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68화
468화. 전설로 가는(7)
지영은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다.
이는 역시 트라우마가 관여되어 있다. 지영은 회귀 전 다쳤을 때, 어설픈 위로와 사과, 그리고 지원을 제법 많이 받았다. 그 지원은 솔직히 고마운 일이다. 입바른 위로라고 하더라도, 그걸 무조건 나쁘다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진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는 받아들이는 지영이 문제였다. 그건 회귀 전에도 이미 스스로 인정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지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코치 생활을 할 때쯤엔 위로도 곧이곧대로 들었지만, 사고 초기에는 그 어떤 위로와 지원도 지영의 다친 마음을 치유하지 못했다.
그때의 마음을 지영은 잘 알고 있어서, 어설픈 위로는 건네지 않는다. 그리고 어설픈 지원도 하지 않는다. 레미에게 했던 말도 그런 마음에서 기인한 거였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영은 제대로, 끝을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끝을 보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다. 나의 무사님 촬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한참 촬영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 나머지 분량을 달리기 위해 촬영팀 전체에 일주일간 휴가가 주어졌다. 이는 촬영 스태프까지 전부 포함이었다. 지영도 당연히 그 안에 포함되고, 일주일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일주일 안에 지영은 레미의 일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래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숙소였다.
두 모녀의 보금자리가 될 집은 구했다.
하지만 지영은 레미와 이치카 씨를 바로 집으로 안내하지 않았다. 일단은 관광부터 하면서 지친 심신을 달래는 게 먼저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울에 일주일간 쉴 숙소를 잡았다.
이 단계에서도 지영은 정말 신경 썼다. 평생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좋은 일로 온 것도 아닌데 너무 휘황찬란한 숙소를 잡으면 오히려 어색하고 불편할 것 같아서 마음이 평온해지는 소박하고 정갈하며, 깔끔한 숙소를 구했다.
물론 모녀 숙소만 구하지 않았다.
둘만 덩그러니 놓으면 또 무서울 수도 있다고 생각한 강한결은 앞, 좌우까지 전부 숙소를 잡았다. 그리고 황금세대가 전부 며칠간 묶기로 정했다. 그렇게 숙소를 잡고, 휴가와 관광이 시작됐다.
레미와 이치카 씨에게 물어 서울에서 가보고 싶은 곳은 전부 다녔다. 동대문, 이제는 망한 명동, 이태원과 홍대, 첫날, 둘째 날은 번화가 위주로 다녔고, 3일째는 시장 구경에 나섰다. 남자들이 우르르 쫓아다니면 그걸로도 시선을 끄니까, 언제나 황금세대 중 두 사람만 동행했다. 그리고 지영은 고정이었다.
시장 탐방을 마쳤을 때쯤, 레미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힘들어? 숙소로 갈까?”
“아니요. 더 보고 싶어요. 저녁 먹고 우리 이제 어디 가요?”
“소화시킬 겸, 가볍게 산책할 거야. 근처에 괜찮은 산책로가 있거든. 괜찮지?”
“네. 저는 좋아요.”
식당에 들어와 앉자마자 지영이 한 질문에 레미는 조금의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으며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영은 레미의 거절을 받아들였다. 얼굴은 분명 피곤하지만, 눈빛만큼은 일본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정말 행복하게 반짝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낯선 곳이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로,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정말 큰 부담을 주는데, 레미는 그래도 이치카 씨와 함께 있고, 지영이 계속 같이 붙어 있어서 그런 불안감이 덜했다.
거기에 지영은 레미의 질문에 정말 친절하게 대답해 줬다. 조금도 귀찮은 기색을 내지 않았고, 오히려 즐거운 표정으로 레미의 통역사를 자처했다.
“이치카 씨는 어때요?”
“네? 저요?”
메뉴판을 빤히 보던 이치카 씨가 고개를 들며 화들짝 놀랐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뜬 게 레미와 정말 판박이다.
“어, 전 괜찮아요. 레미가 좋다면 저는 뭐든 다 좋아요.”
“음, 엄마. 그런 게 어딨어? 엄마도 의견을 말해야지.”
“하지만…… 엄만 정말 레미가 좋으면 다 좋은걸?”
“치…….”
레미는 그런 이치카 씨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은 모녀가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 지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드르륵, 시장통 구석이라 옛날식 느낌이 물씬 나는 식당이다. 그런 식당의 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잠시 통화하러 갔던 황석이 들어왔다.
“은정이?”
“어, 지금 온댜.”
“그래? 서울이래?”
“아니, 청주. 아까 출발해서 지금 막 내렸나 봐. 지영아. 와도 괜찮은지 네가 좀 물어봐 주라.”
“알았어. 이치카 씨, 레미.”
지영은 레미와 이치카 씨를 불렀다. 그러자 두 사람이 자세를 바로 하곤 지영을 바라봤다.
“저, 지인이 올 겁니다. 여기, 석이 여자 친구인데, 친구가 성격이 급해서 벌써 서울이라고 하네요. 오게 해도 괜찮을까요?”
