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8화
418화. 마지막, 재(9)
으음…….
지끈거리는 통증에 정신을 차린 재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선 천장이다. 나무로 촘촘히 바람구멍 하나 없이 막은, 목수들의 손이 정말로 많이 갔을, 그런 천장이다. 실제로 훈훈한 열기만 느껴질 뿐, 웃풍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재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몸이 무거웠다. 마치 추를 넣어 재봉한 조끼를 상체에 휘감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재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몸을 바라봤다. 얇은 천 옷을 입었지만, 몸이 무거울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었다.
그에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린 재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몸이 너무 무거웠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왜? 순간 짜증이 올라왔지만, 짜증이 올라오는 순간 골을 울리는 통증에 재는 그냥 다시 드러누웠다.
잠깐 몸을 움직였는데 열이 나기 시작했다.
몸이 마치 너 누가 움직이래! 죽고 싶어 환장했냐? 하는 것처럼 땀을 뽑아냈다. 그리고 기력이 쭉쭉 뽑혀 나갔다. 칼에 매진할 때, 양부를 지키기 위해 칼을 수련했던 그때, 백적파를 이끌며 전장에서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 죽도록 수련했을 때, 그때처럼 몸이 무거웠다. 아니, 그때보다 더했다. 그땐 기력이 좀 쇠하긴 했지만, 이렇게 아예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얇은 천 옷만 걸치고 있었고, 자다 깬 것 같은데 조금도 움직일 만한 힘이 없었다. 고개만 조금 까닥이는 게 겨우 일 정도니, 몸 상태가 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재는 움직이는 건 포기했다.
그리고 고개만 천천히 돌려가며 이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했다. 사방이 나무고, 타닥타닥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지척에서 모닥불이 타는 것 같았다. 완전히 목조주택이라면 모닥불을 피우는 건 미친 짓이다.
그런데도 피웠다?
재는 고개를 돌려 나무 타는 소리가 나는 곳을 겨우 살필 수 있었다. 흙으로 쌓은 화덕이다. 그리고 연통이 목조주택 밖으로 빠져나가고, 나무를 넣는 공간은 어떻게 했는지 새까만 철로 막아뒀다.
저렇게 해둔 덕분에 연기가 집 안으로 빠지지 않고, 불씨가 나무 주택을 태우지 않고 있었다.
공을 엄청나게 들인 주택이다. 재는 반사적으로 이런 집에 잡혀 있는 자신이, 적어도 제국군에 사로잡힌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로잡혔다면, 이미 끔찍한 고문에 몸이 너덜너덜했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다.
제국의 입장에서 반군의 우두머리 중 하나라 칭해지는 재를 사로잡았다면 이런 대우는 있을 수가 없었다. 제군을 찬탈한 후가, 절대로 이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니 적어도 사로잡힌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나는…… 어떻게 살아난 거지?’
이 부분이 일단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재는 절벽에서 자신이 떨어지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좀 전에 슬쩍 본 가슴에 입은 깊은 검상이 그걸 증명한다. 하얀 실선처럼 길쭉하게 난…… 음? 다 나았다?
‘이게 왜?’
이렇게 하얀 흉이 남으려면 짧은 시간으로는 어림도 없다. 딱지가 아물었다가 떨어지고, 그걸 반복해야 한다. 그것도 시간이 적게 걸리진 않는다. 그런데 이렇게 흉이 졌다는 건, 절벽에 떨어지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살아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흉이 이렇게 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이해가 가지 않는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정도 단서면 상황을 유추할 수는 있다.
‘누군가에게…… 구해졌어.’
물에 빠지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구해진 건 확실했다. 하지만 이것도 의문이 남는다. 근처에서 구해졌다면, 제국군이 반드시 추격해 왔을 것이다. 절벽을 내려가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고, 자신을 구했다면 반드시 흔적이 그 근처에서 남았을 테니까. 제국군은 그걸 놓치지 않는다.
특히 모든 부대에 척후에 특화된 첨병단이 동행하니까, 반드시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데 추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첨병단이 훑어본 영역 밖에서 구해졌다는 뜻인데,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 있었다? 어떻게?
“의식도 없었는데?”
불가사의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났는지.
이 의문이 풀리지 않은 상태인데, 졸리기 시작했다. 잠깐 눈 뜬 것 정도, 몸은 아직 회복을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잠들었다. 그리고 얼마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 다시 눈을 떴을 때, 모르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어, 깼다. 깼다, 깼어!”
“……누구?”
갈라진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더니 호들갑을 떨던 소녀가 얼른 물을 떠 와 입가에 흘려 넣어줬다. 감질이 난다. 하지만 소녀는 아주 조금씩 넣어줬다. 하지만 그래도 물이 들어오자, 정신이 확실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됐죠?”
“……응. 네가 나를 구했니?”
