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13화
513화. 전설로 남을(2)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렀다.
강지영이 변했다는 얘기가 나온 공항 인터뷰는 많은 파장이 일었다. 인터뷰는 언제나 무시하던 지영이다. 그런 지영이 직접 먼저 와서 인터뷰를 했다. 기자들의 질문에도 성실히 대답했고. 인터뷰 내용은 사실 별거 없었지만, 그의 팬들은 지영이 인터뷰를 한 것 자체만으로도 그의 심정에 어떤 변화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건 결코 나쁜 방향이 아니라는 것도 같이 깨달았다.
그래도 여전히 팬과의 소통은 여전히 부족하지만, 지영의 메이킹 영상은 신기할 정도로 많이 풀렸다. 물론 작품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의 소통이니 그마저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고, 그냥 단순히 사진이 올라오는 정도지만, 이 정도로도 팬들은 충분히 좋아했다.
무신의 촬영은 12월 중순이 되어서야 끝났다.
러닝 타임이 짧지 않은 데도, 미국에서 시작해 홍콩, 그리고 마지막에 한국에서 모든 공식 촬영을 완료했다.
크랭크업과 동시에 기사가 폭풍까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니엘 화이트 감독은 한국에서 일정을 마무리하고 돌아가기 전에, 완벽하게 찍었으니, 완벽하게 편집해 곧 관객을 찾아가겠다는 말만 남기고는 한국을 떠났다. 잔뜩 기대감 섞인 기사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강지영은 다시 조명되기 시작했지만, 이번엔 따로 인터뷰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공식 크랭크업 선언 일주일 후, 지영은 다시 도복을 입었다.
해가 지나고, 2월 말에 다시 선발전 2차전이 열린다. 그리고 5월에 3차가 열리고, 여기서 아시안 게임 최종 선발 선수가 결정된다. 지영은 1차는 출전하지 않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무조건 내가 선발되지. 하는 자신감이 아니라, 반드시 선발되겠다, 는 각오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각오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훈련이 최고였다. 지영은 그런 마음가짐으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만! 지영 씨.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네, 선생님. 후우.”
지영은 회사에서 고용한 피지컬 트레이너의 말에 머신을 뛰던 걸 멈췄다. 피지컬 트레이너는 유도 선수 출신이다. 그리고 유도 선수만 전문적으로 트레이닝을 해준다. 유도의 인기가 올라가면서 생기기 시작한 트레이너 계열의 갈래라 할 수 있는 직업인데, 지영에겐 사실 익숙했다. 임대성 코치가 딱, 지금 이 직업에 가까운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훈련을 마친 지영은 씻고, 트레이너가 짜준 식단으로 저녁을 먹었다. 오늘은 토요일. 야간 훈련은 없었다. 지영은 양유진이 동생과 함께 데이트 중이라 따로 연락하진 않고, 조용히 쉬기로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할까 했는데, 예상외의 사람에게 연락이 왔다.
이우진.
종종 연락을 주고받긴 했지만, 이렇게 전화가 온 건 사실 처음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네, 강지영입니다.”
-지영이? 나야, 이우진.
“알아. 이름 떴어. 오랜만이네?”
-하하, 그러게. 잘 지냈지?
“나야, 뭐 다시 폼 끌어올리면서 지내지. 너는? 입촌했나?”
-아니, 나도 용인대에서 따로 훈련하고 있어. 참, 시간 좀 돼? 서울이면 잠깐 보고 싶은데.
“응? 지금?”
-응. 바쁜가?
이우진이 먼저 이렇게 청해오니, 지영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엔 두 사람은 라이벌리로 묶인 사이였다. 지영, 이우진, 구혁. 이렇게 셋이서 말이다. 그래서 지영은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괜찮아. 오늘은 약속 없어서 숙소에서 쉬려고 했고. 어디로 갈까?”
-숙소 근처에 장소 알려주면, 내가 그쪽으로 갈게.
“그래? 그래, 그럼. 잠실 쪽으로 일단 출발해. 나는 옷만 입으면 되거든.”
-알았어.
지영은 전화를 끊고, 숙소 근처에 친구들과 종종 가던 펍을 떠올렸다. 제법 운치 있고, 손님도 조용한 분들 위주로 와서 지영이나 친구들이 가도 크게 귀찮게 하지 않던 곳이었다. 물론 지금도 그럴 거란 장담은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곳이 거기밖에 없었다.
