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66화
466화. 전설로 가는(5)
다음 날, 점심이 되기 전, 지영은 이치카 씨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어제는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헤어졌다. 근데 헤어지기 전에 레미는 지영을 집으로 초대했고, 지영은 이를 받아들였다. 원래도 레미의 집을 찾아가려고 했었다. 그녀가 집을 나와 이렇게 숙소까지 찾아올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미의 집을 찾는 건 사실 크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아직도 기자들은 레미의 집 앞에 상당수가 대기 중이었다. 밤에 나올 때도 그 정도였는데, 아침엔 더할 것이다. 거기에 이미 지영의 일본 입국 소식은 기사로도 파다하게 났다. 지영이 왜 왔는지쯤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으니, 다시 레미의 집 앞은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레미는 집으로 초대했다.
그 이유가 궁금했고, 그 이유보단 레미의 정식 초대가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11시쯤 레미의 집 앞에 도착했고, 역시 기자들이 쫙 깔려 있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경찰이 열 명 가까이 나와 집 앞을 막아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멀찍이 떨어져 있던 기자들이 지영이 내리자 얼른 다가왔지만, 지영은 이미 집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아마 다시 강지영! 사토 레미의 집에 오다! 라는 이름으로 기사가 많이 나갈 것이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오!”
어제 집을 지키던 이성진이 지영을 보자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이성진은 남자와 스킨십은 질색팔색하는 편인데도 날 듯이 다가와 지영을 안았다. 그러곤 등을 막 토닥여 주는데, 지영은 신기하게도 그게 자기를 위로하는 게 아니라, 본인을 위로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폭력.
이성진이 가장 경멸하는 것.
그래서 폭력에 노출되는 장면을 지극히 좋아하지 않았다. 미블이나 DG, 레인 스튜디오의 화끈하게 오락성 폭력은 즐겨봐도, 스릴러를 포함한 진득한 폭력이 주를 이루는 드라마나 영화는 아예 쳐다도 안 보는 편이다. 그런 이성진에게, 자기가 겪었던 것과는 또 다른 폭력에 당한 사토 레미의 존재는 그 자체로 트라우마가 자극되는 일이었다.
‘아…….’
못 할 짓을 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아니, 친구니까 오히려 더욱 신경 썼어야 했는데…….’
당시 자기 자신도 패닉 상태라서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이성진은 지영의 부탁이니 자기 마음이 다쳐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건 강한결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미안했다. 정말.
너무.
“미안…….”
“응? 뭐지? 난 너 위로하는 중인데?”
“그래도, 미안해.”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은 싫어!”
지영을 놓고 눈을 사납게 치켜뜨는 시늉을 한 이성진이 총총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며칠 이곳에 있더니 하는 꼴이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그냥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성진이 들어가니, 2층에서 임효중이 걸어 내려왔다. 복장을 보면, 그냥 이 집에 사는 사람이다.
그에 지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왔어?”
“너무 편한 거 아니야?”
“음? 음, 그렇긴 한데. 이상해. 여긴 진짜 편하거든……. 너도 며칠 있어 보면 알게 될걸?”
“헐…….”
“진짜야. 진짜 이상하게 편해……. 참, 레미는 위에서 짐 싸고 있어. 그래서 내려오는 데 좀 걸릴 거야.”
“그래? 알았어.”
집에 초대하긴 했지만, 이 집은 레미나 이치카 씨나, 오늘로 마지막이다. 두 사람은 오늘 저녁, 황금세대와 함께 한국으로 넘어가 이민 절차를 밟을 것이다. 이미 그렇게 얘기가 끝나 있었다.
그래서 지영은 이 집에 초대한 이유가 지영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해 ‘대접’하는 자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이 인정사정없이 나는 고소한 냄새를 생각하면 거의 확실했다.
지영은 실례합니다, 하고 인사한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치카 씨가 환한 미소로 웃으며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나왔다.
“어서 오세요. 제가 마중 나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아니요.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기.”
“어머, 이런 걸…….”
그래도 초대받은 집에 빈손으로 오기 뭐해, 가벼운 선물을 사 왔다. 준비한 선물은 꽃이었다. 어차피 뭘 사와도 오늘 한국으로 떠날 거라서 가져와 봐야 짐만 될 것 같아서 가장 기분을 낼 수 있는 꽃을 준비했다.
