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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444화 (444/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44화

444화. 왕관의 무게와 책임(9)

지영은 도움이 필요하단 말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도움을 주기 꺼려져서가 아니라, 고작 며칠 사이에 그때 그렇게 단단하던 소녀의 목소리가 확연히 변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위로부터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거의 즉시 그러지 않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

괜찮니?

괜찮아. 잘될 거야.

이런 무책임한 위로. 지영은 이런 위로를 많이 들어봤다. 너무 많이 들어서 솔직히 질리고 물릴 정도였다. 누구도 모르지만, 지영은 회귀 전 몸 이곳저곳이 아작났었고, 수술이 끝나고 재활할 당시 찾아오는 관계자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도 천재라 불리던 지영이었다.

아니, 황금세대 전체가 그랬다. 그런 황금세대는 지영을 시작으로, 몰락했다. 정말이지, 처참하게.

그러나 당연히 그걸 믿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유도계 관계자들은 은연중에 황금세대가 다음 대 대한민국 유도를 이끌어 갈 거로 생각했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유도의 중흥을 바라는 사람들은 당연히 황금세대의 몰락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소식을 듣고 황금세대를 찾았다.

그리고 찾아서, 그런 소리를 했었다.

괜찮다.

열심히 재활하면 재기할 수 있다.

노력하면 된다.

포기하지 마라.

내가 어떻게든 도와주마.

뭘 어떻게?

대체 뭘 어떻게 도와주겠다는 건데?

수십 년 후의 의료기술이라도 가져다줄 건가?

조각난 뼈를 완벽하게 접합시켜 줄 수 있나?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말 좀 해보라고. 대체 어떻게 도와줄 건지.

그리고 그렇게 말했던 사람 중, 세 번 이상을 찾아온 사람은 정말 손에 꼽았다. 그리고 그 손에 꼽는 사람들도 지영의 재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곤 조금의 위로비와 함께 발길을 끊었다. 그때 지영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들끓는 분노를 느꼈다. 그래서 더욱 악착같이 재활에 몰두했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 절절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더욱 깊게 좌절했다.

지영의 감정이 나락으로 처박혔던, 그 단초를 제공한 게 그 무책임한 위로였다. 그들의 위로 때문에 진짜 재기할 수 있을 거란 희망을 품었고, 그렇게 품은 희망 덕분에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처박혔다.

그래서 지영은 그때부터 그 누구에게도 섣부른 위로 따위는 하지 않았다.

똑같이 몰락한 황금세대에게는 더더욱.

그렇다면 사토 레미는?

목소리의 고저가 사라진 이 아이에게는?

이 아이의 세상은 단언컨대, 무너졌다. 사토 레미는 강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강함이 그녀가 겪은 일을 아무것도 아닌 일로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저 나이 때의 아이에게 그런 처참한 일은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일이었다.

감히 지영이 위로조차 하기 힘든.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이번 일에 책임을 느끼는 지영이 상상하는 것조차도 이렇게 힘든데, 본인은 정말 오죽하겠나.

-저기, 힘들까요?

지영의 침묵이 불편했을까.

아니면 서운했을까.

무심히 건너온 사토 레미의 말에 지영의 정신이 번쩍이는 느낌과 함께 돌아왔다.

“아니, 아니아니……. 도와줄게. 당연히…… 그래야지.”

-또, 또 책임을 느끼나 보네요?

“어…….”

이 상황에 이렇게 묻는다고?

지영은 순간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목소리를 들어보면 정말 분명 어떤 심정 변화가 왔음이 분명해 보이는데, 근데도 지영을 치유했던 저 말투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토 레미는 아직 소녀였다.

-이번엔 지영 책임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을래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알았어.”

-봐주셔야 할 게 있어요. 30분 뒤에 다시 전화할게요.

지영은 다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사토 레미는 고마워요, 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곧장 메시지가 넘어왔다. 한 사이트의 주소와 패스워드로 추정되는 메시지였고, 지영은 이 메시지에서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레미가 보내준 거라 안 들어갈 수 없었다. 임은진이 옆에 와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지영은 태블릿으로 주소에 접속했고,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개인 클라우드 서버로 추정되는 사이트로 들어갔다.

다섯 개의 동영상.

“지영아, 이거…….”

“……아마도 누나가 생각한 게 맞을 것 같아요.”

“…….”

느낌이 심히 싸했다.

하지만 안 볼 수가 없었다. 사토 레미가 왜 이 주소를 보여줬는지, 이 소녀가 무엇을 바라고 이 불길한 영상이 있는 주소를 알려준 건지, 정말로 심히 불길했다. 그래도 봐야 했다. 레미는 이번엔 그 책임대로, 책임을 져달라고 했다. 그게 도와달란 말이었다.

