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한 유도 천재는 다재다능 417화
417화. 마지막, 재(8)
예정.
핫핑크의 막내.
새벽 세 시에 일어난 그녀는 가장 먼저 현장에 나와 있었던 모양이다. 지영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말이다.
“안녕하세여!”
안녕하세여!
잠이 덜 깨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혀가 살짝 짧은 건지, 요를 여로 발음하며 인사하는 예정의 등장에 부스스하던 현장 스태프들이 웃으며 그 인사를 받았다. 체구도 작아서, 초등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예정은 확실히 밝았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그런 예정은 지영에게는 겁나게 깍듯하게 인사했다. 허리를 거의 90도로 접었으니 이건 인사를 한 게 아니라, 인사를 박았다는 표현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그래, 예정아, 안녕. 일찍 나왔네?”
“넵! 일찍 깨서 일찍 나왔습니다!”
“너무 그렇게 크게 대답 안 해도 돼. 누가 보면 내가 너 잡는 줄 알겠다.”
“악! 설마요! 선배님이 얼마나 잘해주시는데!”
“그러니까. 볼륨 좀 줄여.”
“넵!”
이상하게 지영에게만 이렇게 깍듯하다.
선동일 선배님 따님 역할이고, 그래서 선동일 선배님이 잘 챙겨서 두 사람은 평소에는 정말 부녀처럼 놀았다. 그런데 지영에게는 세상 공손하고, 깍듯하다. 아직 준비까지 시간이 있어서 지영은 이 기회에 그냥 물어보기로 했다.
“예정아. 거기 앉아봐.”
“넵! 아니, 넵.”
예정은 지영이 앉아보라고 하자 세상 긴장한 표정으로 앞에 앉았다. 마치 혼내려고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긴장 풀고, 뭐라고 그러려는 거 아니니까.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넵. 뭔데여?”
“선동일 선배님이랑도 편하게 지내면서, 왜 나한테는 그렇게 깍듯하게 대해? 내가 불편하게 하는 것도 아닌데.”
지영의 말에 예정이 흠칫하는 표정이 됐다. 솔직히 그랬다. 선동일 선배님과 예정이 함께 나오는 신은 전부 회상 신이다. 그런데 정은정 작가는 초반부에 이 두 배우를 아주 자주 등장시켰다. 일단 소설에서부터 비중이 상당했다.
재가 어떻게 구해졌고, 어떻게 보살핌받았고, 어떻게 재활을 거쳤고, 어떻게 훈련을 거쳤는지, 이 전부를 정은정 작가는 허투루 다루지 않았다. 전부 제대로 지문을 할애해 다뤘다. 그렇기에 대본으로 옮겨졌을 때 두 사람의 분량은 적지 않았다.
애초에 대배우인 선동일을 여기까지 불러놓고 꼴랑 몇 신 찍게 하는 것조차 말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선동일만 그런가? 예정의 그룹도 요즘 핫하다. 이런 연예인을 불러놓고 꼴랑 몇 신? 그럴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시작부터 쳐냈을 거다. 예정이야 신인이니 왔어도, 선동일 정도면 굳이 올 이유가 없었다.
기술자인 그는 할애하는 시간만큼 대우받길 원하는 배우니까.
[받은 만큼 연기한다.]
그의 신조다.
아무리 돈을 많이 주고 여기에 대기해 주길 바랐다면, 그는 배역 자체를 거절했을 것이다. 자신의 기술이 정당한 대가를 받고 쓰이길 바라는 기술자, 그게 선동일이다. 그런 만큼 찾는 곳도 많았다.
그런 두 사람은 이곳에 있으며 매우 친해졌다.
그런데도, 예정은 지영에게 거리를 줬다. 지영도 같이 찍는 신이 많아서 친해져서 나쁠 게 없는데도, 그걸 모를 것 같진 않은데도, 이상하게 거리를 뒀다. 지영은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물었더니.
“저…… 솔직하게 대답해야 해요?”
“어……? 그러면 좋겠지? 이유를 알아야 나도 마음이 편하니까.”
“아, 그, 그렇겠죠? 그게…… 회사에서요. 선배님이랑 엮이지 말라고…… 그랬어요.”
“회사에서? 누가. 매니저님이?”
“아니요. 대표님이요.”
“……아니, 왜?”
