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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434화 (434/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34화

434화. 마지막, 재(25)

정은정 작가의 대본은 직관적이었다.

어렵고 꼬고, 복잡하게 비트는 걸 그리 선호하지 않는 그녀는 자기가 창조한 세계를 매우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딱 보는 순간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면서,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지, 상황에 따른 선택을 통해 매우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재가 그랬고, 선고가 그랬으며, 후가 그랬다.

그렇다면 연은?

재는 목적이 확실했다.

시즌1과 시즌2의 목적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러했다.

시즌1에서의 재는 오직 연을 살리는 것에 중점을 둔다. 그렇기에 연의 목적에 맞춰 움직였다. 이때도 재에게 연은 주군은 아니었다. 그저, 지켜야 할 경호 대상일 뿐이었다. 시즌2는, 족쇄에 불만을 느끼고, 족쇄에 고민하고, 전쟁의 참화에 고뇌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이 또한 직관적이었다.

고심이란 직관이 있었다.

시즌3에서는 자신의 운명을 깨닫고 이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움직인다. 전쟁의 끝. 재가 원하는 것은 그러했다.

선고는 재를 바라보는 직관을 가졌고, 후는 시종일관 제국을 탐한다.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쳐냈다. 제학 선생을 날리려는 것도, 그 외에도 많은 신을 통해 후는 오직 제국만을 탐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렇다면 연은?

여기서 비틀렸다.

직관적인 모습을 좋아하는 정은정 작가는 시즌2에서 시즌3로 넘어가면서 오직 연만 달랐다. 연은 중심을 잡지 못했다. 제국을 되찾겠다는 목표는 아직도 확실하지만, 그 수단에 대해서 연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쟁.

반드시 누군가는 피를 흘리는 것.

샨 강을 두고 벌였던 전투와 재의 죽음 이후 연은 결국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쪽으로 최종 진화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인간적인 고뇌가 있었다. 왜? 그녀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후후, 이런 내가…… 도대체 후와 다른 게 뭐지?”

회의가 끝난 후, 이연의 대사를 들어보면 그랬다. 연은 선고의 죽음에 순간 기뻐했던 자신에게 지독한 혐오감을 느꼈다. 선고는 이족의 모든 전사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강력한 전사였다.

숲과 산, 들판과 평야에서의 저격은 백발백중으로, 마주치는 모든 적의 숨통을 끊는 게 선고였다. 거리만 확실히 주어지면 선고는 적에겐 사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선고는 향후 전투에 있어서 지독하게 중요한 존재였다.

그런 선고가 죽었는데, 자신은 웃었다.

적의 죽음에 웃은 것도 자신이 반쯤 미쳤다는 증거인데, 동료의 죽음에 웃었다. 이건 완전히 미친 거다.

연은 그걸 깨닫고,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변화가 무서운 것이다.

“하하, 아하하.”

괴물이 됐음을 자각한 이후에는 자조적인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이런 혼란스러운 모습을 정은정 작가는 이연에게 요구했고, 이연은 천변만화한 표정 연기를 통해, 감정을 완벽하게 잡았다.

이연은 초반엔 시청자에게 연민을 자아내는 캐릭터였다.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처박히는 캐릭터다. 재와 함께 탈출 과정에서 구르고 굴렀다. 이연은 리얼리티를 위해 아예 메이크업을 받지도 않았다. 흙먼지를 전부 뒤집어썼다. 여배우에게 외면의 아름다움이란 아주 강력한 무기다.

아니, 여배우가 아니더라도 배우 그 자체, 그리고 나아가 인간 전체에게 아름다움이란 더없이 강력한 무기다.

그런데 그녀는 시즌1, 아직 성공이 확실치도 않은 작품을 위해 아름다움을 포기했다. 이연의 생얼은 역시 상당하다. 하지만 메이크업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차이는 당연히 엄청났다. 메이크업 기술의 발달로 솔직히 한 듯 만 듯, 그렇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사실 이런 선택은 영화에서는 종종 나왔다. 하지만 화면빨이 지극히 중요한 드라마에서는 아예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런데 노메이크업? 그녀는 아주 강력한 무기 하나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 역으로 시청자는 그런 이연의 결정을 아주 적극 지지했다.

상황에 딱 맞게 자신을 내려놓는 모습에 이연은 역시 이연이다! 하는 칭송도 뒤따랐다. 그렇게 연민을 바탕으로 한 지지를 받았던 이연은, 시즌2에서 점점 변했다. 이때도 이미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보여줬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재를 말도 안 되는 작전에 내보내는 상황이었다. 그런 몇 번의 이야기 끝에 연은 연민의 대상에서 벗어났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캐릭터가 되었다.

흔히 발암 캐릭터라고 하는데, 연이 그 포지션을 맡은 것이다.

