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33화
433화. 마지막, 재(24)
재는 의식을 잃은 선고를 안아 들고 곧장 동굴로 돌아왔다. 발자국이 남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동굴로 돌아온 재는 선고를 위해 불을 피웠다. 이런 상태에서는 그냥 자는 것도 위험하다. 그런데 선고는 피까지 흘렸다.
출혈 상태에 이어 체온까지 내려가면, 십 중 아홉은 죽는다.
그래서 연기가 빠져나가는 것은 개의치 않기로 했다. 재는 일단 급히 출혈을 막아주는 연고부터 발라주고 곧장 불을 피웠다. 그리고 동굴에 굴러다니는 돌을 모닥불 아래 깔고, 땅을 팠다. 얼어붙은 땅이지만 불에 달군 돌을 넣는 정도면 되는 거라 깊게 파지 않아도 되었다.
넓고, 얇게 땅을 판 뒤 열을 막아줄 가죽을 깔았다. 그리고 돌을 깔고, 다시 가죽을 깔았다. 그리고 그 위에 다시 짚을 깔았다. 짚은 따로 챙겨 다니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나오면서 적당히 챙겼는데, 이럴 때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재는 그렇게 준비를 끝낸 뒤 선고를 그 위에 눕혔다.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를 다시 살폈다.
길쭉하게 갈린 상처. 거죽은 물론 지방과 근육의 단면까지 보일 정도로 깊게 파였다. 하지만 이 정도면 천운이었다. 조금만 더 깊었으면 아예 전부 갈라져 내부 장기가 흘렀을 수도 있었다.
‘다행이야. 뼈가 걸린 것 같지도 않으니.’
물론 당분간은 충분히 요양해야 하는 부상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었으면 선고를 이렇게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재는 상처 부위를 잘 살핀 후, 바늘과 실, 그리고 독한 화주를 꺼냈다. 화주로 바늘을 소독하고, 곧장 옆구리를 당겨 꿰매기 시작했다. 바늘이 살을 파고들자 움찔 떠는 선고였지만, 기력이 너무 쇠해 깨어나지 않았다. 재는 상처를 전부 꿰매고, 약을 발라준 뒤 다른 상처를 살폈다.
이 때문에 가슴은 물론, 바지도 벗겨야 했지만 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연인이다.
관계는 둘째 치고, 안 보이는 깊은 상처가 있으면 치료하는 게 맞았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리 옆구리 상처를 치료했다고 해도, 높은 확률로 오늘 새벽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자잘한 상처를 제외하곤 큰 부상은 없었다.
아, 하나 있긴 했다.
놈에게 차였을 때 쇄골을 맞았는지, 벌써 멍이 깊게 들어 있었다. 가만히 만지고, 살짝 힘을 주어 누르자 느낌이 반사적으로 움찔 떠는 선고.
‘살짝 금이 간 정도인가?’
골절이긴 하지만 그래도 완전히 똑 부러진 게 아니니 큰 문제는 없었다. 상체를 쓰지 않고 조금만 요양하면, 잘 붙을 것이다. 거기에 학미가 챙겨준 약을 발라주면 회복은 더 빨라질 것이고.
재는 그렇게 급한 치료를 끝내고, 약을 달였다. 원기를 회복시켜 주는 약이다. 혈액을 생성시켜주고, 맑게 해주는 학미의 특제 약재다. 이걸 주면서 학미가 그랬다.
‘돈 주고도 구하지 못할 물건이라고 했지.’
약초에 관심이 많고, 천부적인 재능마저 있는 학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게 금창약과 바로 이 원기 회복 약재였다. 그걸 학미는 봇짐에 잔뜩 넣어줬다. 부피도 크지 않고, 학미는 고맙게도 제조법까지 알려줬다. 그래도 사용할 때는 심사숙고하라고 했다. 효과 좋다고 막 쓰면 나중에 분명히 아쉬울 거라고.
하지만 재는 다 쓰면 다시 만들면 되니까, 쓰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리고 선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인인 선고다.
한 개밖에 없고, 자기와 선고 두 사람이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재는 주저 없이 그녀에게 쓸 것이다.
