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432화 (432/538)

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32화

432화. 마지막, 재(23)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

촬영장 사람들! 지영이 할리우드 진출한대요! 몸값이 무려 천억이래요! 이런 소문이 아주, 아주…… 파다하게 났다. 그래서 마주치는 사람마다 웃으며 축하해요! 이렇게 인사하는데 이게 일일이 다 설명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하하, 웃고 마는 지영이었다.

촬영장은 이젠 뭐, 지영이 무신 척위준을 찍는 게 당연하다고, 기정사실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가 여론을 몰아갔다.

당연히…… 이연이었다.

내 동생이! 무려 천억에! 무신 척위준을 찍는다! 이러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걸 일일이 바로잡기도 힘들어서, 지영은 그냥 포기했다. 이연은 그렇게 정말 행복해 보였다. 같은 배우라서 시기와 질투가 있을 법도 한데, 그녀는 정말 지영을 자랑스러워하는 기색밖에 없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저렇게, 너무 좋아하니까. 또한,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잊히지 않을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대신, 지영은 다시 작품에 몰두했다.

현장 분위기가 마치 자신을 ‘추앙’하는 모양새라 마음이 붕 뜰 것 같았지만, 지영은 중심을 잘 잡았다.

중심을 잘 잡지 않으면 붕 떠서, 열기구처럼 날아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지영도 사람의 칭찬에는 약했다. 그래서 중심이 흩어지지 않게, 소설과 대본을 파고들었다.

지영이 그렇게 작품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지영을 향한 축하의 인사도 자연스럽게 멈췄다. 그리고 덩달아 배우들도 지영처럼 작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진정세 속에 준비가 끝났고, 그 중심에 두 배우가 자리 잡았다.

바로 심수정과 지영이었다.

오늘은 재의 시점에서 선고를 만나는 날이었다. 관영에게 제선을 맡기고, 재는 정찰에 나선다. 어디에 초소가 있고, 어느 초소가 제국의 것이고, 어느 초소가 이족의 것인지를 확인하는 작업을 가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익숙한 느낌을 진하게 풍기는 한 저격수를 확인하고, 뒤를 쫓는다. 그리고 그녀가 선고임을 확인하고, 개입한다.

오늘 찍을 신은 이 장면이었다.

감정이 요동치는 신은 아니지만, 재의 입장에서 선고를 만났을 때의 감정이 잘 드러나야 하는 신이었다. 그래서 심수정은 현장에서 지영이 감정을 잡기 수월하게 대기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비슷한 감정선을 유지해 줬다.

더벅머리 심수정의 모습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이 작품에 진심인지가 잘 보여서 지영은 저도 모르게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지영이 감정을 잡고 눈을 뜨자, 기가 막히게 그 모습을 캐치한 홍진아 감독이 액션 사인을 내렸다.

액션.

그 소리에 지영은 다시금 재가 되었다.

* * *

샨 강.

이족에게 샨 강은 삼도천이다.

죽어서 모두 저 강을 건너는 저울추에 오르고, 이생에서의 행실에 따라 강을 건너 나아갈지, 아니면 강에 가라앉을지가 결정된다고 이족은 믿고 있었다. 삼도천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지만, 결은 같다.

그런 샨 강은 요즘 죽음이 넘쳐난다.

하루에도 수십의 목숨이 강 건너 이족의 대지에서 스러져 강으로 날아온다.

‘영의 무게를 다는 이도 과로로 쓰러졌겠어.’

스윽, 한겨울이다.

그런데도 이족의 숲, 산맥이 이어지는 경계선엔 시체 썩는 냄새가 났다. 아주 미묘하지만, 재는 이런 죽음의 냄새를 질리도록 맡아왔다. 그래서 얼지 않은 땅에 누운 시체가 아주 조금씩 썩는 냄새를 숲에 진입하자마자 맡을 수 있었다.

재는 굳이 그 시체의 정체를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죽었다.

그건 곧, 정체를 파악한다고 해서, 바뀔 게 없다는 뜻이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정말로 저승이 있다면.

‘그곳에서 죄의 경중에 따라, 선행의 경중에 따라 심판이 나뉘겠지.’

정말 그렇다면 말이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면, 자신은 절대로 좋은 곳으로는 가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재는 앞으로 나아갔다. 학소양에게 걷는 법도 배웠는데, 이번에 그 걷는 법을 연습했다.

