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47화
447화. 왕관의 무게와 책임(12)
강한결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한 뒤, 곧장 친구들을 끌고 현관으로 움직였다. 그러곤 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쪽 시간은 늦은 시간이겠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지영은 당연히 깨어 있었다.
-응, 한결아.
“레미한테 지금 들었는데, 자수한 놈들이 범인이 아니래. 넌 알고 있었지?”
-……응.
“……미치겠네. 뭔데. 어떻게 된 건데?”
강한결이 그렇게 묻자, 지영은 상황을 설명해 줬다. CCTV가 있었고, 그걸 통해 자수한 범인과 실제로 일을 저지른 범인의 체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레미가 알았다. 그 말을 듣고.
“……그 영상을 너한테 보냈어?”
-응. 보냈더라. 아무것도 편집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전부.
“……지영아. 레미.”
-알아. 덤덤한 느낌이지? 절대 아니야. 나도 계속 생각하느라 연락이 늦었는데, 레미 잘 지켜봐 줘.
“알았어.”
강한결은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보다 깊이 눈치챘다. 지영에게 보냈다는 영상이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편집하지 않은 영상이라면 솔직히 누군가에게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 경찰 조사 때 쓸 수는 있겠지만, 그건 공기관이니 어느 정도 신뢰를 보장해 주기에 가능한 거다. 반대로 지영은 연이 있다고는 해도 일단 성별부터 달랐다. 그런데 그 영상을 보냈다?
‘분명 엄청난 수치심이 들 텐데?’
전화를 끊은 강한결은 친구들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탄식했다.
“그걸 지영이한테 그냥 보냈다고? 그러면서 도와달라고 했고?”
“응, 그랬다더라. 지영이도 그래서 지금 패닉인가 봐.”
“아이고…….”
임효중은 안타까움이 가득한 탄식을 흘렸다.
겉으로 봤을 때 레미는 괜찮아 보였다. 분명 표정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잘 이겨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아니었던 거다. 오히려 반대였다. 수치심을 이길 정도로 레미는 화가 나 있었다. 분노해 있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못 떠난다는 얘기를 한 거였다.
“한결아. 범인 바꿔치기할 정도면, 단순한 범인이 아닌 거 아냐?”
황석의 말에 강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아직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분명 일반 경호원은 아니겠지.”
일반 경호원이 따로 벌을 받을 범인을 만들어서 보낸다? 성범죄자로 낙인찍힐 일인데 그걸 감수하게 하려면, 아주 당연하게도 돈이 들어갔다. 그것도 한두 푼으로는 아마 어림도 없을 것이다. 못해도 한국 돈으로 억 이상은 들이지 않는 이상, 범인 셋을 따로 만들어서 자수시키진 못할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일반 경호원이 할 수 있는 수가 아니라는 뜻이고, 일반 경호원이 아닌 이상 이 문제는 지극히 어려워진다.
“아…… 쟤는 그걸 알았구나. 자기 혼자는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야. 그래서 지영이한테 도움을 요청한 거고. 지영이 전에 갔을 땐 오히려 위로해 줬었던 애잖아.”
이성진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는 똑똑했다.
딱 봐도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주관이 제대로 잡힌 아이였다.
“힘이 필요한 거지. 강지영이라는 인간이 가진 힘.”
지금도 지영은 뜨거운 감자를 넘어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비록 안 좋은 화제의 중심이지만, 지영은 그 가운데에서도 가진 힘을 스스로 쓰지도 않았는데, 쓰고 있었다. 지영이 가진 힘. 정의 뭐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었다.
지영은 책임의 힘이 있었다.
어떤 문제에 빠지면 지영은 절대로 자기의 책임을 미루지 않았다. 고뇌하고, 궁리해서 항상 ‘최선’이라 생각되는 방향으로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그런 행동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되돌아와 지금의 강지영을 만들어줬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지영은 이번에도 책임질 생각이었다.
그래서 자신은 물론 친구들에게 부탁한 거였다. 그러나 강한결은 레미가 자신이나 친구들 말고, 다른 게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여론?”
“응.”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임효중의 말에 강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미가 지영에게 원한 것은 지영의 팬이었다. 일본 내에서의 여론은 어차피 이미 바닥을 쳤다. 그리고 이걸 아무런 힘도 없는 레미가 뒤집기란 아예 불가능했다. 그냥 순도 100%로 불가능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진실을 알릴 수 있을까?
여론을 몰아야 했다.
그럼 여론을 어떻게 몰까?
레미의 생각은 간단했다.
지영의 ‘팬’을 이용해서.
이게 레미가 지영에게 도와달라고 한 이유였다. 지영이 나서면 아주 자연스럽게 전 세계에 고루 분포된, 집계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지영의 팬덤이 호응할 테니까.
