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83화
483화. 전설로 가는(22)
충주에 도착했을 때는 7시가 좀 되기 전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짐을 챙겨 위로 올라갔다. 도착하기 10분 전에 양유진이 미리 연락해서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이른 아침이다. 그런데도 열린 문을 통해 고소한 냄새가 사정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엄마, 저 왔어요!”
“어, 유진이 왔니!”
양유진의 인사에 주방에서 어머니의 화답이 들렸다. 지영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어요.”
“그래, 지영아. 엄마 잠깐만!”
아무래도 손을 놓지 못하는 뭔가를 하고 계신가 보다. 그래서 짐을 놓고 주방으로 가보자, 계란말이를 하고 계셨다. 잠깐 나와도 되지만, 잠깐 정신을 놓으면 화르르 타버리는 요리라 자리를 빼기 힘드셨던 것 같다. 그리고 계란말이는 지영도 좋아하지만, 양유진이 정말 좋아하는 요리였다.
그러나 사연을 알면, 대신 좀 슬퍼진다.
계란은 대표적인 서민 식재료 중 하나다. 싸고, 많고.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그 칭호는 빼앗긴 것처럼 사라졌다. 계란이 아니라 금란이라 불릴 정도로 이제는 비싸졌다. 생계를 책임지던 양유진은 그런 계란 한 판을 살 때도 부담을 느꼈었다고 했다. 동생도, 자기도 정말 좋아하는데 월급날에 한 번 사서, 그걸 한 달 내내 아껴먹는다고 했다. 한 판에 만오천 원 가까이하니, 그럴 법도 했다. 빡빡한 가계에선 매 끼니 식탁에 올리긴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 계란을 거의 원가로 받아 오신다.
아는 농장이 있는 탓이다. 물론 팔 정도로 많이 가져오는 건 아니고, 딱 먹을 정도만 가져오신다. 고소한 계란말이 냄새에 양유진의 눈빛은 새벽부터 움직여 생긴 피로를 잊고 어느새 다시 초롱초롱해졌다.
“어, 상 다 차리셨네요. 밥 풀까요?”
“응, 그래줄래? 유진이는 거기 국 좀 뜨고.”
“네, 엄마!”
지영은 손을 씻고 밥을 푸기 시작했다.
“아 맞다. 아들, 두 개 더 퍼? 이치카랑 레미도 올 거야.”
“어, 그래요?”
“응. 오랜만에 너 온다고 해서, 설 같이 보내기로 했어. 괜찮지?”
“그럼요. 저도 안 그래도 바로 연락하려 했어요.”
어머니의 말에 지영은 웃으며 대답했다.
동생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면 가족이다. 같이 보내는 데 당연히 조금도 부담이 없었다. 거기에 두 사람은 한국에 아는 사람이 정말 없다. 충주로 오겠다고 결정한 만큼, 더욱 외로울 수도 있었다. 밥을 푸고, 양유진이 국을 푸고, 어머니가 한 초대형 계란말이를 놓자, 간단한 아침 식사가 완성됐다. 그리고 미리 연락했었는지, 상이 차려지기 무섭게 현관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안녕하세요. 하는 인사가 들렸다.
“안녕, 하세요?”
아직은 어색한 한국어.
레미의 목소리였다.
지영은 물 묻은 손을 옷에 대충 슥슥 문질러 닦으며 현관으로 갔다.
“어!”
“안녕? 안녕하세요, 이모.”
호칭이 마땅치 않아 이모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럼 엄마의 동생이 되는 거라, 의동생으로 둔 레미와의 관계가 요상해지지만, 뭐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그래도 누나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이모라 부르기로 했다.
“아, 안녕하세요?”
어색한 한국어다.
그러나 앞으로 천천히 배워가면 되는 거라서 지영은 그냥 웃음으로 받았다. 두 손 가득 싸 온 선물을 받아 거실에 놓고, 주방 식탁에서 아침을 먹었다. 계란말이를 콕 찍어 오물오물 먹는 레미를 보며 지영은 안도했다.
많이 풀린 모습이었다.
눈빛을 보면 그냥 지금 이 일상을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분명 있었다. 하지만 레미는 지난 한 달간, 정말 한국에 잘 적응했다. 특히 어머니와 가까운 곳으로 왔던 게 신의 한 수였다.
이치카 씨도 그랬다.
