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94화
494화. 왕의 귀환(3)
세상만사, 전부가 뜻대로 풀리길 바라는 건 도둑놈 심보다. 뭐든, 계획과 어긋날 때가 있다. 스포츠에서는? 불의의 일격 정도가 있다. 흔히, 자이언트 킬러라 불리는 선수나 팀들. 이 팀들은 공룡 팀이나 선수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너뜨리곤 한다.
이런 걸, 상대성이라 부른다.
세계 제일의 선수를 아무런 성적도 없는 무명의 선수가 터트려버리는 것. 그런 상황이 종종. 아니, 아주 자주 벌어지는 게 유도 경기였다. 그리고 지금 경기가 그랬다.
“아, 강지영 선수 절반을 따냅니다! 경기 종료 20초 전입니다!”
“강지영 선수 고전하고 있죠?”
“네, 조인선 교수님. 강지영 선수의 상대는 공주대 1학년 장범 선수인데요. 고등학교 전체국전 3위 입상 성적밖에 없습니다. 성적 면에서 강지영 선수가 이렇게 압도적인데, 경기 내용은 장범 선수가 확실히 우위에 있습니다. 이게 왜 그런 거죠?”
배영우의 말에 조인선 교수는 참 그가 능구렁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포츠 해설만 하는 그다. 그런 그가 상대성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묻는 건 시청자들에게 재미난 얘기를 해주라는 것과 같았다.
자기는 모른 척하고, 조인선은 전문적인 느낌을 주는 아주 보편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방법은 많이 쓰인다. 그러나 부드럽게 쓰는 것과 그러지 못한 것의 차이는 당연히 있었다.
“네, 이게 흔히 유도에서는 상대성이라 부르는 겁니다. 성적과 무관하게 실력 차이가 큰 선수에게 유독 강한 선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이게 한 체급 안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경우가 딱 그래요. 장범 선수는 대학교 입학 이후 성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성에서 강지영 선수에게 우위에 있는 겁니다.”
“이런 경우가 꽤 있습니까?”
“유도처럼 개인 종목에는 제법 많습니다. 기록을 재는 종목을 빼면, 아마 거의 다 있을걸요?”
“그렇군요. 설명 감사합니다. 아, 이렇게 4분이 지납니다. 서로 절반 하나씩, 73체급 2회전 첫 게임은 연장전으로 들어갑니다. 조인선 위원님. 강지영 선수의 컨디션은 어때 보입니까? 제가 듣기로는 반년간의 공백을 아직 전부 메우지 못했을 거라고 하던데요.”
배영우의 질문에 조인선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럴 가능성이 크죠. 아무래도 반년이란 시간 동안 도복을 못 입은 거니. 몸을 보면 기름기가 끼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마 액션을 찍으면서 철저하게 몸 관리를 했을 거고요. 중요한 건 실전 감각인데, 지영 선수는 연습 자체도 한 적이 없다고 하니 감각 하락은 확실히 있었던 거로 보여요.”
“아, 그럼 예전과 같은 폼은 아니라는 거죠?”
“네. 그럴 수밖에 없어요. 십자인대 파열 아시죠?”
“네, 스포츠 선수에겐…… 재앙이라고 하는 걸 제가 모르겠습니까. 하하.”
“그 십자인대 파열 부상이 보통 재활까지 하면 반년 정도는 걸리거든요. 부상이 완벽하게 치료가 되고, 재활도 완벽하게 끝내도 이전의 실력을 되찾는 건 다시 반년을 더 들여도 될까 말까예요. 물론 지영 선수는 부상은 없었어요. 그래서 빠르게 감각을 찾는 게 가능은 하겠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최소 한 달 이상은 걸릴 거예요. 그런데 듣기로는 지영 선수가 도복을 입은 건 이제 고작 2주밖에 되지 않았어요. 이 안에 감각을 찾는다? 그건 감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요.”
“자신 있게 어떻게요?”
“절대, 절대 불가능하다고요.”
“아…… 그렇군요. 그럼 강지영 선수의 컨디션은 어느 정도일까요?”
“1회전이랑 2회전, 지금 경기를 보니 70에서 80 사이가 아닐까 싶어요.”
“음, 그 정도면 나쁘진 않은 거죠?”
“그렇죠. 사실 대회에 나올 때 선수들이 100% 컨디션으로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물어요. 특히 경량급 같은 경우는 감량을 많이 하잖아요? 적게는 5에서, 많게는 10에 가깝게 빼는 선수가 많아요. 그렇게 감량하고 하루 만에 다시 컨디션을 올린다? 그건 솔직히 힘들어요. 최선을 다해 회복에 집중하겠지만, 그래도 한계라는 게 있거든요. 그러니 다른 선수들도 100%의 컨디션은 아닐 거예요. 다만 다른 건, 기존 선수들은 실전 감각은 날카롭게 서 있다는 점이고, 지영 선수는 육체 컨디션과 실전 감각 정상은 아니라는 점 정도겠네요.”
