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64화
464화. 전설로 가는(3)
후욱, 후욱.
들숨과 통해 차가운 공기가 들어와, 폐부 깊숙이 들어가 더운 공기로 변해 도로 날숨으로 나왔다.
“재. 저기 저 뒤에 놈. 맡아줄 수 있나?”
“…….”
바로 붙어 있는데도 겨우 들릴 정도로 작게 날아온 관영의 말에 재는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포위됐다. 처음에 조 하나씩 정리했는데,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움직이며 전선을 휩쓸었다. 그것 때문에 저쪽에서도 열을 받을 만큼 받았는지 경로를 추적해 포위망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재와 관영의 예상을 벗어났다.
사실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다.
제국의 역량과 현장을 움직이는 느낌으로 보아, 분명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초소전 전선을 지휘하는 놈은 생각보다 머리를 잘 굴리는 놈이었다. 판을 짜면서 놈들은 그냥 일반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는 것처럼. 그게 재와 관영의 방심을 끌어냈다.
그래서 초소 다섯 개를 순회 타격하는 작전을 짰는데, 세 개째에 제대로 갇혔다.
칠흑의 어둠이 온 사방에 바탕처럼 깔린, 그 어둠을 휘영청 뜬 달이 살짝 밀어낸 늦은 새벽에, 재는 제국의 병사 일백에 갇혔다.
물론, 겁나진 않았다.
이런 놈들에게 다치기라도 한다면, 스승님이 한숨을 내쉬며 그동안 뭘 배웠냐? 하고 핀잔을 줄 게 분명했다. 학소양에게 배운 것은 아주 많았다. 특히 ‘보는 법’을 가장 중점으로 배웠다. 이게 정말 대단한 게, 이런 윤곽만 겨우 보이는 어둠 속에서도 상대를 아주 명징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본다고 하여 시각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온몸의 감각을 열어 흐릿한 대상의 움직임을 뇌에서 전체적으로 계산, 판단하여 어디를 공격해 올지, 어디에 빈틈이 생길지 등을 빠르게 재에게 전달한다.
직관에서 나온 판단.
보는 법은 그런 능력이었다. 그걸 익힌 후 재는 가히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 보던 모든 것들에 다른 의미가 깃들었고, 다른 방향으로의 이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각을 극단적으로 이용해야 해서, 정신 피로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면 애초에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사위가 고요해지는 느낌.
학소양에게 배운 것 중 하나.
‘원하는 것만 들어라.’
‘그게 가능합니까? 그리고 그게 가능하면 뭐가 좋습니까?’
‘원하는 것만 상대할 수 있지. 그리고 그건 자체로 고도의 집중이다. 목표만 확실히 처리할 것인가. 아니면 이 공간에서 벗어날 것인가. 그에 필요한 것을 ’선‘ 분류해 놓으면, 최단 경로로 그 목표를 위해 치고 나갈 수 있다.’
‘……그렇군요. 근데 그게 가능합니까?’
‘내가, 만약 제국제일검 자리를 놓고 놈과 붙었을 때 방법을 익혔다면, 지지 않았을 것이다.’
‘…….’
학소영의 단언이었다.
그가 한 말은, 그때는 못 익혔지만, 지금은 익혔다는 뜻이었다. 학소양이 익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공’에 수렴하니, 믿는 게 맞았다. 그리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학소양과 학미의 온갖 방해 공작을 뚫고, 재는 듣는 법과 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걸 지금까지는 펼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다르다. 전장을 살피는 직관이 자기보다 뛰어난 관영이 부탁한 것은, 일백의 포위망 가장 겉에서 서성이고 있는 느낌이 다른 놈들이었다. 이놈들은 간간이 비도를 날려댔는데, 그게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러니 관영이 부탁한 것이다. 저놈들만 재가 맡아주면, 포위망 따위는 찢어발길 수 있으니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제선과 선고가 포위망 밖에 있다는 점이지.’
제선은 관영의 교육을 받고 일취월장이 뭔지를 보여줬다. 일신우일신. 그 뜻조차도 스스로 증명했다. 물론 백적파를 기준으로 비교하면 이제 갓 애송이에서 벗어난 정도지만, 그 정도면 웬만한 제국 정예부대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세 놈은 동시에. 그런 제선이 외곽에서 치고 오면, 포위망은 흔들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을 이용하는 데 이골이 난 게 재와 관영이었다. 거기에 더해, 선고가 있었다.
