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45화
445화. 왕관의 무게와 책임(10)
통화를 끝낸 강한결은 한숨조차 쉬지 않았다. 대신, 다시 전화를 걸었다.
-어, 한결아.
“형, 일본 티켓 좀 예매해 줘요. 저 포함 네 명이요.”
-넘어가게?
“네.”
-한결아. 근데 이번 일은 상황 좀 보면서…….
뚝.
강한결은 전화를 끊었다. 그러곤 임효중을 바라봤다.
“효중아. 일본 가는 티켓 예매해. 우리 넷 거 전부.”
“알았다.”
강한결의 조용한 말에 임효중은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임효중의 눈치를 보는 황석과 이성진. 두 친구도 화가 났다. 지영이 직접 일본까지 찾아가 격려했던 소녀, 나중에 듣기로 오히려 지영을 다독여 치유해 준 소녀 사토 레미에게 일어난 일은 정말이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영과 연락이 닿기 전에 얼마나 욕을 했는지 몰랐다.
그러나 그랬던 이성진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영이 통화하자마자 분위기가 확 변한 강한결 때문이었다.
리더.
대장.
두목.
강한결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다.
많은 일을 강지영이 끌고 오고, 설득하고, 결정하고 해서 움직였지만, 그걸 알아야 한다. 그 모든 게 강한결의 ‘허락’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한결아. 우리끼리 갈 거지?”
임효중의 말에 강한결은 고민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응. 성중이 형은 빼. 연락 오면 받지 말고.”
“어? 그렇게까지?”
“그 형은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됐어.”
“아, 그렇긴 하지. 알았어.”
강한결은 친구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드물게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평소 그저 선한 미소로 팀을 이끌고, 뒤에서 보조해주며, 때론 자신이 앞서 이끌어가는 그는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모두가 분노해도 오히려 자신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명 아래 냉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친구였다.
강한결은 자기의 위치를 잘 알고 있었다.
자기가 흔들리면 팀이 흔들리고, 팀이 흔들리면 그건 자기의 책임이라 생각했다. 그런 책임을 강한결은 주장이 되었을 때부터 져왔다. 그러나 그런 책임감이 실제로 드러나는 일은 별로 많지 않았다.
임효중은 트러블 자체가 거의 없었고, 황석도 연인인 한은정의 부모님 문제 때 한 번 있었다. 이성진의 문제 때 두어 번 나왔고, 이성진은 게임도 안 될 만큼 많은 문제가 되었던 지영의 사건 사고에서는 오히려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지영이 워낙에 잘 해결했기 때문이다.
연예계에 발을 들인 이후, 많은 사고가 친구에게 일어났지만, 친구는 전부 잘 해결했다.
그랬던 친구인데, 이번 일엔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강한결은 알 수 있었다. 지영의 목소리는 얼어붙어 있었다. 언젠가부터 지영의 약한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모든 일에 주도적으로, 정말 잘 대처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그래도 친구는 알고 있었고, 도움을 요청했다. 지영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공포에 떠는 것 같기도 했다.
강한결은 처음 봤다. 지영의 그런 모습을. 그래서 솔직히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내 금방 정신을 차렸다.
지영의 부탁이다.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SOS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니 이런 와중에도 상황을 좀 지켜보자고, 고민하고 움직이자고 하는 매니저의 말은 무시하는 게 나았다.
“예약했어. 2시간 뒤, 하네다 공항. 일반석 자리 없어서 비즈니스로 끊었다.”
“그래? 잘했어. 바로 움직이자. 충전기 이런 것만 챙겨. 옷 같은 건 그냥 가서 사는 거로 하고.”
임효중이 티켓을 예매하자 강한결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지금 서울 숙소에 있었다. 여기서 기사를 보며 지영과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지금 연락이 됐다. 각자 흩어져 대충 짐을 챙겨 나왔다. 강한결의 차에 같이 타고,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중 전화가 왔다.