폰으로 주소를 검색해 이우진에게 보내주자, 30분쯤 걸린다는 메시지가 왔다. 지영은 먼저 가 있기로 했다. 복장은 간편하다. 청바지에 후드, 그리고 패딩. 지영은 딱히 멋을 내는 편이 아니라서 적당히 입고, 숙소를 나섰다.
현관문을 나서기 무섭게 삭풍이 얼굴을 할퀴었다.
그에 절로 몸을 떤 지영은 마스크를 쓰고, 펍으로 향했다. 펍까지는 딱 10분 정도 걸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 몇 명이 보였다. 마스터는 지영이 들어오는 순간 알아보고는 눈인사를 보냈다. 지영도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적당히 빈자리로 움직였다. 옛날 같았으면 창가에 앉았을 테지만, 지금은 힘들었다.
지영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서, 이우진을 기다렸다. 잠시 뒤, 이우진이 들어왔다. 근데 혼자가 아니었다. 이우진보다 머리 반은 큰 여성이 함께 왔다.
“우진아.”
“어, 지영아. 하아.”
마스크를 썼지만 워낙에 피지컬이 좋은 이우진에게 시선이 몰렸다가, 그 옆의 여성에게도 시선이 돌아갔다가, 다시 다들 돌아갔다. 지영은 이우진과 악수하고, 같이 온 여성에게도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강지영입니다.”
“이유나예요. 만나서 영광이에요.”
만나서 영광이라는 것치곤, 목소리가 참 담담했다. 그런데 꺅꺅거리면 그게 더 부담스러우니 이게 딱 좋다. 자리에 앉아서 지영은 설명을 바라는 눈빛으로 이우진을 바라봤다.
“여기는 약혼자.”
여자친구, 애인이 아니라 약혼자?
결혼할 사이도 아니고, 약혼? 지영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아. 하고 탄성을 흘렸다. 잠깐 깜빡했는데, 이우진이 재벌 3세라는 걸 늦지 않게 떠올린 것이다.
“음, 약혼했는지 몰랐는데?”
“양가 집안 어른끼리 이미 우리 어렸을 때 말이 끝나 있었거든. 그리고 유나랑 중학생 때부터 그냥 사귀고 있었어. 어차피 두 집안 중 한 곳이 망하지 않으면 결혼할 테니까. 기왕 하는 결혼, 기분 좋게 하는 게 좋잖아?”
“아아…….”
재벌은 재벌이다.
지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걸 말하려고 보자고 한 건가? 그건 아닐 거다. 지영은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뭐 좀 시켜야겠다. 뭐 먹을래?”
“보자. 내가 시킬게. 유나 입맛이 좀 까다로워서.”
“…….”
“윽!”
툭. 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푹 찌른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변화가 없다. 오래 사귄 사이라더니, 그 행동이 정말 자연스러워서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참, 지영이 너 술 마실 수 있어? 지금 폼 끌어올리는 중 아니야?”
“하루쯤이야, 뭐. 체중 문제도 없고. 주말이잖아. 그리고 시합도 꽤 남았고. 근데 술 마시게?”
“응, 가볍게? 너랑 꼭 한잔해 보고 싶었거든.”
“그래, 마시자.”
이우진은 자기 관리가 정말 철저한 친구다. 그런 친구가 술을 찾는다? 음, 지영은 말했듯이 술 마시는 거에 부담이 없다. 미국에서 스태프, 배우, 감독과 주말만 되면 파티를 하기도 해서, 오히려 술이 제법 늘었다.
“고맙다. 여기.”
이우진은 능숙하게 메뉴를 시켰다.
가격이 고지되지 않은 와인과 보드카 하나, 그리고 지영을 바라봤다. 이렇게 시켜도 되겠냐는 질문이었다.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미국에 반년 있어서 익숙해, 괜찮아.”
“하하, 그래.”
지영은 소주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정확히 얘기하면 싫어하는 건 아니고, 그 향이 껄끄러운 정도? 물론 그렇다고 소주 마시는 자리에서 그런 티는 절대 내지 않았다.
“촬영은 다 끝났어요?”