“어머, 그럼요!”
“저도 괜찮아요.”
한은정은 이치카 씨와 레미가 한국에 왔다는 소식에 엄청 흥분했었다. 자기가 바로 봐야 한다며 날뛰었지만, 아쉽게도 수업 때문에 계속 시간이 나지 않았다. 그러다 내일 수업이 오후에 하나 있어, 얼른 차표를 끊고 냅다 날아오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게 흥분하는 이유는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레미가 아니라 이치카 씨에게 있었다.
“참고로 그 친구는 요리를 아주 잘해요. 장래 희망이 요리사거든요. 그래서 아마 이치카 씨랑 잘 맞을 거예요.”
“진짜요? 와아…….”
이치카 씨는 솔직하게 기뻐했다.
한국에 와서 그녀가 가장 관심을 보인 건 한식이었다. 끼니는 전부 한식당이나 숙소의 조식 서비스를 이용했는데, 그녀는 그 모든 음식을 정말 진지하게 맛봤다. 그렇게 진지하게 음식을 연구하는 이유는 이치카 씨가 이미 한국에서 뭘 할지 결정했기 때문이다.
바로, 식당.
일식과 한식이 융화된, 혹은 서로의 개성을 헤치지 않는 음식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이는 레미가 이동 중 잠시 쉴 때 해준 말이었다. 벌써 자립하려는 그녀의 마음에 지영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사실, 그녀를 위해 일을 주선할 생각도 있었다. 연희 스포츠 재단은 언제나 인력이 부족했다. 특히 선수의 인성을 알아보는 일은, 언제나 많은 인력과 시간이 들어가기에 한두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그래서 그쪽에 자리를 마련하려고 했는데, 이치카 씨는 사무직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굉장히 빨리 결혼한 케이스였다. 스물을 갓 넘겨, 결혼했다. 그리고 그해의 다음 해에 레미를 낳았다. 그래서 지금 나이가 아직 40도 되지 않았다. 그런 이치카 씨는 교토의 한 온천여관의 딸이었다. 한국과는 다르게, 엄청 커다란 규모였고, 숙식까지 모두 제공해 이치카 씨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음식을 하며 집안일을 도왔다고 했다. 그래서 그녀는 거의 모든 일본 음식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에서의 자립으로, 식당을 정했다.
그리고 지영은 그녀의 선택을 매우 지지했다. 왜? 그녀의 음식을 먹어봤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 끼였고, 반찬의 가짓수도 얼마 없었지만, 입맛이 제법 까다로운 지영은 물론 황금세대 전체가 푹 빠질 정도로 맛있었다. 그런 실력이면, 구성만 잘하면 한국인의 입맛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시킨 메뉴가 나왔다.
시장통 구석에서 파는 갈비탕.
커다란 뚝배기에 담백해 보이는 국물 사이로 커다란 뼈 하나가 들어 있었다. 거기에 뼈에 두툼하게 붙은 살덩이, 그리고 송송 썬 파가 잔뜩 들어 있었다. 전형적인 한국식 갈비탕이다. 이 음식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는 매우 달랐다.
이미 식당을 열기로 작정한 이치카 씨는 국물과 반찬을 아주 신중하게 관찰했고, 레미는 눈을 반짝이며 지영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얼른 알려달라고 사정없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해줄게.”
“네.”
뚝배기를 앞으로 당긴 지영은 집게로 뼈를 잡아 가위로 먹기 좋게 잘랐다.
“후추랑 소금은 취향에 맞춰서 조금씩 타 먹어.”
“그게 끝이에요?”
“음…… 거의? 한국 사람은 나중에 밥 말아 먹을 때 깍두기 국물을 넣어서 먹기도 하는데, 그것도 레미 선택에 달렸겠지?”
“아…….”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손가락에 끼워 합장하는 것처럼 손을 모아 인사한 뒤, 레미는 식사를 시작했다. 먼저 국물부터 호로록 맛보더니 음! 하며 기쁜 몸부림을 쳤다. 지영도 국물을 맛봤다. 기타 미사여구가 필요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여긴 황석이 추천한 곳이다. 음식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한은정과 전국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두 사람의 기본 데이트 방식이었다.
여기도 둘이 다닌 곳 중 하나고, 한은정이 별 세 개 만점에 두 개 반이나 준 곳이었다.
그리고 과연, 한은정의 인정한 식당다웠다.
고소하면서도 담백하다. 기름기를 걷어낸 국물은 깔끔함의 절정을 자랑했고, 고기는 어떻게 삶았는지 매우 연했다. 보통 갈비탕에 들어가는 이런 큰 갈빗대는 수입고기를 쓰는 경우가 많고, 그러지 않더라도 저품질의 고기를 쓰는 곳이 많은데 여긴 질이 정말 좋은 고기를 쓰는지 냄새도 안 나고, 심지어 정말 부드럽기까지 했다.
“스고이…….”
국물을 맛본 이치카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카미도쿠랑 비슷한데 맛이 더 깔끔하고 좋아요.”
