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11화
511화. 이 사람이란 확신(3)
바비큐 파티는 즐거웠다.
맛있는 고기도 고기지만, 이런 파티는 신기하게도 다들 경험이 없어서 더욱 재밌었다. 10명 중의 6명이 거의 연예인에 가깝지만, 그렇다고 이런 파티에 익숙하진 않았다. 황금세대야 자기들끼리 종종 모여서 고기를 굽고 놀고 하지만, 이렇게 연인과 함께하는 일은 거의 손에 꼽았다.
그래서 그냥 다들 기분이 좋았다.
거기에 정말 오랜만에 다들 술을 마셨다. 그래 봐야 인당 소주 한 병도 마시지 않았지만, 정말 오랜만에 마셔서 그런지 다들 텐션이 올라갔다.
진심으로 웃고, 즐기는 이런 자리가 얼마 만일까?
지영은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특히 양유진이 좋아했다. 양유진은 복작복작한 걸 좋아했다. 회사에서 일할 때야 많은 사람과 함께 하지만, 일은 일이다. 잡담하면서 불량을 걸러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휴식 시간이 아니면 대화는 거의 없다. 그러다 퇴근하면 언제나 편의점에서 일했고, 집에 왔을 땐 이미 동생이 잠든 시간이다.
이런 쳇바퀴 일상을 살다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복작이는 걸 좋아했다. 이런 자리가 딱 그녀가 좋아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자리라도,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었다. 10시쯤이 되자, 피곤한 사람이 나왔다. 적당히 술도 들어갔고, 물놀이를 너무 달리기도 했고, 이런 모임은 또 처음이라 긴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이 10시가 넘어가자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소영이 나가떨어졌다. 이성진이 정소영을 챙겨주는 동안, 자연스럽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여럿이서 움직이자 정리는 금방 끝났다.
“지영 씨. 우리 산책하러 가요.”
뒷정리가 끝나자 옆에 붙어 작게 소곤거리는 양유진. 이렇게 끝내기는 조금 아쉬운가 보다. 지영은 당연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안 그래도 지영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가기 전에.
“외투 챙겨 나와요. 좀 쌀쌀하다.”
“네!”
후다닥!
안으로 들어간 양유진은 외투를 챙겨 5분도 안 되어 나왔다. 지영은 술을 조금 마셔 그런지, 열이 올라 그렇게 덥진 않았다. 하지만 혹시 몰라 가디건 하나는 걸쳤다. 둘은 나란히 걸어 펜션을 빠져나갔다. 펜션 아래로 쭉 내려가다 보면 하천이 하나 있는데, 그 길을 따라 산책로가 제법 괜찮은 걸 아까 오면서 봐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오늘 진짜 즐거웠어요. 히, 고마워요.”
“그래요? 다행이다. 불편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니요! 진짜 좋았어요! 지원이도 되게 좋아했어요.”
조잘조잘.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하며 뭐가 좋았는지를 설명하는 양유진의 얘기를 들으며 어느새 도착한 산책로. 무드 등으로 분위기는 죽여줬다. 그리고 따로 스모그 같은 걸 뿌리는지, 하천에 옅게 피어오른 안개가 분위기를 한층 더 올려줬다. 그렇다고 너무 어둡지도 않아 무서운 느낌도 없었다. 산책을 위해 조성한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났다.
“이번에 가면 언제 와요?”
양유진의 질문에 지영은 상념에서 깨, 잠시 생각에 잠겼다. 미리 전달받은 스케줄 일정은 있었다. 그 스케줄에 따르면…… 적어도.
“연말쯤에나 끝날 것 같아요.”
“힝, 오래 걸린다…….”
“중간에 시간 내서, 어머니랑 미국에 와요.”
“어! 그래도 돼요?”
“그럼요. 제가 다 준비해 놓고 있을게요.”
“와, 와아! 그럼 음, 8월? 8월 휴가에 갈래요!”
“네.”
양유진은 반응이 확실히 좋았다. 좋은 건 좋다고 한다. 하지만 싫은 건 잘 내색하지 않는다. 싫고, 슬픈 건 속으로 삭이는 타입이었다. 그래서 양유진은 잘 살펴봐야, 진짜 기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지금 보면, 뭔가 살짝 그늘이 보였다.
불안해요?
