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76화
476화. 전설로 가는(15)
다음 신을 기다리며 대본을 다시 숙지하고 있는데, 임은진이 뜻밖의 소식을 들고 왔다.
“네?”
“좀 전에 연락받았어. 이연 씨가 컨디션이 갑자기 안 좋아서 빠졌다네.”
“누나가요? 아깐 괜찮아 보였는데. 어디 아프대요?”
“거기까진 모르겠어. 그냥 갑자기 컨디션이 안 좋아졌나 봐.”
“아…….”
임은진의 말에 지영은 폰을 찾았다.
“전화 안 하는 게 좋을걸?”
“네? 왜요?”
“많이 안 좋아 보이더라. 그냥 쉬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아.”
“…….”
임은진의 그 말에 지영은 잠시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자기가 모르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고 보니, 뭔가 좀 이상하기도 했다.
‘아깐 분명 컨디션 좋았는데?’
이연과 함께 하도 오래 하다 보니, 이제 그녀의 안색만 봐도 컨디션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그리고 몸이 정말 안 좋았으면…….
‘나한테 말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그냥 짐을 챙겨 훅 떠났다? 그것도 분명 이상했다. 그래서 자기가 모르는 뭔가가 있을 거로 생각되어 임은진을 빤히 봤다. 그녀는 지영의 시선을 잠시 받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지영은 그녀의 반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쉬고 있어. 지금 바뀐 신 확정되면 바로 알려줄게.”
“네.”
임은진이 나가자, 지영은 들고 있던 대본을 내려놨다. 다음 신에 맞춰 대본을 다시 숙지하고 있었는데, 이연이 떠나면서 신이 바뀌는 게 확정됐으니 지금은 볼 필요가 없어서였다. 지영은 대신 폰을 들었다가, 메시지라도 보낼까 하다가 임은진의 반응이 떠올라 다시 내려놨다.
“내가 못 하진 않았나 보네…….”
이연에게는 미안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물론 회심의 미소처럼 대놓고 진한 미소를 짓진 않았다. 그냥 잔잔한, 스스로가 뿌듯해서 나온 작은 웃음이었다. 이연이 시간을 달라고 한 이유는 아마도, 자신과 같을 것이다. 앵커리지에 도착해 심수정의 연기를 보고 충격을 받아서, 신 스타트를 늦춰달라고 했을 때 자기의 마음과 지금 이연의 마음은 크게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신 수정이 끝나고, 세 신을 더 찍고 지영은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나온 지영은 다시 준비를 시작했다.
“누나가 그렇게 노력하는데, 나도 해야지.”
지영은 이번엔 대본 대신 이연의 이전 작품을 살펴봤다. 몇 년간 같이 합을 맞췄지만, 그녀의 연기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서였다. 지영은 예인부터 시작해, 가장 최근 그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나의 무사님 시즌2까지 전부 돌려봤다. 물론 이연의 연기만 모아서 봤다.
그러자 눈에 띄게 보이는 게 있었다.
배려.
이연은 배려를 아는 배우였다.
단독 신에서의 이연과 다른 배우와 합을 맞추는 이연의 연기는 분명 달랐다. 처음에는 그것도 잘 몰랐는데, 계속 돌려보다 보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 누나, 나랑 연기할 때도 나에 맞춰주고 있었네.”
몇 번이나 돌려봐도 그게 확실했다. 지영은 어이가 없긴 했어도, 이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왜? 이연의 행동이 자기를 얕봐서가 아니라, 배려해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지영도 이런 경우가 많았다.
어느 스포츠나 마찬가지겠지만, 막 운동을 시작했을 무렵엔 다들 실력이 제로에 가깝다. 그럼 이 실력을 어떻게 올릴까? 당연히 훈련으로 올린다. 그리고 이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파트너였다.
초보는 뭘 해도 초보다.
그래서 실력이 조금 높은 선수와 붙으면 지는 게 당연했다. 여기서 경력이 있는 파트너의 존재가 중요해진다. 똑같은 레벨끼리 붙여 놓으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실력 차가 나면 기존 선수가 얼마나 받아주느냐에 따라 성장의 속도가 결정된다.