누워 있던 상태로 그렇게 물었더니, 소녀는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이렇게! 앙! 안아서 구해왔지요!”
“……그래, 고맙구나.”
“고맙기는요! 당연한 일은 한 건데요!”
“그래도 고맙지. 그런데 내가 너에게 구해지고 얼마나 지났지?”
“어…… 이 정도?”
소녀는 손가락을 쭉 펼쳤다.
여섯 개다. 그럼 5주?
‘아니, 아니지. 5주는 아니야. 그럼 5년도 아닐 테니…….’
남은 건? 5개월이다.
“오래 누워 있었구나.”
“그럼요! 몸에 뼈가 거의 다 부러졌었는데!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그랬어요!”
“…….”
몸의 뼈가 다 부러졌다.
재는 이해했다. 그 높은 절벽에서 물가에 떨어졌다. 낙하의 힘이 더해져, 수면에 텅! 하고 떨어졌을 테니 몸이 괜찮길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수면에 떨어졌을 때 쩡! 하고 느꼈던 고통에 자신은 의식을 놓았다.
재의 정신력은 단단하다.
인고의 훈련과 수많은 작전을 거치며 웬만해서는 정신을 잃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도 정신을 잃었다. 가슴의 검상이 깊긴 했지만, 그 정도로 의식을 잃을 재가 아니다. 그런데 의식을 잃었다. 낙하의 그 아찔한 순간도 견뎌냈으면서. 그건 곧 수면에 떨어졌을 때의 충격이 어마어마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게 기적이라고 들었다고?’
그렇다는 건 곧, 다른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누구? 소녀 혼자 있지는 않을 테니……. 벌컥. 문이 열리며 백발이 성성한 중년이 들어왔다. 얼굴의 외모는 50대 정도인데, 머리가 하얗게 센 독특한 풍모를 풍겼다.
“깨어났군.”
“……구은에 감사드립니다.”
“틀렸네. 자넬 구한 건 내가 아니라 내 딸 학미라네.”
“그렇습니까?”
“그래, 뭐, 나도 학미가 구해온 자넬 치료하긴 했네만. 내 딸아이가 자넬 구하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도 자네는 이미 그때 삼도천을 건넜을 거네.”
“……그렇군요.”
삼도천이란 단어를 쓴다?
그건 곧 제도인이란 뜻이다. 북부나 남부는 물론, 동부도 그렇고 서부도 그렇다. 그쪽은 삼도천이란 단어를 안 쓴다. 제도 근방 이들이나 쓰는 단어다. 제국의 국경을 넘어선 쪽은 각기 다르게 부른다. 이족만 해도 삼도천이란 단어보단, 샨 강을 건넌단 말을 쓴다. 삶의 터전인 샨 강이 그들에겐 곧 죽음의 경계인 삼도천인 것이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삼도천이라 했으니, 적어도 제도권에 살던 이였다.
“내가 제도인이라는 걸 파악했나 보군?”
그리고 눈치가 귀신이었다.
“흐흐, 자네 눈빛이 워낙에 솔직해 그냥 보이네. 칼을 거하게 맞았던데, 적어도 남의 등쳐먹고 도망치다 한 방 맞은 사기꾼은 아니겠어.”
“……”
“그래, 몸은 좀 어떤가?”
중년인이 옆에 앉으며 물은 말에 재는 잠시 답을 고민하다가 내놨다.
“좋습니다.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빼면요.”
“날개 뼈부터 시작해, 등 전체가 말도 아니었네. 자네는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운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어디서 누구와 싸웠는지 모르겠지만, 등뼈가 그렇게 부서졌을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는데, 살아남은 것만 봐도 그렇지.”
“……저도 솔직히 제가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높이가 장난이 아니었으니까요.”
“흐흐.”
재의 대답에 중년인은 한차례 웃고는 그 이유에 관해 설명해 줬다.
“이건 내 개인적인 의견이네만, 아마 자네는 물에 빠졌다가 다시 떠오르는 순간 부력이 있는 뭔가에 정말 천운으로 걸쳐진 게 아닌가 싶네.”
“네?”
“부력이 있는 뭔가에 걸렸을 거라고. 그래서 익사하지 않고 물에 뜬 채로 떠내려온 게지. 그러다가 내 딸이 자네를 구한 바위에 부딪치면서 부력을 가진 뭔가는 튕겨 나가고, 자네는 이때도 역시나 운 좋게 바위에 가슴부터 걸쳐진 거고. 그런 운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싶네.”
“아…….”
“직접 본 건 아니니, 그럴 거란 예상만 할 뿐이네. 물론 부력을 가졌던 게 뭔지는 나도 모르네. 그냥 그런 게 자네가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자네도 정신을 잃었고, 누구도 자네가 빠진 이후를 본 적이 없으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네.”
“흐흐, 인정이 시원시원해서 좋구만. 그래, 자네 이름은 어떻게 되나?”
