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507화
507화. 왕의 귀환(16)
지금이야 일본 73체급의 5에서 7사이의 국대지만, 다나카 류가는 사실 오노 쇼헤이의 뒤를 이을 것이라 평가되던 천재 중 한 명이었다. 분명 도쿄 올림픽이 끝났을 때쯤엔 세계 주니어 랭킹 1위도 했었을 정도였다. 다나카 류가는 그때만 해도, 새로운 일본 유도의 황제는 자기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오노 쇼헤이의 뒤를 이어받아, 자기가 세계에 군림하게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걸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선발전에 툭 들어온, 혜성의 등장에 뒤로 그냥 밀려버렸다.
미야모토 신지.
잘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천재. 그는 대표 선발전 등장한 첫해에 오노 쇼헤이를 비롯한 73의 터줏대감들 전부를 잡아버렸다. 그렇게 화려하게 데뷔에 성공한 신지와 비교하면, 다나카 류가의 데뷔는 매우 초라했다. 대표 선발전 7위. 그리고 그다음도 또 7위. 다시 그다음도…… 7위. 준결승까지도 올라가기 힘들었다. 기존 터줏대감들과 신지가 너무 강력했다.
그게 다나카 류가에게 좌절감을 선사했다.
취미인 난파질까지 끊고 운동에 매달렸지만, 소용없었다. 천재의 벽은 높아도 너무 높았다. 그래서 운동을 그만둘까 했지만, 그래도 끝은 보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 혼자만큼은 확실히 만족할 만한 끝 말이다. 그게 이번 대회였다. 메이저 대회인 세계 선수권에서, 유종의 미를 거둬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강지영을 보자 마음이 변했다.
‘내가 강지영을 잡으면…… 날 키워주지 않을까?’
일본 유도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 1위가 강지영이다. 아니, 요즘엔 아예 일본인이 가장 싫어하는 한국인 1위라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런 강지영을 만약, 정말 만약 자기가 잡으면? 그럼 일본이 강지영을 잡은 자기를 대승적인 차원에서 키워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갔다.
실제로 코치진도 그런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황금세대를 잡으면, 결과에 상관없이 포상이 있을 거라고. 그래서 다나카 류가는 기를 쓰고 준결승까지 올라왔다.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는 필승의 마음으로.
하지만…… 강지영의 준결승을 보고 나자, 그 필승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강지영의 예선은 보지 않았다. 시합에 집중하고 싶었고, 코치진도 굳이 도움이 안 될 거라고 했기 때문에 안 봤다. 이미 충분히 시합을 돌려보고 나왔기에, 안 봐도 크게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직접 본 강지영의 유도는…… 달랐다.
이걸 콕 집어 뭐가 다르다, 라고 말하긴 힘든데, 그냥 달랐다.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선수라는 것을. 영상으로 봤을 땐 이 타이밍에 이 기술을 걸면, 던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직접 본 강지영의 유도는 달랐다. 그냥…… 틈이 보이질 않았다.
‘저걸 도대체…… 어떻게 넘기지?’
뭘 해도 막힐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벽. 신지와 몇 번 붙어보며 느꼈던, 그런…… 거대한 벽. 자신에게 끝없는 좌절을 선사한, 바로 그 벽.
‘도대체 신지 그 새끼는 어떻게 저런 인간과 그렇게 박빙의 승부를 한 거지……?’
그런 의문이 들 때쯤.
“류가. 류가!”
코치의 외침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 하이?”
“정신 차려!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지금 들어가야 하는데!”
“하, 핫!”
강지영의 준결승이 끝났다.
그리고 어느새 강지영은 이미 경기장 밖으로 나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감정이 없어 보였다. 힐끔, 자기를 보긴 했지만, 그 시선에 어떤 특별한 감정은 없었다. 마치, 신지가 자기를 볼 때와 같은 눈빛이었다.
그에 다나카 류가는 이를 꽉 깨물었다.
무시당했다는 기분 때문이었다. 그의 뒤로, 저번 대회에서 자기를 철저히 농락한 장펑위가 후련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시합에서 패배해놓고, 뭐 그렇게 후련한 얼굴을 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건 예의가 아니라서, 묻지 않았다.
“자, 들어가자!”
“핫!”
정신을 차릴 때다.
크게 대답한 다나카 류가는 경기장에 입장했다. 심판은 대만 심판이었다. 인사하고, 입장. 심판에게 인사하고, 상대에게 인사하고, 한 발 앞으로. 하지메!
하!