파트너가 무작정 내던지기만 하는 연습은 초보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질 않았다. 어느 정도는 맞춰서 받아줘야지만 초보도 실력을 올릴 수 있었다. 지영도 당연히 초보 때는 파트너로 잡아주는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고, 선배가 되어서는 반대로 신입생들과 훈련할 때 그 실력에 맞춰 파트너를 받아줬다.
운동계의 실력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혼자 훈련이 가능한 몇 개의 종목을 제외하면, 실력 향상의 길은 사실상 선배들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훈련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감독과 코치도 결국엔 크게 보면 선배들이었다.
이 경우가 딱 그랬다.
“신인, 음. 맞지. 솔직히 경력도 얼마 안 되니까.”
지영의 필모는 매우 짧다.
조연으로 데뷔해 곧장 주연으로 올라간, 연예계에선 라이징스타만 가능한 길을 똑같이 달린 지영은 명성에 비해 실력이 부족함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은 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이 최소한 작품에 폐를 끼치는 정도는 아니다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 보니까…….
“아니었네. 이 누나가 숨은 공신이었네.”
강지영이란 한 인간이 아무리 대단해져도, 작품에 들어갔으면 연기는 아주 당연히, 기본적으로 잘해줘야 했다. 요즘은 이름값이 아무리 대단해도, 연기력이 별로면 대중은 외면한다. 실제로 그런 작품은 무수히 많았다.
배우를 좋아하긴 하는데, 배우의 연기가 별로다.
이런 공식이 가능한가? 하겠지만 가능하다. 외모만 반반하면서 연기력은 개판인 배우는 널리고 널렸으니까. 그래서 연예인의 외모와 성격을 좋아해 팬이 되지만, 팬심으로 극복하지 못하는 연기력이면 결국 작품은 외면한다.
그런 경우는 꽤 많았다.
지영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다. 그리고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아니었다.
“자아도취는 아니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났었는지 몰랐다.
더불어 이연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이연은 오늘, 지영이 전에 했던 행동을 똑같이 답습했다. 이는 자기의 연기가 드디어 이연의 뒤를 잡았다는 뜻이었다. 물론 확실하진 않았다. 진짜 몸이 안 좋아서 조퇴한 거일 수도 있으니, 성급하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좋지 않았다.
그때.
띠링, 하고 메시지가 왔다.
폰을 열어보니 이연이었다. 내용은 딱 기다려! 이 한 문장이 전부였다. 지영은 그 문장에서 자기 생각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뿌듯한 기분. 지영은 그래도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기껏 겨우 따라잡았는데, 다시 저만큼 거리를 벌린 채 이연이 돌아올 수도 있어서였다.
“누나, 쉽게 지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 다짐한 이틀 뒤.
이연이 돌아왔다.
독기를 가득 품은 채로.
* * *
돌아온 이연은 독이 바짝 오른 암사자가 같았다. 다시 돌아온 이연을 반기려던 스태프들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그녀의 분위기에 다가가다 말고 슬그머니 발을 뺐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다 보면, 저런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들은 지독하게 예민하니 건드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예술가들은 예민함의 극치를 달린다고들 하는데, 이는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감각을 극도로 예민하게 벼려야 하는 게 예술이란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는 체육계도 마찬가지였다. 시합 직전 선수의 예민함은, 정말이지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난감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이런 경우, 그냥 피한다.
괜히 눈치 없이 들이댔다가는 불벼락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이연이 지금 그랬다.
이틀을 굶고 온 건지, 그녀의 분위기는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었다. 피골이 상접했단 표현의 두 발자국 뒤? 그 정도였다.
현장에서 그런 이연과 마주친 지영은 인사를 하려다가, 조용히 대기실로 돌아왔다. 머릿속에 경종이 쳤다. 저렇게까지 예민하게 감각을 벼렸다면, 뭘 해도 상대하기 쉽지 않단 생각 때문이었다. 유도를 할 때도 저렇게 날이 바짝 선 선수는 한칼을 준비한 게 분명해서, 무조건 조심해야 했다.
지영은 곧장 대본을 펼쳤다.
오늘 지영의 첫 신은 이연과 붙는다.
이야기 속에서 재는, 이연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국지전을 걸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걸 눈치채자마자 이연의 표정은 감정을 뽑아낸 것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게 이 전의 마지막 신이었다. 듣기로는 본래 엔딩 신 말고, 그 장면을 엔딩 신으로 쓴다고 했을 정도로 잘 뽑혔다. 지영도 정말 뭔가에 홀린 것처럼 연기를 펼쳤고, 받아준 이연의 연기력도 굉장했다.