아무리 신 아래 충격을 흡수하는 것들을 붙여도, 인간인 이상 걷다 보면 돌이 밟히는 소리든, 나뭇가지를 밟는 소리든 나게 마련이다. 하지만 학소양은 그런 게 없었다. 뒤꿈치 바깥부터 원을 그리며 내딛는데, 기이하게도 그런 방식으로 걸음걸이의 소음을 최대한 죽였다. 이 걸음 법 때문에 재는 한동안 발목 힘을 기르는 훈련만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배운 걸음 법은 과연 효과가 있었다. 뭐, 훈련할 때도 충분히 효과를 보긴 했다. 하지만 실전에 가까운 지금 써먹기 시작하자 학소양이란 기인을 만난 게 얼마나 자신에게 천운이었던 건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소리도 없이, 숲을 전진하는 재는 첫 번째 초소를 발견했다. 초소라고 오두막처럼 지어져 있는 게 아니었다. 나무 위에 지어진 것도 있었다. 재가 찾은 게 딱 그랬다. 전방의 시선에서 이상하게 나뭇가지가 흔들리지 않는 곳을 발견했다.

분명 주변은 다 길게 펄럭이는데, 그쪽만 나뭇가지가 펄럭이다가 뭔가에 막혔다. 거리가 멀어서 곧장 파악하지 못했고,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위장막을 씌운 초소라는 걸 확인했다. 재는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이 숲의 전체 지도는 이미 머릿속에 있다.

강을 두고 대치했을 때, 이곳에서 난전을 염두에 두고 숲 전체를 돌아다니며 머릿속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재는 그 지도에, 초소 하나를 쿡 박아 넣었다.

하지만 당장 초소를 치진 않았다. 만약 제국 척후병이 저 안에 있다면…….

‘분명 정해진 시각에 어떤 방식으로든 교신할 거야.’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라면, 유기적인 협조와 혹시 모를 교전을 알리기 위해 부대마다 저마다의 교신 방법을 정해둔다. 이건 백적파도 마찬가지였다. 숲에서 적과 대치하면 반드시 정해진 시각에 소리를 통해 무사한지, 아니면 교전이 벌어졌는지를 전달한다.

그러니 적이 저 안에 있다면, 재가 죽였을 때 정해진 시각에 동료와 교신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 주변에 있던 다른 적은 적이 침입했음을 확인한다. 그럼 재는 이 숲에서 적에게 포위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게 겁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재가 교전을 시작할 경우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었다.

‘괜히 풀을 건드려 뱀을 놀라게 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 기억만 해두고, 물러난다.

오늘 목적은 초소 위치의 파악이다. 내일도 같고, 모레도 같을 예정이었다. 숲에 존재하는 모든 초소를 확인하고, 나중에 타격할 때 한 번에 덮치거나, 아니면 관영과 순회를 하며 정리하는 게 목적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혹은 제선과 둘이었으면 이렇게 움직이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타격해서 이족의 활동 영역을 넓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관영이 있으니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관영과 함께라면 여기에 제국 척후병 전체가 있다고 해도 상대할 자신이 있었다. 진일보한 자신의 무력과 살기의 발산과 갈무리가 지극히 자연스러웠을 정도로 성장한 관영이면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재는 초소를 지나쳤다.

그렇게 이동한 재가 숲에서 발견한 초소는 총 여섯 개였다. 넓은 초소에 전부 여섯 개. 적은 숫자 같지만, 적지 않은 숫자다. 왜? 이곳은 후방이었다. 제국이 초소전을 펼치면서 후방에 지은 초소다.

그런 이 숲을 지나 산맥으로 들어서고, 산 능선과 그 산맥 전체, 그 아래 평야에 대체 얼마나 많은 초소가 있을지를 생각하면, 후방에 여섯 개의 의미는 결코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런 재의 생각은 틀렸다.

재는 숲을 벗어나 산맥으로 진입했다.

거친 눈보라가 치기 시작한 산맥에서, 재는 거의 초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이것밖에 없다고?’

고작 세 개다.

최후방인 숲에 여섯 개였는데,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능선에 고작 세 개다. 그것도 일자로 딱 세 개만 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오면서 찾은 절벽 능선의 옆에 난 동굴로 들어온 재는 챙겨 온 육포로 끼니를 때우고, 생각에 잠겼다.

‘후방에 여섯 개, 능선에 세 개. 총 아홉 개야.’

영토의 넓이를 생각하면, 생각보다 적다. 재는 적어도 능선은 밀리면 안 되는 구간이라 좀 더 있을지 알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적었다. 왜? 초소의 개수, 위치에 대한 건 이미 후도 알고 있을 텐데, 후가 이걸 용인했다? 의문이 들었다.

‘설마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생각인 건가?’

초소를 많이 세우면, 당연히 방어하기 위한 병력이 많이 들어간다. 다 막을 필요성은 없어도, 전선이 뚫려서는 안 된다. 왜? 뚫고 들어간 다음, 역으로 후방을 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포위는 어떻게 생각해도 무조건 피해야 하는 상황이다.