백발백중의 명사수.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그 바람마저 계산해 과녁에 촉을 꽂는 선고다. 바람이 급작스럽게 뒤틀리지 않는 이상은, 선고의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밖에서 대기 중이다. 지금 상황이 크게 불리한 거 같지 않다고 판단을 했는지, 둘 다 몸을 숨기고 이쪽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거기에 일백의 포위망.
많은 숫자인 건 맞는데, 애초에 재와 관영은 이것의 몇 배나 되는 포위망도 뚫은 전적이 넘치도록 있었다. 제국의 척후병이든, 북부의 정예병이든, 그건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전부 죽일 거니까.’
재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지어진 것은 그때였다. 후우, 후욱. 정신을 집중했다. 앞에서 조심스럽게 전열을 다듬는 놈들을 보면서 재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복면을 쓰고 있어 겉으로 보이지는 않아 놈들은 재가 웃는 중일 것도 모를 것이다. 이런 웃음을 전투 중에 짓는 것은, 하나의 선언이다.
그러나 그걸 놈들은 보지 못했다.
재는 계산했다.
최단 경로. 비수를 뿌려대는 놈은 총 여섯이다. 복장은 똑같지만, 냄새는 분명히 다른 놈들이다. 선고처럼 사냥꾼의 냄새가 짙게 나는 거로 보아, 쉬운 놈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것들은 실수했다.
도대체 뭔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선고처럼 사냥에 특화되어 있다면.
‘그녀처럼 몸을 숨기고 있었어야지…….’
그런데 저렇게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포위망을 너무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툭, 팔꿈치로 들어온 미약한 신호. 그 신호 뒤 관영이 움직였다. 파박! 땅을 박찬 관영이 가장 가까이 있던 놈에게 짓이겨 들어갔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밭이지만, 관영이나 재나, 백적파나 이 정도는 우습게 무시할 경지에 올랐다.
앞발바닥에 힘을 주고, 쌓인 눈이 힘과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압력에 뭉개지기 전, 이미 다시 발을 떼야 하는 이동법이다. 당연히 몸에 부하가 많이 걸린다. 아니, 애초에 그 단계까지 가는 게 힘들었다.
강력한 신체 능력이 바탕에 깔렸어야 가능하니까.
그렇기에 평지에서 달리는 것만큼 빠르다. 쉭! 관영의 도가 어둠을 쭉 그었다. 깡! 소리와 함께 불똥이 번쩍 튀었다.
“어!”
그리고 그 짧은 틈을 노린 재가 상체를 바짝 숙인 채, 눈밭을 박찼다. 이런 재의 움직임을 관영의 공격에 시선이 잠시 팔려 놓친 놈들의 대가는 아주 컸다. 재는 빨랐다. 그것도 매우. 어느새 잠깐 눈알만 굴려 관영을 살폈던 한 놈의 앞에 나타난 재는, 아주 가벼운 동작으로 짧은 단검을 옆구리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쭉! 그어 올렸다. 억! 하는 소리도 지르지 못한 놈은 푸들푸들 떨다가, 그래도 검을 한번 재를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그 공격엔 힘이 없었다.
이미 옆구리가 갈라져 피가 쭉쭉 나오는데, 검에 힘이 담길 리가 없었다. 그걸 가볍게 피한 재는 자신을 향해 집중되는 공격에 ‘집중’했다.
‘쳐내고, 반보 앞으로, 낭심, 머리를 잡아 측면에서 오는 공격의 방패로 삼고, 역방향으로 전진……. 선고. 믿을게.’
순식간에 계산이 끝난 재는, 그대로 움직였다.
깡! 쳐내고, 반보 전진. 그리고 상체를 아래로 숙이며 검을 던졌다. 손목을 털어 손끝에서 팍 쏘아진 검이 놈의 낭심에 찍혔다.
“억!”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며 급소를 가리는 놈의 머리카락을 쥐어 옆으로 당겼다. 그러자 푹! 소리가 나며 놈의 등에 동료의 칼이 꽂혔다. 동시에 재는 대각사선으로 움직였다. 쇄애액! 그러자 어둠을 찢어발기는 파공성이 들리더니, 재가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가 그대로 재를 향해 고개를 돌리던 놈의 목에 꽂혔다. 그리고 그대로 뚫고 지나가, 뒤에 있던 놈의 가슴팍에 촉이 다 박힐 정도로 깊게 꼽혔다.
이곳 전장에서 구한 철목궁이다.