그걸 이어서 나누는 대화다.
“연기를 끝낸 연과 연기를 간파한 재의 대화.”
대립, 갈등의 신호탄을 거하게 뽑아내는 대화가 시작된다. 지영은 이 신도 당연히 철저하게 준비했다. 하지만 오늘 이연을 보니, 또 밀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지금 기세를 보니 예전처럼 자기의 연기력을 낮춰 합을 맞춰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잘못하면…… 망신 정도로 안 끝나겠는데?”
진짜 제대로, 대차게 깨질 수도 있겠단 위기감이 엄습했다.
누누이 말했지만, 지영은 지는 게 싫었다. 유도는 말할 것도 없고, 상황이 이렇다는 걸 안 지금은 더더욱 지고 싶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내가 누나보다 연기를 잘할 수는 없어. 그건…… 불가능해.’
애초에 노력한 시간이 다르다.
이 시간을 거스르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었다. 그렇다면? 이런 경우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지영은 잘 알았다.
‘죽을 각오로 부딪쳐야지.’
지기 싫어하는 지영이 지금의 실력을 아직 갖추지 못했을 때, 두세 살 위의 선배들과 연습할 때의 마음가짐. 아니, 각오가 지금은 최선이었다. 지영은 그런 마음으로 훈련에 매진했고, 고1이 되었을 때 정상의 자리에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때부터였나?
지영은 패배를 허용한 적이 정말 손에 꼽았다.
‘아니, 없었나?’
지영은 시합을 포기한 적은 있어도, 회귀 이후 지금까지 무패 행진 중이었다. 그 행진은 회귀라는 말도 안 되는 선물 덕분인 것도 있지만, 절대 지진 않겠단 각오도 분명 지분이 매우 컸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각오와 신념. 이 모든 걸 버무린 다짐. 이는 강지영이란 인간의 원천이었다. 그렇게 각오와 다짐이 끝나자 신기하게도 흔들리던 마음이 천천히 바로잡혀 갔다.
똑똑.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온 임은진.
“시간 됐어.”
“네.”
우르르.
안으로 들어온 스태프에게 메이크업을 점검받고, 전 신과 똑같이 세팅한 다음 준비된 세트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이연은 먼저 와서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고 있는데, 얼굴에 어떤 감정이 있을지 예상조차 되지 않았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지영은 그녀의 건너편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이연처럼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면서도 대사를 다시 복기하는 건 잊지 않았다.
두 사람이 눈을 감고 미동도 없자 분주하던 스태프들이 저도 모르게 눈치를 보며 행동거지 하나까지 조심하기 시작했다. 배우가 감정을 잡는 작업은 매우 고단하다. 연기라는 게 그렇다. 슬프지 않아도 슬퍼야 하고, 화가 나지 않아도 화를 내야 한다. 철저하게 대본에 있는 상황에 몰입해 감정을 글자에 맞춰야 했다.
이걸 쉽다고 말하는 건, 연기를 수박 겉핥기처럼 배웠거나, 아니면 진짜 말도 안 되는 내공을 품은 사람뿐일 거다.
당연히 지영은 어디에도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래서 저렇게 조용히 해주는 스태프가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다운. 다운. 다운.
감정은 조금씩 내려갔다.
세계를 떠올렸다.
나의 무사님! 이란 간판이 매달린 커다란 세계다. 그 세계는 이미 상당 부분 스토리가 진행됐다. 지영은 그 스토리를 빛의 속도로 따라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지막 부분까지 도착했다.
차갑게 표정을 굳힌 연.
안타까움에 표정을 일그러뜨린 재.
도착 완료.
지영은 눈을 떴다.
그러자 앞에서 조명에 반사되어, 신기하게도 파랗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연의 시선과 시선을 마주하게 됐다. 인사도 없었다. 차갑게 굳은 표정에서는 지금이라도 대사를 확 쏟아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이연을 보는 지영의 표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본인은 몰랐지만, 그걸 알아챈 이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잠시 피었다가, 사라졌다.
“…….”
“…….”
사위가 고요하다.
마치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