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59화
459화. 왕관의 무게와 책임(24)
크다.
거기에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라, 체격도 상당했다. 격투기 선수처럼 벌어진 어깨가 뒤이어 눈에 들어왔다. 별로 특색이 없는 검은 정장에 안에 흰 셔츠를 입었는데 블랙과 화이트의 조합이 절묘하게 어울렸다. 거기에 강한결은 거의 반사적으로 저 정장 안에 얼마나 단단한 육체가 숨어 있을지 짐작해 버렸다. 시합 때 상대 선수가 도복을 입고 있어도, 체격에 따라 피지컬을 계산하던 버릇이 저도 모르게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게, 위압이란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야…….”
같이 들어온 임효중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나왔다. 감탄일 게 분명했다. 그냥 보기만 해도 뭔가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아니,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는 게 절실히 느껴졌다.
그래서 위압 다음에 찾아온 감정은, 신기함이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존재할 수 있지? 하는 그런 느낌이었다. 강한결은 자기가 만나본 사람 중에 가장 압도적인 아우라를 가진 사람으로 딱 두 사람을 꼽았었다.
한 명은, 지금은 친근한 국가대표팀 감독 전기정 교수님.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소속사 사장님이자 여자 골프 국가대표 감독 장세리 선배님이었다. 이 두 사람은 각자 한 분야의 종사 급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기술이 바탕 된 실력 자체가 거의 마스터 급에 이른,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는 정말 ‘위엄’이 뭔지 확실히 느꼈었다.
그러고는 없었다.
대단한 실력자들을 만나보긴 했지만, 연륜과 실력, 인성까지 모두 갖춘 사람을 만나기는 힘들었었다. 그런데 결이 다르지만, 이 여자는 그런 느낌이 물씬 났다.
싱긋.
빨려들어 갈 것만 같은 미소를 지은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의뢰인 상? 반가워요. 마녀 탐정 사무소의 후미코예요.”
“안녕하세요. 강한결입니다.”
“임효중입니다.”
“후후, 반가워요. 계속 서 있는 것도 그러니, 앉을까요. 신사분들?”
후미코의 안내에 따라 강한결과 임효중은 그녀의 앞에 앉았다. 자리에 앉고 났는데, 꾸벅하고 가드가 고개를 숙였다.
“어머, 우리 만난 적이 있구나?”
“네, 선배님. 저 선배님과 같이 본청에 있었던 다케우치입니다. 넘어가기 전엔 본청 기동대에 있었습니다.”
“아, 기억나네. SP로 갔었던 다케우치. 맞지?”
“네, 선배님.”
“후후, 반갑구나. 그래, 일은 할 만하니?”
“SP의 임무가 뭐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매일 긴장하고, 매일 따분하고, 후후. 우리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하자. 지금은 의뢰인 상과 할 얘기가 있으니.”
“네, 죄송합니다. 지금 아니면 인사드릴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아니야. 괜찮단다. 이 신사분들은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해 주실 분들이란다. 안 그런가요?”
이야…….
이건 좀, 대단하다. 독특한 화법도 화법인데, 교묘하게 상황을 정리하는 게 아주 고단수다. 가드가 저렇게 나서는 건, 확실히 무례다. 가드는 침묵이 금이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 먼저 나서는 건 경호 대상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 후미코가 먼저 저렇게 말함으로써, 이쪽의 선택을 강제한 것이다. 거기에 더해 앞에다가 신사분들이란 호칭을 붙여 버렸으니, 인상이라도 쓰는 순간 신사가 아니라는 게 되어버린다.
교묘한 화법이다.
그걸 강한결은 당연히 눈치챘고, 눈치 빠른 임효중도 당연히 알아챘다. 그래서 두 사람은 그냥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한결과 임효중에게 가드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이해해 줘서 감사하단 뜻으로 인사한 뒤, 거리를 벌렸다. 대화를 듣기 힘들 정도의 거리였다. 가드가 떨어지자 후미코는 옆에 두었던 가방에서 갈색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강한결은 그걸 받아 꺼냈다. 프로필이었다. 총 세 사람의. 말하는 건 무리 없지만 그래도 글을 읽는 건 아직 부족해 상당히 시간을 써야 다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다들 나이가 제법 있다는 것, 그리고 프로필로 보았을 때 이 셋은 ‘권력’을 쥔 느낌이 없었다. 그럼 아까 통화할 때 말했던 것처럼, 이 셋은 브로커다.
“이 세 사람은, 음, 범인은 아니군요.”
강한결의 말에 후미코는 싱긋 웃었다.
