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28화
428화. 마지막, 재(19)
후우.
관영.
관영 역을 맡은 배우 장하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컷 사인이 나자 조금 어둡던 동굴에 불이 확 들어왔다. 극 중에서는 편집 과정에서 CG를 입혀 매우 어두컴컴하게 나오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괜찮아? 어디 맞진 않았지?”
“네, 저는 괜찮아요. 선배님은요?”
“나야 괜찮지.”
먼저 안부를 물어주고, 괜찮냐는 지영의 반문에 씩 웃으며 괜찮다고 하는 장하원은 시즌 1에 잠깐 나왔다가 시즌2는 통째로 불참이고, 시즌3에 다시 합류한 배우다. 그런 장하원과 신을 확인하고, 오케이 사인을 받은 지영은 임은진이 주는 물을 받아 반 통을 단숨에 비웠다.
긴장했다.
실제로는 크게 어둡진 않았지만, 그래도 모조 검의 색이 거무튀튀해서 궤적 파악을 잘못하면 당연히 큰 부상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제대로 긴장한 채 신에 임했고, 덕분에 오케이 사인이 난 지금, 몸이 축 늘어졌다. 그리고 그건 장하원도 마찬가지였다.
“자, 자! 2번 세트로 돌아갈게요. 저녁 조 로테이션 전 마지막 신이니까 다들 마지막까지 힘내주세요!”
조연출의 외침에 네! 크게 대답한 스태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동굴에 세팅한 촬영 장비를 정리했다. 지영은 그들을 도와 함께 정리했다. 정리한 장비는 차량에 실어 나를 거라 굳이 들고 갈 필요는 없었다.
임은진과 함께 대기실로 돌아온 지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요즘 들어 체력적으로 부담을 느끼는 상황이 생겼다. 긴장했다가, 풀렸다가, 다시 긴장했다가, 다시 풀렸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체력 소진이 이전보다 확실히 빨라졌다. 아직 크게 문제 될 정도는 아니지만,
‘이러다 사고 나겠는데?’
어느 순간 정신력이나 체력이 지영의 의지를 배반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사고다. 무조건.
그러니 체력을 어떻게든 채워야 했다. 지영은 그래서 다음 신이 준비될 때까지, 그냥 곧장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들었다. 40분 정도 자고 깨자, 뻑뻑하던 머리가 어느 정도 개운해졌다.
“깼어?”
“네. 신 준비 아직 안 끝났죠?”
“응. 아직 남았어. 대본 보고 있어. 아, 뭐 먹을 거라도 가져다줄까?”
“주먹밥이나 김밥처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거 있으면 두 개? 두 줄? 그 정도만 챙겨주세요.”
“그래, 알았어.”
임은진은 폰을 꺼내 곧장 같이 온 팀 스태프에 연락을 넣었고, 10분 뒤 갓 만들어 따뜻한 김밥과 어묵 국물이 눈앞에 세팅됐다. 지영은 게눈 감추듯 김밥으로 배를 채우고, 대본을 펼쳤다. 다음 신은 다행히 세트장이다. 세트장에서 제선, 그리고 관영과 함께 그간의 사정을 묻는 신으로 이어진다.
관영.
백적파의 부단주이자, 재라는 캐릭터가 작전을 나갔을 때 등을 가장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였다. 캐릭터 설정은 재와 거의 함께 골목을 돌아다녔던 소꿉친구다. 그런데 같이 양부의 밑으로 들어가지 않은 건, 그래도 관영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제도에서 작은 규모지만, 무관을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관영이 17살이 될 때까지만. 큰 규모의 무관이 관영의 무관이 점차 성장하자 욕심과 질투로 쳤고, 가족은 전부 죽었다. 재와 함께 외부로 나갔었던 관영만 살아남았었고, 이번 시즌에 잠시 관영의 과거를 보여주는 화상 신을 통해 백적파가 결성되고 첫 임무로 그 무관을 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런 관영은 죽지 않았다.
당시 수천의 추적군에게서 재와 연을 피신시키고, 남은 백적파 전원과 함께 추적군을 상대한다. 이게 시즌1, 2화의 마지막 내용이다. 그리고 백적파가 어떻게 되었다, 이런 설명은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전개에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죽었다.
살았다.
이런 언급이 없으니.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았을 수도 있다는 설정이다.
이런 걸 일종의 보험이라고 한다.
재가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역으로 재는 돌아온다. 이런 멘트로 재가 죽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효과가 약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개연성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런 설정을 바탕으로 부활한 게 바로 관영이었다.
재는 집단이 없었다.