앞뒤로 치고 들어오면, 당연히 손발이 어지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뒤에도 적이 있다는 것은, 퇴각도 용이하지 않을 거라는 심리적 압박을 선사한다. 그런 압박을 안은 채 작전을 펼치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 자체를 막기 위해, 지켜야 하는 전선 자체를 줄였다?

‘일리가 있긴 해.’

게다가 초소전은 장기로 이어졌다.

재가 알기로도 벌써 1년 반 이상 이 지겨운 양상이 이어졌다. 그럼 대체 여기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떨어졌을까? 이렇게 전선이 교착 상태인 이유는, 이족의 전사들이 이런 지형에서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었다.

타고난 사냥꾼들.

‘아마 여기에 병력을 상당히 투입했을 거야.’

제국 척후대나 북부 척후대가 대단하다고는 알고 있긴 하지만, 이족의 전사들은 이런 지형에서는 가히 사신이다. 재 본인도 이런 숲에서는 웬만해선 이족 전사들과 붙고 싶지 않았다. 몇 명은 상대할 수 있어도, 숲 전체에 이족의 전사가 적으로 있다?

그건 곧 재의 죽음을 의미했다.

아주 작은 흔적도 놓치지 않는 그들은 천천히 재를 사냥할 것이다. 이걸 생각하면 제국군은 반드시 여기서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래서 병력을 집중한 거야.’

이족의 전사들에게 사냥당하지 않게.

뭉쳐 있으면 표적이 많아졌다고 생각하겠지만, 기습받았을 시 대대적인 대응이 가능하다.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추격에 나서면 이족 전사들도 버티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병력을 모았다고 재는 생각하기로 했다.

탁, 탁탁.

그때, 절벽 아래 난 동굴 위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귀가 밝은 재는 소리를 듣는 즉시 반응했다.

꾸욱, 꾸욱.

눈 밟히는 소리다. 동굴 바로 위에 능선으로 이어지는 땅이 있다. 그 진동이 신기할 정도로 잘 느껴졌다.

‘적?’

밖은 어둠이었다.

그런데 이 어둠에 움직이는 적이 있다고? 눈보라를 뚫고? 재는 만약 그런 상황이라면, 그놈은 분명 중요한 뭔가를 가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정보든, 전서든, 구두로 전해지는 명령이든 뭐든지. 분명 뭔가 중요할 게 분명해.’

초소를 파악하는 게 중점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그리고 그놈이 가지고 있을 뭔가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결국 재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중무장한 채, 스승님에게 받은 칼을 챙겨 동굴을 나섰다. 절벽을 타고 위로 올라간 재는 발자국을 찾았고, 이미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 적을 쫓기 시작했다.

‘발자국이 작아. 발을 일부로 전족한다는 북부 놈들인가?’

발이 바닥에 닿는 면적을 최대한 줄여서 소리도 죽인다는 제국 북부의 척후병 중에 전족하는 놈들이 있다고 들었다. 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뒤를 쫓았고, 저 끝에 희미한 인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람은 다행히 역풍이었다.

재의 추적이 적에게 들키지 않는 최고의 조건이었다.

조금 더 가까워진 재는 적의 신형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북부 척후대 중 일부가 전족하는 건 알아도, 저렇게 왜소하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사들은 잘 먹어야 한다. 대충 적당히 먹어서는 절대로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니 전사들은 제국에서도 가장 잘 먹는다.

그렇게 잘 먹으면, 남자인 이상 저렇게까지 왜소할 수는 없었다.

‘여성이야.’

그런데 여성이 이런 눈보라를 뚫고, 능선을 탄다?

재는 그런 의문을 다시 삼켜가며 여성을 쫓았다. 그러다 여성이 바짝 엎드리는 걸 확인했고, 재도 같이 엎드렸다. 그 날렵한 동작에 재는 여성이 훈련받은 전사라는 걸 깨달았다. 거기다가 언제든 튀어 나갈 준비를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전사였다. 그 전사가 고개를 뒤로 순간적으로 돌려서, 재는 얼른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자 비릿한 냄새가 코끝으로 훅 들어왔다.

‘피. 부상 중.’

자세히 보니 붉은 선혈이 한두 방울씩 보이는 것도 같았다.

파바박!

부상을 입은 전사가 갑자기 몸을 날려, 고개를 숙이느라 보지 못한 다른 인형의 뒤를 점하며 칼을 휘두르는 걸 목격했다. 정확히 입을 막으며 거의 동시에 날이 안쪽으로 가게 역수로 쥔 비수로 목을 긋는 동작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재는 그걸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내가 가르친 건데?’