“영악하네. 힘든 일을 겪었는데도.”
“머리가 좋은 거지. 똑똑한 거야. 그리고 독하기도 하고. 이렇게까지 머리를 쓸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이해해야지. 이 일 자체가 지영에게서 비롯됐다고도 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지만. 한결아. 근데 범인 바꿔치기한 거, 이거 우리가 밝힐 수야 있겠지만, 진범까지 찾을 수 있을까?”
“찾게 해야지. 그리고 우리가 안 해도 돼.”
“그럼 누가 해? 여기 경찰이 움직이겠냐?”
임효중이 인상을 찌푸리며 한 말에, 강한결은 씩 웃었다.
“우리 재단에 돈 제법 있잖아. 지영이도 좀 있고. 너네나 나도 그렇고. 고용하면 돼.”
“누굴 고용? 변호사?”
“로펌이야 당연한 거고. 여긴 좋은 제도가 있잖아? 사설탐정 제도.”
“아…….”
“돈 주고 찾으라고 하면 돼. 찾으면 사례 제대로 해준다고 하면 되고. 그럼 재벌 아들이 저질렀건, 국회의원 아들이 저질렀건, 신경도 안 쓰고 달려들어서 알아내려 할걸?”
강한결의 말에 임효중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서 흥신소는 불법이다. 하지만 일본은 합법이었다. 지금도 일본 내엔 6만 명이 넘게 탐정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돈만 제대로 주면, 아마 총리가 오늘 하루 뭘 먹고, 어디에 들렀고, 뭔 헛소리를 했는지까지 싹 뒤져줄 것이다.
돈을 조금 더 주면 아마 천황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전부 해줄 것이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레미가 여기까지 계산했을까?”
“모르지. 똑똑한 애니까 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했어도 상관없어. 우린 책임을 다 지면 돼.”
“음, 그건 그래. 책임, 그것만 제대로 지면 되지. 이거 한결이 네가 나서서 할 거야?”
임효중의 질문에 강한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한테 보고하고, 직접 움직이려고. 무려, 지영이가 부탁한 거잖아.”
“그래. 그럼 일단 내가 들어가서 상황 설명할게.”
“잉? 너 일어 돼?”
“나 아이돌이었다. 아이돌한테 일어는 기본이지. 너는 일단 대표님한테 연락부터 해.”
“그래.”
이성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임효중을 노려봤지만, 임효중은 그런 이성진을 무시하곤 안으로 들어갔다. 이성진은 임효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고, 황석만 옆에 남자 강한결은 곧장 장세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한결아.
“대표님. 도움이 필요해요.”
-어, 말해봐.
왜? 라는 말도 없었다.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도와주세요. 하는데 장세리는 도와줄 테니 말만 해. 이렇게 받아줬다. 평소 그녀의 성격이 고스란히 나온 대답이었다. 그러나 강한결은 이 대답이 정말로 든든했다. 그런 든든함을 내색하지 않고, 강한결은 현재 상황을 설명했다.
-아, 그거. 임은진 팀장한테 보고받았어. 그래서 이미 일본 최대 법인 니시노 하루히랑 접촉 중이야.
“벌써요?”
-시간 싸움이잖아. 여론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뒤집어버려야지. 너도 그럴 생각 아니었어?
“네, 같은 생각입니다. 이건 빨리 뒤집어 놔야지 레미가 상처를 덜 받을 거예요.”
-그러니까. 잠깐 얘기했는데 긍정적이야. 물론, 그쪽에서 적지 않은 수임료를 요구하겠지.
“그건 저나 지영이가 내겠습니다.”
강한결이 말하자마자, 뭐? 하더니, 하, 하는 코웃음이 넘어왔다.
-한결아. 네가 대단하고 돈도 많은 거 알겠는데. 그렇다고 이 리치 누나 무시하면 곤란하다?
“아, 그런 뜻은 아닙니다.”
-알아. 무슨 뜻인지. 개인의 책임이라 이거겠지. 그러니 그 개인의 친구인 너나 친구들이 책임지고 싶은 거고. 하지만 우린 남이니? 너 우리 소속사야? 어떤 소속사가 이런 문제에 개인 돈을 쓰게 하니?
그런 곳 많을 겁니다. 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눈치가 있는 강한결은 당연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러니 돈 얘기는 그만.
“네, 감사합니다.”
탐정 쪽이 있지만, 그쪽은 아예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했다.
-지영이는 어떠니?
“상태 안 좋아요. 보기 드물게 멘탈 깨진 느낌입니다.”
-지영이가 아무리 강해도 이런 문제가 생기면 또 어쩔 수 없지. 누구도 괜찮을 수 없을 거야. 괜찮으면, 그건 인간이 덜됐으니까 괜찮은 거고. 나도 위로하겠지만, 한결이 네가 그래도 지영이 잘 챙겨주고.