이족과 함께 했지만, 이족은 확실히 근접전에 약했다. 싸움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늘어나는 게 아니다. 훈련은 당연히 기본으로 장착되어야 하고, 이런 훈련으로 쌓은 것이 다시 진화하려면 실전은 필수다.
죽고 죽이는.
그런 치열한 전장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짜 제대로 전투술을 익히긴 힘들다. 특히 근접전이 그랬다. 이족은 타고난 사냥꾼이지만, 근접전이 약하다. 반대로 제국군은 사냥꾼에게 숲에서는 아주 무력하지만, 반대로 드넓은 평야에서 펼쳐지는 대회전은 역상성을 받아 강력했다.
그래서 정은정 작가는 밸런스를 맞추기로 했는지, 백적파를 부활시켰다.
지영은 정은정 작가의 이런 선택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국은 강력했다. 제국의 전력이 온 것도 아닌데 이족과의 전선이 팽팽한 건, 그만큼의 저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부는 야만인과 남부는 해적과 대치다. 동남부의 샨 강 너머는 이족이 있고, 서부가 그나마 안전하다. 그래서 제국은 언제나 군비를 철저하게 유지했다.
그 전체를 십 할로 따졌을 때, 이족의 전선에 투입된 제국군은 삼에서 사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족은 샨 강을 막지 못했다. 전선 균형의 추가 제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걸 어떻게 막을까?
뭔가가 필요했다.
무게추가 달린 저울이 뜬 쪽이, 다시 내려갈 수 있을 만하면서 개연성이 파괴되지 않는 뭔가가. 정은정 작가는 그 뭔가를 백적파로 대체한 것이다.
신의 한 수는 아니어도, 최고의 한 수는 된다는 게 지영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관영이 부활했다.
“역시 재밌어.”
틈틈이 무신 척위준도 보고 있지만, 역시 지금은 나의 무사님이 더 재밌었다. 그리고 이런 재미가, 지영의 연기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직관적인 세계관 창조와 그 세계에 동화하기 너무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즐겁기까지 했다.
그런 마음으로 소설에 흠뻑 빠져 있기를 1시간, 스태프가 대기실 문을 두들겼다.
* * *
시체는 동굴 앞에 묻었다. 그리고 관영과 함께 흔적을 싹 제거한 뒤, 이 동굴 말고 뒤쪽에 좀 더 은밀한 동굴에 거처를 잡았다. 작은 동굴인데 종유석에서 떨어지는 물을 식수로 쓸 수 있어 재가 학소양의 거처를 떠나 상서성으로 이동하며 보아둔 곳 중 하나였다.
수풀에 가려져 있어, 은밀성까지 확보된 곳.
산짐승이 갑자기 튀어나와 재가 반사적으로 그 수풀을 살펴봤기에 찾은 곳이지, 그냥 길을 가면 웬만해서는 찾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 곳에 거처를 잡은 재는, 관영과 마주 보고 앉았다.
“관영.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살아남은 거지.”
“그 추적대 속에서?”
재의 물음에 관영은 피식 웃었다. 두 사람의 웃음은 참 닮았다. 철이 들기 무렵부터 함께하면서 형제처럼 자란 게 바로 관영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실소는 매우 닮아 있었다.
“왜 이래. 재. 너 너무 날 무시하는 거 아니냐?”
“아니, 그건 아닌데. 여태까지 아무런 소식도 없었잖아. 내가 살아 있는 걸 알면서도 왜 기별을 안 넣었어?”
무려 사 년이 넘도록 말이다.
재의 질문에 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재가 했던 고민을 꺼냈다.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었어. 추적대를 피해 도망치다가 절벽에서 떨어지며 비죽 튀어나온 곳에 운 좋게 걸려서 살아난 거지. 거기에 작은 동굴이 있었고, 몸이 좀 나을 때까지 버티다가 작은 마을로 스며들었는데, 그때 그런 생각이 들더라.”
“무슨 생각?”
“후는 재 너를 놓치고 공식적으로 백적파의 절멸을 선언했어. 우릴 역도로 지정했고, 모두 처단했다고 했지. 그다음 이족과의 전투를 시작했고. 내가 살아 있으니 그 얘기를 듣고 제국의 거짓 선전이라는 걸 알았지만, 내가 조용히 숨죽여 지내면 그 선전은 진실이 되는 거잖아. 그럼 나를 찾지 않을 거고.”
“……전장에 지쳤구나.”
“너와 함께 수년을 전장을 떠돌았으니까.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은…… 비참했고.”
“…….”
맞다.
비참했다.