칼을 쥐는 방식도 여러 가지가 존재하고, 기습해 목을 따는 방법도 당연히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백적파가 저렇게 날이 안쪽으로 오게 역수로 쥐고 긋는다.

‘설마…… 살아남은. 아니, 아니야. 저렇게 왜소한 녀석은 없었어.’

그럼 도대체 누구지?

설마, 이족인가?

재는 저 기습법도 당연히 가르쳤다.

그럼 이족이라면 저렇게 백적파와 아주 똑같이 뒤를 점해 목을 긋는 기습도 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이족의 여성 전사라…….’

얼마 없었다.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전사가 되는 이족의 풍습을 보면, 당연히 저렇게 근접 기습을 배운 여성 전사들이 있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재가 아는 한, 저렇게 수준 높은 기술을 구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아니…… 적어도 내가 절벽에서 떨어진 그 날까진 없었어.’

한 명을 제외하곤.

두근, 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 한 명은, 자기의 연인이었다.

‘선고…… 너야?’

자기가 아는 한, 선고만이 유일하게 저렇게 물 흐르듯이 유려한 기습을 가할 수 있었다. 그걸 자각하자 심장의 고동이 점차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는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일단은 확실하지 않으니, 좀 더 기다렸다.

선고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다른 이족의 여전사라면, 자신의 생환이 반드시 알려질 것이다. 그럼 후에게 일격을 먹이기 힘들다. 왜? 후는 철저하게 준비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신은 결정적인 순간까지, 죽은 인간이어야 했다.

이는 관영도 찬성했다. 그러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재는 좀 더 지켜봤다. 여전사는 시체를 치우고, 주변을 철저하게 관찰했다. 저곳에서 적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초소가 더 있다는 것. 그런데 저곳은 재가 파악한 곳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눈이나 땅에 묻어 놓은 초소가 있는 거야. 멍청이가…… 이런 기본을 까먹어?’

쯔……!

속으로 혀를 차며 자책한 재는 다시 현실에 집중했다. 잠시 뒤, 초소를 파악한 여전사가 눈을 뚫고 들어갔다. 꽈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난 직후, 재는 빠르게 접근해 불쑥 튀어나온 바위 옆에 몸을 숨겼다. 바위 옆이다. 그리고 바위 아래로 굴을 파서 초소를 만들었다. 위장은?

눈이다.

쌓인 눈이 완벽하게 초소의 존재를 지웠다.

쿵! 퍼억!

격렬한 전투의 소리가 났다.

그리고 잠시 뒤, 퍼억! 여전사가 뚫고 들어갔던 문을 통해 다시 튕겨 나왔다. 기습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벗겨지며 재는 아주 찰나간 구름을 피해 지상으로 떨어진 달빛의 도움을 받아 얼굴을 확인했다.

‘선고…….’

선고였다.

연인이었다.

심장이 요동쳤다.

얼른 저 연인을 만나러 가라고, 그렇게 소리쳤다. 하지만 재는 기다렸다. 기다려야 했다. 적이 있으니까.

“그래, 그래 줘서…… 정말 고맙다, 이년아!”

선고가 자세를 잡자 비릿하게 웃으며 소리치는 제국군의 뒤에서, 재는 상황을 기다렸다. 혼자? 아니면 더 있나? 저놈을 잡으러 가다가 뒤에서 적이 튀어나오는 건 곤란하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본 선고가 순간적으로 굳는 경우도, 곤란했다. 백적파에서 자신이 가르치고, 한평생 지켜왔던 규율 같은 전투법이 당장 뛰쳐나가려는 몸을 잡아챘다.

그러나 안에서 인기척은 나는데, 나오지 않았다.

슬쩍 고개를 넣어 봤더니, 허벅지에서 흐른 피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딱 봐도 허벅지 뼈 사이의 혈관이 다친 것 같았다. 저런 경우, 십에 십, 죽는다. 그러니 남은 놈은, 저놈 하나다.

크, 크크. 비릿한 웃음이 들리긴 했는데, 그 소리의 주인공은 같이 나오지 않았다. 안에 지킬 게 있어서. 죽어가는 중이니, 그럴 리는 없으니까.

‘여긴 총 셋이 있었고 선고가 둘을 정리한 거야. 그럼 남은 놈은 저놈 하나.’

그 짧은 순간 다시 교전이 벌어졌고, 선고는 가슴을 얻어맞고 다시 눈밭을 굴렀다.

꿈틀, 재는 그 순간 움직였다. 이미 선고는 움직임이 없었다. 자책하며 재는 빠르게 놈의 등 뒤로 접근했다.

쌍판이니, 반반하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놈의 뒤에 귀신처럼 다가간 재는 스르륵, 칼날을 목에 넣고,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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