“재라 불렸습니다.”
“재. 재라…….”
이름을 아는 눈치였다.
그에 재의 눈빛에 경계의 빛이 드는 순간, 그는 씩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나는 학소양일세. 여기 이 아이는 내 딸아이인 학미라 하고.”
“학 어르…… 학소양?”
“흐흐, 왜.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인가?”
“……네.”
그럼, 들어봤고말고.
재가 무예에 뜻을 두고 스승을 구할 때, 가장 먼저 신변을 알아봤던 사람이었다. 왜 알아봤냐고? 당연히 사사 받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제도권은 물론 제국 어디에서도 학소양은 발견되지 않았다.
재가 그를 찾았던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이 아닌, 전대의 제국제일검의 무력에 가장 가까이 있던 자가 바로 학소양이란 이름을 썼기 때문이었다. 제국제일검이란 칭호는 현 제일검이 칭호를 버린다는 선포를 던진 이후, 전국에 그를 알리는 방을 붙인 다음 각지에서 몰려든 검사들의 생사결 이후 다시 주인이 가려진다.
한 번 정해지면, 죽기 전까지 그 칭호는 유지된다.
중간에 누구도 도전할 수 없었다. 그 도전은 곧 제국 황실이 정한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이 한 번의 생사 비무대회를 두고, 온 천하의 무인이 몰려든다. 호칭 자체에 검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만, 한계는 없었다. 검이 아니라 도끼를 든 무인이 생사결 끝에 최후의 1인이 되어도, 그는 제국제일검이다.
학소양은 생사결 끝에 살아남은 이였다.
왜?
끝에서 만난 둘은 반나절을 싸웠다. 그리고 먼저 쓰러진 건 학소양이었다. 하지만 전대의 제국제일검도 학소양을 굳이 죽일 생각이 없었고, 그리고 학소양이 쓰러진 직후 그도 쓰러졌다. 학소양은 그래서 살아남았다.
전대의 제자가 이번대 제국제일검이지만, 학소양은 그땐 아예 출전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가 찾았을 때는 제국에 없었다.
“자네가 아는 이름이, 내가 맞을 걸세. 제국제일검을 두고 다퉜던 학소양이라면 말이네.”
“……선배님을 뵙습니다.”
“됐네. 됐어. 그리고 자네도 결코 이름이 없진 않구만. 아니, 나보다 더 유명한 이 아닌가. 백적파 단주 재.”
“…….”
자신의 이름과 백적파의 단주였던 것도 아는 걸 보니 세상과 아예 연을 끊고 산 건 아닌 것 같았다.
“흐흐, 왜. 어떻게 아나 신기한가? 아무리 오지에 살아도 생필품은 필요하게 마련이지. 특히 우리 미아가 좋아하는 비누를 사려면 먼 곳으로 나가야 하니까. 최근에 나갔을 때가 1년 전일세. 그때 들었지.”
“…….”
“황녀를 역모에서 구해낸 게, 자네라지?”
“……네.”
“어려운 길을 가고 있구먼.”
“해야 할 일이니까요.”
빌어먹을 족쇄는 이제 끊겼다.
재는 연을 위해, 황녀를 위해 정말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제는 전장에서 멀어진 지금도 나쁘지 않단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몸이 이렇게도 꼼짝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런가. 충성이 대단하군.”
“…….”
재는 충성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음을 굳이 밝히지 않았다. 대신, 자기의 몸에 관해 물었다.
“그보다 몸이 너무 무거운데…… 어떻게 된 겁니까?”
“몸? 뼈는 아물었네. 하지만 그 상태로 자네는 몇 달이나 의식이 없었어. 솔직히 그대로 눈을 못 뜰 확률도 있었네. 그런 상태로 몸만 나은 게지. 그런 몸이 그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바로 움직이겠나?”
“……혹시, 저는 이제 움직이지 못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 뼈는 제대로 맞춰 놓았네. 다만, 재활이 필요할 뿐이지. 흐흐.”
흐흐?
너무 의미심장한 웃음이라 재는 순간 소름이 쭈뼛 돋았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재활을 거치면 다시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기 때문이었다. 전장에서 벗어났다지만 한평생 이렇게 누워서 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몸이 좀 더 좋아지면, 학미더러 재활을 하라 할 테니 그때까지만 좀 참게.”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나 말고, 학미한테 하게나. 아까도 말했지만 학미가 아니면 자넨 이미 괴기밥이 되었을 테니.”
“……감사합니다, 소저.”
에헴!
허리에 손을 척, 의기양양한 학미의 모습에 재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고마웠다. 아무런 사심도 없는 두 사람의 행동이. 하지만 일주일 뒤, 재활을 시작했을 때는 그 고마움이 쏙 들어갔다.
재활 때면 눈을 부라리는 학미는, 호랑이 선생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