지영은 대표님이란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대표님이란 말이 나오는 순간, 조금 기가 막혔다. 서운한 걸 넘어선,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긴 했다.
휙! 휙!
주변을 둘러본 예정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제, 제가 신인이잖아요? 그리고 저희 회사도 작구요. 그래서 그, 선배님이랑 잘못 엮이면 곤욕 치른다고…….”
“뭔 곤욕을? 아, 아아.”
지영은 그렇게 되물었다가, 이내 깨달았다.
스캔들이다.
연인이 있는 지영이다.
그러니 스캔들은 솔직히 말도 안 된다. 하지만 코너에 몰렸다고 해도 지영을 싫어하는 일부 언론은 분명히 있었다. 그런 언론은 절대로 지영과 예정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타이틀?
대충 달면 된다.
-지영, 예정으로 갈아타나?
-강지영! 연인과 헤어지고 예정과 열애 중?
이런 식으로 별 내용도 없이 사진 한 장 정도 던져주고 작업하면? 사실이 아니어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팩트 체크 같은 건 관심도 없으니까.
“뭔 소린지 알겠다.”
“그…… 죄송합니다. 히잉. 저희 사장님이 하도 신신당부하셔서…….”
“아니야. 오히려 마음 놓였어. 서운한 것도 없고.”
“지, 진짜요?”
“응, 진짜.”
지영은 웃었다.
작은 기획사에서 내놓은 핫핑크다. 첫 싱글 곡이 좋아 요즘 인기를 얻고 있지만, 그런 작은 기획사의 아이돌은 기자들이 작정하고 바람만 불어도 훅! 하고 날아간다. 언론 대응 능력이 비즈와는 말도 안 되게 떨어질 게 분명했고,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이 아니라 부정하는 것도 힘들 것이다.
그런데 그래서 지영은 마음이 풀렸다.
‘적어도 예정이를 노이즈마케팅에 이용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다는 거네? 그럼 이해가 되지.’
노이즈마케팅.
지영이 지금의 위치로 올라오게끔 한 게 노이즈마케팅이다. 지영이 바란 건 아니지만 모든 사건 사고가 그런 마케팅이 됐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잘 먹힌 마케팅이 됐다. 다만, 이런 마케팅은 노리고 한 게 아니라면 반드시 대상을 상처입힌다. 지영도 크게 상처를 입었고, 황금세대 아이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예정은 여자아이다. 거기에 이제 중2다. 그런 애를 노이즈마케팅에 이용했으면, 그건 제정신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예정의 기획사 사장은 예정을 보호하기 위해 지영과 아예 엮이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러니 이건 서운해할 일이 아니었다.
“저…….”
“어? 아아. 괜찮아. 이제 정말. 좋은 기획사 들어갔네?”
지영이 그렇게 말해주자, 예정이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은 곳이에요! 다 가족같이 정말 잘 대해주시고!”
그런 곳이 정말 흔치 않은데, 잘된 일이다.
지영은 이제 괜찮다고, 일어나도 된다고 말해줬다. 그러자 일어나서 꾸벅! 하고 다시 인사를 박고 얼른 자리를 뜨는 예정.
좋으면서도 씁쓸했다.
호흡을 맞춰야 하는 배우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했고, 그걸 걱정해 저 어린아이를 제대로 챙기는 소속사가 있음에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지영은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 자신의 위치라면, 별의별 말이 정말 다 나올 것이다.
게다가 워낙에 글로벌하게 팬덤이 있어서, 괜한 스캔들은 예정의 앞길을 막는 정도가 아니라 아이돌 인생 자체를 터뜨려 버릴 수도 있었다. 팬이란 건 보통 든든한 존재다. 하지만 어긋난 팬심을 가지기 시작하면, 그건 때론 또 매우 곤란해지기도 한다.
지영은 그걸 간과하지 않았다.
스캔들이 나고 예정을 테러하기 시작하면? 지영은 내 팬은 안 그래! 하는 마음은 절대로 품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 차라리 베스트다. 아쉽고 서운하고, 곤란하고 이런 마음들은 그냥 곱게 접어 버리는 게 나았다.
“여, 지영아!”
마음을 추스르는데 들려온 부름에 지영은 벌떡 일어났다.
선동일의 목소리다.