동시에 후라는 캐릭터 정도까진 아니지만, 악역 포지션에 발을 살짝 담그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게 시즌2 마지막에 재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아예 건너가 버렸다.

내부의 적, 연의 포지션은 그렇게 변경된 것이다.

하지만 연은 그걸 철저하게 감췄다. 자신이 그런 기색을 드러내면, 이족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욕을 먹는다.

이번 신은 연이 아예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장면이다.

“그래, 어차피…… 나는 괴물이 된 거야……. 후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후후, 후후후. 하하하!”

이연이 대사를 통해 괴물이 된 캐릭터 성을 강조했다. 모두가 숨죽여서 그런 이연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복잡한 감정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저 연기를 보면서, 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연의 연기는 역시 진짜였다.

도무지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지영은 저런 게 진짜 연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과 예술의 총집합.’

선동일 선배님이 얘기했던 게 바로 저거다.

선동일 선배님은 시간이 나면 배우들과 시간을 함께하며 자기의 노하우와 스킬을 전수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가르침을 받으면서, 어느 배우가 좋은 연기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는데, 선동일은 주저 없이 이렇게 답했다.

스킬을 배워라.

예술을 할 수 있다면, 예술을 해라.

그런 대답을 듣고 그럼 둘 중 뭐가 더 좋냐고 묻자, 선동일은 다시 조금의 고민도 없이 답했다.

총집합이 좋다.

예술적인 기술을 펼쳐라.

기술을 바탕으로 예술을 행해라.

그 두 가지가 합쳐지면, 그럼 누구나 연기 장인이라 불릴 것이다.

그게 선동일이 한 대답이었다.

그러면서 지영을 보더니 이런 얘기를 했다.

-여기 지영이가 그 둘을 같이 하고 있는겨. 얘는 제대로 못 배웠으니까 자신만의 예술을 하는 건데, 이제는 그래도 짬이 차서 예술에 기술에 더해진 상황이지. 물론 아직 많이 부족하긴 햐. 그런데 이대로 꾸준히 성장하면, 진짜 제대로 된 배우가 될겨.

그런 선동일의 말에 지영은 좀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숙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연기 기술자에게 인정받아서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리고 그 말 뒤에 다른 배우가 다시 물었다.

그럼 여기서 누가 선배님이 말하는 궁극에 제일 가까워요?

하는 질문엔. 주저 없이.

-뭘 물어? 이연이지. 갸가 얼굴만 이쁜 것 같지? 아녀, 갸 독한 애여. 연기 스킬은 이미 내 턱아래까지 온 안데, 나한텐 없는 예술성까지 충분히 갖춘 애여. 극은 지영이 쟈가 끌고 가지만, 억지로 끌고 가는겨. 그럼 삐그덕 거리는 부분은 어찌냐? 누가 잡거나 밀어줘야겄지? 그게 연이여. 연이 연기가 너거들한테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겨.

이렇게 대답하며, 선동일은 씩 웃었다.

그러곤 주변을 둘러보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갸는 연기 외적으로도 전부 챙기잖어. NG 나서 분위기 무거워지면 괜히 깨발랄 하게 굴면서 긴장 풀어주고. 너거들은 몰랐쟈? 갸는 그런 애여. 극에서 주인공이 지영이 쟈라면, 현장에서 주인공은 연이 갸여.

이곳저곳이 섞인 사투리로 한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랬다.

이연은 현장 분위기를 조절하느라 매일매일 피곤했다. 자기 신이 없을 때도 나와서 챙기는 게 이연이었다.

작품에 대한 고집.

작품에 대한 집착.

작품에 대한 애정.

이 모든 것을 따졌을 때 이연만큼 생각하는 배우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영은 이연의 저 연기를 보며 소름이 돋았다. 예술과 기술의 총집합이 뭔지도 제대로 봤다.

대단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기가, 마음을 자극하는 게 뭔지도 깨달았다. 이 자체가 지영에겐 생각보다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컷!

홍진아 감독의 사인이 나오는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친 연기를 보여준 이연에게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지영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대단한 연기였다. 이연이 가진 복잡한 전부를 모조리 꺼내 보일 줄은 지영도 예상하지 못했다.

게다가, 원테이크였다.

지영이라고 NG가 없는 건 절대 아니었다. 지영도 중요한 신을 촬영할 때는 NG를 냈다. 아까 찍었던 신만 해도 NG를 세 번이나 냈다. 첫 번째는 과해서, 두 번째는 부족해서, 세 번째는 어중간해서.

세 번의 NG 끝에 결국엔 홍진아 감독이 나서서 디렉팅을 해줬고, 그걸 받아 제대로 감정을 잡을 수 있었다.