그게 지금, 눈앞에 의식을 잃고 쓰러진 선고에 대한 죄를 갚는 일이었다.
선고는 탕약을 제대로 마시지도 못했다. 그래서 기도가 막히지 않게 조절해서 직접 입으로 선고에게 약을 먹였다. 적지 않은 양이라 몇 번에 나눠서 겨우 먹였다. 다행히 뱉어내거나, 기도에 막히지 않았다.
그렇게 처치를 모두 끝낸 재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잠든 선고를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선고는 이족의 다른 여인들처럼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지는 않았었다. 긴 머리카락은 전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깨보다 조금 더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생활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머리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아예 가위나 단도로 대충 막 잘라서, 전투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못하게 짧게 잘랐다.
“후우…….”
그에 재는 한숨이 나왔다.
제국이나 이족이나, 긴 머리카락은 여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조건 중 하나였다. 일반 평민 여인들조차 다른 건 몰라도 피부와 머리카락만큼은 어떻게든 곱게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유는 그게 성혼의 첫 조건이기 때문이었다. 비단처럼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아이도 매끄럽게 잘 난다는 속설이 있고, 이는 수천 년간 이어져왔다. 많은 학사와 약사가 그건 낭설이라고 주장했지만, 수천 년이나 이어져 온 민간 설화는 깨지지 않았다.
그걸 선고도 알고 있었다.
절벽에 떨어지기 전, 함께 밥을 먹거나 같이 시간을 보낼 때, 선고는 자신의 짧은 머리카락을 가끔 부끄러워했다. 그리고 재에게 미안해했다. 전쟁이 끝나면 머리카락을 기를 거라고 하기도 했다.
‘부끄러워하며 분명 그랬었지. 매끄럽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을 자기도 가지고 싶다고.’
그 말을 왜 부끄러워하냐면, 그 말 자체가 재의 아이를 낳고 싶단 말이기 때문이었다. 그랬었던 선고의 머리카락은 지금, 쥐가 파먹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재는 단숨에 왜 이렇게 머리를 잘랐는지도 알아차렸다.
이족의 풍습 중, 복수를 천명할 때 이렇게 머리카락을 자른다고 들었다. 이것도 선고한테 들은 얘기였다.
그러니 선고는, 자신의 복수를 이족의 설화에 존재하는 신에게 머리카락을 바친 거다. 재물을 바치고, 자기의 복수를 하겠다고 목숨을 건 것이다. 이 의식을 치른 이족의 전사는 둘 중 하나다.
복수를 완성하든가.
아니면.
복수의 대상에게 죽든가.
오직, 이 두 가지만 존재한다.
그러니 선고는 의식을 치른 순간부터 오로지 두 가지의 미래만 남은 것이다. 후를 죽이든가.
‘후에게 죽든가.’
재는 이를 꽉 깨물었다.
주먹에도 힘이 들어가서, 실핏줄이 볼록 뛰어나왔다. 후에 대한 분노, 자기 자신이 얼마나 바보처럼 굴었는지에 대한 깨달음, 이런 것들이 마음을 너무 심란하게 만들었다. 학소양이 가르친 부동심이, 어떤 상황에서도 깨져서는 안 되는 부동심이 너무나 형편없이 쉽게 깨졌다.
“미안, 미안하다…….”
재는 입술을 깨물며 선고에게 사죄했다.
선고가 버텨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재활을 시작하기 전엔, 어차피 돌아가 봐야 그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건 재 스스로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활을 완벽하게 끝냈을 때, 고심했다. 풀린 족쇄, 그리고 다시 채워진 족쇄. 새롭게 생긴 족쇄는 선고였다. 그걸 깨달았을 때, 재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연이란 족쇄보다, 선고란 족쇄가 더 좋았다.
그런 족쇄의 존재를 느꼈기에 재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러나 바로 돌아갈 순 없었다. 재활이 끝났지만, 그래 봐야 절벽에서 떨어진 자신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다. 그 정도로는 어차피 똑같은 결말이 기다릴 거라 재는 생각했고, 학소양의 전부를 전수받기 위해 시간을 끌었다.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는, 선고가 잘 버텨줄 것이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재는 지금 선고를 보며 깨달았다.
