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46화
446화. 왕관의 무게와 책임(11)
문이 열리자 보인 건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다. 스물 초중반의 사내. 머리를 빡빡 깎았는데, 귀가 만두처럼 부어 있었다. 강한결은 당연히 이 남자가 유도 아니면 레슬링을 배웠을 거라고 바로 유추할 수 있었다.
그의 안내로 현관으로 들어서자, 신발을 벗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사토 신지로입니다. 한결 상처럼 유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 반갑습니다. 강한결입니다.”
“신지 상에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하하. 하고 웃었지만, 진심으로 즐거워 웃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반가움을 표시하기 위해 최대한 반가운 ‘척’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눈빛엔 친족이 당한 사고 때문에 분노와 안타까움이 보였다.
그래도 강한결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일본 유도는 강한결 본인부터 배척하는 중이었다. 예전에 포드 사와 함께 이성진 건으로 인터뷰했을 때도 일본 유도를 망하게 하겠다고 선포했을 정도였다. 그러면 적어도 자신에게 악감정이 충분히 있을 법도 한데, 이 사람 사토 신지로는 그런 느낌이 없었다.
거실 안쪽에서 주춤주춤 모습을 드러낸 중년 여인.
좀 전에 전화 통화를 한 이치카 씨 같았다. 수척하다 못해, 당장이라도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것 같은 모습에 강한결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앞치마에 물 묻은 손을 슥슥 닦으며 다가온 이치카 씨.
전화 통화를 했을 때와는 또 달랐다. 아니, 당연히 달랐다. 딱 봐도, 척 봐도 불안해하는 모습.
‘그럴 만도 하지…….’
경호원을 믿었다.
지영의 배려를 받아들여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사고는 그 경호원에게서 벌어졌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정도를 그냥 넘어선 거다. 그런 일을 겪었으니 남자가 무서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집안으로 들인 건 같이 유도를 하는 신지로의 존재와 그녀가 직접 한번 봤었던 지영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믿음보다 더 큰 이유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겠지.’
그녀는 지금 아군이 없었다.
언론은 기이하게도 조금씩 사토 레미를 매도하고 있었고, 오히려 그녀가 몸가짐을 바로 하지 못한 게 이유라는 식으로 물타기를 하고 있었다.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솔직히 전 세계에서 쉽게 보기 쉬운 인권 유린 방식이었다. 실제로 자수한 3인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오면서 임은진에게 받았던 연락을 통해 강한결은 그 범인들이 경호원이란 걸 이미 전해 들었다.
그런데 기사 어디에도 범인이 경호원이란 걸 적지 않았다.
분명 자수했고, 자백도 했을 건데 그런 게 풀리지 않은 건 언론 자체에서 막고 있단 뜻이었다. 그걸 이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냥 지금까지 언론이 돌아가고 있는 것만 봐도 자기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우…….
“미친 나라야, 진짜…….”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작게 중얼거린 강한결은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좀 전에 전화했던 강한결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 레미 엄마인 사토 이치카예요. 이쪽은 제 조카인 사토 신지로고요.”
“네, 인사했습니다. 저희는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겠어요. 여기 현관 근처에 있겠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
그리고 지영을 믿는 만큼 자기들도 믿어주려고 하는 게 분명 티가 나지만 그래도 강한결은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불안과 두려움. 저걸 보니 안으로 들어가선 안 된다는 판단이 바로 섰다.
하지만.
목발을 짚고 불쑥 튀어나온 소녀, 레미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창백한 피부. 착 가라앉은 눈빛. 뭐라 말로 형용하기 힘든 감정을 눈빛과 얼굴 전체 담고 있는 소녀. 레미를 본 강한결과 이성진, 임효중, 황석은 순간 멈칫했다.
솔직히 지영의 부탁이니 무작정 날아온 거다.
저 소녀를 위로할 어떤 방법을 정해두고 온 게 아니었다. 하지만 오는 내내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떤 위로의 말을 해줘야 할지, 이런 걸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레미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은 무조건 잘못된 생각이란 감이 확실히 들었다.
이건, 위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섣부른 위로는 저 아이를 더욱 상처입히는 길이라는 걸 알게 되자, 강한결은 순간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친구들도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소녀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 일은, 지영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었다. 아무리 편을 들어준다고 해도,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강한결과 친구들의 마음을 아주 무겁게 만들었다.
“들어오세요. 도와주러 오신 분들을 현관에 세워두는 건 예의가 아니랬어요.”
“……감사합니다.”