마스터가 돌아가자, 이유나가 물어왔다. 그 질문에 지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키도 크고, 연예인을 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다. 좋은 유전자만 물려받은 것 같은. 거기에 이쪽도 재벌 3세다. 어느 기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우진이 집안 어른들끼리 얘기가 끝났다고 했으니 그의 집안과 비교해 부족하지 않은 곳일 거다. 하지만 지영은 그걸 굳이 알고 싶은 마음까진 없었다.
“네, 한국이 마지막 일정이었는데, 이주 전에 끝났어요.”
“음, 미국 촬영은 한국이랑 좀 다른가요?”
“좀 더 체계적이긴 해요. 스케줄이 빡빡한 건 같지만, 좀 더 집요하다고 할까? 어쨌든 그런 식이에요. 충분히 배우와 스태프를 케어해 주기도 하고요.”
“아아, 저는 영화감독이 꿈이에요. 집안을 잇는 건 어차피 오빠들이 할 거라서. 그래서 좀 궁금했어요. 가서 견학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그렇군요. 한국이랑 크게 차이가 난다고 할 수는 없어요. 음, 혹시 나중에 가시게 되면, 느낌에 대해서 기록해 놓은 게 있으니까 그걸 드릴게요.”
“어머, 정말요?”
“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 사람은 첫인상이 나쁘지 않다. 특히 재벌이라고 뻗대는 느낌이 없었다. 사람을 아래로 보는 특유의 느낌이 없어서, 이우진이 좋은 사람과 만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이라면, 도움을 못 줄 것도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주겠다고 한 기록이 뭐 그리 특별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 감독으로 할리우드 진출? 배우가 진출하는 것만큼이나 빡세다. 그녀의 꿈이라지만, 그게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니 딱히 부담되는 것도 아니었다.
“고마워요. 우진이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정말 좋은 분이시네요. 느낌이 편하고, 음, 편해요.”
편해요만 두 번. 딱히 다른 느낌을 못 찾았나 보다.
그에 지영은 감사합니다. 하고 말았다. 술과 안주가 나왔다. 이우진은 능숙하게 지영과 이유나, 그리고 자기 잔에 술을 채웠다. 가볍게 건배하고 한 모금. 뜨끈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나쁘지 않았다. 이런 느낌 때문에 지영은 오히려 독주가 맞았다. 뜨끈한 느낌이 마치, 경고처럼 들리니까.
“지영아. 나 은퇴한다.”
“응?”
잔을 내려놓기 무섭게 날아든 말에, 지영은 이게 이우진이 오늘 보자고 한 이유라는 걸 깨달았다. 은퇴. 은퇴. 이우진은 한창때다. 그런데 은퇴? 이건 너무 이르다. 지영은 그냥 잠자코 들었다.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두어 달 전에 치렀던 1차 선발전에서, 이우진은 장범에게 준결승에서 패했다. 연장전 끝에, 반칙패로. 그리고 장범은 구혁에게 결승에서 졌고. 지금 선수촌엔 장범과 구혁이 있었다. 이우진은…… 3위다. 패자 결승에선 그래도 시원하게 한판을 돌렸다. 하지만 3위다. 지영도 없었는데, 3위.
“집안에서 후계 공부하라고 하도 난리라서. 내 고집으로 막는 것도 이제 한계고. 음, 이렇다 할 성적이 없잖아? 하하.”
“흠…….”
성적이 없지는 않다.
세계 대회에 제법 나간 이우진이고, 나간 대회는 전부 입상권에 들었다. 하지만 1위가 없었다. 거기에 올림픽도 지영에게 밀려서 나가지 못했다. 지영은 이게 나비효과인가 싶었다. 본래라면……. 이전 독일 올림픽. 아니, 파리 올림픽은 이우진이 나갔어야 했다. 그리고 결승전에서 신지에게 패배해 은메달을 따게 된다.
잘생긴 외모와 재벌 3세라는 타이틀.
이 두 가지에 은메달리스트 타이틀이 합쳐지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는 게 이우진이다. 그러나 지영이 회귀하면서 그 미래가 전부 바뀌었다. 지영의 기억으로 이우진은 지영이 회귀할 때까지도 현역이었다. 2연속 올림픽 은메달. 아시안 게임 결과는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진 분명 이우진이 나갔다.