장세리 대표였다.
매니저 전화는 무시했지만, 이 전화는 무시할 수 없었다.
“네, 대표님. 강한결입니다.”
-에휴.
지극히 사무적인 어조로 전화를 받자, 즉시 한숨이 넘어왔다.
-넌 또 뭣 때문에 화났니?
“별로요. 그런 거 없습니다. 대표님.”
-없기는. 어디야?
“김포 공항 가는 길이에요.”
-김포? 일본으로 넘어가게?
“지영이가 부탁했어요. 가서 레미 그 아이 좀 지켜달라고.”
-아……. 지영이가 직접?
“네.”
-그럼 가야지.
다행이었다.
장세리 대표는 역시 분위기를 읽을 줄 알았다. 보통 연예인들은 이런 사고가 터지면 일단 시간을 두고 대처 방법을 생각한다. 문제가 터지는 즉시 즉각 대처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게 가능할 땐 미리 뭔가가 터지기 전에 그 정보를 입수했을 때뿐이었다. 뭐,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게 언론사와 매니지먼트의 관계지만, 일부 특종은 그러지 않는다.
즉시 터진다.
그리고 강풍 앞의 들불처럼 온 사방으로 번져간다.
지금이 그랬다.
일단 수습이고 뭐고, 먼저 움직이는 게 상책이었다. 강한결의 마음은 그런데, 매니저는 좀 지켜보자고 한다. 그게 맞지 않는 거였다. 그 일반적인 대응이 얼마나 친구한테 악영향을 끼칠지, 그걸 생각하지 않는 게 말이다.
그래도 다행히 장세리는 분위기를 읽었다.
만약 읽지 못했다면 정말 실망했을 텐데, 정말 다행이었다.
-먼저 가 있어. 한결이 네 스타일에 맞는 사람 보내줄게.
“감사합니다.”
-감사는. 이런 거 하라고 소속사가 있는 건데. 가서 지영이 부탁 잘 들어주고 있어. 나도 이쪽에서 최선을 다해 해결책 생각해 볼게.
“네.”
전화를 끊은 강한결은 속도를 좀 높였다. 김포에 도착해 주차장에 차를 대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시간에 맞춰 비행기에 오른 강한결은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다시 교토와 가장 가까운 국내선을 타고 움직였다. 교토에 도착했을 때는 임효중이 예약한 렌터카를 타고 움직였다.
주소를 이미 받았고, 연락을 해뒀다고 해서 조금도 쉬지 않고 바로 움직였다.
“한결아. 우리 기사 올라갔다. 일본 들어온 거.”
“뭐 가리지도 않고 그냥 왔으니까.”
이성진의 말에 강한결은 뭐 그럴 거라고 예상해서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아, 그리고 범인 자수했다는데?”
“범인이?”
“응.”
이성진에 이어 임효중이 보여준 기사를 읽은 강한결은 눈살을 찌푸렸다. 범인이 자수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아서였다. 뭐 잘한 짓을 했다고, 벌써 자수했을까? 그런 의문이 당연히 뒤따랐다.
그런데.
“가관이네, 진짜…….”
기사 내용을 읽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일본어 기사지만, 일본어 읽기 쓰기가 전부 되는 강한결은 더러운 조센징이니, 벌을 줬다느니 같은 개소리를 전부 알아들었다. 그리고 거기에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평생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동시에 강한결은 지영이 이런 문제와 싸우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색도 안 하고, 이런 문제를 혼자 안고 있던 지영에게 화도 났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곧 눌러서, 짓뭉개 안에서만 터트렸다.
지영이 믿고 지켜달라고 한 이상, 지금은 그것만 생각할 때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교토, 레미의 집으로 가는 길은 이후 조용했다. 다들 폰으로 상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복잡한 얼굴들이었다.
이런 일을 겪지 않은 건 아니지만, 지영처럼 많이 겪은 건 또 당연히 아니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한국 분위기는 어때?”
