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9화
429화. 마지막, 재(20)
번들거리던 살기는 재를 보며 짓는 웃음에 사르륵 녹아 사라졌다. 살기의 분출과 회수가 지극히 자연스럽다. 재는 깨달았다. 관영 또한 어떤 경지를 넘었음을.
“하지만 바로 움직일 수는 없었어.”
“그랬겠지. 감이 떨어졌을 테니까.”
“후후, 맞아. 탈진할 때까지 달빛 아래 칼춤을 추며 본능적으로 깨달았지. 이대로 전장으로 향해 내 복수를 하다간 며칠 지나지 않아 칼 맞아 죽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 그래서 그날부터 다시 훈련에 들어갔지. 어차피 조급할 것도 없었어.”
“……내가 죽었으니까.”
“맞아. 내가 위급한 것도 아니고 죽었으니, 급할 게 없었지. 그래서 나는 분노를 연료 삼아 악착같이 수련했어. 다행히 농사일이 고되어 근육은 유지되어 빠르게 실력을 되찾았지. 하지만 부족했어. 이 정도로는 후를 죽일 수 없거든.”
“…….”
“제국제일검은 더더욱. 재 네가 넘지 못한 벽을 내가 넘을 거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나를 한계까지 올려놔야 조금이라도 승산이 올라갈 테니까, 해가 가고, 또 가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가족을 떠났어.”
가족을 떠났다는 말에 눈매를 찡그리며 아픔을 느끼는 관영.
가족이란 게 그렇다.
생기면, 그 순간 역린이 된다.
하지만 가족은 삶의 동력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지금 그를 힘들게 하는 건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재를 위한 복수 사이의 괴리에서 나오는 답이 없는 감정 때문이었다.
관영은 거기까지 말한 후 웃었다.
따뜻한 미소였다.
괴리에서 나온 답 없는 감정을 이제는 느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왜?
재가 살아 있다.
심지어 이렇게 극적으로 만나 눈앞에서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자체만으로도 관영은 심마에서 벗어났다.
자신을 향해 웃는 관영을 향해 마주 웃으며 재는 그를 불렀다.
“관영.”
“안 가.”
그리고 귀신같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하고 거절부터 때렸다.
“고집부리지 마.”
“헛소리 마라. 나를 실없는 놈으로 만들지 마. 이곳으로 오며 각오는 끝났어.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마라. 백적파는 이제 부활하는 거야.”
“……너는 진짜, 가족이 있잖아.”
“개소리 말라고 했다.”
“…….”
관영이 험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이 이상 하면 칼을 뽑을 놈이라는 걸 알아 재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제 이쪽 분 소개 좀 받자. 내자 될 분은 아닐 테고. 누구시냐?”
관영이 화제를 돌렸다.
재는 거기에 그냥 동참해 주기로 했다.
“제학 선생님 알지?”
“알지. 모를 리가 있나.”
“그분 따님이야.”
“응? 그럴 수가 있나? 제학 선생님은 황궁이 불탔던 날까지도 혼자셨는데?”
관영은 바로 뭔가 이상함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 설명은 제선이 맡았다.
“저희 어머니께서 재혼입니다.”
“아, 장성한 따님을 둔 분과 혼례를 올리셨군요.”
“네. 인사드립니다. 제선입니다. 천하의 백적파 부단주를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허명입니다. 반갑습니다. 관영입니다.”
가볍게 통성명을 한 뒤, 관영은 곧장 문제가 되는 부분을 찔렀다.
“재를 따라왔다는 건, 이 전쟁에 동참하겠다는 뜻이신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무슨 뜻인지는 아나, 저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제 복수도 후, 그 자식이니까요.”
“…….”
관영은 대답 대신 재를 돌아봤다.
그 시선에 재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가르칠 게 많아. 칼을 제법 다루긴 하는데, 전장 스타일은 당연히 아니야. 셋 이상은 감당하기 힘들 거야.”
“셋 이상이라……. 그럼 둘은 괜찮다는 뜻이겠네. 상대 수준은?”
“북부 놈들 상대로.”
“그럼 대단하긴 한 건데?”
“어림도 없어. 이대로 전장에 들어서면 세 번을 넘기긴 힘들 거다. 우리가 돕지 않는다는 전제로.”
“흠…….”
자신을 두고 하는 말에 제선의 얼굴이 벌겋게 익었다. 모욕적이고, 치욕적인 언사다. 하지만 재의 실력을 이미 경험해 봤고, 그런 재와 거의 동급이란 얘기가 있던 백적파의 부단주 관영의 앞에서 자신은 어린아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미 깨달았기에, 주먹을 꾹 쥐고 부르르 떨 뿐, 어떤 반론도 내놓지 못했다.
할 수 있는 건 가지 않겠다는 고집, 딱 그 정도였다.