“물론이에요. 이 셋은 가짜 범인을 중개한 브로커예요. 순서대로 의뢰를 받는 놈, 선수를 관리하는 놈, 그리고 그 둘을 중개하는 역할을 가졌지요.”
“……설마, 잡은 건가요?”
“그럼요. 증거는 전부 녹취했답니다. 그리고 거기 곰 같은 친구가 아마 진범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커서, 그 아이는 구금 중이랍니다.”
“……구금이요?”
“도망가면 곤란하잖아요? 그리고 직접 이 자리로 데리고 오기도 그렇고요. 두 분은 음, 얼굴이 알려져서는 곤란하니까요.”
배려인가, 협박인가.
순간적으로 든 의문이었다. 하지만 미소에는 사심이 없었다. 애초에 임은진으로부터 소개받은 쪽이고, 그렇다면 믿어야 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럼 그 브로커에게 알아낸 게 있습니까?”
“그럼요. 그게 있으니 만나자고 했겠지요?”
……대단하다, 진짜.
이 사람의 능력이 좋은 건지, 아니면 일본 탐정들의 능력치가 원래 놓은 건지, 감탄이 나올 정도다. 아직 그게 뭔지 듣지 못했지만, 아마 스모킹건(결정적 증거)에 버금가는 뭔가가 될 것이다.
“이 영상을 보시겠어요?”
후미코는 이어서 다시 노트북을 꺼내더니, 한 영상을 틀었다. 그건 곰이 고급 정장을 차려입은 누군가와 만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안경을 쓴 말쑥한 느낌의 사내. 그는 잠시 곰 브로커와 대화 끝에, 품에서 딱 봐도 현금이 담겼을 게 분명한 봉투 하나를 꺼내 넘겼다.
그리고 잠시 뒤 일어나 자리를 떠났고, 곰 사내는 상대가 떠난 걸 확인한 뒤에야 숨겨 둔 카메라를 꺼내서 껐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 장면이 어떤 장면인지는 안 봐도 빤했다.
권력자의 자제일 거란 유추가 지금으로선 가장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데 그 권력자의 자재가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직접 저렇게 돈을 찾아들고 왔을까? 아닐 거다. 아니, 무조건 아니다. 분명 그 새끼들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일 게 분명했다.
비서.
그럼 사실상 거의 다 잡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브로커까지 이렇게 찾는 사람들이 저 사진 가지고 권력자 집안 자식의 비서 하나를 못 찾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럼 여기서 사실상 게임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정적 스모킹건은 아니어도, 판을 완전히 뒤집을 정도는 충분히 되는 증거였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 작업은 거쳐야 했다.
“이 정보의 신뢰성은 어느 정도나 됩니까?”
“99% 이상임을 자부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요?”
“예전에 제게 목숨 빚을 졌던 녀석이거든요.”
“목숨 빚?”
“그런 게 있답니다. 사실 마지막엔 너무 싱거웠어요. 제가 아는 아이라, 만나서 말을 꺼내는 순간 그냥 고스란히 가져다 바쳤거든요.”
“…….”
실제로는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강한결은 당연히 거기까진 묻지 않았다. 굳이 거기까진 자신이 알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느낌이란 게 있었다. 이 사람이 정말 연기의 대가가 아닌 이상, 지금 저 말은 거짓말이 아니란 느낌이 물씬 났다. 그래서 확신은 아니어도, 믿음이 갔다.
직감에 의지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정황상 이 여자 말을 믿어도 될 것 같았다.
“효중아. 네 생각은 어때?”
“나? 난 널 믿지.”
“……뭐냐, 그게?”
“네 선택을 지지한단 소리야. 지금처럼 해. 네가 옳다는 방향으로 선택해. 우린 그냥 믿고 갈 테니까.”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이 고마우면서도 부담됐다. 다른 일 같았으면 괜찮은 데 이번 일은 워낙에 중요한 일이 걸려 있어서, 조금 부담이 됐다. 하지만 강한결은 이런 부담감은 원래 항상 곁에 두고 살았었다.
강한결이니까.
한결이니까.
이런 기대를 초등학교 때부터 질리게 들었다. 그래서 부담을 느껴도 그걸 이겨내는 내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 내성이 다시금 작동하는지,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강한결을 가만히 보던 후미코가 푸근하게 웃었다. 매우 따스한 미소였다. 마치 대견하네. 하고 토닥여 주는 것처럼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서 도무지 적응될 수 없는 미소였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느낌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거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때 짧은 침묵을 툭 깨고 들어온 후미코의 말에 강한결과 임효중의 정신이 강제로 끌려갔다. 화법이 정말 교묘하고, 또한 대단했다. 정확한 타이밍이라고 해야 하나? 목소리에 깃든 묘한 느낌까지 합쳐지니, 사람의 관심을 끄는 쪽으론 정말 최고였다. 이건 배우 활동도 해야 하는 자신도 배워야 할 기술이란 느낌까지 들었다.