요즘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다니며 식자재를 보고, 가게도 알아보러 다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레미는 집에서 한국어와 한국어를 비롯한 공부를 하고, 저녁엔 집에서 또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다고 들었다. 그런 일상이 두 사람에겐 너무나 이로운 작용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아침 식사를 끝냈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부른 배를 진정시키는데, 레미가 옆에 와서 앉았다. 그러고 보니, 깁스를 풀었다.
“깁스 풀었네?”
“네, 저번 주에 풀었어요.”
“발은 안 아파?”
“음, 괜찮아요. 원래도 많이 다친 건 아니었잖아요. 오빠는, 음. 괜찮아요? 연기하는 거 되게 힘든 일이라고 하던데.”
“괜찮아. 난 적응이 돼서. 공부는 어때?”
“재밌어요. 음, 어렵지만, 어려워서 좋아요.”
“그래, 재밌다니 다행이다. 내년엔 학교 들어갈 거지?”
“그러고 싶어요.”
사실 학교에 간다는 건 레미로선 큰 각오를 한 것과 같았다. 그녀는 정말 힘든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 일은 영악하고, 잔인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반드시 약점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걸 가지고 레미를 놀리는 이들이 나올 건데,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레미는 학교에 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지영도 학교에 가는 일에는 찬성이었다.
아마 도를 넘어선 인신공격을 한다면, 어린애고 뭐고 법적인 조처를 할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지만, 아마 높은 확률로 일어날 것이다. 법의 보호를 받는 아이들의 영악함과 잔인함은 때때론,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한국이나 일본이나 솔직히 다를 것도 없었다. 한국이 그나마 나은 건, 이지메 문화가 그래도 일본보다는 조금 덜 하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지영은 찬성이었다.
학교는 중요한 곳이었다. 단순히 공부만 배우는 거라면 굳이 학교에 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공부 말고 더 중요한 게 학교에 있었다.
바로, 친구다.
강한결이나 임효중, 이성진이나 황석 같은 친구를 만나려면 학교만 한 곳이 없었다. 인터넷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부대끼며 정말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장소는, 학교가 유일했다. 거기에 지영은 친구라는 단어가 주는 안정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고, 회귀 전에도 그랬고, 지영은 친구라는 존재가 없었으면 그 힘든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거다. 레미의 일만 해도 그랬다. 지영은 문제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강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강한결이라면, 한결이와 효중이. 석이와 성진이라면.
이 문제를 내가 가기 전까지 잘 해결하거나 잡아주고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은 멋들어지게 맞아떨어졌다. 오히려 지영의 생각한 것 이상으로 제대로 풀렸다. 갔을 때는 그냥 상황 종료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친구.
아니, 그런 친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힘들 때 얘기를 들어주고, 고생했어. 하고 진심으로 위로를 해주는 친구 한 명은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지영은 진심으로 레미에게 그런 친구가 생기기를 바랐다.
좀 더 대화를 나누다가 레미와 이치카 씨가 돌아갔다. 지영은 이른 새벽부터 움직여서 좀 쉬기로 했다. 앙유진도 피곤할 법한데, 음식 준비를 하는 어머니의 옆에 찰싹 붙어 잘 생각이 조금도 없는 것 같았다.
“저는 좀 쉬고 나올게요.”
“그래, 아들. 점심 다 차리면 깨워줄까?”
“아니요. 음, 조금 늦잠 좀 자보고 싶어요. 하하.”
“그래, 그럼. 아들, 푹 자!”
“네.”
도와드리고 싶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잠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른 새벽에 움직인 여파와 한 달간 촬영장에서 최선을 다해 일한 피로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몸에 쌓인 느낌이었다. 이건 풀어낼 필요가 있었다. 지영은 컨디션에 정말 민감한 편이었다.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로 몇 년을 살았기 때문에, 회귀한 이후엔 최대한 베스트 컨디션으로 몸 상태를 두는 것에 집착이 생겼다. 거의 실시간으로 몸 상태를 스스로 체크하고, 그러는 게 아예 일이 됐다.
그런 자가 진단을 해본 결과 오늘은 무조건 쉬어야 하는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명절 전날이라 할 음식이 많았다. 두 사람이 전을 부치는데 방에서 늘어지게 퍼 잔다? 그건 지영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런 날은 일 년에 많아야 고작 두세 번이다. 지영이 바쁘기도 해서, 시간이 거의 안 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지영은 몇 시간만 자고 일어나 같이 전을 부칠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어? 뭔가 싸한 기분에 흠칫 놀라 몸을 일으켰을 땐 기가 막히게도 이미 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아…….”