예전에 예인에서 호흡을 한 차례 맞췄었고, 자신의 연기에 기술 지도를 해주셨던 분이다. 지영에게 선동일은 그래서 믿고 따를 만한 선배님이었다.
“네, 선배님. 나오셨어요?”
“어어, 그려. 어후야. 여가 알래스카긴 한가 벼. 춥긴 춥다. 그쟈잉?”
“어디 그냥 추운 정돈가요? 포드에서 지원해준 군용 방한 내복 아니었으면 여기서 촬영 접었어야 할걸요?”
“그쟈잉? 이게 진짜, 성능이 좋긴 좋아. 우리 아도 훈련 때 이거 입었으면 좋겠는데, 힘들 거여. 그쟈?”
“하하.”
지영은 웃고 말았다.
거의 모든 사투리를 쓸 줄 아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많은 사투리가 섞이고 섞여서 나오는데, 솔직히 어디 사투리인지 모르겠는데 너무 자연스럽게 들렸다. 오죽하면 그의 사투리를 보고 선동도 선동시 사투리라고 할까.
“어뗘, 컨디션은? 혓바닥은 보니까 풀린 것 같은디.”
“네, 턱은 풀었어요. 선배님은요?”
“나? 시방 나 걱정하냐?”
“배려와 염려입니다.”
“흐흐, 그래? 그런 기분 좋아야 하는 거지? 천하의 강지영이가 배려해 주는 거니께.”
“그럼요? 특별한 거예요.”
“흐하핫!”
선동일은 지영의 너스레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아주 능글맞어졌어?”
“선배님이랑 있으니까 이렇게 되네요?”
“흐흐, 내가 그런 건 또 잘 옮기지. 참, 예정이는 왜 불렀어?”
“아, 예정이요.”
감출 일도 아니라서 솔직하게 얘기했더니, 선동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예정이 쟈, 병장보다 더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잖어. 특히 지영이 니랑 연관된 거는. 그러니까 넘 서운해 말어.”
“그럼요. 안 서운해요. 오히려 안도했어요. 좋은 기획사에 있는 것 같아서.”
“그지? 그럴겨. 나도 오며 며 들은 건데, 쟈들 팀 핫핑크. 갸들, 예정이 빼고 중고 신인들이랴.”
“네? 아, 재데뷔요?”
“그려, 한 번 실패했던 아들. 그런 아들이 위로 주르륵이랴. 예정이 쟈만 신인이고. 그럼 예정이는 아직 실패한 적이 없잖어? 그런데 그 위에 아들은? 다들 이 바닥에 목숨 걸고 버티고 버틴 애들이야. 벌써 스물 넘은 애들이 전부고. 그런 애들이니 오죽 간절하겄어?”
“…….”
그럴 것이다.
누구보다 지영이 잘 안다. 지영도 간절했을 때가 있었다. 제발, 제발 움직여. 제발 아프지 마. 제발 버텨줘. 제발 나아줘. 그 간절함을 지영은 몇 년이나 품고 살았다. 그런 간절함. 끝끝내 이뤄지지 않았던 꿈이 될 뻔했는데, 회귀로 다시 얻었다. 회귀 이후 그럼 괜찮았냐고? 그럴 리가. 트라우마로 남았다. 간절함 그 자체가 말이다.
“그러다 이번에 데뷔가 잘 됐잖어? 그래서 조심, 또 조심한다드라. 괜히 구설수에 오르기 싫어서. 예정이는 이번 기회 꼭 살려서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고. 그러니 너무 서운해하지 마러.”
“정말 괜찮아요. 진짜, 진짜로요.”
“그지? 증말 괜찮은 거지?”
“그럼요. 하하.”
진짜, 진짜로 괜찮았다.
“그랴그랴. 지영이는 이래서 좋다니까? 이제 뭐 할겨? 합 좀 맞춰볼까 하는데.”
“좋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흐흐. 가자고, 가.”
야야! 딸랑구! 연습하러 가자!
선동일의 외침에 기웃기웃 현장을 방해하지 않고 구경하던 예정이 얼른 몸을 돌리며 네! 크게 대답하며 달려왔다. 연습실로 이동해 오늘 첫 신 준비를 했다. 이번 신은 재가 절벽에서 떨어진 이후 구사일생하는 장면이다. 해가 뜨기 전, 물을 길으러 왔던 학미에게 발견되고, 깜짝 놀란 학미는 재를 뭍으로 건져 올린 뒤 호흡을 확인한다. 그리고 살아 있음을 알게 되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 학소양을 불러온다.