“신뢰와 믿음이 아무래도 부족하죠?”
“네, 아무래도 그렇지 않을까요? 일단, 이쪽은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얘기니까요.”
“후후, 그렇죠. 그건 좀 불공평하죠. 그래서 제안 하나 드릴까 해요.”
“제안이요?”
“네. 제안이요. 그 영상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드릴게요. 대신, 확인해 보고 그 정보가 확실하다는 게 밝혀지면, 그때 보너스 스테이지의 결산을 해주었으면 하는데, 어떤가요? 이 정도면 저도 많이 양보한 거랍니다.”
“음…….”
맞는 말이다.
탐정은 이런 정보를 얻으면 무조건 선입금이다. 흥신소나 탐정이나, 모든 정보는 먼저 선입금 뒤에 주인에게 향한다. 먼저 정보를 주고, 후에 그 진위를 따진 뒤 입금? 이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그러니 이건 이 여자가 정말 많이 양보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이 제안은 당연히 받아야 하는 제안이 됐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저는 이 정보에 자신이 있답니다. 그리고 얼굴이 알려진 만큼 알려지신 신사분들이 후에 입을 닦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 같단 확신도 있답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임효중이 처음으로 먼저 말문을 열어 그렇게 묻자, 그녀는 빙긋 웃었다.
“영업비밀이라, 알려 드릴 수가 없네요. 신사님. 이해해 주시겠어요?”
“하, 하하…….”
부담스러운 호칭인데, 마치 아이를 달래듯이 쓰니 이건 뭐 그에 대한 부담이 너무나 쉽게 가루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거기에 뒤에 말 때문에 궁금해도 더는 묻지 못하는 상태가 됐다. 화법이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강한결은 신기했다.
‘주도권을 이렇게 뺏겨본 게, 정말 얼마 만이지?’
양지원과 대화할 때와 비슷하긴 한데, 그건 그냥 자기가 양지원에게 맞춰주니 그런 거고, 지금은 진심으로 밀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그냥 애초에 게임이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위압감? 그걸 느낀 이후부터, 그냥 일방적이었다. 딱히 주도권 싸움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다. 이 여자가 의뢰비를 올려 부르거나 하지 않는 이상 그건 매우 쓸모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주도권이 넘어가도 크게 문제는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넘어가니 신기한 마음이 훅훅 피어났다.
“자료는 여기 있답니다. 확인이 끝나면, 연락 주세요.”
“아…… 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후미코는 USB와 명함 한 장을 두고, 그대로 찻집을 나섰다. 나가면서 아까 아는 척했던 가드의 어깨를 툭툭 치며, 따스한 목소리로 열심히 하렴. 하고 나갔다. 그 말을 들은 가드는 어쩐지 감격한 얼굴이었다.
SP는 일본의 경시청 경비부 경호과에서 요인경호를 전담하는 경찰을 부르는 호칭이다. 그들을 ‘SP’라고 약칭하니, 저 여자도 그 조직에 속해 있었다는 뜻이다. SP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경찰일 수도 있었다. SP는 확실히 엘리트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 나와서 탐정을 한다? 그림이 그냥 쭉쭉 그려져서 역시 일본은 일본이다란 생각이 들었다.
“와, 대단하네…….”
“……그러게.”
거기에 강한결은 절대 평범한 경찰은 아니었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 관한 생각은 이제 여기까지……. 이제는 이걸 니시노 하루히에 전달해, 일을 더욱 가속 시킬 시간이었다. 강한결은 길게 시간 끌지 않고 곧장 하토리 준에게 연락해, 영상을 넘겼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는데.
-아, 저희도 범인은 이미 특정했습니다.
“…….”
-지금은 교차 검증 작업 중이고, 이게 끝나면 곧장 증거를 확보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교차 검증은 굳이 필요 없겠네요. 영상 속의 저 사내, 우리 물망에 오른 친구니까요. 하하.
“아…….”
니시노 하루히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일 처리 속도가…… 어마어마했다.
-일 처리를 얼마나 어설프게 했는지, 이건 뭐. 머리를 굴린다는 게 오히려 증거를 사방팔방 뿌려 놓은 꼴이 됐더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정도로 모였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하하, 네. 그럼 그림이 완성되면 연락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
뚝.
전화를 끊은 강한결은 부족했던 와자리 하나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 느끼며,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 또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