그런 이우진이, 지금 은퇴하겠단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유는 지영, 본인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떤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히 표정이 굳었는데, 이우진이 잔을 내밀었다. 지영은 쨍, 소리가 나게 건배하고 잔을 그대로 비웠다.
속이, 조금 썼다.
미안한 마음도 있고, 그래도 내 잘못은 아니지, 란 마음도 있었다. 그러자 지영처럼 잔을 비운 이우진이 씩 웃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말지? 너 때문에 은퇴하는 건 아니니까. 그냥, 내 한계를 봐서 그래. 야, 장범이 걔 잘하더라. 1, 2년만 더 연습하면 완전히 강지영 되겠던데?”
“그렇긴 하지.”
“긴장 안 돼?”
웃으며 묻는 이우진에게 지영은 좀 강하게 답해주기로 했다.
“왜 이래, 그 스타일 창시자가 나야.”
“하하, 하긴. 어쨌든 그렇게 됐다.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너한텐 꼭 직접 보고 말하고 싶더라.”
“잘했어. 이제는 가문의 후계자인가?”
“그렇게 되겠지. 야, 내가 사업 제대로 이어받으면, CF나 하나 해주라.”
“몸값 감당은 되겠어? 나 꽤 비싸. 내가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비싸.”
“어…… 한때 라이벌 DC 이런 거 없냐?”
“있겠냐? 그래도 너 하는 거 봐서. 좋은 기업이면…… 하하.”
지영의 말에 이우진이 씩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올라가면 싹 갈아엎을 거니까. 뭐 그건 그때 가서 얘기하고. 너, 아겜 금메달 따면 은퇴할 거라며?”
“어? 그건 어떻게 알았어?”
“유진이가 여자팀 회식할 때 술 취해서 말했다던데?”
“아…….”
“진짜야?”
지영은 잠시 고민했다.
자기가 없으면 이우진이 운동을 계속할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물어보는 걸까? 알 수 없지만, 지영은 솔직하게 답했다.
“응. 금메달 따면 은퇴할 거야. 그리고 연기에 집중하려고.”
사실은, 유도를 놓아주는 거다.
지영에겐 정말 애증이었던 유도를, 이제는 놓아주려는 거다. 하지만 그걸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애증이라고 하면, 그건 이우진을 모욕하는 게 된다. 이우진은 유도를 좋아하는 선수였다. 천재적 재능에다가, 즐기기까지 하니까 실력이 이렇게 좋은 거고. 회귀 전에도 신지를 제외하면 세계에 적수가 없었다.
지금은 원래는 고1 때 없어졌어야 할 강지영의 등장으로 장범까지 등장했지만, 본래는 구혁보다는 한 수 위의 실력으로 한국 유도의 에이스로 군림했을 친구였다. 그런 친구에게 유도는 애증이라서, 이제 놓아주려고. 목표만 이루고. 이렇게 말하는 건 정신 나간 짓이었다.
“왜, 더 하려고?”
“아니, 은퇴할 거야. 유나랑 약속도 했거든. 결혼하면 후계 수업에 열중하기로.”
“결혼?”
“응. 아, 사실 너는 꼭 와줬으면 했거든, 그래서 오늘 꼭 보자고 한 건데. 이거.”
“어…….”
청첩장이었다.
처음 받아보는.
지영은 웃었다.
“갈게.”
“진짜? 약속했다?”
“응. 애들 다 데리고 갈게.”
“하하, 고마워.”
그 정도도 못 해줄까.
나 때문에…… 인생이 변한 친구인데.
“아쉽네요. 친구분들이 싱글이었으면, 제 친구들 소개해 줬을 텐데.”
“하하.”
이유나의 농담에 지영은 이번에도 가볍게 웃고 말았다.
그때 울리는 전화.
양유진이다.
“네, 누나.”
-저 이제 지원이 터미널 바래다주고 집에 가는 중이에요!
“그래요? 음, 누나 이쪽으로 올래요? 앞에 커플이 앉아 있는데, 좀 외로워요.”
-앗! 그럼 안 되죠! 어디에요? 바로 갈게요!
“주소 보낼게요. 추우니까 택시 타고 와요!”
-네!
전화를 끊자 두 사람이 지영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친구분? 그, 양유진 님?”
이유나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죄송합니다. 먼저 물어봤어야 하는데.”