“잠깐만!”
강한결의 말에 얼른 이성진이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분위기를 확인했다.
“아, 음……. 역시 좋지 않네.”
“그렇지?”
“응. 미친 건 그 새끼들이 맞는데, 이게 도화선 자체를 제공한 게 지영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는 의견이 많아.”
“…….”
하아…….
그 말에 강한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말은 크게 틀리지도 않았다. 심지어 강한결 본인도 그렇게 느꼈다. 지영이 올림픽에서 기자에게 한 발언이 아니었으면, 만약 그 발언을 삼갔었다면? 강한결도 지금 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거란 의견에 동의했다.
그날 지영은 너무 예민했었다.
시합 당일에는 평소 무딘 친구도 예민해진다. 언제나 허허, 하고 웃는 보살 황석도 시합 날엔 날카로운 눈빛과 예민한 정신을 끝날 때까지 유지했다. 그리고 그건 자신이나,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정한 의미의 득도를 이룬 이가 아니라면, 보통 대부분 다 그렇게 된다.
그러니 그날 지영의 예민함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부상도 겹쳤고 해서, 평소보다 배는 예민한 상태였다. 거기에 대고 개소리를 떠들었으니 지영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게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명백히 잘못이었단 거다.
참으라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기자를 깠었어야 했다. 가족을 건드렸던 건, 확실히 선을 넘었다.
역시나 문제가 생겼고, 왕따 사건이 벌어졌다.
다행히 그건 어떻게 천운이 작용해 잘 수습됐는데…… 이어진 사고, 이건…… 문제가 컸다. 여성으로서, 가장 예민한 사고가 터진 거였다.
“그래도 지영이 옹호하는 목소리가 많아. 원론적으로 따지면 애초에 지영이한테 그런 질문을 한 게 잘못 아니냐면서.”
“그 말도 맞지. 그런데 그렇게 따져도 지영이 발언은 너무 나갔지. 너희들도 냉정하게 봐. 우린 100% 강지영의 편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강지영만 옹호하면 안 돼. 잘 알지?”
“당연하지! 나도 뭐, 그건 좀 심했다고 생각하는 중인데, 뭐.”
“나도.”
“음…….”
강한결의 말에 말을 꺼냈던 이성진이나, 임효중이나, 황석도 다들 동의했다. 팬들이 분석한 강지영의 성공 요인을 그들도 인정하고 있었고, 그래서 가장 가까운 ‘가족’ 중 한 명인 본인들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는 얘기를 지영이 없을 때 서로 질리게 나눴다.
“정신 차리자. 이번에 삐끗하면 지영이 많이 힘들 거야.”
그런데도 강한결은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런 강한결의 표정을 힐끔 본 친구들도 굳은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의 이런 얼굴은 정말로 낯설었다. 정말, 진짜 정말 화가 났을 때의 얼굴이다. 철저한 무표정. 옛날에 일진들을 손도 대지 않고 박살 냈을 때의 무서운 표정이 딱 이랬었다. 그때 학교에서 나서서 빠르게 잘 풀렸지만, 강한결은 학교가 나서지 않아도 일진은 작살낼 방법을 이미 준비했었다.
금품갈취, 폭언, 구타 등등의 모든 정보를 영상으로 담아서, 소년 법정에 세우면 아주 무거운 형벌이 떨어질 정도의 죄를 이미 증거로 가지고 있었다.
그때 만약 일진이 선을 넘었으면, 강한결이 한 여자아이를 구해내는 게 늦어 끔찍한 일을 당했다면, 장담하건대 한국 최고 명문 사학 연희 재단에 거대한 스캔들이 터졌을 것이다. 그때 강한결의 표정이 지금처럼 무표정했다. 그런데도 싸늘함이 가득 묻어났고. 그래서 친구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는 강한결의 말을 잘 듣는 게 무조건 상책이라는 것을.
하늘을 날고, 땅을 달려 몇 시간.