이렇듯 중요한 신은 지영도 부족해서 NG를 낼 때가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이연은 이 신을 한 방에 끝냈다. 지켜보는 이들에게서, 진심으로 가슴에서 우러나온 박수갈채를 받기까지 했다. 지영이 겪은 배우 중에 가장 연기자다웠던 선동일과는 결이 다른 연기였다.

보고 배울 게 정말 많은, 그런 연기였다.

지영은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는 이연을 뒤로하고 대기실로 돌아왔다.

“지영아, 숙소로…….”

쿵.

따라 들어왔던 임은진이 지영의 표정을 보고는 그대로 문을 닫고 다시 나갔다. 지영은 대본이나 소설은 이미 숙지한 상태였다. 하지만 다시 펼쳐봤다. 내일은 신이 없고, 모레 신이 있는데도 지금 다시 보고 싶었다.

‘신기하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신기하게 생각됐다.

잘하고 싶은 마음. 나만 잘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나도 잘해야지, 하는 그런 마음은 정말 오랜만에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을 처음 느끼는 건 아니었다.

지영은 무려, 황금세대의 일원이다. 같이 황금세대라 불리는 다른 친구들도 전부 천재였는데, 이 친구들과 함께 훈련하면 저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농땡이를 부려도 어느 순간 격차가 벌어진다. 그렇게 벌어진 격차를 다시 따라잡으려면 진짜 이 악물고 쫓아가야 했다.

왜?

앞서간다고 멈추거나 기다려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친구들의 노력보다 더 크게 고생고생해야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황금세대 전원은 방송 활동을 가끔 한다. 지영은 주기적으로 하는 시기가 정해져 있었고, 이는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진만 한 달에 두세 번 꾸준히 활동한다. 이때 쉬는 시간만큼, 당연히 복귀해서 더 노력해야 했다.

지영만 해도 작품이 끝나면 거의 사회와 연을 끊은 것처럼 훈련에만 몰두한다.

그런 노력의 바탕에는 말했듯이, 나도 잘해야지. 이런 마음이 있었다. 지영은 그걸 지금 느끼고 있었다. 지영은 이연의 연기를 보면서, 그녀가 자기가 드라마를 찍는 동안 저 멀리 앞서가기 시작한 친구들을 보는 것 같았다.

연기력의 격차를 느낀 것이다.

심지어.

‘나는 연기에 집중했어. 허투루 대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이렇게 느껴진다는 건…….’

애초에 격차가 났다는 뜻이다.

선동일은 그걸 정확히 알아보고 있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이연이나 심수정의 연기를 보고 불이 붙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각고의 노력을 했고, 좀 따라잡은 줄 알았다. 하지만 따라잡기는커녕, 오히려 멀어진 느낌이다.

그럼 이연이 그동안 대충 여기를 했을까?

‘그건 아닐 거야. 그랬으면 정은정 작가님이나 홍진아 감독님이 금방 눈치챘겠지.’

그런데 아무런 말도 없던 걸 보면, 이연은 절대로 대충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는 건 이번 신을 위해 제대로 날을 벼렸다는 뜻이다. 사실 신 자체를 보면, 크게 두각이 드러나는 신은 아니었다. 이런 신은 몇 번이나 있었다.

연은 괴물이 되었지만, 그래도 인간의 고뇌가 있긴 했다.

그리고 이번 신은 인간적인 연이 잡고 있던 마지막 고삐가 풀린다는 느낌이다. 물론 중요한 신이긴 했다. 하지만 이걸, 이렇게 힘을 줄 줄은 몰랐다. 이거 수치화하면, 70 정도의 신을 이연이 자신의 연기력으로 강제로 100으로 만들어버렸다.

이게 과했으면 폐기지만, 조금도 과한 느낌이 없었다. 오롯이 연기로 신 자체의 느낌을 바꿔 버렸다.

연기력.

흔히 말하는 것 하나로.

그녀는 오늘의 주인공이 됐다.

축하받을 일이고, 축하해 줄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연기력으로 뒤지고 싶지 않다는 고집과 각오가 다시금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 익숙해져서 나도 타성에 젖은 거야.’

신을 무난하게 소화하니까, 그걸로 만족했던 거다. 그래서 이연의 혼신의 연기 한 방이 그렇게 크게 다가온 거고. 지영은 반성했다. 이연에게 라이벌 의식을 느껴서는 곤란하다. 하지만 그녀를 목표로 삼는 건, 문제 될 게 없었다.

‘적어도 이번 작품에서 누나를 따라잡거나, 뛰어넘는다.’

이 정도쯤은 당연히, 괜찮고말고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연습.

오로지 연습이다.

연습만이, 노력만이 답이라는 걸 지영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알기에 지영은 소설과 대본을 천착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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