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90화
490화. 전설로 가는(29)
출진은 은밀했다.
제국에 남을 소수의 이족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이족이 따라나섰다. 그렇게 따라나선 이족을 끌고 재는 천양 호수로 직행했다. 다행히 아직 선행 부대는 없었다. 척후의 보고로는, 지방 귀족의 저항을 정리하는 중이라 며칠 정도 더 발목을 잡힐 예정이라 했다. 그리고 그 며칠은, 재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작업하자.”
재의 말에 기름을 먹여 빳빳한 밧줄을 잔뜩 든 이족의 전사들이 협곡 양옆의 나무에 단단히 줄을 고정한 뒤에 쇠정과 망치를 들고 절벽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어느 정도 깊이를 파야 폭발에 바위가 균열이 가며 우르르 무너지는지, 그리고 그 폭발력의 영향이 어느 정도까지 퍼지는지는 제학 선생의 주도하에 전부 계산이 끝났다. 거기에 협곡 전체를 무너뜨릴 필요도 없었다. 협곡의 일부만 확실히 무너뜨린 다음, 지나간 선발대가 되돌아오지 못하게만 해도 성공이다. 목적은 후의 군대를 갈라놓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수만이 남겠지만, 그 정도는 감당해야 했다. 후를 수천 단위의 병력과 남겨 놓는 방법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러니 남은 건 절반으로 잘라버린 뒤, 전면전이다. 이건 피할 수 없었다.
“저 폭탄에, 전쟁의 승패가 달렸겠군.”
관영의 말에 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과를 직접 봤기에 수긍하고 폭탄을 기반으로 이런 작전을 계획했다. 그런데 저 폭탄이 원했던 상황을 만들어주지 못하면, 후방으로 도망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또 다른 전장을 형성해야 하는데, 그건 이 전쟁이 길게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그래서 재는 부디, 저 폭탄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작업은 착착 진행됐다.
그게 가능했던 건 역시 이족이다. 이족은 본래도 저렇게 생활했다. 절벽에 편 귀한 약초를 캐기 위해 저런 밧줄이 아니라, 밧줄보다 훨씬 내구성이 약한 넝쿨을 묶고 내려가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절벽에 매달려서도 매우 안정감 있게 작업을 이어나갔다. 힘이 빠지면 즉시 다른 이족과 교대해서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하루 만에 끝날 일은 아니었다.
해가 떨어지고, 재는 병력을 이끌고 후퇴했다. 증거를 남기지 않으려고 각자 건량을 최대한 챙겼기에, 불은 아예 피우지 않았다. 다행히 날이 풀렸다. 제국은 따스하다. 지독하게도 추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이족의 땅과는 다르게, 이쪽은 새벽에 조금 쌀쌀할 정도였다. 그것도 근처에서 나뭇잎 등을 모아 덮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음 날, 그런 흔적은 감쪽같이 치우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심지를 이어붙인 폭탄을 절벽에 박아넣고, 그중 몇 개만 은밀하게 표식을 해놨다. 작업이 끝난 뒤엔, 다시 흔적 지우기에 돌입했다. 역시 이때도 이족의 능력이 빛을 발했다. 이족은 사냥이 생활의 근간이다. 그리고 이 사냥의 시작은 동물이 눈치채지 못하게 자기의 흔적을 죽이는 작업에서부터 시작된다. 후각과 청각이 매우 민감한 동물들은 조금만 인간의 냄새가 나도 즉시 이상함을 눈치채고 도망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냥할 때는 철저하게 자기의 흔적을 죽여야 했다.
모든 이족은 그에 능했다.
기습 타격전에 능한 백적파도 좀 하긴 하지만, 이족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렇게 후방으로 빙 돌아 돌아가며 생긴 모든 흔적을 이족이 정리했고, 협곡의 위엔 선고를 비롯해 백발백중의 명사수 몇만 은밀히 남겨뒀다.
예전과 같이 땅을 파고 들어가 은신한 건데, 어찌나 감쪽같은지 아무리 뛰어난 척후 부대가 선행해 살펴본다고 해도 찾아내지 못할 거라 자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준비가 끝났다.
남은 것은 후가 이 협곡으로 들어서는 것뿐이었다. 재는 그런 후를 기다리기 위해 천양 호수에서도 길게 돌고 돌아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곳엔 제학 선생이 때에 맞춰 말 상인으로 위장한 군마를 보낼 것이다.
그건 딱 추적용이다. 후가 다른 곳으로 빠지기 전에 협곡 뒤로 몰아넣기 위한.
“후…….”
그럼 이제 남은 건?
기다림이다.