“누나, 저 혼자 볼게요.”

하지만 그전에 일단 임은진의 의중을 물었다. 어떤 영상인지 감이 와서, 여성인 임은진이 보기에는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물었는데, 임은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엔 내 잘못도 커. 이상한 업체를 구했잖아. 제대로 구하기만 했다면…… 이러지 않았을 거야. 그러니 나도, 나도 볼게.”

“정말 괜찮겠어요? 이 영상 이거, 아무래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보자. 보고, 제대로 해결하게 해줘.”

“…….”

각오가 선 눈빛이라, 지영은 어쩔 수 없이 한숨을 내쉰 뒤 영상을 틀었다.

현관 앞에 달린 CCTV 영상이다. 임은진이 고용한 경호원 셋이 보였다. 그들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잠시 화면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5분 뒤, 복장이 바뀌고, 손에 복면을 쥔 범인 셋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곧 이치카 씨가 주었을 거로 예상되는 키로 현관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갔다.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지영은 다음 영상을 틀기가 겁났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드는 순간, 레미가 도와달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말하고 이 영상을 준 이유가 있을 터, 지영은 영상을 켰다.

2번째 영상.

현관 뒤에서 레미의 집 안쪽 거실을 비추는 영상이었다. 범인 셋은 신발을 신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레미의 비명이 울렸다. 소리까지 담기는 영상. 마우스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3번째 영상.

레미의 방으로 추정되는 공간이다.

레미의 비명 뒤, 예상했던 상황이 벌어지려는 조짐이 보이자 지영은 영상을 껐다.

“어떻게, 어떻게 인간이…….”

임은진은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건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지영은 이 영상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강하다고? 괜찮다고? 전혀, 절대.

아무리 믿는다지만 지영에게 이런 영상을 보내는 건 절대로 정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영은 레미의 상태가 지독하게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나, 일본 가야겠어요.”

“……그, 그래. 누나가 얼른. 아…….”

지영의 말에 일어나다 말고 다시 풀썩 주저앉는 임은진.

전에 지영도 겪어 본 적이 있는 증상이었다. 지영은 얼른 임은진을 부축해 소파에 눕혔다.

“괜찮아요?”

“응, 자, 잠깐 어지러워서. 괜찮아…….”

“누난 좀 쉬세요.”

“아니, 누나가 얼른…….”

임은진이 다시 일어나려고 하자 지영은 그녀를 다시 눕혔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괜히 무리해서 상태가 더 안 좋아지는 것보다, 강제로라도 쉬게 하는 게 나았다. 그래서 지영이 단호하게 말했지만, 임은진은 역시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지영은 그런 임은진의 고집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임은진 역시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영상을 대충 봐도 범인은 경호원 셋이었다. 그리고 그 경호원을 보낸 업체를 고른 건 임은진이었다. 당시 일본에 와서 레미만 만나고 바로 다시 떠나야 했기에 제대로 알아볼 시간도 없었지만, 알다시피 이런 문제가 터지면 그건 변명이 되질 않는다.

짐승을, 야수를, 개쓰레기를 레미의 옆에 풀어놓은 거니까.

이건, 임은진의 결정이 낳았다고 봐야 했다.

이런 책임을 그녀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그녀에게 지대한 스트레스를 선사하고 있었다. 심적 중압감. 미안함, 자괴감, 자책, 이 모든 게 그녀를 짓누르고 있었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쉬세요. 누나 할 일 많으니까 제발. 얼른 기운 차리고 저 도와줘야죠.”

“…….”

일어나 앉았던 임은진은 지영의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은 터졌지만, 어떻게 될지 아직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지영은 이 일이 그렇게 잘, 예쁘게 해결될 것 같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이 될 거란 예감이 아주 진하게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일단 뒤로 미뤄놓고, 이런 문제의 영상을 자신에게 보낸 사토 레미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했다. 아이의 고저 없는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책임을 느끼냐고 물었을 때, 그때도 레미는 크게 감정이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할 때도. 간절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게 지영을 불안하게 했다.

그러는 와중에 사토레미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아직 지영도 혼란스러운 상황이지만, 이 전화는 안 받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받기 싫기도 했다. 지영은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를 과대평가했는지 깨달았다.

자기도 아픈 일을 겪었다지만, 이 아이를 이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다.

