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65화
465화. 전설로 가는(4)
길었다.
정말 길고 길었던 로케이션이 끝났다. 이곳에서 필요한 신은 전부 찍었지만, 물론 전부 끝난 건 아니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잠시 휴식 뒤, 또 필요한 촬영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드라마란 게, 이런 강행군은 거의 기본이었다. 사전 제작이 아닌 이상은 말이다.
현장을 정리하고, 짐을 쌌지만, 당연히 당일 떠나는 건 아니었다. 이런 힘든 로케이션의 끝에는 언제나 뒤풀이가 있었다.
점심부터 시작된 뒤풀이는, 그날 새벽이 다 되어서야 끝났다. 지영도 그 뒤풀이에 참석했다. 바로 일본으로 넘어가고 싶지만, 그래도 주연 배우로서 자리를 지켜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다. 딱 한 병 정도. 그래서 다음날 숙취도 없었고, 지영은 필요한 옷과 물건만 빼놓고 대부분의 짐은 촬영팀에 맡기고, LA로 향했다. 거기서 세 시간 정도를 기다렸다가, 도쿄행 비행기에 올랐다.
지영은 친구들에게 비행기 탔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뒤이어 바로 한숨 잔다는 메시지도 같이 보냈다. 그리고 수면안대를 차고 곧장 눈을 감았다. 지영은 거의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엊그제 촬영을 끝내면서 긴장이 풀리기도 했거니와, 그간의 촬영 스케줄이 확실히 만만치가 않았다. 그래도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무사히 마치긴 했지만, 체력은 진짜 바닥까지 떨어졌다.
수치화하면, 10% 정도 남기고 모조리 쏟아부은 느낌이었다.
지영은 거의 기절하듯이 잤다. 중간에 잠깐 깨서 기내식을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챙겨 먹고, 다시 기절했다. 그렇게 잠들었다가, 6시간이 지나서 깼다. 잠에서 깬 지영은 화장실에 가서 찬물로 세수해 정신을 일깨웠다. 그런 다음 자리로 돌아와 태블릿을 꺼내, 기사를 확인했다. 강한결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부터 지영은 어제까지도, 기사를 확인하지 않았다. 촬영에 온전히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야마다 의원의 실종 기사였다. 미국으로 출장 갔다는 야마다 의원이 실종됐다는 공식 기사가 떴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수행비서들과 함께 전부. 그 때문에 그의 자식인 야마다 레이가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할 상황에 처했다는 기사에, 지영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죄를 지은 놈이다.
그런데 그놈은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권력자 집안의 자제였다. 지영은 놈의 신상을 깐 것에서 솔직히 만족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왜? 한국이나 미국보다도 심한 게 일본 정가고, 그쪽의 힘은 진짜 무소불위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었다. 기득권의 힘이 아득할 정도로 강한 곳. 그렇기에 지영은 야마다 레이가 잘 받아봐야 집행유예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예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까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니시노 하루히란 곳이 진짜 엄청난 곳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각오했다.
그런데.
야마다 의원의 실종으로 야마다 가문이 가진 권력 자체가 뭉개지고 있었다. 지영은 댓글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후계자 싸움이 끝났을 때 형제 셋 중 한 명밖에 안 남았다니……. 뭔 중세 시대야?’
아니, 그때도 이러진 않았을 것이다.
보통 가문이라 부를 정도면, 집안에 주인 말고도 여러 사람이 있을 텐데, 야마다 가문은 그런 게 없었다. 어른이 없는 기형적인 구조라서 야마다 의원이 실종되자, 그 권력이 마치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야마다 레이는 실형을 면치 못할 것이란 기사도 많았다. 물론, 같이 죄를 저지른 놈들도 같이. 독보적인 위치의 니시노 하루히란 로펌 때문에 남은 둘의 변호를 원하는 로펌이 거의 없다는 기사도 있었다.
지영은 정말 잘됐다고 생각했다.
저쪽에서 변호사를 고용하기 전에, 니시노 하루힌가 뭔가 하는 곳을 먼저 계약한 건 신의 한 수였다는 것을 지영은 기사를 일일이 확인해 가며 느낄 수 있었다. 판은 거의 끝나간다. 이변이 없는 한, 그들은 정당한 ‘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건 매우 다행이었다.
지영은 레미가 바라는 것도, 이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이게 해결되면, 한 소녀의 원통함을 조금이라도 희석해주게 될 것이다.
지영은 다른 기사도 확인했다.
나의 무사님의 로케이션이 공식적으로 끝났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어제 방영된 나의 무사님의 시청률이 이번에도 소폭 상승하며,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많았다. 다행이었다.
사실, 지영도 부담이 많았다.
솔직히 없을 수가 없었다.