툭 날아든 그 말에 강한결은 거절하지 않았다. 한국의 집과는 조금 다른 형태의 일본 집. 심지어 생면부지의 사람이 사는 집이다. 어색하기 그지없었고, 분위기 또한 미치도록 무거웠다. 그러나 그래도 계속해서 머리는 돌아가고 있었다.
거실 앞까지 가며 강한결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
“표정 관리 잘하자.”
“……응.”
임효중이 대표로 대답했다. 다들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니 강한결이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는 바로 눈치챘을 것이다. 강한결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저 소녀를 불쌍한 눈빛으로 보는 건, 저 아이의 가슴에 다시금 비수를 꽂는 일이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사력을 다하는 게 딱 봐도 눈에 보인다. 그런 아이에게 그날의 문제를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짓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일본 특유의 거실 느낌이 물씬 나는 집.
거기에 나란히 앉자 이치카 씨가 차를 내왔다. 그러곤 레미, 신지로와 함께 나란히 셋이 앉자 강한결은 바로 말을 꺼냈다.
“다시 소개할게요. 저는 지영이 친구 강한결이고, 옆엔 임효중, 이성진, 황석입니다. 음, 음.”
반갑습니다. 이런 말을 하려고 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거기서 인사를 맺자, 레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 말을 받았다.
“잘 알아요. 여기 신지로 오빠가 종종 얘기도 했었고요. TV에서도 자주 봤어요. 음, 안 좋은 쪽으로?”
그럴 만했다.
일본에서 지영을 포함한 황금세대는 악적이었다. 일본의 자존심인 유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린 장본인들이었다. 세 대가 두 번이나 바뀌는 동안 그렇게 노력해서 도쿄에서 겨우 일본의 시대를 열었는데, 고작 4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세대를 모조리 작살낸 게 황금세대 아이돌이니,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판정 문제부터 시작해 많은 부분에서 싸웠다. 강한결은 대놓고 일본 유도를 겨냥한 스포츠를 만들겠노라 공언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걸 가지고 언론에서 주야장천 떠들었을 것이다. 물론 강한결이나 강지영이나, 친구들이나 전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니들은 떠들어라.
난 내 길을 간다.
이런 마이페이스가 기본 장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런 사고가 터진 이상, 이제는 신경 써야 했다.
“그렇죠. 우리를 정말 안 좋아하긴 합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희가 이렇게 일본에 온 것 자체로, 두 분은…… 일본에서 설 자리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
“아.”
“하아…….”
강한결이 대놓고 문제를 얘기하자 이치카 씨는 침묵했고, 레미는 뭔가 깨달은 얼굴이었고, 신지로는 알고 있었다는 느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지영 때문에 욕을 먹었지만, 결국 지영의 도움을 받게 됐다. 이걸 이 나라 언론이 모를 리도 없으니 아마 이것으로 어마어마하게 까기 시작할 것이다.
“기자들을 대놓고 뚫고 들어갔고, 바보가 아닌 이상 저희가 레미 양을 도우러 왔다는 것을 알 겁니다. 그러니 그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할 것이며, 아마 그 방향은 좋지 않은 쪽일 겁니다.”
“그, 그렇겠죠……. 후우.”
이치카 씨는 입술을 꽉 깨물며 터지려는 울음을 참고 있었다. 잠시 진정하길 기다릴까 하다가, 그래서는 얘기가 진행되지 않을 거란 생각에 강한결은 일단 문제를 전부 꺼내고 가기로 했다.
“오면서 계속 기사를 살폈는데, 이미 저희가 오기 전에도 언론은 레미 양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제 예상에는…… 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경찰은 물론 언론도 범인을 옹호할 겁니다.”
“…….”
“레미 양을 모욕하고, 모독해야만 이 문제를 제 친구인 강지영의 탓으로 몰고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해야 문제가 범인이 아닌, 지영에게 향합니다. 이건 기정사실이라고 봐도 좋아요.”
유창한 일본어로 강한결이 그렇게 말하자, 신지로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를 악물고 분노를 참았다. 이치카 씨는 뭐 말할 것도 없었고. 그런데…… 소녀, 레미는 담담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예상했군요.”
“네. 인터넷 곳곳에서 저를 욕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는걸요. 모를 수가 없었어요.”
“…….”
레미의 담담한 대답에 강한결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그것만 안 것 같지 않았다. 강한결은 가만히 레미를 바라봤다. 그러자 레미도 강한결을 가만히 바라봤다.
도무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분명 힘든 일을 겪은 티는 나긴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 느낌은 도무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불편한 느낌이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느낌이 분명 있는데…….’