자신의 그 다짐이, 그 확신이 틀렸다는 것을 말이다. 틀려도 너무 거하게 틀렸다. 조금도 맞는 게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틀렸다.
선고는 버텨줬다.
그러나 선고는 자신을 화르르 불태우며, 버티고 있었다. 심지어 옆구리에 상처를 입고도, 적을 죽이기 위해 교전을 이어갔다.
이건 정말 무식하고, 무지한 짓이었다.
그러나 재는 선고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행동의 원인이,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는 선고에게 정말 면목이 없었다.
너무 미안하고, 정말 너무나 죄송해서, 연인의 마음을 자기가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에 대한 자책감이 너무 들어서.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저 미안하고, 죄송하고, 사죄하는 것밖에 없다는 현실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으음…….”
움찔.
선고의 입에서 흘러나온 신음에 깜짝 놀라 그녀를 살폈다. 그녀는 미동이 없었다. 잠꼬대 같은 신음이었다.
“하아…….”
그에 안도와 안타까움이 섞인 한숨을 저도 모르게 내뱉는 순간.
“재…….”
“…….”
애타는, 애끓는 그 소리에, 재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며 고개를 푹 숙였다.
* * *
컷!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재의. 아니, 지영의 귀로 홍진아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에 지영은 꼭 잡고 있던 심수정의 손을 놓고 고개를 세웠다. 심수정도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신이 끝났다. 이 신은 선고가 재와 재회하며 오열하는 신 이후 연결되는 신이다. 서로의 감정이 어땠는지를, 시청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런 신이었다. 이 신을 통해, 얘기는 중반으로 넘어간다.
그렇기에 중요한 신이었다.
“와……. 지영이 너, 진짜. 와아…….”
몸을 세운 심수정이 지영을 보며 감탄을 연발했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지영은 왜요? 하고 반사적으로 물었다.
“나 눈 감고 있었는데, 다 느껴졌어, 진짜. 막, 네가 후회하고 그러는 게 확 오더라!”
“아, 그랬어요? 다행이네요. 힘 좀 줬는데. 하하.”
지영이 웃으면서 너스레를 떨자 입을 가리고 웃은 심수정은 매니저가 가져온 옷을 얼른 챙겨 입고 신 확인을 위해 홍수정 감독에게 달려갔다. 지영도 가서 신을 확인했다.
“음, 잘 나왔네요. 근데 이쪽 배경이 좀 어두우니까, 몇 신만 추가할까 하는데 괜찮죠?”
“넵! 그럼요!”
심수정의 힘찬 대답에 지영도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의 요청에 따라 신을 몇 개 추가해서 찍고, 동굴 신이 마무리됐다. 실제 장소는 동굴이 아니었다. 동그랗게 곡선 형태의 벽으로 만든 세트장이었다. 모든 동굴 신은 이런 세트장에서 찍는다. 여기서 찍은 다음, 편집에서 CG를 입혀 완전한 동굴로 만드는 것이다.
진짜 동굴에서 찍으면 현장감이 죽이긴 하겠지만, 반대로 배우나 스태프는 죽어 나간다. 그래서 크기가 각기 다른 동굴 형태의 세트장을 다섯 개나 만들어서 장면에 따라 돌아가며 쓰고 있었다.
오늘은 이게 지영의 마지막 신이었다.
하지만 전체 일정이 끝난 건 아니었다. 다른 세트장으로 옮겨 이연의 신과 강서훈의 신이 연속해서 있었다. 서로 다른 세트장이다. 이연이 찍을 세트장은 나무를 세워 만든 막사고, 강서훈이 찍을 세트장은 화려하게 치장된 제국의 구중궁궐이다.
극명하게 갈리는 배경이, 전황 자체를 설명해 준다.
한쪽은 열악하고, 한쪽은 따스한.