지영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작품에서 자기가 어떤 역할을 했고, 어떤 도움을 줬으면, 어떤 피해를 줬는지도 알고 있었다. 작품은 매우 잘 됐다. 그런데 그게 작품 자체의 인기보단, 강지영이란 개인의 인기에 힘입어 성공했다는 평가에는 솔직히 지영도 동의했다. 이는 비즈 엔터에서 자체적으로 내린 평가도 그랬고, 전문가들이 뜯어본 성공 비결도 그랬다.
그렇기에 작품의 흥망성쇠에 자기의 역할이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걸 아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이런 작품은 필연적으로 강지영에 대한 평가가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지영이 잘하면 성공이고, 작품 자체가 재미없어서 실패하면 그것도 강지영의 탓이었다. 그렇기에 지영도 겉으로 괜찮은 척해도, 방영 기간이 다가오면 올수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다행히 작품은 순항 중이었다.
이 추세면 10화가 넘기 전에 40%의 마의 장벽을 넘어설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작품도 잘 되고 있으니,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익스큐즈 미.
편한 마음으로 잔잔한 미소가 절로 지어지던 중에 들려온 누군가의 말에 지영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 백인계 중년 사내가 딸로 보이는 아이와 함께 서 있었다. 딸은 대략 10살 내외였다. 품에는 책 한 권이 들려있었는데, 그림책이었다.
“미스터 지영이 맞지요?”
“네, 맞습니다.”
“하하, 반갑습니다. 초면에 매우 실례인 걸 알지만, 딸아이가 지영의 팬입니다.”
거기까지 한 사내의 말에 지영은 웃으며 소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환하게 웃은 소녀가 얼른 몇 걸음 다가와 그림책을 내밀었다.
“앞 장에 해줄까, 맨 뒷장에 해줄까?”
“여기, 여기에 해줘요.”
“응?”
소녀는 다시 책을 가져가더니, 고래 그림이 있는 곳을 펼쳐 지영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고래 아래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여기에 해주면 될까?”
“네!”
“그래, 이름이 뭐니?”
“렉시요!”
역시 아이는 밝다.
이런 밝음은 신기하게도 치유로 이어졌다. 지영은 렉시에게 사인을 해주고, 사진도 같이 찍어줬다. 렉시가 환하게 웃으며 돌아가자 이번엔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지영은 말리러 오는 스튜어디스를 오히려 말린 뒤, 전부 사인을 해줬다. 같이 사진 찍어주고, 사인 하나 해주는 것.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영은 어떤 메이크업도 하지 않아서 순수한 민낯이었지만, 사진을 찍어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연예인들은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사진도 같이 안 찍어준다는데, 지영이 봤을 때는 팬을 버리는 행위였다. 무작정 전부 해줄 필요는 없지만,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소수만 있다면 비싸게 굴 필요는 전혀 없었다.
스무 명 가까운 사람에게 사인해 주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고 나니, 1시간이 훌쩍 지났다. 짧은 팬 사인회를 끝낸 지영은 이런저런 기사를 좀 더 확인했고, 어느새 대양이 끝이 보이더니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임은진, 가드들과 함께 내린 지영은 입국 절차를 밟고 라운지로 나왔다. 지영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는데, 신기하게도 고요했다. 매우 복잡한 눈빛. 몇몇 지영의 팬들이 다가와 사인을 요청했고, 지영은 그걸 거절하지 않고 사인을 해줬다.
분위기는 칙칙했다.
지영은 마스크를 쓴 속으로 웃었다. 이런 사람들이다. 이 나라는 정말이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게, 잘못을 반성은커녕, 바로잡으려는 사람을 오히려 배척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래서 다행인 게 있으니, 뭘 해도 이 나라에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지영은 국내선 라운지로 이동해 곧장 다시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다시 하늘을 날아 간사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나오자,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한결과 황석이었다.
“하…….”
강한결을 보자 절로 마음이 풀어졌다.
절로 웃음이 나왔고, 뭔가 벅찬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찔끔, 눈물도 났다. 곤란한 일을 부탁했는데도 최선을 다해 도와준 친구들이 고맙고, 미안하고, 그런 마음 때문이었다.
“이성진 안 데리고 오길 잘했네. 성진이가 너 봤으면 1년은 울궈먹었다.”
“하하, 그러게. 잘 놓고 왔어.”
“고생했다.”
강한결은 부드러운 미소로 다가와 지영을 가볍게 안아줬다. 시꺼먼 사내놈의 포옹인데도, 지영은 그냥 가볍게 마주 안아줬다. 이 친구의 이건, 정말 반칙 같은 강점이었다. 아무리 친구 사이라지만 이런 스킨십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는데, 이 친구는 그걸 그냥 무시한다. 미소와 몇 마디 말로 상대를 무장해제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마법을 그냥 너무나 쉽게 부린다.