“악도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악도겸? 아, 그 녀석 애들 가르치는 건 천부적이었지?”
“그랬지. 놈의 손에 맡기면 일주일이면 다른 놈이 되어서 왔잖아.”
“그랬지. 그랬어.”
처음엔 반가운 이름이었으나, 끝은 씁쓸했다.
악도겸은 훈련 교관을 맡았던 백적파의 단원이었다. 그는 정말 신병 훈련을 기가 막히게 했다. 단순히 엄한 호랑이 교관의 역할을 맡는 것뿐이 아니라, 채찍 뒤엔 어머니가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것처럼 다뤄 훈련을 기가 막히게 잘 따라오게 했다.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통제해서, 훈련 효율을 극상승시켰다.
그런 악도겸이 있었다면, 길게 잡아서 한 달이면 제선을 완전히 다른 인간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쉬웠다.
왜?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니까.
재는 힘겹게, 입술을 꾹 깨물어 피가 터진 후에야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다른 놈들 소식은…… 들은 거 없지?”
“……강을 넘기 전에 벽운산 무신묘에 다녀왔다.”
“…….”
“없더라, 깨끗했어.”
“후우…….”
벽운산 무신묘.
백적파가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여 지정한 곳으로 제도 남서부에 있다. 이곳에서는 두어 달 거리고, 백적파는 만약 지금처럼 찢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올시, 살아남으면 그곳을 찾아 무신묘에 표식을 남기기로 했다.
관영이 그곳을 갔다 왔는데, 아무것도 없었다면? 그곳을 찾은 백적파 단원이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건 곧…… 전멸했다는 소리다.
그날, 그곳에서.
재는 고개를 털어, 생각을 날렸다.
‘아니야. 관영도 살아 있어. 분명…… 더 있을 거다.’
재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분명 자신이나 관영보단 분명하지만, 쉽게 죽을 놈들은 절대 아니었다. 생존법. 어떤 수라장에 던져놔도 헤쳐나올 수 있을 만한 실력이 분명 있었다. 그러니 거기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사실은 그런 희망도 없었다.
왜?
지금까지 조용했으니까.
하지만 관영을 만난 이상, 분명 더 살아남은 놈들이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살아 있을 거다. 몇 놈 정도는. 그리고 나처럼 숨죽여 살았겠지. 그러니 기다려보자고. 내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어떤 식으로든 살아남은 놈들은 움직일 거야. 그리고 혹시 몰라서 내가 표식을 남겨 놨다. 연 황녀님을 찾으라고.”
“그래. 그렇겠지. 그런데 연 황녀를? 왜?”
“내가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황녀님은 만나서 뭘 하려고? 의탁하게?”
“설마. 연을 지키는 건 재, 너의 임무지. 우리의 임무는 아니야. 우리가 그날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건 황녀님을 지키기 위했던 게 아니야. 우리 백적파의 단주인 너를 위해서 그런 거지.”
“…….”
관영의 솔직한 말에 재는 대답은 안 했지만, 웃었다.
자신도 그랬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연 황녀를 찾아가는 건 왜?”
“후를 죽여줄 테니까, 병사 좀 내놓으라 하려고 했지.”
“…….”
관영답다.
정말, 매우 이성적인 친구지만, 가끔 정신을 놓은 것처럼 미친 짓을 저지를 때가 있었다. 그때 협곡에서 재만 보냈을 때처럼, 그때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지.”
“그래, 헛생각하지 말고, 함께 가자.”
“후를 죽이러?”
“응. 이 전쟁을 끝내러.”
“그거…… 좋네. 후후.”
관영이 시원시원한 웃음을 흘렸다.
재는 그런 관영을 보며 솔직히 참 막막했는데,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재.”
“응?”
“죽으러 돌아가는 건 아니지?”
관영의 질문에 재는 피식 웃었다.
뭐?
죽으러 돌아가는 거 아니냐고?
“관영. 나 재다. 내가 목숨을 버릴 인간으로 보이냐?”
“후후, 아니지. 아니어서, 마음이 놓인다. 그럼 재, 다시 한번 잘 부탁한다.”
“나도.”
서로 싱그러운 미소를 나누는 둘을, 제선이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제국 전체에 위명을 떨쳐 울리던 게 백적파다. 그 어떤 어려운 전장도 그들이 나서면 몇 주야 내로 정리가 끝난다는 말이 있었고, 그래서 칼을 쥔 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관영. 부탁 하나만 하자.”
“아, 보모 역은 사절인데.”
눈치가 역시 귀신이다.
“부탁 좀 할게. 나는 전장 겉면 좀 가볍게 둘러보고 올게. 제대로 움직이려면 초소를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뭐, 그런 거라면. 알았다. 제선 아가씨?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으으, 잘 부탁드립니다.”