재와 연을 살리기 위해 백적파는 전원이 스스로 미끼가 되었다. 그것도 자진해서, 스스로 원해서. 누구 한 명 그 역할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재와 재의 양부가 사람답게 살게 해준 빚을 갚겠다면서, 수천의 추적대를 이리저리 교묘하게 끌고 다녔다. 정작 재는 그때 협곡을 넘어선 상태고, 그래서 추적대의 추적을 한참이나 피할 수 있었다.
금원대의 추적이 붙었지만, 그건 재가 일신상의 무력으로 해결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백적파를 살펴보면?
미끼가 되었다는 게, 스스로 원했다고 해서 그게 뭔가 고결한 건 절대 아니었다. 백적파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전장에서 살아남는 게 첫 번째 원칙이었다. 개똥밭을 굴러서, 적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통과해 살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했다. 제국의 정식 타격대의 자부심 따위는 애초에 재부터 없었다.
그러니 백적파는 그런 미끼 역할은 원래부터 머릿속에 없는 부대다.
그런데 미끼가 됐으니, 그 말로는 감히 비참하다 할 수 있었다.
‘의리와 우정도 살아 있을 때나 빛나는 거라고 가르친 것도 나였지.’
살자.
골목에서, 다리 밑에서, 판자를 만들고 그 어린 나이에 추위와 더위를 이겨가며, 객잔에서 버린 음식을 먹어가며 살아남았으니, 전장에서도 그렇게 살아남자. 그게 기조다.
관영의 인생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백적파가 되어, 첫 임무로 철저한 조사 끝에 원수의 무관을 파헤쳤고, 관련되어 있던 것들 모두를 죽였다. 그게 관영이 부단주 자리를 수락하는 조건이었다.
그런 관영도 지친 거다.
자신은 연 때문에, 양부의 유지를 받드느라 생각하지 못했을 때 관영은 좀 더 빠르게 전장이 물렸던 거다.
“그런데 왜 돌아왔어요?”
재가 물은 게 아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제선의 질문이었다.
관영은 타닥, 타닥. 눈앞에서 타들어 가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재를 향해.
“재. 그거 알아? 나, 성혼했다.”
“……뭐?”
“좋은 사람을 만났지 뭐야. 첫눈에 반했는데, 다행히 그 사람도 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줬지.”
“……이야, 관영. 축하한다.”
축하한다고는 했지만, 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족까지 꾸린 관영이다.
그런데 그런 관영은 지금 눈앞에 있었다. 차분하게 빛나는 눈빛으로, 무릎 위에 양부가 백적파에게 선물해 줬던 칼을 올려놓고.
“하하, 고맙다. 나는 제국의 중남부의 한 산골 마을에 있었어. 그래도 마을을 찾는 보부상을 통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매번 들을 수 있었지.”
“…….”
“눈과 귀를 막고 사는 게, 참 힘들더라.”
“…….”
눈과 귀를 막는다는 것은, 전쟁에 관한 소식을 듣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백적파의 부단주였다. 재의 소꿉친구기도 했고. 그런 재가 전장에서 처절한 전투를 이어가고 있다는 소식은 너무 무시하기 쉽지 않았다.
“매번 참아야지. 이번엔 무시하자.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달에 한 번 보부상이 찾을 때마다 나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그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더라. 궁금했던 거지. 너, 그리고 내 동료들의 생사가.”
“…….”
“그게 어느 순간부터 나를 잡아먹기 시작했어. 나의 안색은 날로 안 좋아졌고, 안 사람은 당연히 알아봤지. 그런데 알면서도 무슨 일인지 반년이 넘도록 묻지 않았어. 그냥 웃어만 주더라. 그래서 내가 이실직고했지. 난 이런 사람이었고, 이런 상황이라고.”
“…….”
“이주야 거리를 내려가 강을 건너면, 내 동료가 싸우고 있다고. 죽도록, 죽도록……. 하하. 그랬더니 안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아냐?”
“……뭐라고 했는데?”
목이 멨다.
저건 한이다. 한풀이 같은, 전장에 묶인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그런 자조의 웃음이었다.
“자기와 여영이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더라. 하하.”
여영?
아이 이름?
가족을 이뤘으니 아이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어디 그게 쉽냐?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게 가족이잖냐. 그런데 어떻게 버리고 떠나. 다시 돌아올 확률보다 못 돌아올 확률이 몇 배나 더 높은데, 그래서 난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했지. 괜찮다고. 나는 당신과 여영이의 곁에 있겠다고. 그랬는데…….”
“……내 죽음이 알려졌구나.”
번쩍.
자조적이던 눈빛이, 번쩍 떠지며 빛나기 시작했다.
파랗게 빛나는 살기.
“그래, 재. 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제국을 강타했다.”
“…….”
“그리고 나는 칼을 다시 쥐었지. 그리고 휘두르고 있더라.”
달밤에, 미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