조인선 교수의 말에 배영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잘 들었습니다. 하는 대답으로 받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자, 연장전 경기 다시 시작됩니다! 강지영 선수는 1차 선발전에 출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패배하면 올해 메이저 대회 출전이 매우 불투명해집니다! 그 기로에 선 강지영 선수가 어떤 경기를 펼칠지 매우 기대됩니다! 두 선수! 붙습니다!”
“개인적으론 음…….”
“편파 해설은 안 됩니다. 위원님.”
“휴, 알았어요, 알았어.”
“반말도 안 되고요.”
“…….”
두 사람이 만담 아닌 만담을 이어가는 동안, 연장전 경기가 시작됐다.
* * *
방심?
아니, 전혀.
조금도 그러지 않았다. 이 선수에 대한 데이터가 없어서 스타일 자체를 모르고 시합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 방심하지 않았다. 왜? 말했듯이, 데이터가 없어서다. 어떤 스타일인지 모르고 막 덤비면, 아무리 지영이라도 날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방심하지 않았는데, 절반을 빼앗겼다.
지영은 그 절반이 운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충분히 기술이 들어올 타이밍을 읽었고, 대비도 제대로 했다. 그런데 그런데도 넘어갔다. 되치기를 치려는 그 순간, 갑자기 온 지구의 힘을 끌어모은 것처럼 강하게 버틴 다음, 역으로 되치기를 쳤다.
즉, 카운터를 카운터 친 것이다.
되치기를 되치기하는 게 불가능할 것 같지만 가능하다. 예를 들면 밭다리를 되치기하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밭다리를 거는 발을 피해서 상대가 힘을 쓰는 방향으로 돌리던가, 아니면 밭다리를 버틴 다음, 역으로 밭다리를 건다던가. 이렇게 두 가지 정도로 나뉜다. 지영이 절반을 빼앗긴 건 후자였다. 밭다리를 버틴 다음, 역으로 걸었는데 장범은 그걸 마치 바위처럼 견딘 다음, 다시 역으로 걸었다.
그건 정확히, 노린 거다.
지영은 거기에 당했다.
정말 조금도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훅 뒤집혔다. 지영이 순간적으로 한판을 떠올렸을 정도로 제대로 넘어갔다. 다행히 뒤집히는 강도가 세서 한판이 아니라 절반이 나왔다. 나중에 영상을 봐야겠지만, 절반이 맞을 것이다. 한판을 줄 수 있으면, 심판이 한판을 안 줄 수가 없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지만 지영은 유도계완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절반을 준 건, 어쩌면 절반이 아닐 수도 있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고.
어쨌든, 지영은 장범의 스타일에 고전했다. 지영처럼 방어 유도를 구사하는데, 그게 제법이었다. 확실히 감각이 좋았다. 눈빛을 봐도 막 덤벼드는 건 아니었다. 잡기를 하면서도 지영의 전신을 계속해서 훑는 게, 확실히 지영의 움직임을 보면서 반응하고 있었다.
이런 스타일은 정말 오랜만이다.
지영은 자기의 스타일을 따라 한 선수를 많이 만나봤다. 충북권 내 학교 중, 한둘은 꼭 지영처럼 수비적 운영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걸 이번 2주 연습에서 확실히 확인했다. 그러나 전부 대충 카피한 것 정도였다. 제일 중요한 몇몇 가지가 빠져 있었다. 그런데 장범은 달랐다. 정말 깊게 연구했고, 그리고 재능도 있는지 지영처럼 방어 유도를 제대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게 지영을 즐겁게 했다.
상대를 무시하는 것 같아 미소를 짓진 못했지만, 지영은 그 자체로 그냥 즐거웠다. 이런 선수가 나와주는 건 정말 환영할 일이었다. 지영은 지독한 이성주의다. 어떤 순간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자기에게 생기는 아주 많은 문제를 최대한 이성적으로 판단해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런 지영은, 유도복을 입었을 때 특정 상황과 맞물리면 쾌락주의자가 된다.
지영이 유일하게 입가에 진심이 담긴 미소를 걸고, 이성을 놓을 정도로 집중하게 되는 상황은 유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특정 상황이란, 바로 이런 상황이다. 상대와의 승패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바로 지금 같은 때다. 신지와 붙을 때, 여유가 사라져서, 지영도 이성보단 본능에 의지해야 할 때. 바로 그런 때다.
지금이 딱 그랬다.
상대성이라고 해야 할까? 실력 전체로 보면 확실히 자기보다 못하다는 느낌은 드는데, 무조건 이길 수 있단 확신은 안 드는 상대다. 그게 즐거우면서도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다.
정규 시간이 끝나고, 연장전이 시작됐다.
지영은 빛나는 장범의 눈을 보면서, 이번엔 미소를 숨기지 않았다. 그냥 저도 모르게 나왔다. 그러자 장범도 비슷하게 웃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미소였는데, 그걸 나쁜 의도로 받아주지 않아서 고마웠다.