관영이 보모고, 아이를 보는 역할이라면 그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시 얼굴이 벌게져 부르르 떠는 제선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늦은 밤까지 그간의 해후를 나눴다.
* * *
연습, 연기, 휴식.
쳇바퀴처럼 일과가 돌았다.
일요일 제외하고 신을 소화했고, 필요한 분량이 점점 끝나가고 있었다. 어느새 70% 가까이 신의 소화가 끝났을 때쯤, 이때쯤 되니 확실히 다들 지친 기색이 눈에 확 보였다. 그래서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무려, 3일간의 휴가가 주어진 것이다. 대신 익사이팅 스포츠는 전면 금지가 조건이었다.
이제 로케에서 찍을 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상태인데 배우들이 부상을 입는다?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얘기하면 미친 짓이다. 작가는 물론 연출한테 날아갈 각오는 해야 한다.
어떻게?
죽이면 된다.
당연히 실제로 죽이는 건 아니고, 전쟁 시대극이니 그냥 칼 맞고 죽는 거로 바꾸면 된다. 실제로 정은정 작가는 화사하게 웃으며 배우 단톡방에 이를 공지했다. 너무한 처사 같지만, 배우들은 이를 이해했다.
배역의 생사여탈권을 쥔 정은정 작가의 공지에 반기를 들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연은 물론이고, 지영까지도.
그렇게 주어진 휴가.
지영은 그 휴가의 첫날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또 먹고.
지영은 저녁을 잔뜩 퍼와서 다시 테이블에 앉았다.
오늘 하루, 지영은 치팅데이처럼 먹을 생각이었다. 과식을 넘어 폭식에 가깝게 먹었지만, 속이 조금도 더부룩하지 않았다. 그간 에너지를 너무 써서 몸이 넣는 족족 회복을 위한 연료로 태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와, 오늘은 진짜 제대로 먹네?”
지영처럼 종일 자고 일어나서, 이제 배를 채우러 온 이연의 말에 지영은 입에 있는 걸 씹어 삼킨 뒤 대답했다.
“오늘은 시합 끝난 날처럼 먹기로 했어요.”
“그래 보인다. 속은 괜찮고?”
“네, 에너지가 부족하긴 했나 봐요. 화장실도 안 가네요.”
“아, 진짜?”
“네.”
진짜로 화장실은 한 번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소변도 두 번인가 밖에 나오지 않았다. 몸에 수분이 부족할 때 나오는 전형적인 증상이다. 물론 몸이 안 좋은 건 아니다. 수분이 충분히 차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니까.
“너 내일은 뭐 할 거야?”
“앵커리지나 나가보려고요. 와서 제대로 둘러도 못 봤으니 잠깐 나갔다 올 생각이에요.”
“그래? 같이 갈까?”
“누나도 가려고요?”
“왜, 뭐야? 난 가면 안 되니?”
“설마요. 그래요, 그렇게 해요.”
“어째, 싫은 눈친데?”
“아닙니다.”
지영은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곤 식사를 이어갔다. 오랜만에 포만감이 느껴지게 먹었더니, 또 졸렸다. 지영은 또 잤다. 자다 일어나 야식까지 먹고, 또 잤다. 이렇게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먹었다.
그러나 그렇게 먹고도 지영은 소화제가 필요 없었다.
애초에 운동선수들은 대식가였다. 거기에 기초대사량이 워낙에 높아 작정하고 먹으면 진짜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거기에 더해, 지영은 원래도 많이 먹는 편이었다. 선수촌에 있을 때는 시합 시즌이 아니고서는 식단도 안 한다. 그때 타 종목 선수들은 지영이나 친구들이 먹는 걸 보면 대부분 질린 표정을 짓는다.
진짜 잘 먹는다는 먹방러들에겐 부족해도, 운동선수를 기준으로 해도 거의 상위 1%였다.
그런 지영은 그렇게 먹고 자고 일어났을 때도 더부룩함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버릇처럼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러닝을 했다. 한바탕 땀을 빼고 들어오자, 컨디션이 놀라울 정도로 올라왔다.
역시 고단백 식사를 때려 넣은 보람이 있었다.
아침은 그래도 적당히 챙겨 먹고, 지영은 정말 오랜만에 호텔로 돌아와 외출 준비를 했다. 내일은 다시 훈련 스케줄을 잡았으니, 하루의 여유를 지영은 알차게 보내기로 했다.
호텔 로비에서 20분쯤 기다리자, 이연이 내려왔다.
힘을 빡 주고.
누가 봐도 나 연예인이요. 하고. 그러고 내려왔다.
‘저 누나는 진짜…….’
전에 스캔들이 났었던 건 까먹은 걸까?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지영은 임은진과 이연, 이연의 매니저와 함께 호텔을 나서 앵커리지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해 돌아다니기 무섭게.
한국에 속보로 기사가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