이런 배경 자체는 극의 흐름을 알려주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는 미술팀이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등장인물의 위치, 소품의 배치, 조명 등으로 화면에 잡히는 그림 자체를 매우 풍성하게 해준다. 반대의 상황이 필요하면 아주 삭막하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는 건데, 작품이 만약 사극에 가깝다?
그럼 미술팀은 반쯤 미친다.
왜?
고증 때문이었다.
현대 문물은 당연히 들어가면 안 되는 거고, 건물 양식은 기본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복장이다.
정통 사극은 참고할 자료는 차고 넘친다.
이전의 작품도 있으니까 말이다. 한국 사극은 고구려부터 시작해 고려, 신라와 백제, 조선으로 넘어가 초중기, 말기, 대한제국으로 불릴 때까지 거의 모든 작품이 존재한다. 그걸 보면 바로 각이 선다.
하지만 시대만 따온 작품은 이게 애매하다.
일단 시대상은 비슷해도 실제 역사가 아니니, 굳이 고증을 따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막 만들어서 배치하고 만들면, 난리가 난다.
동양풍이어야 하지만, 철저하게 일본과 중국의 양식은 피해야 한다.
차라리 이슬람 양식이 들어가면 들어갔지, 이 두 나라의 양식이 들어가는 순간 네티즌은 폭도로 변한다.
“어, 이거 애매한데? 이거 송 초기 양식 아닌가?”
“참고했는데, 아닐걸요?”
“아니야, 맞아. 송 초기에 장강 이남 쪽 지주들이 이런 옷을 입었다는 썰이 있어.”
“썰이요? 그럼 팩트는 아니잖아요?”
“썰이 있다는 것 자체가 논란거리가 된다는 증거란다. 이 애송아. 다른 거 가져와!”
“……네.”
미술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연을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휴, 미안해요.”
“어머, 미안이라니요? 이런 예쁜 옷 언제 이렇게 계속 입어보겠어요? 후후, 저 지금 즐거우니까 걱정하지 말고 팍팍 가져오세요. 오늘 내가 다 입어줄라니까. 성철아, 예쁘게 다 찍어라? 알았지? 나중에 방영 시작하면 SNS에 폭탄 드랍하게!”
넵!
잠시 뒤 이연은 미술팀이 다시 가져온 옷을 입고 나왔다.
누가 봐도 한국식이다. 한복에 아주 가깝게 만들었는데, 지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안 어울리는 게 아니라, 극 중 연과 어울리지 않았다.
시즌3의 연은 독한 느낌이 난다.
그런데 흰색 바탕의 화사한 꽃무늬가 들어간 의복은 그런 연의 느낌과는 너무 정반대였다.
“이것도 패스. 일단 다 가져와라.”
“……네.”
다시 의상팀이 옷을 가지러 갔다.
이연은 불편할 법도 한데, 촬영 준비가 되길 기다리면서 의상 피팅을 이어갔다. 그리고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차례 이어진 피팅 끝에, 아무런 특색도 없는 새까만 의상으로 결정된다. 마치 상복을 연상시키는 복장인데, 그걸 입으니 연의 독하고 어두운 느낌이 물씬 났다.
피팅이 끝나고 20분 뒤, 촬영 준비도 끝났다.
세트장의 가장 상석에 앉아 감정을 잡는 이연.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감정을 완벽하게 잡고, 눈을 떴을 땐 좀 전까지 발랄하게 피팅하던 그녀가 아니었다.
레디, 액션.
“……선고가 행방불명이라고요?”
“……네. 며칠째 연락이 안 닿고 있습니다.”
“교전이 있었나요?”
“마지막 전투가 능선에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절벽으로 떨어진 건지…… 흔적이 거기서 끊겼습니다.”
“그래요…… 후우. 재에 이어 선고마저…….”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고개를 숙이는 연.
누가 봐도 선고의 죽음에 슬퍼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얼굴을 가린 손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비틀리는 입술.
그 모습에 연의 지금 감정이 잠시간 보였다.
연은, 선고의 죽음을 반겼다.
그리고 다시 처연하게 돌아오는 표정. 이내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방울방울 맺혀, 또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연.
그녀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니, 이미 괴물이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