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86화
486화. 전설로 가는(25)
숙소에 도착한 지영은 대본을 꺼내, 씻는 것도 잊고 빠져들어 갔다. 정은정 작가는 정말 신기하게도, 지영이 오늘 했던 얘기를 그대로 대본에 넣어놨다. 이는 지영의 말을 들은 게 아닐 거다. 아마도 ‘화계’라는 설정을 이미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게 분명했다.
“이야…….”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다.
화계는, CG로 입힐 수 있었다. 하지만 정은정 작가는 이 부분은 ‘극’ 리얼리티를 바랐다. 극 리얼리티가 뭐냐고? 진짜 불을 지르겠다는 것이다. CG가 아니라, 진짜 ‘불’을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산이나 숲을 드라마의 한 장면 때문에 불 지른다?
그건 작품이 망하는 것 정도를 넘어서, 아예 죄를 짓는 일이다. 방화죄란 뜻이다. 그런데도 정은정 작가는 실제로 불을 지를 생각이었다. 그게 가능하겠냐고? 모른다. 나의 무사님 예산은 어차피 마르지 않는 샘과도 같았기 때문에 또 어떤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좀 무지한 지영이 생각해 본다면, 일단 나무랑 비슷하게 소품을 몇천 개 준비해 그걸 드넓은 평야 같은 곳에 세워놓고 불을 질러버리면,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그런 짓을 하려면…….
‘소방관이 많이 출동해야겠지.’
괜히 불씨가 다른 산에 날아가기라도 하면, 그건 진짜 지옥이 된다. 그걸 예방하기 위해 소방관은 필수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예술 하는 사람들은 원래 그런 것에 굉장히 취약하다. 마치 범인의 뇌 구조와는 다른 것처럼, 자기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다른 것은 일단 무조건 배제하고 보는 성격들이 많았다. 이는 정은정 작가도 같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영은 다시 대본을 탐독했다. 과연 화계의 뒤는?
“오호…….”
화계는 일어난다.
하지만 이를 연은 모종의 정보를 통해 예측했다. 그리고 일점 돌파를 계획한다. 이 일점 돌파가 뭐냐고? 화계가 터지는 틈을 타서 역으로 샨 강 상류에서 도강을 진행하고, 그대로 직선으로 제도로 진격하겠다는 뜻이었다.
역으로 제국의 제도를 탈취 후, 그곳에서 농성하겠다는 계획인데, 지영은 이게 가능할까 싶었다. 역으로 샨 강을 도강하는 건 지영이 보기에도 나쁜 건 아닌 것 같았다. 이족의 터전을 잃는 대신, 제국에 자기의 땅을 만드는 거니까.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해 보였다. 제도를 탈취한다고 해도 문제다. 후라면, 그것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 의문을 품은 채 지영은 대본을 읽어나갔고, 최종장에서 정은정 작가의 노림수를 발견했다.
“아…… 이렇게.”
제국군은 혼자 죽일 수 없었다.
화계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제도가 탈취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후는 반드시 제도로 돌아올 것이다. 제도는 제국의 심장부이고, 이 제도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곳이다. 이야기 속 설정으로 제도의 크기는 가히 현실 속 대도시의 크기보다도 크다는 설정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비축된 식량도 상당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즉, 작정하면 한참을 농성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공성이 수성보다 어려운 거야, 굳이 이쪽 전문가가 아니어도 다들 아는 얘기다. 이족의 군대는 설정상 오만 정도이다. 제도의 수비군이 일이 만 정도만 있어도 공성은 지극히 어렵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역시 해결책이 있었다.
“백적파라…….”
극 중 재가 이끌었던 백적파.
극의 초기에 재와 연을 탈출시키면서 ‘전멸’했을 거로 예상되는 이 단체가, 이야기의 끝에 재등장한다. 이건 설정파괴 아닌가? 하겠지만 이미 시즌3 초기에 관영이 등장하면서 이들에 관한 설정이 변경된 상태다. 그런 백적파를 극적인 순간에 재등장시킨다.
그것도…….
“제학 선생을 통해서.”