하는 질문이 불쑥 목구멍을 넘어 입안으로 들어왔지만, 다행히 그걸 내뱉진 않았다. 연애로는 선배인 이연이 그랬다. 그걸 물어보는 것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일어난다고. 왜 그러냐고 되물었더니, 그런 질문을 누가 했던, 그건 곧 둘 중 한 사람이 불안함을 느끼는 증거라고 그랬다.
지영은 그 말에 공감했다.
그래서 그런 말은 꺼내지 않았다. 대신, 오늘 행복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는 양유진에게 선수를 쳤다. 그리고 그걸 위한 준비도 해왔다. 잠시 걸음을 멈추자 양유진이 멈칫하더니, 지영을 올려다봤다. 지영은 그녀를 향해 서서,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누나.”
“네?”
“우리, 결혼할까요?”
“어…… 네?”
동그란 눈이 파르르 흔들린다. 지진이 난 것처럼, 갑자기 들은 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지영은 그런 그녀에게 지영은 말을 이어갔다.
“올해도 좋아요. 전. 지금 당장 준비해서, 바로 결혼하고 싶기도 해요.”
“어……. 하지만 그건, 지영 씨 바쁘잖아요.”
“그러니까요. 참 안타까워요. 그래서 먼저…… 도장부터 찍어놓으려고요.”
“네?”
지영은 가디건 주머니에서 작은 케이스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준비한 목걸이를 보여줬다. 너무 갑작스러웠는지, 양유진은 입을 가리며 놀랐다.
“내년 아시안 게임이 끝나고, 우리 결혼해요. 목표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냥 그때는 이제 누나랑 함께 살고 싶어요.”
“아…….”
지영은 참 멋이 없다.
전 세계에 팬이 수두룩한데, 본인은 멋을 잘 모른다.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변명을 구질구질하게 하자면 뭐, 멋을 내는 일보다는 그냥 앞으로 우직하게 걷는 일이 더 많았다.
프러포즈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었다.
사실 지영은 좀 더 그녀와 빨리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하지만 지영은 해야 할 게 또 많기도 했다. 레인 스튜디오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지영은 올해 결혼하고 싶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지영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양유진이 언제고 부담을 느낄 수도 있단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한 사람이었다.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걸 누구보다 지영이 잘 알지만, 사람은 영원히 강할 수 없었다. 특히 지금도 지영을 흔들려는 악의적인 기사가 하루에도 몇 개씩은 꼭 나오고 있었다. 언제 양유진이 그 기사에 흔들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지영은 확실하게 그녀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은 결혼이다. 그것만큼 확실한 것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당장 올여름부터 겨울까진 무신의 촬영이 잡혀 있었고, 내년엔 아시안 게임이 있다. 이 안에 결혼을 준비해도 되지만, 그땐 지영이 빠져 있어야 한다.
결혼은 같이하는 것. 혹은, 함께하는 것.
양유진에게 그 준비를 전부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아시안 게임이 지나고 결혼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까지 기다렸다가 프러포즈하는 건 또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오늘로 정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얻어 놓으려고. 그래서 이런 멋대가리 없는 프러포즈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있었어도, 이 이상은 하기 힘든 게 지영이었다. 지영은 이런 쪽으로는 정말…… 참 멋이 없으니까.
하지만 양유진에겐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순백색으로 빛나는 반지와 목걸이를 보며, 양유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좀 더 무드 있는 곳에서 프러포즈를 받는 건 모든 여성의 로망이지만, 그녀는 그런 로망이 없었다. 그녀의 바람, 꿈은 하나였다.
“전, 언제나 연예인님과 함께하는 게 꿈이었어요……. 헤헤, 그거, 저 이루는 거 맞죠?”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호칭도 지영 씨에서 다시 연예인님이 됐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를 뒤로하고, 입가에 다시 행복한 미소가 걸렸다. 지영은 그에 안심했다. 그녀 특유의 네! 하는 대답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됐으니까, 알 수 있었다.
“네, 이뤄줄게요.”
“힝…….”
받아준 거다.
지영은 일어나 반지를 손에 끼워줬다. 사이즈가 딱 맞았다. 눈썰미 좋은 지영은 양유진의 손가락 사이즈를 틀리지 않았다. 그리고 목걸이까지 걸어줬다. 양유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지영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안았다.
떨림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받은 프러포즈에 놀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지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지영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가, 지영의 얼굴을 빤히 다시 올려다보는 양유진. 지영은 그런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성하(盛夏)의 계절.