“네, 대표님.”
-그래. 니시노 하루히랑 계약 끝나면 바로 그쪽으로 보낼 테니까 주소 알려주고.
“네. 아 참. 대표님. 여기 두 사람 한국에 이민시키려고 합니다.”
-음, 그게 낫겠지. 너희 연희 스포츠에서 받을 거야?
“당장은 그러려고요. 그래도 다른 도움은 회사에서 도와주셨으면 해요.”
-알았어. 그것도 말해 놓을게. 더 있니?
“아니요. 끝이에요. 여기 정리되는 대로 바로 들어가서 보고드릴게요. 막 움직여서 죄송합니다.”
-행동 시원시원해서 난 좋은데? 잘 해결하고 와. 법적 지원은 이쪽에서 전부 해줄 테니까.
“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는 무슨.
통화를 끝낸 강한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자.”
“응.”
숨을 돌릴 틈도 없었다.
안으로 들어간 강한결은 사토 가족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세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시노 하루히란 이름이 나와서였다.
“거, 거긴 돈이 많이 들지 않나요?”
신지로의 질문에 강한결은 곧장 대답했다.
“모든 금액은 저희가 부담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 그래도…….”
“정말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히려 저희가 꼭 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부디 그럴 수 있게 편하게 받아주세요.”
“그, 알겠습니다.”
신지로가 이렇게 나올 정도로 사실 니시노 하루히란 이름은 위명과 악명이 높았다. 돈만 되면 연쇄살인범의 변호도 맡는 집단. 그런 만큼 최우선 조건은 당연히 돈이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여러 사건을 직접 맡으며, 부와 악명을 동시에 쌓았다. 그런 만큼 수임료가 장난이 아니다. 그걸 알아서 지영을 이용하기로 한 레미마저 놀란 눈이 됐다. 초등학생도 알 정도의 악명. 그 정도라 보면 되는 곳이었다.
“이민은 빠른 시기 안에 준비할게요. 원한다면, 당장 지금이라도 갈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숙소에서 잠시 쉬다가, 집으로 옮기시면 됩니다.”
강한결의 말에 이치카는 눈치만 봤는데, 레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적어도 그 자수한 사람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질 때까지는 있고 싶어요. 범인은…… 오래 걸릴 테니까요.”
역시 진범을 잡는 게 쉬운 일이 아님을 레미는 알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게,
“……알겠습니다.”
레미의 말에 강한결은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아줬다. 분명히 힘이 있는 인간이다. 금력이든, 권력이든, 분명 뭐든 갖춘 놈들이 범인이다. 이런 놈들이 당연히 쉽게 꼬리가 잡힐 리가 없었다.
아마 아예 안 잡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과정은 진실을 바로잡기 위한 과정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가만히 있으면 진범이 돈으로 죄를 묻어버리기 일보 직전인 게 아니라. 레미는 적어도 이렇게 자기 사고가 종결되는 게 싫은 거였다.
그래서 그걸 최소한이라도 바로잡기 위해 강지영의 도움이 필요했던 거고.
여기까지 생각하자.
절로 입이 열렸다.
“진짜 대단하네, 레미 양. 대단해요. 대단해, 진짜.”
강한결은 레미가 너무 대견하게 보였다.
느닷없는 강한결의 칭찬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세 사람에게 강한결은 선선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레미 양이 바라는 게 뭔지 알겠어요. 나나 지영이가, 그리고 여기 친구들이 최대한 노력해서 도와줄게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씩씩하게, 대단한 레미 양으로 남아 있어줘요. 지금처럼 쭉. 앞으로도요. 알았죠?”
“…….”
“그리고 지영이에게 도움을 요청한 건 아주 잘한 선택입니다. 그 덕분에 나나, 여기 이 친구들이 진심으로 움직일 생각이 됐으니까요. 그거 알아요? 지영이도 사실은 내 말을 듣는 거? 나는 세계 전체에서 유일하게 지영이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 내가, 이제 정말 진심으로 레미 양을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게 전부.”
“…….”
“레미 양이 도움받을 ‘용기’를 낸 덕분이에요.”
그러니 이제 마음 놓고, 지켜보기만 해요.
“우리가 진심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는지.”
이런 강한결의 부드러운 말에 사토 레미의 눈시울이 처음으로,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울방울 맺히기 시작하는 눈물.
“흑, 흐윽…….”
아무리 강하고, 똑똑하고, 야무지고, 영악하다 한들.
아직은, 중학생이었다.
온전한 자기 편의 등장에, 그간 억누르고 있던 감정의 족쇄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여리고도, 여린.
이 사고를 견디기엔, 아직은…… 너무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