시즌1에 썼던 설정과 시즌3에 썼던 설정이 툭 튀어나왔다. 특히 제학 선생은 재의 양부가 죽은 이후, 제국 전체에서 가장 존경받는 학사다. 그를 존경하는 학사를 일렬로 세우면 제도의 성문에서 천리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학사들은 도움이 안 된다. 하지만 학사 자체 말고, 학사의 가문은 도움이 된다.
가난한 자도 있지만, 애초에 옛날부터 동양에선 공부도 돈 있는 놈만 하는 아주, 아주아주 고급 학문이었다. 심지어 이 세계관엔 신분제마저 존재하고, 이 카스트 내에서도 학사는 꼭대기 층에 거주하는 주민이었다.
그래서 각자 가세가 확실히 풍족했고, 이 가세가 풍족하다는 설정 자체는 곧 ‘전투력’으로 치환이 가능했다. 학사 가문은 사병을 두는 것도 백 명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이 백 명이 수십, 수백씩 모이면 그 수는 가히 어마어마해진다.
제학 선생은 이런 학사들의 지원을 은밀하게 모았고, 이족이 제도로 도착할 때쯤엔 이미 그 안으로 침투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여기에 백적파가 등장하며 그 사병을 이끌고 제도의 성문을 안에서 열어버린다.
제도는 그렇게 탈취되는 거다.
“스토리라인이…… 미쳤네, 진짜.”
딱 두 가지의 설정으로, 정말 그럴 법하게 제도를 탈취해 버렸다. 이 대반전이 오늘 지영이 받은 대본의 내용이었다. 흐름이, 정말 광풍이 부는 것처럼 빨랐다. 극의 흐름 또한 굉장히 과격하게 변했다.
마치 추격전을 연상케 했다.
대사도 거의 없고, 행동 지문이 많았다. 특히 액션이 주를 이뤘고, 일정 또한 매우 타이트했다. 그렇다면, 후는 어떻게? 그 최종대본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지영은 이제 걱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극의 후반에 대반전을 마련한 정은정 작가였다.
그래서 분명 엔딩 또한, 시청자들이 납득하는 수준일 것이라 예상됐다. 지영은 대본을 한 차례 더 읽었다. 그러곤 씻고, 다시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내일 첫 촬영이 오전 10시쯤이라, 새벽 3시가 넘게까지 대본을 탐독한 뒤에야 잠에 빠져들었다.
* * *
긴장감이 감돌았다.
정은정 작가의 미친 설정은 결국 현실로 이어졌다.
파주의 한 대형 평야에서, 소품으로 제작한 나무 수백 개를 촘촘하게 세운 뒤, 불을 지를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리고 그 주변을 가득 메운 카메라들. 그리고 다시 카메라 라인 밖에는 소방차와 소방관이 줄지어 서 있었다.
고작 며칠이었다.
그런데 정은정 작가의 이 미친 상상을 지역 소방재난본부의 수락으로 실제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소품이야 전국을 뒤져서 찾았으나 좀 부족했고, 결국 지영의 차기 계약사인 레인 스튜디오가 나서서 헐리우드에서 쓰인 소품을 보내주면서 해결됐다.
평야를 찾는 것도 쉬웠다.
대농장을 하시는 분의 땅인데, 어차피 겨울엔 논을 한번 태운다. 병충해 예방에 도움이 별로 없다는 말로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하는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이곳 농장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소방서에 신고는 하는데, 마침 소방재난본부의 허락이 떨어지고 신고가 들어가면서, 소방본부에서 이 장소까지 주선해 주기까지 했다.
어마어마한 인기를 구가하는 나의 무사님이고, 드라마나 영화 촬영할 때 건물이나 차량을 폭파하는 신이 있으면 어차피 소방관들이 지원을 많이 나갔다. 그런 지원의 일환이지만, 규모는 확실히 달랐다.
“어후…….”
전체적인 지휘를 끝낸 홍진아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장면을 위해 진짜 실제로 불을 태우기는 태우는데, 만약 불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 그건 진짜 재앙이었다.
해마다 대형산불로 몸살을 앓는 게 한국이었다.
그래서 산불에는 정말 민감했고, 그때마다 고생하는 게 소방관이기 때문에 만약 불이 진짜 나는 순간, 아무리 나의 무사님 촬영이라고 해도 무사하진 못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미친 짓을 떠올린 정은정 작가는.