그 신이다.
이번 신은 편집을 거치는데, 일단 지영이 먼저 방수 의복을 입고 미리 준비한 세트장에 들어간다. 장면의 특성상, 지영이 강가에 걸쳐 있는 신을 일단 따야 한다. 그리고 지영과 아주 흡사하게 만든 인형을 예정이 끌어낸다. 이걸 인형으로 하는 이유는, 예정의 힘으로 지영을 끌어내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힘이 상당하단 설정이 있어도 실제로 의복에 물까지 먹은 지영을 예정이 끌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신을 두 번에 걸쳐서 찍는다. 여기서 지영이 들어갈 곳은 진짜 강이다.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 건, 포드가 구해온 방수복의 성능이 어마어마하다는 점이다. 전신 슈트 형태인데, 보온기능도 있어서 잠시 물에 들어가 있는 건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걸 입고 겉을 재의 의복으로 대체하고, 살짝살짝 보이는 부분은 당연히 편집으로 쳐내는 거고.
이렇게 하나의 장면을 만든다.
솔직히 포드에서 구해준 방수 보온 슈트가 아니었으면 리얼리티를 살리겠다고 진짜 강에 들어가는 미친 짓은 절대 하지 못했을 거다.
배우님 준비하겠습니다!
스태프의 방문에 지영은 연습을 마치고, 곧장 현장으로 향했다. 슈트야 이미 입고 있는 상태였다. 이걸 입은 채로 가죽신을 신은 뒤 물에 살짝 발을 넣어보는 지영. 솨아아! 거친 물살에 담긴 발은 한참이 지나도 괜찮았다. 있으나 마나 한 가죽신 말고, 안에 입에 슈트가 제대로 막아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걷는 게 불편했지만, 한기를 완벽하게 막아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불편한 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렇게 물에 들어가서 자세를 잡았다. 머리에는 어쩔 수 없이 물을 묻혀야 해서, 사전에 먼저 물을 묻혀 적셔 둔 상태였다. 그런데 이것만 해도 상당히 추웠다. 아니, 매우매우 추웠다. 그래서 빠르게 신을 딸 생각에 홍진아 감독이 곧장 액션을 외치려고 할 때.
“홍 감독?”
선동일이 끼어들었다.
“네? 선생님 왜요?”
“저 신 말여. 여기 예정이가 역도를 했다고 하는데, 그냥 들고 꺼내는 건 어뗘?”
“뭘? 누구를? 지영이를요?”
“응. 자기가 충분히 들 수 있다는데?”
선동일의 말에 지영은 바위에 얹었던 가슴을 뗐다.
역도를 했었다고? 저 호리호리한 몸으로? 아, 생각해 보니 선수촌에서 만났던 역도 선수들의 신장은 기본적으로 크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중량에 따라 다르지만, 경량급 선수들은 전부 상당히 작은 체구였다.
“진짜요?”
“그, 네에……. 선수 생활 했었어요……. 초등학교 때 몇 년?”
“…….”
예정의 대답에 홍진아는 곧장 고개를 돌려 지영을 봤고, 그 시선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지영도 물에 나와 예정의 앞에 엎드렸다. 진짜 들 수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리얼리티를 살리려면 직접 드는 게 진짜 최고긴 했다.
‘그걸 살리려고 직접 물에도 들어가는 판국이니까. 근데 진짜 들려…… 억.’
흐읍, 욥!
허리춤을 잡는 느낌이 나더니, 몸이 붕 떴다.
그냥…… 진짜 붕 떠올랐다.
심지어…… 팔을 뻗었는데, 지면에 안 닿는다. 그건 예정이 거의 가슴까지 끌어올렸다는 뜻이다. 역 V자로 접히듯이 들어 올려진 지영은 어이가 없어서, 허!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150 초반에, 호리호리한 예정은…… 역도 장사였다. 그리고 그 장사 덕분에, 신이 수정됐다. 가슴을 바위에 대고 있는 재를 끌어내는 게 아니라, 등을 대고 기절해 있는 재를 학미가 공주님 안기로 데리고 나오는 걸로. 그렇게 수정됐다.