“아니에요. 괜찮아요. 꼭 뵙고 싶은 분이었어요. 그분, 저도 팬이거든요. 아, 팬클럽도 가입했어요.”
“……진짜요?”
“네. 존경할 만한 분이잖아요?”
“하하. 그렇죠.”
존경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유나의 이번 말은 의외였다. 하지만 지영은 그래서 이유나란 사람이 좀 더 괜찮게 보였다.
“너는 결혼 언제 하게?”
“나? 나도 내년에 해.”
“헙, 진짜?”
“진짜요?”
이우진과 이유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프러포즈도 했고, 어머니한테 허락도 맡았어. 아시안 게임 끝나면 결혼할 거야. 꼭. 그리고 이거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안 된다?”
“당연하지. 이야, 이야…….”
“왜 그런 반응이야?”
“아니, 너는 연예인이잖아?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난 네가 이렇게 빨리 갈 줄은 몰랐지.”
“연예인이 뭐 대순가. 그냥, 빨리 함께하고 싶어서 그래. 누나가 불안해하는 것도 싫고.”
지영의 말에 이유나가 와, 로맨티스트…… 하면서 놀랐다.
“너 하면 황금세대도 줄줄이 하겠네?”
“응. 아마도? 오래 끌지는 않을걸?”
“와, 대단하네. 멋있다.”
“멋있기는. 당장 너만 해도 나한테 지금 청첩장 들이밀어 놓고.”
“나야 양가의 결정에 가까운 거잖냐. 자.”
쪼르르.
이우진이 다시 잔을 채워줬다. 이유나도 와인을 받고 나서, 조금은 짓궂게 말했다.
“제 친구들 조만간 오열 좀 하겠네요. 후후.”
“우진이가 잘못한 거죠. 친구들이 다 짝을 찾을 때까지 유나 씨를 소개해 주지 않았으니까.”
“어머, 그러네요?”
부담스럽지 않은 장난이었고, 지영도 부담스럽지 않은 멘트로 받았다. 그렇게 잠시 얘기를 나누는데, 양유진이 들어왔다. 딸랑, 꽤 크게 울린 풍경 소리에 다시 몰리는 시선에 움찔하더니, 지영을 발견하곤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양유진. 지영도 마주 손을 흔들었다.
“미소가…… 정말 아름다운 분이시구나?”
“그렇지?”
“응, 지영이 너랑 정말 잘 어울리시는 분이야. 넌 웃음이 없잖아?”
“……인정하긴 싫은데, 인정.”
지영은 미소가 많지 않다.
하지만 양유진은 미소가 많다. 그래서 좋았다. 삭막한 자신에게 주는 저 아낌없는 미소가. 자리로 온 양유진이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곤 옆에 앉았다. 그러곤 두 사람을 바라봤다가, 지영을 바라봤다.
소개해 달라는 뜻이라, 지영은 두 사람을 가볍게 소개해 줬다.
“여기는 같이 운동하는 친구 이우진. 그리고 옆에 분은 우진이랑 곧 결혼하실 이유나 씨. 두 사람은 저랑 동갑이에요.”
“앗, 그렇구나. 양유진입니다. 두 분 결혼 축하드려요!”
양유진의 인사에 두 사람도 얼른 인사를 했다. 그런데 이유나가 갑자기 백에서 노트를 꺼내더니.
“팬이에요, 언니. 저 사인 좀 해주세요…….”
“네?”
“저 언니 팬이에요. 진짜. 진심.”
“어…… 어? 네? 에?”
놀란 양유진이 지영에게 도와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지영도 놀랐지만, 그냥 고개를 끄덕여줬다. 팬클럽도 가입했다는데…… 사인 정도는 해주는 게 도리 같아서였다. 하지만 양유진은 사인 같은 걸 해준 적이 없어서 한껏 당황했다. 그래서 솔직히 사인할 줄 몰라요…… 하고 했는데, 이유나는 끝끝내 이름 석 자를 정자로 쓴 사인을 받아내고는 소중하게 다시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정말 재벌 같지 않았다.
이어진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조금 톤이 낮았던 자리는 양유진이 합류하자 더 활발해졌다. 12월의 마지막 주. 새해 직전에 나비효과가 뭔지, 지영이 절실히 느낀 날이었다. 다시 며칠 뒤, 새해가 왔고, 다시 성큼, 선발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