지영이 보내준 장소에 도착했다. 맞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일반 주택가인데, 이미 기자가 수십 명이나 깔린 게 보였다. 하이에나 떼들이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기자 정신이 없는 기자는 역시 넘쳐났다.
“아, 저길 어떻게 들어가지?”
“담 넘을까?”
임효중의 말을 이성진이 받자, 강한결은 고개를 저었다.
“도둑도 아니고 뭘 담을 넘어. 당당하게 가자. 그, 이치카 씨? 연락처 받았으니까 그분한테 연락하고 당당하게 그냥 들어가면 돼. 우리가 뭐 죄지은 것도 아니고, 지으러 온 것도 아니니까.”
“어…… 그래.”
“그럴까, 그럼?”
강한결은 이성진과 황석의 대답 뒤로.
“만약 들어오지 못하게 하면?”
임효중의 질문에도 곧장 대답했다.
“지영이가 강한 아이라고 했어. 아마…… 우리가 겁은 나겠지만. 지영이한테 도와달라고도 했다니까 우리가 무서워도 잘 참아줄 거야. 너무 불안해 보이면 현관에 쪼그리고 있지 뭐.”
“지영이도 지영이지만, 너도 참…… 너다. 하하.”
임효중의 대답에 강한결은 몇 시간 만에 피식, 하고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그런 실소에 이성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찐리더 모드가 그나마 풀린 것 같아서였다.
그런 이성진의 반응에 다시 한번 실소를 흘린 강한결은 이내 지영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한국의 90년대 발라드가 생각나는 컬러링이 잠시 들리다가.
-여, 여보세요?
당황, 불안, 슬픔이 덕지덕지 붙은 인사가 건너왔다.
“안녕하세요. 강지영 친구 강한결입니다.”
-아! 여, 연락받았어요! 은진 상에게!
“네, 저도 연락됐다고 들었습니다. 저흰 지금 집 앞에 도착해 있습니다. 앞에 기자가 이렇게 많은 걸 보면, 잘못 찾아온 것 같진 않아요.”
-아! 그, 안으로 들어오셔도 되는데, 그 기자들 때문에…….
“그건 저희가 알아서 할 건데. 혹시, 괜찮을까요? 레미 양이 무서워하거나 그러진 않을지, 그게 걱정입니다.”
강한결의 유창한 일본어 실력에 이성진과 임효중은 체념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그리고 황석은 뭐 강한결이니까 당연한 거지. 하며 수긍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친구들의 반응 뒤로.
-레미는 괜찮아요. 언제 오냐고 좀 전까지 물어보고, 저녁 대접해야 하는 건 아니냐며 저한테 얼른 저녁 준비하라고 시켰거든요.
“……강하네요.”
상식의 선을 넘어섰을 정도로.
지영은 몰라도 자기나 친구들은 처음 보는데. 이렇게까지 마음의 문을 연다? 솔직히 지영의 말이 없었으면 어디 간이라도 빼가려고 그러나? 의심부터 했었을 거다. 여긴 일본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건 아닐 거다.
그런 아이라면 지영이 강하다는 말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도울 생각 자체도 안 했을 거고. 그러니 친구인 지영을 믿으니 레미라는 아이는. 그냥 지영의 말 그대로 강한 아이가 분명했다. 아니면 아주 영악한 아이던가. 하지만 고작 중학생의 영악함에 넘어갈 친구도 아니니까,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뭐, 만나보면 알겠지.’
실체야 뭐 곧 보면 되니까. 그때 가서 나머지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네, 그럼 지금 들어갈게요. 앞에 소란스러워질 텐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네, 그, 흑……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 고맙다. 등등의 일본어가 한참 이어지고 나서야 끊긴 전화.
잠시 뒤.
새까만 왜건에서 내린 강한결은 기자들 앞에 섰고, 세상을 백지로 만들고 싶은 것처럼 눈부시게 터지는 빛을 뚫고, 지영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