밀어 파고 오는 걸 막을 수 있는 준비를 한 상태였다.
두 선수는 그렇게 잡고, 움직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