북부 정예병이 쓴다는. 활대도 무겁고, 시위도 두꺼워서 선고가 쓰던 활보다 사용이 매우 어려웠지만, 선고는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대신 많이 쓰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여인의 힘으로 연사하기엔, 그리 좋은 놈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라면, 당연히 써야 한다. 나중에 팔뚝이 말린다고 해도, 사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재의 복면 쓴 얼굴이 눈앞에 귀신처럼 나타나자, 달려들던 놈이 흠칫 놀라며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 애송이다. 얼굴을 보니 이제 약관도 안 됐다 싶을 정도로 앳됐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었다.
이놈은 이미 칼을 잡았다.
그리고 그 칼엔 제대로 닦지 않은 피가 묻어 있었다. 그건 이미 저 칼로 살인을 저질렀다는 뜻이다. 사람을 이미 죽여본 놈. 동료의 죽음에도 크게 놀라진 않았다. 다만 경험이 없어 눈앞에 불쑥 나타난 것에 놀랐을 뿐이다.
그러니 이놈은, 나이 대접받을 자격이 없었다.
서걱.
그런 마음과 함께 재의 칼이 어둠을 쭉 그었다. 목젖이 제대로 갈라지며 억, 어억…… 하며 반사적으로 목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나는 놈에게서 시선을 뗀 재는 다시 사선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쇄애액!
그러자 철시가 어둠을 가르고 재가 있던 공간을 지나쳐, 재의 앞에 있었던 놈의 가슴에 그대로 적중했다. 다만 좀 전처럼 가슴을 아예 뚫고 지나가진 못했다. 뼈에 걸려 힘이 상쇄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미 세 번의 사냥이 있었다. 재의 위치로 두 번, 관영의 위치로 한 번. 이는 이제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저격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거기에 선고는 사냥꾼이다. 절대로 한 위치에서 저격하지 않았다. 재와 관영이 움직이는 만큼, 선고도 그에 맞춰 움직이며 위치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재는 삼 겹의 망을 벗겨내고 비도를 들고 틈을 노리던 놈에게 몸을 날렸다.
서걱!
어둠에서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불쑥 솟은 재가 한 놈의 손목을 자르고, 빙글 돌며 칼끝으로 목젖을 슬쩍 베었다. 정확히 동맥이 걸릴 정도의 깊이였다. 동작의 간결화, 그러나 반드시 결정타를 줄 것. 학소양은 그랬다. 전장에서 쓸모없는 움직임은, 결국에는 체력 소모밖에 안 된다고. 그러니 최대한 간결하게 쳐낼 것을 권했다. 물론 제대로 된 놈과 맞붙으면 현혹을 위해 몸짓을 크게 해도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런 말을 떠올리며, 이놈들을 대입시키면?
동작의 간결화가 맞다.
관영 또한 마찬가지였다. 재와 아주 흡사한 도를 쓰는 관영은 한 마리 야수가 되어 적진을 휘젓고 있었다. 단일 무력으로는 백적파에서도 유일하게 재와 비빌 수 있던 게 관영이다. 지금도 그의 무력은, 지금의 재와 비교해 그리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그러면 재는? 그림자다. 유령이다. 짙은 회색 세계는 어디로도 물든다. 검어질 수도 있고, 밝아질 수도 있다. 어떤 것도 될 수 있지만, 그렇기에 존재감이 엉성하고, 희미한.
재는 그런 자신의 이름처럼 흐릿하게 움직였다.
포위망은 뚫렸다.
이 작전을 짠 놈은 머리를 분명 잘 굴렸다. 재가 반드시 죽여야 할 놈 목록에 올렸을 정도로. 다만 능력치 판단만큼은 제대로 못 했다. 백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일반적인 이족을 상대할 때나 가능한 거다. 그걸 계산에 못 넣었기 때문에 이런 처참한 결과는 당연하다면 또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재와 관영은 사냥꾼이지, 사냥감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쳤으니, 이런 결과는 빤했다. 포위망이 허물어지고, 슬슬 귀곡성이 몰아치는 이 혹한의 대지 위에 떨어진 목숨이 오십이 넘어 육십이 됐을 때, 적은 도망쳤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재와 관영은 굳이 쫓지 않았다. 굳이 또 다른 함정일 수도 있는 상황에 쫓아가서 적을 죽여야 할 이유는 없으니,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나았다. 지략가의 존재는 그만큼 위협적이기도 했다. 놈들이 완전히 물러난 것 같단 판단이 들었을 때 재는 선고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지긋지긋한 눈이 다시 내릴 때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필요한 것을 챙겨서 전장을 이탈할 때였다.
전리품.
승자의 권리.
다행히, 챙길 게 많았다.
* * *
컷!
“고생했어요, 모두! 다들 이제 짐 싸죠!”
“우와!”
로케이션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