폰을 들어 시간을 보니 벌써 5시가 다 되어갔다.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지영은 일단 스트레칭부터 했다. 몸을 풀고 밖으로 나가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레미가 반죽을 수저로 퍼서 팬에 올려주면 양유진이 그걸 착착 눌러 부쳤고, 어머니와 이치카 씨는 다른 음식을 준비하며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음, 정말 작년 이맘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광경이었다. 어색하기도 했고, 진귀하기도 한, 그런 광경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어, 깼어요?”
양유진이 나온 지영을 발견하며 한 말에 다른 세 사람의 시선이 달려들었다. 그 시선에 지었던 미소는 어느새 민망한 웃음으로 변했다.
“아들 일어났네?”
“죄송해요. 너무 잤어요.”
“아니야. 피곤했을 텐데 더 자도 돼.”
“괜찮아요. 이제 잠 깼어요. 저도 뭐 도울 일 없을까요?”
“음, 아. 튀김 가루랑 계란이 좀 부족해. 가서 좀 사다 주지 않으련?”
“네, 갔다 올게요.”
지영은 들어가서 외투를 챙겨 입고, 마스크와 안경을 썼다. 가벼운 변장이고, 매우 효과적인 변장이기도 했다. 지갑과 폰을 챙겨 아파트 정문의 마트로 향했다. 어머니의 주문대로 물건을 사서 올라와, 같이 일을 도왔다. 이것저것 챙길 게 제법 됐다. 양유진을 잠시 쉬게 하고, 전을 뒤집기로 했다.
능숙하게 전을 뒤집는 지영을 보며 레미가 놀라며 말했다.
“잘 뒤집네요?”
“엄마랑 예전부터 명절엔 같이 했거든. 레미 너도 익숙한데?”
“저는 근래에 배우고 있어요. 음, 아직 서툴러요. 한국어처럼.”
“하다 보면 금방 늘 거야.”
“네. 아, 이거 뒤집어야 할 것 같은데요?”
“어? 어어.”
잠시 얘기하는 동안 조금 탄 게 나왔다. 전을 뒤집는 거야 익숙하지만, 아직 멀티는 불가능한 지영이었다. 음식을 전부 장만하고, 저녁도 같이 먹었다. 아침에는 그래도 조금 어색했던 지영이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저녁이 되자 꽤 자연스러워졌다.
저녁을 같이 먹고, TV를 보며 얘기를 나누다가 나의 무사님 재방송도 함께 봤다.
이튿날.
제사는 셋이서 지냈다.
그리고 성묘를 갔다 온 뒤에, 일본식으로 명절을 보낸 레미, 이치카 씨와 모여 고스톱도 치고, 윷놀이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3일의 시간은 정말이지 금방 지나갔다. 지영은 아쉬워하는 양유진을 집에 태워다주고 서울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장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회사로 향했다. 회사에는 아직도 운동기구가 그대로 있었다. 시작은 가볍게, 유산소다. 몸을 푼 지영은 머신에 올라 천천히 러닝을 시작했다. 10분은 천천히, 10분은 좀 더 빠르게, 뒤로 20분은 인터벌 속도로, 나머지 다시 10분은 천천히 러닝하듯이.
50분을 뛰고 나자 땀이 비 오듯이 흘렀다.
명절 간 몸이 두 팔 벌려 끌어안듯이 환영한 기름기가 안 돼! 하며 뽑혀 나갔다. 물론 전부 빼내는 건 지영이라고 해도 무리였다. 하지만 50분의 러닝으로 몸 상태가 제법 좋아졌다. 땀을 흘리고 나니 컨디션이 수직상승 한 것이다.
지영은 간만에 웨이트도 했다.
하체부터 상체까지,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딱 근육에 긴장을 욱여넣었다. 땀을 쭉 빼고 돌아와 다시 푹 자고 일어나자, 컨디션의 대부분 회복됐다. 하지만 그렇게 컨디션이 올라온 건…… 지영만 그랬던 건지.
빠악-!
플라스틱으로 만든 소품 검이 눈두덩이를 강타하며, 피가 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