기합을 크게 넣은 다나카 류가는 자세를 낮추며 천천히 접근했다. 준결승 상대는 모로코 선수였다. 하산 도칼리. 몇 년 전에 한 번 붙어본 적이 있었고, 그땐 자신의 승리였다. 연장까지 가서 반칙으로 이겼지만, 그것도 이긴 건 이긴 거다. 그래서 준결승은 좀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끙…….’
하지만 아니었다.
그때는 그렇게 힘이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키는 컸지만, 기술은 별로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벼웠다. 적당히 업어도 붕붕 떴으니까. 그래서 혼을 빼놓은 뒤, 업어치기만 죽어라 막는 하산에게 안다리로 카운터를 넣어 절반을 따내 이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의, 종이 인형처럼 가볍던 하산이 아니었다.
쉽게 생각했던 준결승이 생각보다 힘들어지겠단 생각을 순간 불쑥 떠올린 게, 시합 중에 딴생각한 것과 같았는지, 벼락처럼 들어온 안다리를 막지 못하고 뒤로 쭉 밀렸다.
“윽!”
쿵!
강하게 엉덩방아를 찧고 몸을 다급히 뒤집은 다음, 심판을 올려다봤다. 유도 선수는 보통 넘어가는 순간, 이게 점수인지 아닌지쯤은 그냥 바로 파악 가능했다. 어떻게? 수천을 넘어 수만 번을 넘어가고, 수천 번의 경기를 관전하다 보면 점수를 알아보는 안목은 그냥 자연스럽게 쌓인다.
당연히 다나카 류가도 그중 한 명이고, 넘어간 순간 머릿속엔 와자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심판은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자세히 고개만 빼고 잠시 바라보긴 했는데, 그 이상의 액션은 없었다.
“…….”
순간적으로 나온 안도의 한숨. 하지만 그 한숨을 따라 우우! 비난과 야유가 뒤따랐다. 그 야유를 듣고 나서야 다나카 류지는 깨달았다. 진짜 안 넘어가서 절반을 안 준 게 아니라, 자기가 ‘일장기’를 등에 업고 있기에 절반을 받지 않았음을 말이다.
생각해 보니 느낌은 분명 절반이었다.
그러나 심판은 절반 콜을 주지 않았다.
그게, 다나카 류가에게 수치심을 선사했다. 화가 났다.
‘나는…… 나는!’
고작 국가의, 종주국의 위세를 등에 업어야만 이길 수 있는 그런 선수가 아니다. 다나카 류가는 노력하는 천재라 불렸다. 여자를 좋아해 난파질은 자주 했어도, 그래도 훈련 때 절대 노력을 게을리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의 유도 성적이 여자를 꼬시는 데 더 유리하다는 걸 알아서, 더욱 열심히 했다. 그렇게 일본 고교 유도계를 접수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참 찬란했다.
그에게 유일한.
그때의 자존심은 아직 남아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어진 것도 아니었다.
“류가! 정신 차려!”
코치의 사이드에 다나카 류가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굴욕을 참고 싶지 않았다.
실력으로,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실력으로. 져도 내 실력으로 지고, 이겨도 내 실력으로 이기고 싶었다.
그런 각오, 다짐은 다나카 류가의 기세를 완전히 바꾸어버렸다.
하지메!
심판이 시작 사인에 류가는 빠르게 움직였다. 다나카 류가의 특기는 업어치기다. 서서 뽑기, 외깃 업어치기, 외깃에서 밭다리나 안다리 등으로 연결하는 게 특기다. 앉아 업어치기도 잘하지만, 보통은 서서 뽑았다.
왜?
그게 멋있으니까.
한창 작업 거는 여자를 불러서, 서서 뽑아 멋지게 던져주면 와아!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해 주니까. 그러면 작업은 사실상 거기서 끝났다. 그래서 굳이 찬스가 와도 앉아 업어치기보단, 서서 뽑았다. 물론, 자기보다 실력이 한참 아래인 선수에 한에서다. 비슷하거나, 잘하는 선수는 서서 뽑는 게 거의 먹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런 운영은 버릇을 넘어,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버릇이 아예 사라졌다. 스타일? 이기는 게 먼저였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조건 자기 실력으로.
상처받은 다나카 류가의 투지에 하산 도칼리는 당황했다.
막상 시합을 시작했을 땐 눈이 좀 풀려 있었는데, 한 번 넘어가더니 정신을 좀 차린 정도를 넘어서 마치 원수를 대하듯이 자기를 노려보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뒤로 밀렸다.
마치 저돌적인 탱크처럼 밀고 들어와서 좀 뒤로 밀려났다. 워낙에 힘이 좋은 선수라서, 피하지 않고는 오히려 페이스에 말려들어 갈 것 같단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맛테!