“에구, 다 큰 사내들의 우정도 정말 빛날 때가 있구나. 혹시 나, 청춘 영화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는 거니?”
임은진의 말에 강한결은 지영을 놓아주고, 그럴 리가요? 하면서 웃었다. 그리곤 그녀가 메고 있던 가방과 캐리어를 빼앗듯이 들고는 렌트한 차로 안내했다. 준비한 차량은 한국으로 치면 대형 스타렉스 같은 차 한 대였고, 운전은 국제 면허가 있는 가드분이 맡았다. 가드 둘이 앞에 타고, 지영은 뒷자리로 탔다.
“레미는 어때?”
지영은 차에 타자마자 그것부터 물었다.
“괜찮아졌어. 많이. 오면서 기사는 봤지? 야마다 의원 일.”
“응, 봤지.”
현직 국회의원 실종사건.
그것도 미국에서 실종됐고, 지영이 하네다 공항에 내리기 30분 전쯤에 야마다 의원과 그의 수행비서들의 시신을 워싱턴 인근 캣릿에서 발견했다는 공식 기사가 올라왔다. 이는 백악관의 공식성명을 통한 기사였다. 이 문제에 일본은 사건을 직접 수사하겠다는 강경한 의지를 내보였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그러나 지영은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더러운 짓을 저지른 야마다 레이가 이제는 기사회생할 기회 자체가 아예 사라졌음만 신경 쓰였다.
안 그래도 최대 로펌의 개입으로 셋이 빠져나갈 구멍 자체가 막혀가고 있었는데, 이런 외교 문제가 생기면서 화제성 자체가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시끄럽긴 했다. 범죄자와 범죄자의 부모가 동시에 문제가 생겼으니 화제가 안 될 수는 없었다.
“레미가 몰래 인터넷으로 봤나 봐. 그 기사 나온 이후로, 정말 밝아졌어.”
“후우, 다행이네.”
“이제는 성진이도 굳이 막 레미 멘탈 관리에 신경 쓰지도 않는 중이고, 그냥 우리는 이제 동네 오빠처럼 그 집에 눌러앉아 있는 중이지.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만.”
“오늘 바로 한국으로 가게?”
“시간 끌 필요 있어? 이미 한국에 머물 집은 마련했어. 이민 문제는 재단에서 지원해 줄 거고. 재판 때만 들어올 건데, 그땐 비즈 엔터랑 계약한 경호업체가 같이 움직일 거고.”
“레미랑 이치카 씨는 수락했어?”
“응. 귀화는 안 하고, 이민만 수락했어.”
“후우, 다행이네.”
일본에 있겠다고 하면, 지영이 도와주기가 매우 힘들다. 금전적인 지원은 가능해도, 그 이상 어떻게 도움을 주기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민을 오면 지영이 나서서 도와주는 게 당연히 한결 편해진다. 그래서 나온 안도의 한숨이었다.
“근데 너 정말 레미 의동생 삼을 거야?”
강한결에 말에 지영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지금 그거 거절하면 어쩌지, 하는 게 제일 큰 걱정이다.”
“너 설마 내 동생이 돼라! 막 이럴 건 아니지?”
강한결의 말에 임은진과 황석이 풉! 하고 웃었다. 운전하던 가드도 웃겼는지 차가 조금 흔들렸다. 지영은 강한결을 빤히 봤다.
“야, 넌 내가 애로 보이냐?”
“왜, 지영이 네가 하면 효과 직빵일 것 같은데?”
빙글빙글 웃으며 자기를 놀리는 강한결을 보며 지영은 그냥 피식 웃는 거로 답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차는 공항을 빠져나와 쭉쭉 달렸다. 오사카를 지나 교토에 도착했다. 1시간 30분쯤 걸렸다.
도착했을 때는 정말 늦은 저녁이었다. 아니, 저녁을 넘어 자정에 가까웠다.
그래서 지영은 곧장 가지 않고, 숙소부터 들렸다. 늦은 시간이라 방문하는 건 실례가 될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숙소에 도착했는데, 레미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예전에 봤을 때의 수척함이, 오히려 지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모습.
여자친구 확대범은 황금세대 중 딱 한 명이라, 누구 짓인지 지영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영이 차에서 내리자 이치카 씨가 레미가 탄 휠체어를 밀어 앞으로 왔다.
“…….”
“…….”
가만히 마주친 눈.
뭔 말을 할까 고민하다가, 지영은 그냥 웃었다. 지영의 미소를 본 레미도 비슷하게 웃었다. 지영은 그런 레미의 미소를 보면서 깨달았다.
‘벌써, 나아가고 있구나.’
이 아이는 떨쳐내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음을.
정말…… 강한 아이였다.
지영은 그런 이 아이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