부디 후가 이곳을 지나길 바라는 간절함을 담은, 기다림.
하루, 이틀이 더 흘렀다.
“나타났다.”
“…….”
먼저 나섰던 송헌이 환영초를 입에 물고 돌아와 한 말에, 재는 아무런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올 것이라 예상했고, 반드시 와줬어야 했으며, 진짜 와주자 뭔가…… 마음이 이상했다. 재는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를 바로 깨달았다.
“마지막, 마지막이라…….”
“…….”
“…….”
재의 혼잣말에 주변에 있던 백적파가 반응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씩 웃었다.
“뭐야, 겁나?”
“저거, 겁먹은 거 같은데? 안 그러냐, 조영아?”
“먹었네, 먹었어. 천하의 백적파 단주가, 쯔쯔.”
“야야, 냅둬라. 재 울겠다. 크크.”
동료의 놀림에 재는 그냥 피식 웃었다.
겁?
먹었다.
이 많은 인간의 목숨이 자기 손에 달렸다. 이 압박감을 저들은 모를 것이다. 전투를 앞둔 흥분, 공포, 그런 것들이 한데 뭉쳐서 만들어낸 고양감은 느껴도, 최대한 병사들을 살리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생각에 빠진 재의 마음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휘관이 짊어져야만 하는, 책임.
재는 그 책임을 온전히 느끼면서, 눈을 빛냈다.
“움직인다.”
재의 빛나는 눈빛을 본 백적파와 이족의 전사들의 눈빛 또한 같이 빛났다. 저 모습이다. 언제나 당당하고, 언제나 최전선에 서서 길을 여는 대장의 모습이다. 강력한 무력을 바탕으로 그는 전장에서 그 존재의 가치를 오롯이 빛낸다. 그리고 그 빛을 보고 있자면, 전의가 들끓는다.
심지어 전세가 열악한 상황에서도 재는 빛난다.
재라면, 저 무사라면, 저 친구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만들어내 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지금 재는, 그런 재의 모습이었다.
절대적 믿음을 주는. 아군의 대장.
진군은 빠르지 않았다.
기마에 능숙한 학사군은 말에 오른 상태고, 그 최전방엔 역시 기마술에 능한 관영과 산조영이 자리 잡았다. 일만의 기병이다. 계획대로 된다면, 선발대인 기병이 빠져나간 뒤 선고는 작전을 시작할 것이다.
그럼 저쪽은 기병이 잘리고, 이쪽은 일만의 기병이 있는 셈이다.
기병은 후방에 배치하기 쉽지 않다. 소수 병력은 남겨둘 수 있어도 기병의 특성을 생각하면 후방에서의 돌격은 어마어마하게 비효율적이다. 왜? 앞에 아군이 질주에 방해되기 때문이었다. 좌우로 빠져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 적의 기병이 정면의 아군 보병을 직격한다. 창병으로 막을 수 있겠지만, 근래에 들어서 기마에는 미끌미끌한 가죽을 씌우기에 웬만한 창병의 찌르기는 전부 무용지물로 돌려 버린다. 그걸 생각하면 지극히 비효율이다. 빙 돌아서 가속도를 받은 기병보다, 적의 기병이 먼저 정면을 때려 버릴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작전대로 제국군의 기병을 잘라버리면, 일만의 기병은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두 시진쯤 움직이자 사라졌던 송헌이 다시 귀신처럼 나타났다.
“재, 후미병의 흔적이 보인다. 잠깐 멈추는 게 좋겠는데?”
“그래? 그럼 그래야지.”
송헌의 말에 재는 진격을 멈췄다.
후미가 재를 발견하면 영 좋지 않은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후가 재의 존재를 눈치채면, 진격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거리는 대충 예상이 갔다. 전력으로 움직이면, 빠지기 전에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다. 그 역할은 기병이 수행한다.
재는 그런 마음으로 기다렸다.
폭발을 터지는 시기는 선고가 정할 것이다. 재는 선고에게 선발대와 기병이 지나가면 곧장 작업을 시작하라 일러뒀다. 그리고 그 시기 자체는 선고에게 맡겼다. 다른 이족의 사수들은 땅을 파고 숨었지만, 선고만 나무 꼭대기에 자리 잡았다. 협곡 위 숲은 매우 우거져서, 직접 나무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은 선고를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선고가 숨어 있는 이족의 사수에게 신호를 줄 것이고, 그때부터 작전 시작이다. 아니, 마지막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그러니 기다린다.
선고를 믿고.
한 시진이 다시 지났다.