꽃을 받은 이치카 씨는 마음이 넉넉해지는 미소를 지었다.
딸의 아픔, 자기가 받은 아픔. 사방이 적이고, 괴로운 일을 당한 딸을 오히려 비행 소녀로 몰아가며 매도하던, 모두. 의지할 곳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던 그녀에게 강지영의 존재는 한 줄기 빛과도 같았다.
그가 보내준 친구들을 통해, 딸의 사건은 너무나 쉽게도 뒤집혔다. 딸은 다시 피해자가 되었고, 가해자는 이제 죄의 값을 받기 직전이었다. 사실 강한결을 비롯한 친구들을 믿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사촌인 신지로가 보증해 줬고, 딸이 도와달라는 말 한마디에 적극적으로 나선 강지영이 어떤 사람인지, 병문안을 왔을 때 이미 겪어봤기에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이었다. 무섭고 두렵기도 했다. 건장한 청년들이 집으로 들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을 내치면 강지영의 도움을 거절하는 거고, 그건 곧 레미의 억울한 일을 해결할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는 것이 된다.
그래서 무섭고 두려웠지만, 이겨내고 믿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오늘이다.
그 힘든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가자, 눈물이 왈칵 났다.
“엄마, 왜 또 울어요.”
그런 이치카 씨를 사촌이라는 신지로의 부축을 받아 내려온 레미가 가만히 끌어안으며 다독였다.
“그냥, 그냥…… 너무 감사해서…… 흑!”
“……아휴, 우리 엄마도 참.”
레미는 엄마를 안아 가만히 다독였다. 지영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레미라는 아이에게 더 놀랄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도 놀랐다. 성숙한 것도 성숙한 건데, 이 아이는 이번 일로 마음이 정말 쇠처럼 단단해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 됐으니, 이제 이 아이는 웬만한 일에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이걸 절대 전화위복이라 할 수는 없었다.
“엄마, 타는 냄새 나는데요?”
“흑…… 어, 어머!”
이치카 씨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화들짝 놀라더니 얼른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엄마를 잔잔한 미소로 보던 레미의 시선이 다시 지영에게 향했다.
“짐은 다 쌌어?”
지영이 묻자, 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조금 남았어요. 도와줄래요?”
“음, 그래.”
소파에 앉아 손을 흔드는 강한결과 황석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준 지영은 이 층 레미의 방으로 올라갔다. 소녀 감성이 넘치는 방과는 역시 거리가 있었다. 간결한 인테리어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다음은 책장이었다. 방문을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 책장이 있었고, 빈 책장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어와 영어로 된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어, 문학소녀란 이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커튼만 그나마 소녀 취향인 분홍색이 유일한 방이었다.
“책이 많네?”
“네, 책 읽는 게 좋아요. 정말 좋아해요.”
“이건 버리지 않을 거지? 사람 시켜서 한국으로 국제 배송 해줄게.”
“정말요?”
반짝.
지영의 말에 레미는 책을 버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빛이 정말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아깝잖아.”
“감사합니다!”
처음으로 톤이 올라갔다.
그것만 봐도 레미가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영은 웃는 레미를 비슷한 미소로 보다가, 방을 조금 더 둘러봤다. 상장? 상패 같은 게 제법 있었다. 일본어가 완벽하진 않아도 대충 보면 상장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상이야?”
“음, 글짓기? 그리고 단편 소설 공모전 상장이요.”
“글 읽는 것 말고, 쓰는 것도 좋아해?”
“네. 좋아해요. 읽는 것만큼, 쓰는 것도 비슷하게 좋아해요.”
배시시 웃는 레미를 보며 이 아이의 장래 희망이 뭔지 지영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소설가라…….’
일본도 그렇지만, 한국에서도 소설가는 참으로 장래 희망으로 바람직한 직종은 아니었다. 인터넷 플랫폼의 등장으로 종이책 시장은 아예 고사당하기 직전까지 몰렸고, 겨우 명맥만 이어가는 중이었다. 20년대 넘어 조금 부흥하긴 했지만, 그래 봐야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지경에 가까웠다.
‘아마 학부모들이 뽑은 내 아이의 장래 직업 기피 직종에 순위권에 들 거야.’