좋을 때였다.
* * *
짧은 휴가의 끝은 금방 왔다.
휴가가 끝나고, 지영은 남은 4일은 집에서 보냈다. 짐을 싸놓고, 지영은 떠나기 하루 전 어머니와 저녁을 먹으면서 양유진과 있었던 일을 말했다.
“어머니, 저 내년 아시안 게임 끝나고 결혼하려고요.”
지영의 말에 어머니는 국을 뜨다 말고 다시 내려놨다. 그러곤 지영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실 어머니는 그러니? 언제 식 올리려고? 이렇게 물어볼 줄 알았다. 당연히 허락해 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의 눈빛은 엄했다.
지영이 잘못하면 보여주는 엄한 눈빛이다. 지영이 흔들릴 때 바로잡아주던, 부모의 눈빛이다. 그래서 지영은 순간 내가 뭘 잘못했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잘못한 건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의아함이 다시 당혹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지영을 가만히 보던 어머니가 말문을 열었다.
“진지하게 생각한 거 맞니?”
“네? 네.”
“치열하게 생각한 건 맞고?”
“네?”
“한 사람을 인생의 반려로 들이는 일이야. 괜히 옛말에 인륜지대사라고 했던 게 아니란다. 아주 중요한 일이야. 특히 너는.”
“…….”
어머니의 말에 지영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치열하게 생각한 게 맞냐고? 음, 그렇게까진 아니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지영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양유진이 흔들리는 일이었다. 지영은 그녀가 불안한 게 싫었다. 자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정말 너무 싫었다. 그래서 예전에도 그녀에게 확신을 주긴 했지만, 지금처럼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엔 아예 프러포즈를 해버렸다. 비록 1년은 더 있어야 결혼하겠지만, 1년이란 시간은 금방 지나가니까.
“치열하게 생각했냐는 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요.”
“말 그대로야. 결혼이란 주제를 놓고, 한평생 유진이와 함께 하는 것에 대해 확신을 치열한 고민 끝에 내놓은 거냐고 묻는 거야.”
“그거라면…….”
“지영아. 요즘 젊은 부부가 얼마나 많이 이혼하는지는 아니? 나라 문제라고까지 할 정도로, 요즘은 결혼하고 이혼하는 일이 너무 비일비재해. 물론 나도 내 아들이 그럴 거라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거잖니. 당장 몇 년 전만 해도 알았니? 지영이 네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되어 몇백억씩 받으며 영화를 찍게 될지?”
“음, 몰랐어요.”
“인생이란 게 그래. 너와 유진이의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야. 어떤 일이 생길지 몰라. 너는 그 수많은 일을 감당하며 유진이를 지켜줄 수 있겠니? 그 아이가 외로움에 떨지 않게 해줄 자신이 있니? 그 아이의 얼굴에 슬픔을 가셔줄 수 있겠어? 엄마는 그걸 알고 싶어.”
“…….”
그건…… 그래, 그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있다. 있는데, 그냥 자신했다. 나는 그럴 일 없다. 그렇게. 내가 유진 누나를 슬프게 할 리가 없잖아? 하고 넘어간 거다. 하지만 어머니 말을 들으니 그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게 맞다.
세상일은 정말 모른다.
당장 지영만 해도 고작 몇 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배우가 될 줄은 상상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벌어졌다. 당장 내일이면 몇백억을 받은 만큼의 일을 하러 가야 한다. 그것도 미국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결혼 생활엔 그럼 또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질 것인가. 지영은 그제야 어머니가 한 말의 진의를 깨달았다.
두 사람은 다르다. 지영은 신경 쓰지 않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차이에서 나오는 그 모든 역경과 고난에도 양유진을 지킬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게 포인트다.
지영은 그 주제로 하루 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어머니가 말했던 것처럼 정말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치열한 고민 끝에 답을 도출했다.
‘그녀가 아니면 안 돼.’
그렇기에 무슨 일이, 그 어떤 일이 생겨도, 지킨다.
이게 답이었다.
하루가 지나 미국으로 출발하기 직전.
지영은 짐을 챙겨 나가면서 어머니에게 말했다.
“지킬게요.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이 무너져도 지켜볼게요.”
“……장하다, 우리 아들.”
푸근한 어머니의 미소와 그 대답에, 지영도 비슷한 미소로 화답한 뒤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