“카미도쿠요?”
그게 뭔지 몰라 지영이 되묻자, 한은정에게 단련됐던 황석이 답을 알려줬다.
“일본식 갈비탕 라면? 그런 걸걸.”
“아아.”
지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자, 이치카 씨는 한껏 기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 라멘은 기본적으로 간이 세요. 담백하게 육수를 우려내도, 추가로 들어가는 고명에도 간이 세게 되어 있죠. 그런데 이건 비슷하면서도 너무 다르네요. 간이 정말 담백한데, 고소한 풍미가 넘쳐요. 음, 이건 만들어 보고 싶어요.”
이치카 씨의 말에, 레미는 풉, 하고 웃었다.
“어? 왜?”
“엄마가 이렇게 신나 하는 모습,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서.”
“어머, 그랬니?”
“응. 그랬어.”
“앞으로는 계속 웃을 거란다. 레미 옆에서.”
“……응.”
때아닌 훈풍에 지영은 머쓱한 표정으로 남은 갈비탕을 흡입했다. 맛은 뭐, 엄청났다. 황석은 나중에 밥을 말고 깍두기 국물을 섞었는데, 그게 또 이치카 씨의 흥미를 유발한 것 같았다. 가만히 황석의 뚝배기를 보더니 결국, 따라 했다.
“음, 담백함이 사라지는 대신, 새콤하고 매콤한 맛이 추가되는 거네요? 한 번에 두 가지 맛을 즐길 수 있기도 하고요.”
“네, 정확합니다.”
“아…… 이건 이것대로 또 맛있어요. 음음.”
“하하…….”
봉인이 풀린 소녀 같은 느낌.
지영은 아마도 이게 평소에는 레미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본모습일 거라 생각했다. 결혼과 동시에 엄마가 되어, 소녀의 순수성을 모성의 뒤에 잠시 미뤄두고 살았던. 한국과 일본 말고 전 세계 엄마가 아마 이럴 것이다.
식사는 그렇게 밝은 분위기에서 끝났다.
바로 옆의 전통찻집에서 기다리기를 30분, 한은정이 왔다. 음, 숙녀에게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역시 살이 조금 더 붙었다. 먹는 걸 너무 좋아하는 친구라 그 힘들다는 조리 과에 다니는데도…… 살이 빠지질 않는다.
물론, 그 같은 티는 절대 내지…….
“왜, 사람을 살찐 돼지 보듯이 보냐?”
않았는데, 한은정은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인사치고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어머, 그랬네. 근데 아니라고는 안 하네?”
“안 했어.”
“했는데?”
“안 했다니까?”
“했다니까? 눈빛이랑 표정이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지영은 양손을 들었다.
눈치 귀신인 한은정에게 이미 표정으로 걸렸으면, 뭔 수를 써도 못 이긴다. 뭔지 모르지만, 잠깐의 말다툼(?)에서 새롭게 등장한 여자가 지영을 이겼다는 것을 안 레미와 이치카 씨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안녕하세요?”
황석과 지영의 사이에 자리 잡은 한은정이 나름 깔끔한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혼자서 일본도 종종 가서 맛집 탐방을 하고 오는 그녀는 기본적인 일어가 가능했다. 서로 간단한 통성명을 했을 때, 지영은 화제를 던져줬다.
“이치카 씨는 한국에 음식점을 열 거야. 석이한테 들었지? 이분, 음식 정말 끝내주신다.”
“알아! 그래서 이렇게 날아왔지! 아, 이따 스케줄은 뭐야? 가능하면 취소하고 숙소로 가면 안 되나? 마침 여기 시장이니까 장 좀 봐서!”
“왜? 뭐 하게?”
“뭐 하긴! 요리 교류해야지!”
“응?”
“석이가 감탄한 음식의 장인이잖아? 너도 알겠지만 나도 한 음식 하는데 나한테 단련 받은 석이가 극찬했다는 건, 그건 진짜거든? 그러니 맛봐야지!”
“…….”
“물론 억지로 권할 순 없지! 일단 물어만 봐줘! 만약 힘들다고 하면 나도 깔끔하게 포기할게!”
“……알았다.”
지영은 고개를 저으며 한은정의 말을 전했고, 이치카 씨는 반색했다. 그리고 레미도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스케줄은 따로 예약을 잡은 것도 아니라서, 그냥 취소 가능했다. 거기다 레미는 안 그래도 조금 피곤한 상태였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의기투합 끝에 시장에서 장을 신나게 보고,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는 독채고 따로 조리 공간도 있었다. 그리고 아닌 밤의 홍두깨처럼 요리 베틀이 벌어졌고, 황석과 지영은 배가 터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처음으로…… 도망칠까 고민했다. 레미도 버티고 버티다가 안 되겠는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나간 뒤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황석이 한은정에게 제발 살려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하고 나서야 베틀이 끝났고, 지영과 황석은 위장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3일째의 시끌벅적한 밤이고.
두 사람이, 완연히 치유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