그만큼 인기가 없는 직업이다.
고정적인 수입도 없다는 게, 일단 가장 큰 문제였다. 예술가는 배고프다는 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소설가는 가히 원탑이었다. 10년대 중후반엔 배고픈 예술가가 아사하는 일도 있었다. 상상이나 가나? 2000년대를 넘은 이 시점에, 아사라니. 그것도 다 큰 어른인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예술.
일반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의 시점에서는 절대 이해하기 힘든 단어다. 고집과 아집, 예술에 미치면 가족이고 뭐고 전부 내팽개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예술의 세계는, 결코 이해하기 쉬운 세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레미는 그런 세계에 발 들이고 싶은 것 같았다.
“소설가가 되고 싶니?”
그래서 물었다.
알아야 도와줄 수 있으니까.
그러자 레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하는 게 그거밖에 없어요…….”
“그래? 그럼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 많은 걸 경험해야겠고. 근데 그런 건 내가 다 도와줄게. 너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한다면, 언제까지고 내가 도와줄 거야.”
“……저기.”
“응?”
“왜 저한테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처음엔 책임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걸로는 설명이 힘들어서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도와달라고 한 건 맞는데…… 이렇게까지 해주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거든요. 그래서 알고 싶어요.”
“…….”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세요?”
레미는 지영의 말에 조금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물어왔다. 지영은 그 질문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 예상도 했다. 그래서 솔직한 마음을 답해줬다.
“책임감 맞아.”
“네?”
“그거 말고 이유가 있겠니? 나는 병원에 찾아왔을 때부터 너는 괜찮다고 했지만, 이미 그때부터 나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어. 네가 다행히 마음이 강해서 오히려 내가 치유 받았지. 그리고 그렇게 끝났다면, 아마도 너와 나 사이에 책임감이란 이런 단어가 나설 일은 없었을 거야.”
“…….”
“그런데 너는 나에게 도와달라고 했어. 나쁜 일 때문에. 그래서 나는 최선을 다해 도왔어. 레미 너를 지켜야 하는 게 내 책임감 자체에서 생긴 마음이야. 그리고 지금 이 일도 그 과정 안에 있어. 레미, 생각해 보자. 이제 잘 해결됐다고 내가 이대로 널 두고 떠나면, 너는 이 나라에서 편하게 살 수 있겠니?”
“……아니요.”
도리도리.
그녀는 조금 생각했지만, 역시 힘들다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그리고 그게 맞았다. 이대로 레미를 일본에 두고 가면 2차, 3차 범죄는 반드시 일어난다. 레미의 지금 상황 자체에 불만을 품고 있는 극우 단체가 수두룩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걸 똑똑한 이 아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맞아. 그래서 나는 너를 한국으로 데리고 가야 해. 그럼 가서 툭 던져두고, 살집 정도만 해결해 주면, 그건 책임지는 걸까?”
“그게…… 보통 아닌가요?”
“그 보통은 누가 정하는데? 너? 나. 둘 중 누가 정할까?”
“어…….”
“도움을 청하는 사람은 너지만, 도움을 주는 사람은 나야. 그러니 그 도움이 어디까지인지도 내가 정하는 거야. 레미, 혹시 이런 내 도움이 불편하니?”
“……아니요. 전혀요. 조금도…… 정말 감사하고 있어요.”
도리도리.
얼른 고개를 저으며 한 레미의 말에 지영은 웃었다.
“그래, 그러면 돼. 나는 딱 네가 이 이상은 불편하다. 싶은 직전까지만 도와줄게. 그 안에는 너의 미래, 그리고 이치카 씨의 자립까지 전부 들어 있어. 그 기간은 너와 너의 가족이 내 도움이 필요 없을 때까지야. 그때까지 난 너를 내 동생이라고 생각할 거야. 그리고 그날이 온다면 나는 너를 아주 자랑스러운 동생이라 생각할 거고.”
“…….”
레미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잔잔하지만, 그 안에 단단히 깃든 의지를 고스란히 느꼈기 때문이다.
지영은 그런 레미의 반응에, 쐐기를 박았다.
“내 마음은 이런데, 그래도 부담스럽고, 싫니?”
“…….”
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주, 빠르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래서 그 대답으로 지영은, 동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