눈빛이 정말 부담스러울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환하다 못해, 그냥 아이처럼 해맑기까지 했다. 홍진아 감독은 그런 정은정 작가를 보며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건 다른 배우들이나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그 안에는 지영도 껴 있었다.
예술 하는 사람의 무서움은, 지영만큼 제대로 겪은 사람도 없었다. 그런 경험이 있는데도, 정은정 작가가 정말 범상치 않아 보였다.
“후우, 레디. 액션!”
이윽고, 촬영이 시작됐다.
나무에 달린 원격 발화장치가 픽! 소리를 내며 소품 안쪽에서 불을 일으켰고, 가연성 액체에 불을 붙였다.
“오…….”
“와…….”
밑동부터 일제히 타오르기 시작한, 물경 천 개에 가까운 나무 소품에 불이 붙는 장면은 확실히 장관이었다. 한겨울의 추위가 타오르기 시작한 불길에 으아악!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거리가 상당한데도 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바람이 가장 안 부는 날을 잡아서 진행 중이지만, 그래도 간간이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열기는 장난이 아니었다.
지영은 고개를 돌려 아예 포위하듯이 사방에 자리 잡은 소방관들을 바라봤다. 비장한 눈빛이었다. 몇 명은 카메라를 꺼내 불타는 장면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 문제가 생기면 언제고 달려갈 준비를 끝낸 상태로 잔뜩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죄송했다.
이 정도 거리인데도 화끈거리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런데 저분들은 이런 불 안으로 들어가 불길을 잡고, 시민을 구한다. 심지어 반려동물도 생명이라 눈에 보이면 위험을 감수하고 구해 나온다.
그런 영웅이지만, 대우는 최악이다.
그런데도 오직 사명감 하나로, 불과 물로, 무너지는 건물로 뛰어든다. 그런 분들을 촬영을 위해 저렇게 긴장하게 한 건 정말로 미안했다.
물론 그런 마음으로 나의 무사님 제작진 측에서 이번에 도움을 준 경기도 소방본부에 후원금을 잔뜩 내기로 했다. 그리고 지영도 익명으로 따로 후원하기로 했다.
어느새 불은 나무 꼭대기까지 잡아먹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지?”
홍진아 감독의 말에 정은정 작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보고 싶던 장면을 봤는지, 이제는 초롱초롱하던 빛이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컷!”
홍진아 감독은 정은정 작가의 대답에 기다리지 않고 곧장 컷 사인을 외쳤다. 컷 사인에 카메라가 빠르게 빠졌고, 빠지는 순간 근처에 대기 중이던 소방차에서 물줄기가 폭발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두두두.
그리고 저 멀리서 소방헬기도 몇 대 날아왔다. 그리고 매달고 왔던 물주머니를 소방차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살려줘! 악을 쓰며 몸을 뒤트는 불길 위에 촤아아악! 시원하게 뿌리고 지나갔다.
불길은 금방 잡히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소품에 붙은 불은 금방 껐지만, 주변 평야를 태우기 시작한 불길은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애초에 임야를 태울 목적으로 농장주가 장소를 제공한 거기 때문에, 웬만큼 태우지 않고는 불길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큰불만 잡고 난 뒤에 다시 농지가 한참 타고 나서야 나머지 불도 껐다.
바람에 실려 간 불씨가 다른 산불을 낸 건 아닌지 걱정됐다.
하지만 소방관들은 따로 연락받은 건 없는지, 불을 전부 끄고 나자 잽싸게 차에 올라 잔불을 확인할 팀 하나만 남기고 그냥 곧장 출발했다.
솔직히, 가장 긴장했던 촬영이었다.
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차에 올라 세트장으로 향했다. 이쪽 현장의 촬영은 끝났지만, 세트장에서 다시 일정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가장 문제가 됐던 신을 촬영하고 나자, 다음으로 진도가 쭉쭉 나갔다.
그렇게 현장도 바쁜 만큼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의 무사님은 최종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 최종장의 시작은…… 시즌1의 1화와 같았다. 화면 전체에 가득 넘실거리는 불길.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닿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화마. 다른 게 있다면 장소가 구중궁궐이 아닌, 숲이라는 것 정도였다.
거대한 화마가 숲과 산, 모든 것을 태우고 있던 그때.
재는 강을 넘어 제도로 진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