그게 뭔지 잘 감이 안 잡히는 강한결이었다.
“그, 그러면 이제 어떡해야 할까요?”
딸을 위해 급히 자신을 추스른 이치카 씨의 질문에 강한결은 딱, 단 하나밖에 없는 방법을 제시했다.
“귀화. 혹은 이민. 그것밖엔 지금으로선 답이 없습니다.”
“아…….”
오면서 생각해 봤는데, 역시 답은 귀화나 이민밖에 없었다. 레미는 절대로 이 땅에서 살 수 없었다. 이미 얼굴도 전부 팔렸고, 아무리 조용히 산다고 해도 이 일본이란 나라에 사는 ‘특정’ 미친놈들은 결코 그녀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온 사방이 자신을 배척하고, 노리는 삶? 그건 삶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 옛날, 조선 시대에서도 그런 삶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민성이 성장하지 못한 나라라서, 레미를 이곳에 두는 건 사자 우리에 가둬놓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강유진 건처럼 그녀를 귀화시키든가, 아니면 한국으로 이민 신청하게 하는 것만이 당장 그녀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이것만이 답이었다.
그리고 그 답을 들은 신지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고. 이치카 씨는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이민, 이건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에도 이미 사토 레미의 얼굴은 파다하게 팔려서, 분명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한국은 짐승을 풀어놓은 우리는 아니었다.
분명 정신 나간 놈들이 있긴 하겠지만, 이곳보다는 몇백 배는 안전했다. 게다가 뭔 일이 터져도 한두 시간 내에 즉시 대응할 수 있었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 보호도 가능했고. 그러니 이민만이, 답이다.
“생활은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와 다른 나라 언어를 익힌다는 게 어렵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부분만 이치카 씨가 노력해주시면 일자리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제가 나이는 어려도…… 제법 규모가 있는 후원 재단의 이사거든요. 이치카 씨와 레미 양은 충분히 저희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아…….”
그럼, 충분히 가능하고말고.
어차피 후원 재단은 돈 잡아먹는 괴물이다. 수입은커녕, 돈만 줄줄 나간다. 거기에 두 사람이 자립할 때까지 책임지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게다가 슬슬 사회에 나간 유망주들은 자신이 받았던 도움을 잊지 않았다. 후원받는 입장에서, 후원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최소로 잡아도 10년은 아무런 문제 없이 두 사람을 도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정도면 두 사람이 자립하는 데 넘치도록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당장 결정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저희가 여기에 체류 중일 때 결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야 제 소속사와 재단에서 두 분의 이민이나 귀화를 지원할 수 있으니까요.”
타지도 아니고, 아예 다른 나라로 가서 사는 건 당연히 쉽지 않은 문제였다. 하지만 그래도 강한결은 결정을 조금은 재촉했다. 이 문제는 길게 시간을 끌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체류할지는 모르지만, 아마 자신들이 모습을 보인 이상 분명 극단주의자들이 몰려들 것이다. 거기서 받을 상처를 생각하면, 시간을 길게 끄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이치카 씨는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미는 달랐다.
“귀화는 안 돼요.”
“네?”
“일본인으로 할 일이 있거든요.”
“무…… 아닙니다. 그럼 이민에는 찬성하는 거죠?”
강한결의 물음에 레미는 엄마인 이치카 씨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맘. 우린 어차피 이 나라에서 이제 못 살아요.”
“레미, 그래도…….”
“희망 가지지 말아요. 어디에도 우리 편은 없으니까……. 있어도 고개를 들지 않을 거예요. 저처럼 낙인이 찍히고 싶지 않을 테니까. 지금 제 친구들도 그래요.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니 지금은 지영이 보내준 이분들만이 우리 편이에요.”
“…….”
레미의 그 말이 결정타였다.
이치카 씨는 강한결을 보더니, 굳은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을 지키고 싶은 엄마의 눈빛이었다. 강한결이 잠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그런데, 이렇게는 갈 수 없어요.”
“네?”
“범인. 범인이 잡히는 건 보고 가고 싶어요.”
“범인이요? 범인은 자수…… 어, 음.”
강한결을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자기편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면 뉴스나 기사를 다 본 거고. 그러면 범인이 자수했다는 걸 못 봤을 리가 없는데?’
그런데도 범인이 잡히는 게 보고 싶다?
강한결은 길게 고민할 것도 없이, 금방 정답을 알아차렸다.
“자수한 셋이 범인이 아니군요.”
“…….”
레미는 강한결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만난 이후 가장 무서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