그리고…… 쿠웅! 쿠르릉! 저 멀리서, 거대한 폭음이 울리면서, 먼지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재는 슬쩍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슬슬 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전투는, 야간 전투가 될 것 같았다.
“가자.”
다시 시선을 내린 재의 말에, 관영과 산조영이 박차를 가하더니 일만 기병을 이끌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저 기병의 임무는 적의 퇴로를 막는 거다. 그러니 너무 급할 필요는 아직 없었다.
쿠웅! 콰과광!
연쇄 폭발이 시작됐다. 절벽에 넣었던 폭탄이 터지며 튄 불씨가 연결된 다른 폭탄으로 옮겨가,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폭음이 수십 번이 반복되며, 협곡이 지금쯤 어떻게 됐을지 예상이 됐다.
흠칫.
숨어 있던 후미병이 재를 발견하고 급히 본대로 도망가는 게 보였다. 재는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다. 어차피 재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전적이 꽤 되기에, 후는 재가 살아 있음을 이미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굳이 잡을 필요는 없었다.
체력을 보존하며 진군하기를 다시 한참. 해가 서산에 걸리기 직전쯤에 후의 본대와 조우했다. 관영과 산조영이 이끄는 기병이 길을 막고 있어, 잘린 제국군은 천양 호수로 빠지지 못했다. 그렇게 정면으로 재가 나서자, 제국군의 길이 열렸다.
천운인지 악운인지, 후가 칠흑의 갑주를 걸치고 눈부신 백마에 올라 천천히 나오고 있었다.
따가닥, 따가닥.
이윽고, 정면에 선 후.
옆에 제국제일검 진이 서자, 그의 입이 열렸다.
“역시 살아 있었군.”
“그러게. 명줄이 길지 뭐야.”
“천운이 따랐겠지. 나에겐 참 악운이겠지만. 후후.”
후의 느긋한 말에 재는 피식 웃었다.
“누가 할 말을. 자, 이제 어쩌냐. 퇴로는 막혔고. 기병도 잘렸고. 천하의 후가 그물에 걸렸어.”
“그물? 글쎄. 내가 이걸 예측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나?”
“했겠지.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겠지. 너는 폭탄이란 것을 몰랐잖나. 안 그래?”
“그건 인정하지. 이런 기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나도 처음 듣고 봤으니. 대단한 것을 손에 넣었어. 어디서 얻었지?”
후의 말에 재는 굳이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폭탄의 존재는 숨기지 못한다. 후가 이 전투에 살아남으면 그는 어떻게든 폭탄을 찾아낼 것이고, 재가 살아남는다면, 어차피 알고 있을 것이라 숨길 것도 없었다.
“동방의 나라에서.”
“이런, 변수가 그쪽에서 등장했군. 그래서 그건 뭐라고 부르지?”
“폭탄. 진천뢰라 하더군.”
“하늘을 진동하는 소리를 낸다라. 어울리는 이름이야.”
후는 허장성세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리고 깔끔하게 인정하는 거로도 유명하다. 솔직한 그의 감상에 재는 웃었다.
“내가 없는 동안 그렇게 열심히 황권을 공고히 하려 움직이더니, 덕분에 제국의 밖은 살펴보지 못했나 봐?”
“그랬지. 그리고 좀…… 안심한 것도 있고. 후후.”
“안심?”
“연을 말함이다. 기이하게도 내 바람을 읽은 것처럼 움직여 주더군.”
“…….”
역시……. 예상했던 대로다.
후의 입장에서 초소전 같은 소모전은 지극히 바랄 만한 일이다. 제국은 인재가 많다. 넓고,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빠른 병력 충원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족은 그게 힘들다. 그걸 아니 후는 소모전을 반길 수밖에 없었다.
인적 자원이 풍부하니까.
재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미 이 문제로 연과는 척을 제대로 진 상태다. 그 때문에 오만 정이 떨어져서, 그의 신하를 포기하기도 했다. 그런데 후는 이런 상태를 알아본 것 같았다.
“그런데 좀 이상하더군. 내가 아는 연은 그것도 모를 정도로 모자라지 않는데. 어째서 그런 짓을 저질렀을까?”
“……글쎄?”
대답이 조금 늦었다.
하지만 후는 다 안다는 것처럼 웃었다.
“변했더군.”
“변했지.”
재는 인정했다.
연은 변했다. 그리고 왜 변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연의 목표는 후였다. 오직 그를 잡기 위해 하루의 모든 시간을 소모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것도 자기의 입장에서가 아닌, 후의 입장에서. 그게 뭘 뜻하냐면…… 들여다본 것이다.
후라는.
“심연을 들여다본 건가?”
“…….”
개자식.
재는 대답 대신 웃었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