결이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애석하게도 성별이 달라서, 지영은 이 아픔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영이 아무리 2회차를 산다고 하지만, 회귀자라고는 하지만 성폭행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지독하게도 무례한 짓이겠지.’

그렇기에 이 일은, 지영에게 고통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전화는 받아야 했다. 받고 싶지 않았지만, 회피하고 싶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니 더 책임져야 해.’

어떻게든.

이 아이가, 일어날 수 있도록.

이런 영상을 지영에게 그냥 던져버릴 정도다. 그건 곧 마음 어딘가가 고장 났다는 것을 뜻했다. 그걸 고쳐야 했다. 그걸 고치지 않으면, 진짜 이번엔 더욱 지독한 일이 일어날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에 각오를 다졌다. 소피를 구할 때 악을 쓰며 다짐했던 거로는 부족할 것 같아서, 지영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했다.

“응, 레미.”

-영상은 봤어요?

“다는 못 봤어.”

-괜찮아요. 다 안 봐도. 중요한 건, 범인이 아니에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

-자수한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에요.

“……뭐?”

-알 수 있어요. 세 사람의 목소리, 체형, 머리카락 길이까지 전부. 얼굴은 못 봤지만, 복면을 썼을 때 머리카락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런데 자수한 세 사람은 전부 머리가 매우 길어요. 저 정도면 복면을 써도 머리카락이 목 아래로 보였을 거예요.

“…….”

-더 있어요. 자수한 세 사람은 좋은 말로는 체격이 좋아요. 나쁘게 말하면 비만이에요. 조금 뚱뚱한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저를 덮, 덮……친 범인은 다 날렵했어요. 세 사람 전부.

“……아. 자, 잠깐만. 확인 좀 해볼게.”

레미의 말에 벼락처럼 스쳐 가는 무언가.

지영은 태블릿을 조작해 범인이 자수하는 영상을 확인했다. 사진, 영상을 확인했는데 진짜였다. 자수한 범인들은 건장했고, 심지어 중간에 있는 놈은 중도 비만 정도였다. 그리고 레미가 보내준 첫 번째 영상을 확인했다.

셋 다 날렵했다.

호리호리한 체형이다.

옷에 가려져 있지만 마른 멸치의 레벨을 벗어난 정도, 그 정도였다. 체격에서 극단적으로 차이가 났다. 정밀 프로그램이고 나발이고 그냥 눈으로 보면 알 수 있을 레벨이었다.

“이 미친…….”

범인을 바꿔치기했다.

아무리 지영이 세상사에 관심 있는 게 별로 없다고 해도, 범인을 바꿔친 이유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나는요.

그때 다시 들려온 레미의 목소리.

-지영 상이 가고, 어렴풋이 눈치챘어요.

“……뭐를?”

-어쩌면, 노려질 수 있겠구나. 그거요.

“…….”

-제 SNS 저를 강간하겠다는 글과 메시지가 가득해요. 유출된 메일 번호 때문에 폰으로도 가득 날아들었어요. 자주 가던 커뮤니티에 갔는데, 거기선 저를 어떻게 강간해야 할까 논의도 하고 있었어요.

“……미쳤어. 미친 거야, 그건 진짜…….”

정신이 진짜 아득해졌다.

지영은 자기가 일본이란 나라를 너무 얕봤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 극우 세력 정도가 아니라, 진짜 이곳은 한일 관계가 삐걱거리면 곧바로 관광객을 테러하고, 유학생을 테러하는 놈들이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면 그런 기사를 수두룩하게 찾을 수 있었다.

이게 한국과 일본이 그렇게 가까워도, 다른 점이다.

다른 민족이고, 다른 문화를 가졌다는 증거다.

-경호원을 붙여주셨지만요. 불안했어요. 그래서 인터넷서 용돈을 다 털어서 어렵게 설치했어요. 설치하면서 제발 이걸 쓰지 않기를 바랐어요. 그런데, 그런데…… 쓰고 있어요. 지금 저는.

“…….”

-다행이겠죠? 억울하게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

다행? 그럴 리가 있겠냐?

이런 건 아예 일어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 결단코 다행이란 말은 쓸 수 없었다.

-그걸 도와주세요. 저는, 지영에게 말한 것처럼 강하게 살 거예요. 그런데 그래도. 이 문제는 해결하고 싶어요. 근데 저는 돈이 없어요. 엄마도 없어요. 제가 아무리 외쳐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지영의 도움이 필요해요.

“반드시…… 해결해 줄게.”

-……고마워요.

뚝.

지영의 대답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은 사토 레미를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냥, 존재 자체가 잘못됐어.”

사람이 아닌, 나라 전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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