하지메!
악!
기합을 크게 넣었다.
지영답지 않게 큰 기합이었다.
스타일의 변화는 없었다. 지영은 왼쪽, 장범은 오른쪽이다. 서로 거리가 좁혀지자 지영은 손을 슬쩍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멈칫한 장범이 손을 툭 쳤다. 꺄아아! 두 사람이 페어플레이 하잔 의미로 손을 서로 살짝 치고 물러나자, 관중석에서 열렬한 호응이 일어났다.
후우.
쇼맨십이라고 봤겠지만, 아니었다. 지영은 정말 이 상대를 인정했다. 이대로 실력이 더 오르고, 지금의 스타일에 익숙해지면 구혁이나 이우진도 절대 쉽게 볼 수 없는 상대가 될 것 같았다. 나이도 심지어 한 살 어린 스물하나. 대한민국 유도계에 좋은 선수가 나타났다. 물론 지영에게만 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영은 이 정도면 좀 더 갈고 닦았을 때 충분히 다른 선수들에게도 효과를 볼 것이라 생각했다.
잡기가 시작됐다.
지영처럼 어깨를 아예 내주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서 잡기 싸움은 평범하게, 매우 거칠었다. 절대 소매는 안 주는 스타일이다. 이런 스타일은 확실히 피곤하다. 절대 자기가 불리한 포지션에 서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진 다른 선수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지만, 자기가 마음에 정해 놓은 선까지 잡기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수비 모드다.
지영은 이 수비를 어떻게 깨야 할 건지 고민했다.
‘미끼? 아니, 안 낚여.’
지영이 제일 좋아하는 게, 슬그머니 미끼를 던져주고 그걸 물면 즉시 카운터를 치는 방식이다. 이쪽으로는 정말 도가 터서, 아주 자연스럽게 상대가 미끼를 물도록 유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범은 그런 미끼를 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미끼인지 알고, 역으로 그걸 써먹을 생각을 할 것이다.
‘지도는 서로 하나씩. 반칙 유도하면 아마 미친 듯이 발악하겠지.’
알고 있을 것이다.
반칙 하나를 받는 순간, 지영의 페이스에 말릴 거라는 것을. 상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이 정도쯤은 그냥 알 수 있다. 그러니 미끼는 막 뿌릴 수 없었다.
툭, 툭.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며 손목을 턴다. 지영의 가슴 쪽 공간을 만들기 위한 수작이었다. 공간을 열면, 업어치기나 낚시걸이 등,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기술을 주로 건다. 지금이 딱 그 타이밍처럼 보였다.
타이밍을 읽었으면, 막는 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역스탭을 밟아 자세를 바꾸며 순간적으로 자세를 바꿔 들어오는 낚시걸이. 지영은 그걸 가슴 깃을 툭 미는 거로 쉽게 막아냈다. 몸이 들어가야 하는 타이밍에 제동을 걸면, 기술은 그냥 깨진다. 그걸 무시하고 들어오는 건 자살 행위다. 지영정도의 카운터 선수면, 무조건 되치기 각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으니, 즉시 멈췄다. 그리고 뒤로 빠지는 순간, 지영은 역으로 훅 치고 들어갔다. 이렇게 치고 들어갈 땐 자세를 낮추고, 중심이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안 그러면 그냥 거꾸로 뒤집힌다. 오늘 걸 받아넘기는 건 99%의 유도선수가 다 할 줄 아는 거다. 그러니 이렇게 치고 들어갈 땐, 중심을 반드시 신경 써야 한다.
잡는 순간, 역시 뿌리치려고 중심을 뒤로 쭉 뺀다.
지영은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안뒤축을 툭 때렸다. 그러자 중심이 무너진 장범은 그냥 몸을 뒤집었다. 버티면 그냥 넘어갈 것 같단 순간적인 판단이 든 것이다. 제대로 판단했다. 어차피 지영도 제대로 잡지 못해, 기울이기도 제대로 못 할 판이었다. 그래서 애초에 점수를 딸 거란 기대도 안 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지영의 공세에 포인트는 충분히 얻었다.
맛테!
심판의 그쳐 사인.
도복을 고치며 돌아오며, 지영은 숨을 다듬었다. 체력이 부족하진 않았다. 2주간 정말 죽도록 몸을 굴린 결과 체력은 확실히 돌아왔다. 지영의 나이는 이제 스물둘. 피지컬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다.
보통 이 나이부터 부상에 시달리기도 하는데, 지영은 심지어 그런 것도 없었다.
문자 그대로, 절정에 이른 육체다. 그래서 회복력이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유일하게 되돌린 것이 체력이다. 그래서 체력은 아직 문제없다. 앞으로 10분을 해도, 그 이상을 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장범은 아니었다.
‘넌, 체력이 약하구나?’
호흡이 슬슬 딸리는지, 가슴에 기복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지영은 눈을 빛냈다. 그 눈빛은, 사냥감의 약점을 찾은 눈빛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