시도!
대번에 지도가 들어왔다.
하산이 기가 막힌 얼굴로 심판을 바라봤다. 분명 좀 전에 기술로 포인트를 쌓았는데? 우우! 야유가 쏟아졌다. 그래서 경기장 밖의 부심을 바라봤다. 하지만 번복은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판정이었다. 하지만 후. 이해했다. 하산은 이런 경우를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국력이 약한 나라의 선수가, ‘종주국’의 힘에 밀려 석연치 않은 정도를 넘어서, 말도 안 되는 판정을 받는 경우를 그는 정말 많이 봤다. 그도 유도 선수다. 10살부터 도복을 입어, 이제는 세계 대회까지 나온. 훈련도 훈련이고, 시합도 정말 많이 뛰었다. 그래서 자기가 넘긴 게 점수인지 아닌지쯤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오히려 넘어간 선수보다 더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점수가 안 나왔다는 것은, 메시지가 확실하단 뜻이었다.
따라서.
이번 시합은 이기기 힘들다.
왜?
이미 모종의 협약이 오갔기 때문이다. 종종 있다. 이렇게 승자가 ‘예정’된 경기가.
이번이 자신이 제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하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하산의 투지를 불태웠다. 그는 성공해야 했다. 가족을 위해서. 축구 같은 구기 종목엔 재능이 없었다. 하지만 투기 종목엔 있었다. 그것도 유도에 특화된 재능이었다. 길쭉한 팔다리와 마른 몸에서 나오는 강한 힘으로 상대를 압박하다 보면 어느새 승리가 눈앞에 오곤 했다.
하산은 이번 경기만큼은 그렇게 해선 답이 없다 느꼈다.
그래서 아주 옛날에, 십 대 중반 때나 하던 막무가내 경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메!
경기 시작과 동시에 덮치듯이 덤벼들어 깃을 잡았다. 다행히 상대가 대응을 못 하고 있던 상태라 목깃은 잡았다. 팔이 길어서 뜯어내려고 하지만, 아예 뒤로 도망가면서 양손으로 뜯지 않는 이상은 뜯기 힘든 각도였다.
다나카 류가는 아예 몸을 빙글 돌렸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저렇게 몸을 빙글 돌리면 손가락이 꼬여 저절로 풀리니까. 이때 모두걸기를 쓸면 딱 좋은 걸 알지만, 하산은 그러지 못했다. 그조차 예상 밖의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덮쳤다. 잡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그냥 밭다리를 찍었다.
“큭!”
휘청!
다나카 류가의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꺾였다. 그런데도 버틴다는 건, 다른 건 몰라도 코어만큼은 무지막지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홰액! 아예 한 발자국 더 나서며 찍은 하산의 밭다리에 다나카의 몸이 홱 뒤집혔다.
쿵!
와자리!
심판은 결국 절반을 선언했다.
맛테!
하지메!
앞선 경기와는 전혀 다른 양상으로 흘러갔다. 준결승 A게임은 철저하게 계산된 경기처럼 보였다. 투기 종목임에도, 투지보다는 마치 다큐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맹수의 사냥법. 같은 제목을 단. 하지만 B게임은 정반대였다.
이어서 붙는 건, 그 어떤 계산도 없는.
정말 짐승의 경기가 이어졌다.
쿵!
2분이 지났을 때쯤, 다나카 류가가 절반을 따냈다. 평소 즐겨 쓰는 서서 뽑는 업어치기가 아니라, 금지 기술이 되었다가 다시 풀린 말아업어치기였다. 한국이 만들어낸 기술에 가까워 일본 선수들은 많이 쓰지 않는 기술인데, 그걸로 결국 절반을 따냈다.
사실, 절반도 조금 애매하긴 했다.
심판 10명 중의 8명은 절반은 주지 않을 정도의 기술이었는데, 대만 심판은 점수를 줬다. 운이 좋았다. 조금만 더 세게 돌아갔어도, 저 심판은 한판을 줬을 테니까.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3분이 지났을 때, 다나카 류가의 입술이 터졌고, 10초가 더 지났을 땐 하산의 입술도 터졌다. 하지만 둘 다 투지가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다. 경기장은 그런 선수들의 투지에 압도당했는지, 고요해졌다.
4분이 지났고, 경기는 연장전으로 향했다.
이때, 심판 위원장이 와 주심을 불러 길게 얘기를 했다. 그랬더니 주심이 화를 내며 막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이내, 전례가 없는 일이 벌어졌다.
심판 교체.
이는 정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
‘예정’되어 있던 승자가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